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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순종 실록]
[1. 망국의 황제 순종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1874-1926, 재위 기간 1907년 7월∼1910년 8월, 3년 1개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케 한다. 이후
순종은 일본의 압력에 밀려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당하고,
사법권을 강탈당하는 등 숱한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일본은 친일 매국노들을 앞세워 1910년
한일합병을 단행하고 한반도를 무력으로 강점해버린다.
순종은 고종의 장남으로 명성황후 민씨의 소생이다. 174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척, 자는 군방,
호는 정헌이다.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9세가 되던 1882년 순명효태후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됨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 순명효태후가 죽자 1906년 12월 순정효태후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으며, 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 정객의 모략으로 왕위를 내놓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때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고쳤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립하였으며,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만 3년에 걸친 순종의 재위 기간은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 강점 공략이 가속화되고,
마침내 송병준, 이완용 등 친일파 정객과 일본 정부의 야합에 의해 주권을 상실하게 되어 조선
27왕조 519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 7월,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성립시켜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정부 각부의 장관을 일본이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내정 간섭권을 획득한 일본은 곧 재정 부족을 이유로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으며,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갔다. 이처럼 순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든
뒤 이토 총독이 자국으로 돌아가고, 소네 총독을 거쳐 군부 출신의 데라우치 총독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화 계획은 더욱 강화된다.
일제는 1909년 7월 기유각서의 각의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킨 뒤 러시아와
사전에 만주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때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포살하자 이를 기화로 한반도 무력 강점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일제는 이를 위해 친일 세력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 합병한다는 논리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한편 일본의 조선 식민화 계획이 노골화되자 순종 즉위 원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는 한편, 민족의 저력을 키워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권 회복운동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어 민족 저항의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고, 일부 친일 매국노의 음모로 망국을 막지 못하였다.
또한 순종 주변에는 온통 인사들만 포진해 있어 그가 국가 최고 의사결정의 수렴자로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것도 망국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제의 강압적이고
집요한조선 합병 정책이 망국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일제는 무력을 바탕으로 원색적인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고, 교묘하게 친일 매국노들을 이용하여 민족의 저항 역량을 감퇴시켰다.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너진 뒤, 순종은 황제의 위치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해당하는 대우를
해주면서 왕위의 허호는 세습되도록 조처했다.
순종은 폐위된 후 16년 동안 창덕궁에서 머물다가 1926년 4월 25일에 53세를 일기로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이 해 6월 10일 그의 국장이 치러지게 되는데 과거 고종인산날에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 이어 6.10만세운동이 일어난다.
[2. 순종의 가족]
순종은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종효황후 윤씨 2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능은 유릉으로 경기도 미금시 금곡에 있다.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이다. 순종의 첫번째 황태자비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 12월 황태자비에 책봉되어 입궁했다. 이후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오름에 따라 황후가
되었으며, 그 해 여학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
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숙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
망국 후 일제의 침탈 행위를 경험했으며, 해방과 6.25를 겪고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66년 71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슬하에 소생은 없었으며, 죽은 뒤 순종과 함께 경기도 유릉에 묻혔다.
[3. <순종 실록> 편찬 경위]
'순종실록'은 재위 기간 4권 4책과 퇴위 후 기록 17권 3책, 목록 1권 1책을 합쳐 총 22권
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07년에서 1910년까지 재위 4년간과 퇴위 후 1910년에서
1926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실록은 '고종실록'과 함께 1927년 4월부터 1935년 3월까지 8년에 걸쳐 일본이 설치한
이왕직의 주관하에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총 책임 및 감수는 '고종실록'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순종실록' 역시
일제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됐을 가능성이 높다.
순종 시대의 세계 역사
순종 즉위년인 1907년 중국에서는 손문 등의 한족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되었으나 청군에
의해 와해되었으며,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한편 영국은
뉴질랜드에 자치령을 공포했고, 일본은 미국과 합작하여 축음기 제조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순종
1년인 1908년 청의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었고, 광무제의 조카 부의가 3세의 어린 나이로즉위했다.
순종 2년인 1909년 미국과 콜롬비아간의 협약이 조인되어 남미의 콜롬비아와 파나마가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중국 상해에서는 제2회 아편 금지 국제회의가 열렸다.
순종 3년인 1910년 프랑스가 콩고와 아프리카 적도 지역을 식민지화하였다. 한편 이 해에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간행했고, 러시아에서는 대문호 톨스토이가 사망했다.
[부록 조선 시대의 주요 관청들]
의정부
의정부는 조선시대 백관의 통솔과 서정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관청이다. 별칭으로 도당, 묘당,
정부 또는 황각이라고도 했다.
이 기관은 1400년 4월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고려시대 최고 관청인
도평의사사를 혁파하고 설치되었다.
1400년 이후 의정부는 의정부서사제가 실시되면서 국정을 총괄하였으나 1414년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직계제를 도입하면서 정치적인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1436년 의정부서사제가 다시 부활되어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고, 세조 등극 이후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다시 육조직계제가 부활하면서 1455년부터 1516년까지는 힘이 약했다.
또한 세조 말년에는 원상제도가 운영되면서 의정부나 육조를 제치고 일시적으로 원상들이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중종반정 이후 의정부서사제가 부활되면서 의정부가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다가
1554년부터 비변사가 설치되어 실권을 장악하자 1864년까지 유명무실한 형식상의 최고 기관으로
남아야 했다.
1865년 비변사가 의정부에 합속됨으로써 기능을 회복하였으나 1873년까지는 대원군의
섭정으로, 1873년 이후에는 민비 척족의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다시 유명무실하게 되고
말았다.
의정부는 조선 개국 이후 10여 차례의 변천을 거치면서 정1품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종1품의 좌찬성, 우찬성, 그리고 정2품의 좌참찬, 우참찬 각 1인에다가 정4품의 사인 2인, 정5품의
검상 1인, 정8품의 사록 1인으로 구성되었다.
육조
육조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의 정무를 나누어 맡아보던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에 대한 총칭이다. 별칭으로 육부 또는 육관으로 불리었다. 이 기관은 고려 성종때인 982년
중국식 관제를 본떠 설치한 육관(선관, 민관, 병부, 의형대, 예관, 공관)을 995년에
상서육부로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육조는 각 조마다 정2품의 판서 1인, 종2품의 참판 1인, 정3품의 참의 1인에다가 정5품의
정랑이 2인에서 4인, 정6품의 좌랑이 2인에서 4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무운영에 있어서 상례사는 19개의 속사를 주관한 정랑, 좌랑이, 중대사 돌발사는
판서, 참판, 참의 등 당상관(정3품 이상)이 중심이 되어 처리했다.
육조는 순서는 의례적으로 1418년까지는 이, 병, 호, 예, 형, 공조의 순서였고, 이후에는 이, 호,
예, 병, 형, 공조의 순서가 되었다. 즉 조선 세종 이후 무반이 중심이 된 병조가 약화되고 재무를
다루던 호조와 상례를 다루던 예조가 강화된 것이다.
육조의 기능을 보면 이조는 주로 인사를 담당하였으며, 호조는 재정 경제와 호적 관리를,
예조는 과거 관리 및 일반 상례를 담당했고, 병조는 군제와 군사를, 형조는 형벌 및 재판과 노비
문제를, 공조는 도로, 교량, 도량형 등을 관리했다.
육조의 실제 기능은 왕권 및 통치 구조와 연관되면서 수시로 그 세력이 조절되었지만
법제적으로는 국정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기관이었다. 육조의 정랑, 좌랑은 임기를 미치면
승진되는 특혜를 받았으며, 이, 예, 병조의 정랑, 좌랑은 문관만 재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삼사
삼사는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해서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일명
언론삼사라고도 한다.
사헌부는 백관에 대한 감찰,탄핵 및 정치에 대한 언론을,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언관으로서, 이 두 기관을 합해 대간 또는 언론양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홍문관은 궁중의 서적과 문한을 관장하였고, 경영관으로서 왕의 학문적, 정치적
고문에 응하는 학술적인 직무를 담당하였으며, 세조 대에 집현전이 없어진 뒤에는 그 기능까지
대신했다.
이들 기관은 독자적으로 언론을 행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사헌부, 사간원 양사가 합의하여
양사합계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홍문관도 합세하여 삼사합계로 국왕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끈질긴 언론을 계속하기도 했다. 그래도 언론이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삼사의 관원들이 일제히
대궐 문앞에 꿇어앉아 국왕의 허락을 간청하는 합사복합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삼사가 제대로 기능할 때는 왕권이나 신권의 전제를 막을 수 있었으나, 삼사의
언론이 특정한 세력에 의하여 이용될 때는 혼란을 면치 못했다.
삼사의 인적 구성을 보면 사헌부에 종2품 대사헌 1인, 종3품 집의 1인, 정4품 장령 2인, 정5품
대평 2인, 정6품 감찰 13인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리고 사간원에 정3품 대사간 1인, 종3품 사간
1인, 정5품의 헌납 1인, 정6품의 정언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홍문관에는 정2품의 대제학, 종2품
도제, 정3품 부제학, 정3품 당하관의 도제학, 종3품 전간, 정4품의 응교, 종4품의 부응교 각 1인과
정5품의 교리 2인, 종5품의 부교리 2인, 정6품의 수선 2인, 종6품의 부수선 2인, 정7품의 박사,
정8품의 저작, 정9품의 정자 2인 등이 있었다.
승정원
승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던 곳으로 비서실에 해당한다. 별칭으로 정원, 후원, 은대, 대언사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 개국 때의 관제에 의하면 원래 왕명 출납은 중추원의 임무였다. 그러나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태종이 집권하면서 사병의 혁파를 단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추원의 기능을 축소, 분할하여 군기의 사무는 의홍삼군부가 승추부로 개편되면서 승정원의 기능도 여기에 귀속되게 되었다. 그리고 1405년 승추부가 병조에 흡수되면서 승정원은 독립된 기구가 되었다.
승정원에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각 1인씩 6인의 승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 당상관이었다. 그리고 승지 이외에도 정7품의 주서 2인이 있었고, 서리 28인이 있었다.
승정원의 핵심적인 구성 인원인 6승지는 동벽과 서벽으로 나누어졌는데,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는 동벽, 좌우부승지와 동부승지는 서벽이라 하였다.
이들 6승지는 분방하여 도승지는 이방, 좌승지는 호방, 우승지는 예방, 좌부승지는 병방, 우부승지는 형방, 동부승지는 공방을 맡게 하여 이들의 업무를 분할하였으나 반드시 이것이 지켜졌던 것은 아니다. 되도록이면 이 같은 원칙을 고수하였지만 이들의 능력에 따라 업무관장을 융통성 있게 변경하기도 하였다.
승지의 품계는 정3품이었지만 종2품이 승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승지들은 그들의 고유 업무 이외에도 타 기관의 직책을 겸하기도 하였다. 즉, 승지는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을 겸하는 것이 상례였고, 도승지는 홍문관직제학을 겸하여 지제교가 되고, 상서원정을 겸하였다. 그리고 승지 중에는 내의원, 상의원, 사옹원의 부제조를 겸하기도 했으며, 형방승지는 전옥서제조를 겸하였다. 이처럼 승지가 여러 직을 겸한 것은 왕의 보필을 위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을 뿐 아니라 왕명 출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런 겸직은 승지가 여러 면에서 왕의 고문 역할을 수행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승정원에서는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하여 만든 '승정원일기'가 있었으며, 이것은 실록 편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록이었다.
그 외의 기관들
의금부 /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다스리는 곳으로 일명 순군, 의용이라고도 불리었다.
포도청 / 조선 중기 이후에 생긴 것으로 도둑이나 기타 범죄자를 잡기 위하여 설치한 경찰기관이며 좌,우청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중추부 / 군무의 최고 기관이었으나 세조 때부터는 실무가 없었고, 문무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한 명예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성균관 / 국가의 최고 학부로 유학의 진흥과 문묘 등에 관한 사무를 맡고 있었다.
예문관 / 왕의 칙명과 교서를 기록, 정리하는 곳이다.
오위도총부 / 의홍위,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 등의 오위의 군무를 총괄하던 관청이었으나 중종 때 비변사가 설치되고 임진왜란 이후에 오위병제가 무너짐에 따라 실권이 없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상서원 / 옥새, 병부, 마패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훈련원 / 군졸의 능력을 시험하고 무예를 연습하던 곳으로 병서와 진영의 강습을 맡았다.
고려는 어떤 나라였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속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고려 당대의 상황과 치세를 기록한 역사서이자 조선왕조실록의 전범이 되었던 고려왕조실록이 임진왜란으로 잿더미로 화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사는 고려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우리는 비록 제2차적 자료나마 고려를 다룬 여러 관계서들을 종합 분석하여 고려의 모습을 가능한 한 실제에 가깝게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미처 배우지 못했던 중요한 역사적 교훈과 민족적 자긍심을 확인하게 된다. 즉, 중국 대륙에서 수십 개의 나라가 섰다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오백 년을 버티며 참으로 지난한 삶을 헤쳐나온 고려인들의 강인함과,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국제 정세 속에서 실리와 대의명분을 함께 취하는 고려인들의 현실 감각이야말로 격동의 세계사를 헤쳐나간 중요한 동력이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는 것이다.
외세의 힘을 빌지 않은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이자 북방을 경영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고려의 역사와, 당시의 정세와 문물 및 왕들의 치세를 중심으로 각 정파의 사상적 배경과 대립, 그리고 고려왕조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소상히 살펴본다.
일상의 삶 속에서 저 멀리 아련하게 감추어졌던 모험과 희망, 용기를 드릴 수만 있다면 단 한분의 독자를 위헤서라도 좋습니다.
도서출판 들녘이 함께 하겠습니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무예와 전쟁의 달인이자 모략의 대가인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뒤, 동방 예의의 나라로서 드높은 인본주의 문화를 꽃피워 온 자랑스런 우리나라 조선왕조. 집권 말기의 쇠약함 때문에 야만스런 근대 외세의 침략에 무너졌지만 찬란한 조선왕조의 문화와 역사는 우리 현대인의 피와 살로 여전히 살아있다. 나약하고 소극적이며 분열된 역사로 꾸며진 조선왕조 이야기는 오욕으로 점철된 근대사가 만들어낸 야사일 뿐이다. 우리 선인들은 조선왕조의 꿈과 결실을 다방면에서 철저히 기록하여 방대한 양의 조선왕조실록 정사를 남겨놓았다. 음모의 야사가 아닌 긍지에 찬 실록, 활력을 잃은 사회가 아닌 왕과 왕실을 정점으로 생생하게 문화를 창달한 전통사로서 조선왕조사를 새롭게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조선 왕실의 계승과 역대 왕들의 치세를 정사로서 요약하여 조선 왕조의 전체상을 재미있고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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