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강산
현진건학교 덕분에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최영 시인님이 ‘자기도 글을 써보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시며 매번 격려해 주셨습니다. 때마침 현진건학교 정만진 교장님이 현진건 선생의 모든 글들을 현재화시켜 널리 읽히게 하려는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현진건의 〈고도 순례 경주〉를 본받아 다시 답사해서 써볼 만하다’시며 ‘김성순 선생께서 한번 시도해 보시오!’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용기백배하여 경주를 찾았습니다. ‘경주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부터 가보면 좋을 것’이라는 추천에 따라 소금강산을 최초 답사지로 정했습니다. ‘참작가’현진건 선생을 모시고 함께 답사하는 기분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사는 곳, 먹는 것, 만나는 사람이 곧 나라고 인식하면 현재 인생의 초 전성기를 맞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는 예전이라면 왕족도 가능했을까, 싶은 의문이 뜬금없이 드는 것들이 많다. 오늘이 바로 그 상황이다.
아침에 길을 나섰을 뿐인데 금세 경주에 도착했다. 백률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차료도 입장료도 받는 곳도 없다. 약간은 의아했지만 곧 이곳이 ‘숨은 맛집’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동네 뒷산에 오른다 싶을 정도여서 첫발을 부담 없이 내딛었다.
헉!
신라인들이 있었다!
순간 얼음땡이 되어 사면불상 전체를 보다가 천천히 한 발 한 발, 한 분 한 분 뵈었다. 신라 천년과 접선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시선으로도 그 크기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작업인데 신라 시대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불사였음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서쪽 면은 아미타삼존불, 동쪽 면은 약사여래불, 남쪽 면은 석가여래불, 북쪽 면은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특히 남쪽 면과 북쪽 면에는 협시보살이 두 분씩 서 계셨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
모태신앙이라는 이유로,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신라인과 고려인, 그리고 조선인들의 사찰들과는 친할 수가 없었다. 뭔가 당기는 점도 없지 않았지만 그 당김도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면 불상을 돌면서 합장하고 기도하는 내 또래 분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인류사에서 가장 큰 갈등인 전쟁도 결국은 종교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내 속에서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커다란 바위에 사면으로 새겨진 석불이 불교의 사방정토를 상징하며 온세상에 부처님이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는 정도만 알았어도 어찌 신라인과 친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큰 바위라서 현재까지 남아 있어 우리를 위로해 주고 다독여주고 계시지만 그 시대엔 사방팔방에 큰 사찰로 존재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경주 시내에서 이곳에 와서 기도하는 것만으로 1년을, 궁핍함을, 고단함을 털어 버릴 수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려인과 조선인까지, 그리고 지금 사면불상을 돌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음이 쉬이 진정되는 듯하다.
백률사로 이동한다, 올라가는 길이 잘 정돈되어 있다. 예전길에는 돌로 계단이 되어 있고, 새길은 아스팔트가 쫘아악 깔려 있다. 꼭 아파트에서 나와서 마트로 가는 듯하다. 그래서 예전길을 선택한다.
경사지지 않고 완만하여 오르는 데에 별 무리는 없으나 그래도 조금은 숨이 차려고 한다. 가만 살펴보니, 백률사 입구 쪽으로 가지 않고 뒤쪽으로 가고 있다. 예전길을 따라 가다보니 길이 안내를 이렇게 해준다.
본당과 요사체 사이에 작은 어항보다는 크고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것이 자리를 차지한 채 각종 꽃들과 물고기를 키우고 있었다. 아마도 건물이 춥고 더우니 본당도 요사체도 베란다에 문을 다는 역할로 이런 설치를 한 것이 아닌가 싶어, 보살님이 정성으로 법당을 관리하시는 면모가 엿보였다.
절은 자그마하지만 텃밭도 잘 관리하셔서 어디 하나 눈살 찌푸릴 곳이 없었다. 삼신각에도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아 편하게 구경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삼신각 올라가는 중간쯤엔 장독대가 있었는데 어찌나 윤이 나던지 장식용이 아니라 실사용이다. 백률사가 현재도 살아 움직여 신도들에게 현재형임을 엿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언제 한번 된장찌개라도 만들어 먹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곳 백률사는 이차돈의 순교비가 출토되고 국보(28호)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발굴된 곳이다. 현재 규모로 백률사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백률사를 뒤로 하고 산길을 따라서 걷는다. 야자 매트가 깔린 길이 나온다. 평지가 나온다는 이야기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표암이다. 박바위라고도 불리는 표암은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곳으로, 유허비와 비각이 있다. 표암에서 바라본 경주 일대는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곳은 신라시대의 팬트하우스였으리라!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운 곳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살기에는 층고가 높고 넓은 곳보다 땅의 기운을 갖고 적당히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의 곳이 최고의 집이다. 유허비 뒤편에는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석혈이 남아 있다. 목욕을 하기에는 욕조가 작아 보였다.
표암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는 멋진 기와집이 경주이씨 재실이다. 사람이 거주하지는 않아서 휑한 분위기는 어쩔 수가 없다. 내려가는 길이 일품이다. 우리나라의 멋진 소나무는 이곳에 다들 모여 있는 듯하다.
내려와서 위로 바라보이는 표암의 절경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알평공이 탐낼 만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표암재 주위로 동네분들의 사랑채 같은 한옥들이 모여 있는 규모가 상당해 경주이씨의 세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표암재 바로 옆에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탈해릉왕릉이 있다. 높이 약 4.5m 지름 14.3m 크기의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봉토 무덤이다. 무덤 말고는 어떤 장식물도 없이 오직 소나무만이 지키고 있다.
탈해왕릉은, 아무 날 아무 시에 돗자리와 물 한 병만 가지고 와서 놓아둔 채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며 이어폰을 끼고 정태춘, 박은옥 님의 노래를 들으면서 한나절을 보내고 싶은 곳으로 내 마음에 등극했다.
경주라고 통틀어 말하면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나만 해도 소금강산 코스에 있는 굴불사터 사면석불, 백률사, 탈해왕릉, 표암, 표암재는 처음 들었고, 처음으로 답사했다.
현진건학교는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소비가 미덕을 넘어 의무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한 중심에서 현진건학교는 문화의 주체자로 거듭나게 해준다.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의 눈과 마음과 발걸음을 총총히 남기고자 한다. (2024.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