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독의 War History
명문 부호 아들이었던 국군 포로의 슬픈 최후[3]
동고동락 ・ 2019. 3. 26. 9:02
현영직 중위와 두 박소위가 포로 생활을 하던 북 10사단 사령부가 위치했던
평창군 평창읍 다수리 지역. 둥근 원안이 다수리다.
북한군 중위의 호남 사투리 심문은 처음에는 존댓말을 쓰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말투는 질문이 몇개 있고 나서 대뜸 반말조로 변하고 조금 뒤에는 고성과 욕설이 뒤섞인 폭언으로 폭발했다. 옆방에서 엿듣고 있던 박경석 소위가 주목했던 것은 현준호라는 이름이었다. 현중위와 같은 희성인 현씨 인물이었다.
두어 번 되풀이 되던 그 이름을 듣고 박소위가
"어! 저 이름이 현중위와 관련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북한군 중위는
그가 현중위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폭언을 퍼부었다. 그 북한군 중위는 현중위의 신상에 대한 기본 심문에서 고향이 전남이고 아버지가 현준호씨라는 것을 알고 나서 발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자식아! 알고 있냐?
네 애비 놈은 친일파였고 농민을 착취하던 악질 지주 놈이었어!"
이어서 진한 폭언의 폭포수가 이어졌다. 현준호씨와 현영직 부자의 인격을 잘근잘근 밟아대는 그 욕설은 옆방에서 듣기에도 정떨어지는 것이었다.
현영직 중위 아버지 현준호씨
그때까지 박소위는 현준호씨의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었고 현중위도 전혀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현준호라는 분이고 친일을 했었고 부자였다는 사실을 북한군 중위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북한군 중위의 추궁은 집요했다. 군사 정보 획득이 아니라 가문의 죄악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전형적인 인민재판식의 규탄 추궁이었다.
그러나 현중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침묵만 지켰다. 만약 현중위가 아버지와 형이 북한군에 의해서 몇 달 전에 살해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면 북한군 군관이, 아무리 짐승같은 인간이라 했어도, 그렇게 심하게 몰아대지를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모에도 현중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심문 대상이 입을 열지 않으니 북한군 중위는 더 미친개처럼 날뛰었다.
계속 몰아대자 고개를 푹 숙이고 수모를 당하고 있던 현중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 예상치 못한 현중위의 반응에 북한군 중위는 그제야 심문을 중단하고 박소위와 다른 동기 박소위를 불러서 심문했다. 그러나 소위들에게 무슨 중요한 정보가 있을리가 없었다. 두 소위들에 대한 심문은 비교적 간단하게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박소위는 현중위에게 저 못 된 북한군 중위가 어떤 놈이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현중위는 힘없이 대답했다.
"우리 집 머슴을 했다고 합니다.”
그날 숙소로 돌아온 현중위는 자기를 괴롭히고 모욕한 북한군 중위에 대해서
한마디 정도 할법했으나 계속 침묵을 지켰다. 미움과 분노의 감정마저 건너 뛴 침묵이었다.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간부들.
맨 우측은 10사단장 전문섭과 같은 계급인 육군 소장
북한군이 장교 포로들이 살 집은 주었지만 등잔이나 양초는 주지를 않아 저녁 밥을 일찍 먹고 어두워지면 그냥 어둠 속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가 잠이 드는 것이 매일의 생활이었다. 현중위가 깊은 한숨을 쉬는 것이 자주 들렸었다.
현중위는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사단 정찰부로 불려나갔다.
그리고 돌아와서 어떻게 당했다던가, 뭣을 물어보았다던가 하는 말도 없이 침묵 속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날이 일주일쯤 계속되었다.
두 소위들은 호출하지 않았는데 현중위만 불려나갔던 것은 머슴이었던북한군 중위의 새디즘적인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중위가 심문에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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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출신의 중위는 그 계급으로 보아 9.28 이후 북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일년도 전인 1949년 이전에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그때 평양 남쪽 강동 탄광에 강동정치학원이라는 것을 차려놓고 월북 좌익 분자들을 입교시켜 훈련을 하고 임관시켜 남파하거나 정보 분야에 배치했었다. 이 머슴 녀석도 그런 절차를 걸쳤기 때문에 남한 출신이라는 취약한 성분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날뛰었을 듯하다.
월북해서 강동정치학원등에서 정치 군사 훈련을 받고 남파되었던 육철식씨. 전향한 후 빨치산이라는 이름의 책을 썼었다. 그는 강동정치학원 교장 박병률씨[러시아 거주]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났었다.
현중위는 일주일간 서너 번을 불려갔다 왔다. 지칠대로 지친 현중위의 얼굴이 더욱 낯빛이 되게 어두어진 날, 세 사람은 일찍 저녁을 들고 자리에 들었다. 드디어 그 날 밤 힘들게 버터던 현영직 중위가 무너져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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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에 앞서 전쟁공포증에 대해서 좀 부연 설명을 해야 할듯하다.
국군 전사에 부대 전투력을 좌우하는 이 심리적 현상이 자주 나타나지만 한국 전쟁중이나 지금이나 전투력에 전쟁공포증이 끼치는 비중에 대해서는 너무 연구가 무시되어 있다.
역경에 빠져 있는 사람이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말이 없어지고 표정이 어두워지고 가끔 허공이나 발 밑을 멍하게 보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밀려오는 마음의 고통에서 영원히 탈출하는 수단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인이다.
전쟁공포증은 감내하기 힘든 공포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찾아오는 심리다.[전쟁 피로 증후군이나 전쟁 후유증이나 전문적인 용어도 있으나 여기서는 그냥 전쟁 공포증[war trauma]이라고 하겠다.]
그간 비록 북한군 10 사단장 전문섭이 잘 해주었지만 현중위는 곱게 자라다가 느닷없이 전쟁판에 내밀려서 대대 작전과장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중임을 맡아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 포로가 되었다. 포로까지 된 현중위는 단계적으로 정상 심리의 궤도를 벗어난 전쟁공포증이라는 이상 심리로 몰려 들어갔을 듯하다.
'응시'라는 제목의 유명한 전쟁화로 전쟁공포증의 초기 단계인 전투
스트레스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심하면 공포의 현장에서 미쳐 비리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하는데 한국 전쟁에서도 이런 현상이 자주 보였었다.
전방 응급 치료소를 방문한 패턴 장군. 전쟁공포증으로 입원한한 사병을 비겁자라고 팼다가 큰 문제가 되었다
전쟁 공포증에 몰린 사병 중에 총기로 부상을 가장한 자해를 하거나 탈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발각되거나 체포되면 엄벌에 처해졌다.
미국에서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사회 부적응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었는데 이들은 정글전이라는 최악의 전투 상황에서 공포증에 감염되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재되어 사회로 나갔던 전투병과 제대 장병의 경우가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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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다는 본능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던 현중위의 정신세계를 머슴 출신 군관의 원색적인 모욕이 그 어두운 아지랑이가 완전히 덮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날 밤 일찍 잠든 박경석 소위는 잠결에 “쿵!” 하는 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형체로 보이는 것은 윗목에 쓰러진 현중위였다.
박소위는 얼른 다가가다가 손과 무릎으로 엄청난 피를 느꼈다. 피는 방바닥 전체를 덮을 듯이 흘러나왔다. 박소위가 현중위를 안았을 때 그래도 그의 마지막 숨결은 몇 초나마 느낄 수가 있었지만 그는 금방 축 늘어지며 곧 체온이 낮아졌다. 현중위는 윗목의 다듬이 돌에 머리를 찧고 자살을 한 것이었다.
머리로 벽을 박거나 돌같이 단단한 것에 머리를 박아 자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고 뇌진탕으로 잠시 정신을 잃는 것으로 끝나기 일수다.
그는 확실한 죽음으로 가기 위해서 다듬이 돌의 각이 진 모서리에 머리를 충격했다는 것을 추측 할 수가 있다. 그것은 마치 창끝에 머리를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충격 부분은 두개골 골절 수준이 아니라 삼각형 구멍처럼 함몰되어 버린다.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출혈은 현중위가 확실한 죽음을 각오하고모서리를 충격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는 힘들기만한 포로 생활과 과거 머슴이 가하던 모욕에서 그렇게 탈출 해버렸다.
그 무렵 민가의 필수 가구, 다듬이 돌
박경석 소위와 동기 박준승 소위는 그를 바로 눞혀 놓고 방의 피를 닦아낸 뒤에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아침이 되자 박소위는 북한군 사단 본부에 가서 현영직 중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통보했다. 잠시 후 북한군 군관 한 명이 와서 살펴보더니 퉁명스럽게 하는 말이 "동무들이 알아서 묻어 주기오!" 였다.
현영직이라는 인간의 죽음에 관심 없다는 얄미운 태도였는데 포로 신세에 뭘 어떻게 해볼 여지는 없었다. 겨울철 평창의 땅은 한자가 넘게 깊이 얼어붙어 삽이나 괭이가 들어가지 않았다. 두 박소위는 근처 농가들을 뒤져 곡괭이 하나를 찾아내 하루 종일 땅을 파서 현중위를 매장했다. 호남 명문의 부호 아들은 이렇게 쓸쓸히 강원도 땅에 그 피곤한 육체를 눕히고 영면에 들어갔다.
[출처] 명문 부호 아들이었던 국군 포로의 슬픈 최후 -3-|작성자 동고동락
첫댓글 내가 겪은 것처럼 정확히 묘사되었음.
현영직 중위의 아버지가 호남 갑부 현준호씨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진으로는 처음 대한다.
놀라운 사실은 현준호씨의 사진 얼굴이 다수리에서 죽기 전 현영직 중위와 판박이라는 점이다.
물론 부자간이라 닮을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유별나다. 코밑 수염만 없애면 바로 현영직 중위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