그녀는 유대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권력들의 끊임없는 충돌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떻게든 자신의 몸을 보위할 수 있는 강력한 무엇인가를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 어느 누구도 장사가 없다. 자신의 검은 눈도 흐려질 것이고 흑단 같은 검은 머리도 윤기를 잃고 희어질 것이고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는 이 몸도 언젠가는 늙어서 흉물스럽게 변할 것이다. 헤로데의 형제들끼리 서로 영토를 넓히려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칼끝이 자신의 목을 겨눌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의붓아비 헤로데 안티파스도 어머니 헤로디아도 그녀 자신의 목숨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결정적인 순간엔 모두 자기 한 몸 살아남기에 급급할 것이다. 살로메는 자신을 바라보는 근위대장 사반의 축축한 눈길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든지 의심하는 병이 도진 헤로데 안티파스도 그의 입속에 혀 노릇을 충실히 하는 사반을 신임할 수밖에 없었다. 사반이 부리는 궁전 근위대는 물론 그의 수하에 몰래 키우는 사병들의 무력도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마케루스 궁에서 북쪽으로 한나절 쯤 떨어진 느보산 중턱 마을 ‘베디움’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별장으로 휴가를 냈다. 그리고 사반에게 호위를 부탁했다. 무엇이든 삼켜버릴 듯한 그녀의 동굴처럼 깊은 눈이 사반의 굵은 팔뚝에 머물렀다. 사반대장은 이 후줄근한 군복보다는 로마식 ‘토가’가 훨씬 더 잘 어울리겠어. 당신의 위엄과 힘이 더욱 드러날 거라구. 그리고 이 어깨에 단추를 한 개 다세요. 자수정으로. 그녀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사반의 오른쪽 어깨를 찍으며 돌아설 때 그녀의 긴 머리끝이 그의 턱을 스치며 레몬 향기를 뿜었다.
돌아서 걸어가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바라보며 사반은 손바닥으로 턱을 쓸었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예루살렘에 사람을 급히 보내 자수정 단추가 달린 로마식 토가와 속에 바쳐 입을 튜니카를 구입했다. 그리고 하인을 시켜 흐릿한 거울을 깨끗이 닦아놓으라고 일렀다. 새로 구입한 토가는 로마의 집정관이 입는 관복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흰색 모직 천에 금사로 수놓은, 손가락 두어 매듭 넓이의 보라색 장식선이 테두리를 둘렀다.
그는 거울 앞에서 먼저 검은 색 튜니카를 입고 그 위에 토가의 끝을 왼쪽 어깨에 대고 뒤로 돌려 오른쪽 어깨 밑으로 교차시켜 왼쪽 어깨에 다시 걸친 다음 여분의 자락을 발꿈치 뒤로 길게 늘어뜨렸다. 어깨에 자수정 단추를 얹었다. 역시 훨씬 품위가 있어보였다. 알록달록 염색한 가죽으로 엮은 머리띠를 하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거울 안에서 한껏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양미간을 꺾어 보았다. 그리고 발꿈치 뒤로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을 끌어 올려서 왼쪽 손목에 가볍게 올리고 오른쪽 손바닥을 펴서 위로 높이 쳐들었다.
거울 속의 사내는 금방 로마황제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멀지않은 미래에 이곳 유대의 황제가 될 수도 있다. 지금 그 첫 번째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유대 사람들은 헤로데 일가에게 이미 절망한지 오래다. 성전의 밑기둥은 썩어 문드러져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록 나의 칼에 참수를 당했지만 요한은 유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다만 그런 방식으로 저 거대한 권력과 싸워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자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다. 그는 자수정 단추를 얹은 토가를 두르고 손바닥을 펴서 위로 올리고 있는 거울 속 사내를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들여다보았다. 맞다. 높이 치켜 올린 저 손, 저 손가락에 필요한 것이 딱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하인을 불렀다. 급히 말을 달려서 맑은 노란빛 호박으로 장식한 은반지를 사와라.
그는 근위대 마굿간에서 가장 튼튼하고 멋진 말을 골랐다. 고른 검은 윤기가 번쩍이는 말에 올라탔다. 그 뒤로 눈부시게 하얀 햇빛 가리개를 두른 마차를 사반의 호위무사가 몰았다. 느보산 기슭을 돌아서 베디움으로 들어가는 좁은 계곡 길을 천천히 달렸다. 마차의 하얀 햇빛 가리개 안에서 상큼한 향기가 가을바람에 실려와 사반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갑자기 가파른 계곡 위에서 바위 돌들이 굴러 떨어졌다. 마차를 끄는 말이 놀라서 위로 뛰어올랐다. 사반이 급히 달려가 마차를 끄는 말의 자갈을 손에 쥐고 말을 진정시켰다. 다시 바위 돌이 굴러오는 소리가 좁은 계곡을 가득 메웠다. 그가 말을 끌어 무화과나무 숲 아래로 피신시키고 상황을 살폈다. 바위돌이 굴러 내리면서 여기저기 흙먼지가 가득 피어올랐다. 언덕 쪽에서 두어 명이 뛰어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계곡에 매복했던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복면을 한 사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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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로메의 휴가 (그림/홍성담) |
자욱한 흙먼지가 걷히자 복면을 한 여섯 명의 사내들이 칼을 빼들고 길에 내려섰다. 그중 두목격인 듯한 사내가 손잡이 끝에 비취옥이 박힌 칼을 빼 들며 소리를 높였다. 선지자 요한 선생의 목을 원했던 유대의 요물 살로메야. 오늘 너의 목을 따서 요한 선생이 잠드신 에켈 언덕에 내걸겠다. 사반이 칼을 빼든 복면 사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사내의 허리춤엔 은으로 복잡하게 장식한 칼집이 보였다. 사내가 빼 든 칼은 전투용이 아니라 의례 때 장식용으로나 착용하는 칼이었다. 사반이 웃었다. 마차를 지키고 있던 호위무사가 나서려 하자 그가 손을 저어서 뒤로 물렸다.
자신의 멋진 칼솜씨를 살로메에게 자랑할 기회였다. 그가 앞으로 나섰다. 흠, 지난번 요르단 강 숲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놈들이구나. 사반의 생각이 잠시 헝클어졌다. 저 녀석이 혹시 요한의 후사 예수 일수도 있었다. 헤로데에게 거짓말을 해서 그동안 꺼림칙했던 터에 저 놈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오늘은 운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그러나 저놈이 예수의 졸개일 수 있으니 사로잡아 물고를 내서라도 예수 놈이 숨어있는 곳을 알아내야 했다. 그래, 칼을 빼든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복면을 한 사내가 칼끝을 한번 크게 뿌리며 말했다. 오늘은 저 요물의 목을 따고 다음은 헤로데 궁을 불태울 참이다.
사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 너희들의 칼솜씨나 구경해 보자. 귀찮으니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호위무사의 허리에 찬 칼을 사반이 빼들어 한 손에 쥐고 칼 옆면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때리면서 그들의 공격을 기다렸다. 사내가 뒤의 복면들에게 눈짓을 했다. 다섯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칼을 휘두르는 품세가 기초훈련조차 받아보지 못한 녀석들이었다. 마차의 햇빛 가리개 속에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즐거운 휴가 길이니 피가 보이지 않도록 하세요.
그들이 장작 패듯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그도 앞으로 서너 걸음 내밀면서 칼로 몇 번 후려치자 세 명이 칼을 놓치고 계곡 아래로 구르다시피 도망했다. 나머지 두 명도 뒤로 슬슬 물러나 두목인 듯한 사내의 등 뒤로 숨었다. 사내가 몹시 당황했다. 뒤로 물러서면서 등뒤의 동료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안되겠다. 그만 물러서자. 튀어라. 뒤로 돌아 도망가려는 사내의 허벅지를 보고 사반이 칼을 던졌다. 바람개비처럼 날아간 칼이 사내의 허벅지에 어슷하게 박혔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허벅지에 칼이 꿰어진 채 절룩이며 몇 걸음 달아났다. 사반이 호위무사에게 눈짓하자 그가 달려가서 녀석의 목덜미를 채어 끌고 왔다.
사반이 녀석의 허벅지에 박힌 칼을 빼자 비명을 질렀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었다. 사반이 칼끝으로 녀석의 턱을 들어 올려 복면을 벗겼다. 너의 선생 요한이 칼춤은 가르치지 못했구나. 이따위 솜씨로 어디 가서 좀도둑질이라도 해먹을 수 있겠느냐. 사내가 이를 갈았다. 헤로데의 개야. 우리 선생님을 욕보이지 마라. 사반이 칼끝으로 녀석의 가슴을 가볍게 때리며 조용히 물었다. 그래 네가 요한의 후사 예수란 놈이더냐. 사내의 눈꼬리가 갑자기 올라갔다. 아니다. 예수라는 놈이 요한 선생님의 눈을 가리고 후사를 도적질 했다.
내가 요한의 후계자 요하임이다. 사반이 웃었다. 썩은 세상을 갈아치우겠다며 온갖 깨끗한 척 하는 너희들의 관계도 매우 복잡하구나. 너희들 속내야 내가 알바는 아니다만. 그래, 헤로디아의 창고를 불태운 것도 네놈 짓이냐. 요하임이 분해서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다. 오늘 저 요물 살로메의 목에 칼을 박지 못하고 이렇게 잡혀 죽게 되는 것이 다만 원통 할 뿐이다. 사반이 칼끝으로 그의 목을 지그시 누르면서 낮은 목소리에 힘을 얹어 다시 조용히 물었다. 예수라는 놈은 어디에 숨었느냐. 요하임의 몸이 굳었다. 사반의 칼끝이 살갗을 점점 파고들었다.
요하임이 모기보다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짐산 어디 계곡에 있다고 들었다. 사반이 칼을 거두어 호위무사에게 주었다. 네가 먼저 싸움을 걸었으니 아무튼 나를 원망하지마라. 녀석의 목을 쳐서 계곡에 던져라. 사반으로부터 칼을 넘겨받은 호위무사가 칼날을 요하임의 목뒤에 댔다. 요하임이 무릎을 꿇은 채 목을 길게 빼고 눈을 감았다. 요한 선생도 꼭 이렇게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선생님을 따라 목이 잘리는 것도 영광이었다.
그렇다. 이렇게 죽는 것이 만천하에 요한의 진정한 후계자가 자신임을 공표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요하임이 억지로 안심하면서 슬프게 웃었다. 호위무사가 손바닥에 침을 한번 뱉어 칼자루를 고쳐 잡고 천천히 높이 들어올렸다. 그때 마차 위 햇빛 가리개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칼을 거두어라. 가리개를 위로 올리면서 여자의 발이 땅으로 내려왔다. 호위무사가 칼을 높이 올린 채 사반의 눈치를 보았다. 살로메가 사반의 등을 부드럽게 쓸면서 그의 귀에 대고 뼈있는 말을 속삭였다.
네가 헤로데의 눈을 속였구나. 그러나 염려마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귀기서린 목소리에 사반의 목덜미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요하임에게 걸어갔다. 호위무사가 칼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목을 길게 빼고 무릎을 꿇은 그에게 물었다. 성문 밖에 내걸린 목이 예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었다만, 그이는 살아 있다더냐. 요하임이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로메가 목에 두른 긴 스카프를 풀어서 그의 허벅지에 난 상처를 묶어주었다. 헤로데 궁의 처마가 아무리 하늘을 찌르듯이 높다지만 권력은 유한하다. 곧 나도 죽고 너도 죽어서 한갓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요한 선생과 나의 인연이 너를 살려준다. 너도 아무리 하잘것없는 인연이라도 업수이 여기지마라. 내 말을 잘 기억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그녀가 뒤로 돌아서 걷다가 요하임에게 다짐하듯이 다시 물었다. 예수가 그리짐산에 있다고 했더냐. 요하임이 눈을 질끈 감은채 고개만 그떡였다. 그녀가 사반에게 걸어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나를 죽이려다 잡힌 것이니 그의 목숨은 내 손에 있다. 부상당한 저놈을 그만 놓아주어라. 그리고 마차위에 올라가 햇빛 가리개를 내렸다.
<계속>
홍성담/ 안토니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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