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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부제 - 빨간 스웨터]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경기도 옹진군 백령국민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던 이야기이다.
1963년 약관 18세의 나이로 머리를 빡빡 깍은 채로 생면 부지의 백령도섬에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야말로 그 당시 유행하던 이미자의 "섬마을 총각선생님"이 된 것이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장장 열대여섯시간을 타야 백령도 선착장 용기포에 도착하게 된다. 지금이야 쾌속정이 있어서 얼마 안걸린다고 들었지만 인천에서 오후에 출발하여 먼저 연평도에 들러 사람과 짐을 내려 놓고 9시간 동안 밤새 가면 다음날 새벽에 소청도에 다다른다. 소청도에서 1시간 정도 머물면서 생필품과 승객을 내려 놓고 또 1시간을 북쪽으로 가면 대청도에 다다른다. 이곳에서도 역시 생필품과 승객을 내려 놓고 마지막 종착지인 백령도를 향한다. 1년 있는 동안 처음 부임할때 한번, 그리고 여름방학때 한번, 그리고 겨울방학때 한번 합해서 3번을 왕복하였다.
인천의 연안부두에서 도시를 멀리하고 얼마를 지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망망대해를 물살을 가르며 시속 30놋트의 속도로 가는데 난 처음에는 어떻게 목적지를 찾아가는지 궁금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배가 일단 부두를 떠나 목적지를 향하는데 우선 나침판을 이용하여 방향을 잡고 그 방향으로 정해진 속도로 몇시간 가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연평도에서 소청도를 향하여 배가 가는데 목적지에 다다렀다고 선장이 판단했을 즈음 도대체 소청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바다에는 해무가 짙어서 몇미터 앞을 바라 볼 수 없은 지경이었다. 배안의 승객들이 불안해 하면서 동요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뱃사람들은 바다 한 가운데 배를 정박시키고 바다 깊이를 재고 있었다. "아 우리가 잘못하여 북한 해역에 들어왔구나" 하는 탄식들이 흘러 나왔다. 승객중에는 해병대, 군인, 해군, 경찰, 나같은 공무원들이 있었다. 군인들으 주로 해군함정, 또는 헬리콥터 내지는 수송기로 이동을 하였지만 일부 휴가장병들은 이 민간 선박을 이용하고 있었다. 모두 웅성거리면서 군인들은 계급장을 떼기 시작했고, 나같은 경우는 공무원증을 찢어 없앴다. 한두시간을 혜매이고 있을 때 해무(바다안개)가 햇볕을 받아 사라지면서 저 멀리에 섬이 보이는 것이었다. 소청도 근처에 오긴 왔는데 해무때문에 선장이 잠시 착각을 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일낟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그곳은 항상 북한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6/25 전쟁때는 강력한 영국 함대가 이곳을 지켰기 때문에 위도상으로 38선 훨씬 북쪽인 백령도를 우리 남쪽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많은 수의 강력한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용기포라는 부두가 있는데 다른 말로는 "사곶"이라고 하여 넗디 넓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비행기, 주로 수송기가 활주로 없이 이 "사곶" 바닷가에 내리곤 하였다. 세계에서 보기드믄 바다모래위의 활주로였다.
나는 백령국민학교에 부임하여 처음 맡은 반이 5학년 담임선생이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이 섞여 있는 반이었다. 마음은 육지의 대학교에 가 있었고. 몸만 백령도 학교에 남았다. 고향생각이 나면 반아이들을 모아놓고 노래만 가르쳤다. 내가 오르간 앞에 앉아서 전주를 시작하면 1시간내내 동요와 그밖에 유행하는 노래를 쉬지 않고 불렀다. 그 때 부른 노래들이 "바닷가에서" "과꽃" " 둥근달". "오빠생각" 그리고 "등대지기"등이었다. 우리반 아이들은 그래서 담임선생인 나의 의도대로 동요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고. 매우 즐거워 했다.
경기도 옹진군 백령초등학교 교사 시절 (오른쪽 3번째, 왼쪽 4번째가 강광남 동창생/후에 자살했다고 함)
백령도에는 고아원이 2개가 있었다. 알고보니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 한개. 개신교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 한개. 그런데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아이들을 보면 예쁘고 colorful한 옷을 입어 눈에 띄였다. 알고보니 그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고등학교 동창인 미국인 신부님(Fr. Murppy )이 이곳 가톨릭교회에서 사목을 하면서 케네디 대통령을 통한 미국에서 많은 구호품이 이곳에 전달되고 있었다. 그 예쁜 여자아이들을 볼때마다 고아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알고보니 소록도에 있는 나환자들의 자녀들인데 나환자들과 격리시키기 위해 이곳에 데리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들이 예쁘고 착했지만 한편 축은하기도 하여 나름대로 관심과 사랑을 주었던 일이 생각난다. 너무 어려서 선생을 한지라.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인상에 남을 만한 일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날 오후, 4학년 담임을 맡고 있던 동기 강선생과 상의를 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미술시간 2시간, 음악, 체육시간 합해서 2시간 모두 4시간동안에 바다에가서 낚시와 굴을 따러 가자고 한 것이었다. 바닷가는 나즈막한 산을 넘어 40분 정도 걸어가야 도착했다. 그 바닷가는 북한쪽이었는데 심청이가 빠져 죽었다는 장산곶하고는 바다 사이 30리여서 날씨가 맑은 날에는 바로 이웃처럼 가까이 보였다. 약속한 장소에 5-1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다르니 강선생 반 4학년 아이들이 저 멀리 있어서 손가락 만하게 보였다. 지금 같으면 휴대폰으로 전화하면 서로 의사소통이 되겠지만 그 당시에는 어찌 연락을 하겠는가? 나는 귀엽고 쬐끄마한 공순자라는 여학생이 제일 앞줄에 서있어서 그녀의 빨간 스웨터를 달라고 하여 나무 막대기에다 걸쳐 이곳을 보라고 흔들기 시작하였다. 강선생은 우리를 보았는지 지금 도 알길이 없지만 얼마를 흔들다가 여자는 굴을 따고 남자는 낚시를 시작하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대여섯명의 해병대 군인이 우리에게 드리 닥쳤다. 나에게 기관총을 가슴에 드리 대면 꼼짝 말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우와좌왕하고 있었고 여학생들은 울기 시작하였다. 반장 성빈이에게 우리반 아이들을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피해 모여 있으라고 해 놓고 난 해병대의 심문에 응해야 했다. 요지는 산꼭대기 GP(방어초소)에서 망원경으로 북을 관찰하던 중 내가 빨간 깃발로 북에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 해병대가 출동한 이유였다. 정말 상상도 못하는 비약이었다. 난 어린 마음에 겁이 덜컥났다. 이거 군초소에 끌려가서 망신을 당하거나 붙들려서 영어의 몸에 되지 않나. 겁이 났다. 그래서 학교에 돌아와서 교장에게 이실직고를 하였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니지만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고정간첩으로 오해를 받는 줄 알았었고 그 당시 나에 대한 신분을 밝히고 내신상을 적어가는 것으로 헤프닝은 끝났지만 한참 후에 생각을 하니 그 해병대들의 경거망동한 행동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대학 1년차
그 후 민관 합동행사의 일환으로 해병대와 학교 선생들간에 운동시합이 있었다. 지나고 보니 바닷가에서의 소동은 정말 가소로운 일이었다. 운동시합을 끝나고 군인 트럭을 하고 밭길과 논길을 타고 오는데 길이 좁아 10여미터 아래 논밭으로 트럭이 2,3번 구른다음에 논바닥에 쑤셔 박힌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나는 나이로 봐서 제일 어리기 때문에 트럭 제일 밖앗쪽에 앉았었는데 한번 굴를 때 이미 밖으로 튕겨져 나와 있어서 나데로 굴러서 논밖에 쳐밖혔지만 다시 일어나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옷을 닦고 있는데 교무주임이 날 보더니 "이선생 사람 구하지 않고 뭐하는 거욧!!!" 하는 소리에 트럭을 보니 비명소리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행이 사망사고는 없었고 나만 멀쩡한 채로 다른 선생님들 중에 골절, 찰과상만 입어서 가까스로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 대수롭지 않았던 일들이 자꾸 주마등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나이 탓이리라. 일년동안 육지만 바라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유명한 절경인 해상공원 두무진에도 가 보지 못하였다. 누군가와 함께 아름다운 동행으로 추억이 어린 그곳에 한번 가고 싶다.
섬에서 바이얼린 개인지도를 받지 못한 나는 서울의 친구와 연락하여 매주마다 음악이론과, 화성법, 대위법등을 우편으로 주고 받으면서 독학을 하고 일년 후에 나는 서울음대 작곡과에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작곡과는 내 뜻이 아니였다. 학교에 다니면서 기악과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당시에는 전과가 허용되지 않아 학교를 6개월 한학기를 마치고 서울 음대를 자퇴하는 용단을 내리게 된다. 내년에 다시 기악과 바이얼린 전공으로 떳떳하게 시험을 다시 보기 위해서 였다. 교직을 그만 두고 난 후 부모님에게는 면목이 없었지만 또 다시 다니던 대학까지 그만두었으니..... 그러나 작곡과를 다니면서 교수들을 알게 되어 바이얼린을 지도받게 되었음으로 매일 피나는 연습과 렛슨을 받고 그 이듬해에 서울음대 기악과 바이얼린 전공에 합격하게 된다. 이때 날 경제적 정신적으로 많이 도와준 분이 그당시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나의 큰누님이시다.
3/11/09
93년 충남대학교 음대(예술대) 재직시절 KBS TV방송에서 그때의 제자들이 "그리운 선생님"을 찾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노래를 많이 가르쳐 주었던 나를 찾았었다. 그당시 미국에 있었는데 KBS방송국 출연을 부탁하는 전화 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나를 아는 친구, 선배, 제자,친지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방학이 끝나고 나서야 다시 서울에서 그때의 제자들과 연락이 되어우리집으로 찾아 왔다.그들은 나와 불과 7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제자인데 이미 중년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교직을 그만 둔 후 30년후 백령초등학교 담임했던 제자들과 만났다. 제자들은 우리집을 방문하여 맥주파티를 겸한 이야기 꽃을 피우고 하루를 즐겁게 지냈다.
사진은 은방울 카페에서 퍼옴
노래 등대지기
다른 곡을 듣고 싶으면 정치 버튼 클릭하고 플레이어 버튼을 클릭! 은희 해바라기 트윈폴리오 하모니카연주 기타연주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섬 바람소리 울부짖는 어두운 바다에 깜박이며 지새우는 기나긴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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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나네요,,,,저는 백령초등42회 졸업생입니다 ,그 옛날 백령에서 고생이 심하셨을텐데....지금은 너무 좋아졌어요, 선생님 제자분들과 함께 백령가세요 ,윗 글을 보면서 숙연해진다해야하나요, 저는 결혼해서 취미로 바이올린 배웠는데 선생님은 전공을 하셨군요
백령도에서의 교직시절 크고 작은 여러 이야기들 많으시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같이 들리는 등대지기 노래는 그 때 당시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배워주신 노래로 기억되며 소청도 등대로 견학 갔을 때 등대지키는 분 앞에서 우리들이 합창을 하였답니다.....
소청도로 견학가면 무엇 타고 가나요? 저는 한번도 못가 봤는데....
군용 상륙정(BU라고 했는데)을 학교에서 교섭해서 공짜로 타고 갔는데 그 삐유라는 배는 영화에서 군인들 상륙할때 해변에 대고 배 앞부분이 열리는 배로, 타고나면 하늘만 보여요~
네 그랬군요,
등대지기 배워주셨구요. 그집앞, 홍하의 골짜기, 올드 블랙죠, 스와니 강, 오스잔나등 많은 노래를 배워주셨지요.틈틈이 바이올린 연주도 해주셨구요.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오셨던 선생님, 그때 그시절 이미자의 "총각 선생님"이라는 노랫말과 같이 많은 추억을 오랬동안 간직하였고, 세월이 흘러 46여년이 지난 지금 이런 인터넷 매체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할수 있다는 것이 매우 즐겁습니다.
문제의 빨간 스훼터의 주인공은 왜 이곳에 오지 않는지 .........
그전엔 많이 왔어요. 검색하시면 보입니다. 숨바꼭질하나
머구리가 되었나
이따금 선생님 보러 오겠지요
선생님 순자는 바빠요. 가끔씩 들어와요.
옛날 어렸을적 선생님 만나는 것 보다 더 바쁜일이 있나 보다. 기다려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