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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을 방어하던 수어청 소속 병사들이 무예를 닦던 곳인 연무관 건물로 이동하는 회원들.
남한산성에서 짚어보아야 할 생각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인문산행
글 : 이수인(한국산서회) 사진 : 이송헌(한국산서회)
“국가문화재”에서 “세계문화유산”까지 - 문화재 지정에 대한 이해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을 의미하는데,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문화재를 대상으로 국보-보물-지방문화재-사적 등으로 분류하여 지정 관리한다. 경기도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사적 제 57호로 지정되어있다. 그리고 그 안의 더 많은 종류들이 이 분류체계에 따라 지정목록으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다.
한편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는데, 이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갖고 있는 세계적 부동산 유산을 대상으로 선별하여 지정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이 ▲동아시아 지역의 무기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군사유산이며, 조선의 자주·독립의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수도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인 점, ▲자연지형을 활용해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서, 탁월한 세계유산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흩어진 부재들을 어렵게 찾아서 최대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영화 “남한산성”과 “최종병기 활” 등
2017년, 황동혁 감독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2007)”을 각색해서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받았었는데, 1636년에 일어났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안에서 벌어진 인물들의 갈등과 대립을 내용으로 했었다.
이 전쟁은 결국 조선의 참패로 끝났다. 한겨울 남한산성에 떠밀려와 웅크렸던 인조 임금과 조정은, 단단한 성벽에 의지했으면서도 배고픔과 추위에 밀려 항복의 치욕을 받아들였다. 임금은 남한산성 서문에서 송파나루까지 비탈진 얼음길을 기어 내려와서, 신하의 복장인 남복차림으로 까마득한 다락 위에 버티고 앉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을 꿇어 절하며 그 사이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소위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겠노라는 맹서였다.
그 이전 2011년에 만들어진 김한민 감독의 “최종병기 활”도 이와 비슷한 배경을 다룬 작품이었다.
이런 영화들을 보는 모든 한국인들은, 스크린 앞에서 피가 끓어 튀어 오르는 분노와 함께 푸른 칼날에 썩! 베이는 깊은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치욕의 역사라는, 시퍼렇게 날 세운 다짐과 각오를 하면서 극장을 나왔을 것이다.
왕의 집무공간인 내행전을 둘러보는 회원들.
“신라 주장성”에서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까지
남한산성에 담긴 역사성은 “삼국사기” 기록에서부터 확인된다. 한강을 사이에 놓고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각축했었던 구체적 역사 사실들 중에는 아직 더 구명해야할 세부적 영역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정설에 가까운 단계로 연구가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기원전 6세기 경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의 민호를 남한산성으로 이주시켜 왕도로 삼았다는 기록이나, 신라 문무왕 12년인 672년에 한주 동쪽에 주장성은 쌓았다는 기록 등이 남한산성 안에서의 고고학적 조사로 거의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행궁지 지하에서 나온 대형기와나, 성곽 보수를 위한 기초부 발굴에서 편년을 소급 확인할 수 있는 축성법 관련 고고학적 증거들이 계속 확인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의 발굴과, 아차산 보루군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보다 합리적인 추론 및 교차검증이 뒷받침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그 다음 시대에 진행된 역사는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성과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 병자호란인데,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충실한 기록이 남아있고, 중국 쪽의 자료도 함께 검토되고 있기 때문에 판단에 큰 어려움이 없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의식을 하러 내려갔던 서문. 행궁을 중심으로 보면 오른쪽에 위치하는 관계로 우익문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성 및 지리 공간적 정체성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정도 떨어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1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둘레 12Km가 넘는(계속 보완된 규모가 그렇고, 원성은 8Km 정도) 중세기 대형 관방시설이다. 광주시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하남시와 성남시에도 조금씩 걸쳐 있다.
이 산성은 이승만 정권에서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적이 있었으며, 이승만에게 아부하는 부류들에 의해서 성안에 거대한 송수기념비가 세워졌는가 하면, 신설된 자동차도로에도 “우남로”라는 호칭을 붙이는 등, 어처구니없는 장소가 되기도 했었다(이러한 왜곡은 4·19에 의해서 모두 수정되었다).
남한산성은 만들어진 이래 군사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방어시설로 꾸준히 기능했고, 특히 병자호란을 치루면서 국가의 중심부 역할을 감당했다.
남한산성에 있는 4개 지휘소 중 유일하게 보존된 수어장대. 서장대에서 바뀐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소급된다. 남한산성이 신라가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 세력과 맞서기 위해 구축한 주장성(晝長城, 또는 日長城. 모두 하루 종일 햇빛이 드는 성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임이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광주의 수령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이 성을 중심으로 굳게 방어함으로써 몽골군이 용인으로 우회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승장 김윤후(金允侯)에 의해 적장 살리타이가 처인성에서 사살되었다고 나온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중기-구체적으로 인조 때-에 들어와서 대대적으로 정비되었고, 이후 숙종, 영조, 정조 때를 거치면서 꾸준히 보완되었다(봉암성이나 한봉성, 여러 옹성이나 신남성 등)고 확인된다.
인조는 1624년 이괄(李适)의 반란을 만나 공주까지 몽진했다가 환도한 후, 수도권 방위계획을 정비할 기회를 가졌다. 적의 침입으로 도성이 위협받을 경우 왕은 서울 주변의 든든한 요지에 피란하여 장기항전을 하고, 그 사이 각 지방에서 구원군이 달려와 적을 격퇴하도록 하는 방어대책을 준비하였다. 이 준비는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여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 기간에 남한산성 성벽은 장기간의 방치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튼튼하게 정비될 수 있었다. 성 안에는 장기전에 대비할 식량과 무기 등을 비축하도록 하였다. 예컨대 하남 춘궁동 지역에 있었던 광주 읍치를 성 안으로 옮기고, 성안의 기능화를 위해 세금을 면제하는 정책으로 백성들의 이주를 유도하였다. 또 왕이 피신할 수 있는 피난성의 상징성을 고려해서 종묘와 사직을 포함한 행궁을 둠으로써, 성의 격을 높였다. 남한산성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전략적으로 준비된 첨단의 산성도시였던 것이다.
암문을 통해 연주봉옹성으로 이동하는 대원들. 연주봉옹성은 금암산과 하남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줄기라서 병자호란 이후 보완된 시설이다.
남한산성의 뛰어난 입지조건
남한산성은 일단 해발 500m 대의 험준한 산세를 이어서 철벽을 형성했다. 서쪽 청량산 능선은 송파 벌판과 한강을 넘어 도성의 조감이 가능하고, 성벽 내부는 넓고 평탄하여 식량이나 무기의 비축에 유리했다. 성벽의 연결은 밖에서 보면 까마득한 높이인지라 재래식 무기로는 공략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성의 내부는 넓고 평탄한데다가 80여 군데가 넘는 우물 및 45개의 연못이 갖추어져 있어서 장기농성에 완벽하였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정리한 “민보의(民堡議)”는 산성의 입지조건을 고로봉형(栲栳峰形) · 산봉형(蒜峰形) · 사모형(紗帽形) · 마안형(馬鞍形) 등으로 대별하고 있는데, 남한산성은 그중 가장 탁월한 입지인 고로봉형에 부합한다.
연주봉 옹성 포좌 앞에서 기념촬영.
준비한 청, 방심한 조선-병자호란의 발발
1627년, 명을 압박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힘으로 부상하던 청태조 누루하치(努爾哈赤 , 1559-1626)가 조선에 침략해 왔다. 정묘호란이다. 명백한 조선의 패배였으나, 이때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형제관계로 미봉하면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정적인 치욕은 면했던 셈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누르하치가 죽고 그의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가 무난하게 권력을 승계하면서 그는 대청제국을 선포하였다. 무용과 지략과 야망을 겸비한 그는 서서히 명 제국의 숨통을 조이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반간계(反間計)라는 고급 전술로 원숭환(袁崇煥) 같은 명의 충신이나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 같은 부패한 명나라 장수들을 대거 투항하게 만들어서 명의 명줄을 완벽하게 조여 갔다.
그런 과정에서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을 손보기로 한다. 큰 상대인 명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용의주도함이었다. 1636년 겨울에 벌어졌던 전쟁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홍타이지는 이 전쟁에서 엄청난 기습공격전을 구사한다. 소수정예의 선발대가 접전을 회피하면서 조선의 중심으로 깊게 진격하고, 그 뒤에 본진이 밟아 내려오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인조는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인조가 강화도로 갔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시 청은 명으로부터 획득한 수군력을 이용해 강화도를 쉽게 함락시켰다.)
그런데 잘 갖추어진 철옹성 남한산성에는 말도 안 되는 큰 취약점이 따로 있었다. 하드웨어인 남한산성을 잘 정비해 놓고서도, 소프트웨어인 식량이나 무기 등의 비축을 완료하지 못했다. 성으로 반입되지 못하고 송파나루에 쌓여있던 많은 식량들은, 나중에 청군의 식량으로 고스란히 넘어가고 말았다. 땅을 치며 통탄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설상가상으로 각 지방에서 남한산성으로 달려오던 지방군 병력들은 청군의 강력한 타격에 의해서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결정적인 것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행동이었다. 그는 2만여 대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지금의 양평지역에 숨어서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관망만 하였다.
이제까지 남한산성과 병자호란에 대한 담론은 주로,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요소에 의해서 인조가 항복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기록인 나만갑(羅萬甲, 1592-1642)의 『병자록(丙子錄)』이나 작자 미상의 『산성일기(山城日記)』 등에 따르면, 조선은 소소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분전했으면서도 김류(金灅)나 그의 아들 김경징(金慶徵), 김자점(金自點) 같은 지휘부의 무능과 무대책, 그리고 당시 청이 명을 통해 보유한 첨단무기 홍이포 포격으로 인한 공포감 등이 항복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추위와 식량부족, 그리고 성 밖에서 근왕병의 연전연패가 주원인이라는 기존의 분석에서, 실제로는 성안으로 식량과 무기를 옮겨 저장하지 못하고 그대로 기습침략을 맞은 것 - 즉 국가 기강의 총체적 해이와 지도층의 무능과 무대책, 부정부패 등 - 이 패전의 진정한 이유였음을 알 수 있다.
((공지)) 제16차 서울도성 낙산구간과 자주동천 인문산행 예고
주제 : 서울도성 낙산구간에 남은 역사적 자취를 찾아서
일시 : 2019년 8월 10일(토)
회비 : 1만원
답사경로 : 동대문-한양도성박물관-낙산-자주동천-이화장
집결 : 10:00 서울 지하청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앞
준비물 : 간단한 답사 복장. 중식 및 간식, 음료수. 날씨에 따라 우산이나 우의.
참가문의 및 신청 : 다음 카페 한국산서회(http://cafe.daum.net/peakbook)의 <인문산행 공지> 란에 댓글로 신청하며, 문의는 010-2725-0026(조장빈)
첫댓글 참가문의신청 링크을 16차 낙산 인문산행 공지을 바로링크 해주세요~~
지난달 처음 인문산행 참석
그날에 회원님들과
더위와 웃음으로 함께한 시간들이 생각나네요 ~
다시금 짚어보는 남한산성
글 즐감하며 감사드립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삼복에 안내맡아 고생하시고 후기까지, 애쓰셨습니다~
이 글 뒤늦게 봅니다. 더운데 수고 많았습니다.
* 치욕과 굴종의 역사일수록 사실(史實) 규명과, 사료(史料) 보존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반산 눌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