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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한 가득>과 <동네 한 가득>.
밥은 그릇에 담아 먹지요 ? 그리고 국 그릇과 반찬 그릇 몇 개, 양념 그릇과 앞 접시,
또 밥을 다 먹으면 숭늉 그릇이 올라 오지요 ? 아, 후식으로 과일이 나오면 접시도 딸려 나오겠지요 ?
이 그릇들이 밥상 위에 다 올라오니까 당연히 <밥상 한 가득>이지요 ?
<동네 한 가득>의 사정은 어떠한가요 ?
멀 리 갈 곳 없이 " 바람드리 동네 " , 풍납동 이야기만 할까요 ?
백제의 역사는 678년간 (BC 18 ~ AD 660),
그 중에서 한강의 남쪽 유역에 위례성을 쌓아 서울을 삼고, 고구려 신라와 맞서 영토 확장을 통해 세력을 넓히는 한 편,
서해 바다 건너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하며, 현해탄 건너 일본에 앞선 백제 문화를 전파시킨 기간만 493년간.
그러니까 백제의 역사 중 72.7%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하남 위례성이 백제의 서울이었고,
그 하남 위례성이 바로 풍납토성이라는 사실이 역사적 고증과 출토된 유물과 수 많은 유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한 기록,
"북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펼쳐지고, 서쪽은 바다로 통하고, 동쪽은 산이 둘러싸고"
바로 풍납토성의 지형 그대로입니다.
1. 높이 11m ~ 15m, 폭 최대 43m, 배 모양의 총 둘레는 3.5 Km.
토목공학자의 계산으로 연인원 100만명이 동원하여 최소 4년이 넘게 걸려야만 지을 수 있다는 풍납토성 성벽.
2. 사방에 도랑을 파고 돌을 깔고 숯을 채운 속에 지은 교실 3개 반을 합친 너비의 제사건물터,
3. 제사 때 쓰였을 말 머리뼈 9마리 분이 묻혀 있던 대형 폐기장,
4. 제사 때 백제의 전 지역의 우두머리가 가져와서 바쳤을 215개의 병과 항아리가 우물 한 곳에서 출토되었고,
5. 교실 5개를 합친 규모의 넓은 공방터에서는 5m가 넘는 불가마와 쇳물 흔적이 뚜렷하고,
6. 그리고 백제 기와 역사를 온전히 다 쓸 수 있을 정도의 수만 점의 기와가 발굴지 한 구역에서 나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득 들어 있는 바람개비의 마을 풍납동, <동네 한 가득>이라는 말, 잘 들어 맞지요 ?
10월 18일 화요일 아침.
올 가을 들어 가장 춥다는 일기예보지만 ,
그릇이라는 소재의 예술성과 풍납토성의 역사성을 접목시켜 예술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취지로
[예술교육연구소 라온]이 기획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의 참가자 19명이 풍납토성 북쪽 성벽 앞에 모였습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밥상 한 가득 VS 동네 한 가득>. 인솔자는 이화정선생님.
참가자는 모두 주부인데 30대가 주축을 이루고 예술과 역사를 사랑하는 분들이라 눈이 빛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먼저 풍납토성의 평면도를 보여주며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북쪽 성벽 끝이라는 것을 가리키자,
그 옛날의 나처럼 이 앞을 무심코 지나쳤던 역사의 문맹자들의 탄식이 터져나왔습니다.
하남 위례성이 밝혀져야 백제의 역사가 제대로 지켜지고,
백제의 역사가 밝혀져야 역사의 왜곡이 바로 잡힌다는 당연한 순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그의 아들 비류왕자와 온조왕자,
어느 날 갑자기 일곱 모난 소나무 기둥에서 찾아낸 반 쪽 칼을 들고 나타난 유리왕자가 왕위를 이어받자
뿔난^^^ 비류와 온조는 자기를 따르던 부족장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한강 남쪽에 성을 쌓아 서울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
쉽게 말하면, 하남 위례성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 풍납토성이라고 해설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백제의 역사를 되찾는 막중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역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북쪽 성벽 끝 도로 가에 서서,
을축년 대홍수 때 무너진 서쪽 성벽 대신 서 있는 씨티극동아파트의 뾰죽지붕을 가리키며 문화재 보호구역 내에 들어서는 건축물의 높이가 문화재 높이를 기준으로 사선 27도 이내로 제한되는 서울시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른 지붕 형태라고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높이 15m, 지하 2m라는 건축 규제를 받는 풍납동 5만 주민들의 고통과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노인 한 분이 다가와 화난 몸짓으로 빨리 가라는 손짓을 보자 참가자들이 주민들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역사공원으로 바뀐 경당지구, 백마의 머리를 베어 제사 지내던 건물지와,
전 지역에서 모여든 부족장들이 가져왔을 215개의 병과 항아리가 출토된 우물,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을 둘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래마을부지,
6천 평 남짓한 땅은 발굴이 끝나고 복토가 되어 경당지구처럼 역사공원으로 거듭 날 때만 기다리는데.
이 땅 밑에 묻혀 있는 불탄 6각형 움집들과, 교실 5개를 합친 너비의 공방터와 수만 점이 넘는 기와와 와당,
국가의 길흉사를 점칠 때 쓴 소 어깨뼈는 갑골문화의 상징이자 이곳이 백제의 서울 하남 위례성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철망 위로 주민들의 고통과 대책을 요구하는 현수막과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거리지만,
잡초와 이름 모를 들꽃이 흔들리는 미래마을부지는 곧 역사공원으로 바뀌는 운명을 맞고 있습니다.
흙으로 덮인 허허벌판, 이곳이 왕궁터라니, 역사무상의 쓸쓸함이 참가자들의 눈에 서린 듯 싶었습니다.
1997년 1월 1일. 이형구교수가 지하 4m 아래로 내려가 발견한 백제 토기들이 계기가 되어 하남 위례성의 실체가
드러난 역사적 장소인 현대리버빌아파트를 지나 동쪽 성벽 쪽으로 나왔습니다.
1999년 바로 이 곳 성벽 두 군데를 절개하여 폭 43m 높이 11m의 크기와 축조 공법을 알아내었습니다.
뻘흙으로 토대를 단단히 한 후 중심토루를 쌓은 후, 중심토루에 덧대어 비스듬히 내벽을 쌓아 크기를 늘릴 때사용한 판축법,
흙이 쓸려가지 않게 나뭇잎과 가지를 겹겹히 깐 부엽법, 외벽은 강돌과 깬돌을 깔아 배수가 원활히 되도록 하였고,
나무기둥을 박고 판자를 대어 흙 쓸림을 막는 등등,
현대에도 통용되는 댐공법이 까마득한 2천년 전에 백제 땅 이곳에서 시행된 것은 너무나 경이로운 사실입니다.
절개한 곳을 다시 쌓았지만, 현대 공법이 2천년 전 그 때의 공법에 못 미치는지 누더기처럼 공사한 자국이 뚜렷하게
드러나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보기에 민망합니다. ^^^
성 밖에 있는 우물을 찾았습니다.
나무의 끝을 암수로 다듬어 고정 시킨 후 우물 정[井]자로 엮은 높이 2.5m의 우물입니다.
물에 강한 상수리나무로 단을 쌓아 만든 가장 오래된 백제의 옛 나무우물인데 나무단은 무려 14단,
우물 속에서 줄로 묶은 토기 두레박과 나무 두레박, 목 짧은 항아리, 항아리를 머리에 일 때 받치는 풀로 만든 똬리,
우물 속에 빠진 두레박을 건지기 위해 만든 배의 닻처럼 생긴 나무 끌개도 발굴되어,
그 옛날 우물가에 모인 동네 사람들이 쌀 씻고 채소 다듬고 생선을 손질하던 모습이 눈 앞에 어른어른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경당지구의 우물은 기우제 같은 제의용[祭儀用] 우물이지만, 이 우물은 주민들이 실제로 사용한 생활용 우물입니다.
동쪽 성벽의 끝에 왔습니다.
문화재연구소에서 성벽의 구조와 해자를 조사하기 위해 성벽을 절개하여 발굴 중에 있는데,
마침 점심을 마친 작업팀들이 공사장 문을 열어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라,
허락을 얻어 작업 현장 앞으로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잡았습니다.^^^
풍납토성, 하면 성벽의 밑단이 지하 4m ~ 5m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들이 딛고 서 있는 땅 저 밑 몇 군데를 깊이 파고 있는 현장이 눈 앞에 놓여 있어 성벽의 실체를 눈으로 보며 어림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하에 묻혀 있는 성벽,
백제의 역사 역시 땅 속에 묻혀 있었고, 두 시간 넘게 우리들은 땅 속에 묻힌 백제의 역사를 찾아 다녔습니다.
하남 위례성은, 서울은, 백제의 건국과 함께 한 2천년이 넘는 유서 깊은 고도[古都]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