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俗離山! 속세가 산을 떠났나! 산이 속세를 떠났나!
양 승 근
4월 산행지가 ‘속리산 문장대’라는 소식에 필자의 마음은 설 레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기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俗離山은 필자를 떠났(?)어도 필자는 35년여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산이 바로 俗離山인 까닭 이다.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단하게나마라도 떠올리지 않고는 그 까닭을 알 수 없겠기에 산행 후기에 앞서 잠시 반추해 본다.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한 176명 중 필자를 제외한 다른 친구 들이 다들 번드르르한 십 리 밖 00중학교와 또 다른 이십 리 밖 중학교에 <뺑뺑이>를 돌려 배정 받은 학교로 입학하게 되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필자는 함께 뺑뺑이 돌릴 입학 원서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우리 집 앞을 지나 출 퇴근하던 답임 선생님이 집에 들러 입학금도 없고 수업료 또한 절반도 안 되는 학교가 있으니 거기라도 진학시키는 게 어떻 겠느냐, 고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아버지는 초 등학교에서도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면 쫓겨 오는 판에 그런 학 교가 어디 있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며 거절하자 선생님은 퇴근길에도, 다음 날 출근길에도, 그리고 또 퇴근길 에도...... 설득하기를 수차례, 덕분에 필자는 소문으로도 듣지 못했던 학교 아닌 학교에나마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학년 당 한 학급 수준도 채우지 못한 그런 학교로 이름 하여 ‘00고등공 민학교’. 이름으로만 치자면 가운데 중(中)자 중학 과정이 아닌 그 상위의 과정을 가르치는 거창한 학교 같았으나 실상은 고교 진학 시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고교 입학시험조차 쳐볼 수도 없는 그런 학교였다.
하지만 필자는 까짓 학교가 무슨 대수냐 공부만 할 수 있으 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으로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조 차 행운으로 여기고 기회를 마련해 주신 답임 선생님이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랬으면서도 내심 자존심이 강했던 필자는 통학 길에 있는 00중학교 학생들에게 기 안 죽으려고 그 근처를 지나칠 때면 의식적으로 어깨에 힘도 주고 가슴도 쑥 내밀며 석고 붕대라도 감은 양 목을 빳빳하게 세운 채 시선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꼿꼿하게 다녔다. 한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던가. 새 교복 냄새가 미처 다 가시기도 전에 예의 그 00중학교 모표를 단 3 학년 학생 5명으로부터 산 속으로 끌려들어가 집단 구타를 당 하고야 말았다. 도대체 때리는 이유가 뭐냐고 대거리 한번 해 볼 새도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초죽음이 되도록 몰매를 맞으 면서도 끝까지 울지 않겠다는 오기 하나로 버텼다. 비록 5대 1 로 정신 하나 없이 맞고 있지만 내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면 너희들이 지는 것이다, 이를 앙다물며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내 가 니들보다 단어를 외워도 하나라도 더 외우고, 책 한 권이라 도 더 읽는다, 며 다짐하고 다짐했다. 한데 입학금도 면제에다 수업료도 정식 중학교의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이었는데, 문제는 교과서 밖에서 터졌다. 영어 공부를 하려면 영어사전이 필요하 고 국어 공부를 하려면 국어사전이 필요했는데 교과서면 됐지 무슨 책이 또 필요하냐며 그냥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라는 말 을 해야 하는 아버지의 입장(필자는 그 입장을 이해한다. 일제 당시 징용 끌려가 일본의 탄광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빈 손으로 귀국하신 아버님, 좀 된 일을 하시고 나면 으레 가슴과 등이 결린다고 하시던 아버님, 유산도 받지 못하고 혼자 힘들게 가정을 일구며 5남매를 키워내시느라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아버님, 후일 소설 짓기에 눈을 뜬 뒤 징용 끌려가신 아버님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 여쭈면 다 지난 이야기 이제와서 얘기해 본들 뭣하겄냐, 하시며 끝내 자세한 말씀 없이 돌아가신 아버님, 필자는 이해한다. 아버님의 그때 그 입장을...하지만 지금도 아쉬운 것은 어렸을 적의 가난보다 필자 어렸을 적 가끔 단편적으로 들려주셨던 그 소설 같은 징용 시절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배급 나오는 강냉이와 우유가 없었더라면 점심까지 굶어야 할 때가 있던 시절에 교과서 전부를 사고도 남을 정도의 사전 값이 아버지에게서 선뜻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암담했다. 사실 아버지는 돈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정식 중학교에 비해 돈이 적게 들어간다 해도 이것저것 꽤 들어간 상태였고 그나마 꾸어온 돈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은데 마른 봄 판에 생돈을 내놓으라 하니 나올 리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필자에게 사전은 절실했다. 하여 아버지와 협상을 했고 그 결과 사전 값 대신 속리산문장대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게 될 줄 꿈엔들 알았으랴! 협상이라는 것이 바로 3학년 때 가게 되는 수학여행과 맞바꾼 것이었는데 하필 수학여행지가 속리산 문장대를 오르는 것이었던 것이다.
하여 3년 전의 약속을 지키느라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된 필자 는 친구들이 문장대에 올라갔을 그 시간 즈음에 갈보리 파종을 위해 두엄을 펴며 문장대는 과연 어찌 생겼기에 문장대라는 이 름이 붙게 되었을까, 진종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비록 보리밭 두엄을 펴며 미처 발효되지 않은 노리끼리한 인분이 손 톱에 끼여 닦아도 닦아도 냄새가 지워지지 않아 한동안 코를 킁킁 거리며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어도 수학여행 대신 사전을 택했던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되레 룰루랄라 기 분 좋게 두엄을 내고 있었으니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아무리 사전과 수학여행을 맞바꾸기로 했었다지 만 그래도 아버지에게 여행경비를 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수학여행의 ‘수’자도 꺼내지 않았다. 이유인 즉 필자 스 스로 내건 약속을 필자 스스로 저버릴 수야 없지 않는가 하는 필자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어쩌면 가당찮은 치기에 불과 할지 모르겠으나 필자에게는 속리산 문장대에 비할 바가 아닌 엄청난 행운이 그 사전 덕에 현실로 다가와 있었던 상태였던 것이다. 검정고시 시험 직전 2달 간 평균 2시간 정도만 잠을 자 며 사전과 씨름하고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과 씨름한 끝에 당당히 고입 검정고시 합격 통지서를 받고난 뒤였던 것이다. 선배들 중 그때까지 단 한 번에 검정고시를 합격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 앞에 받아든 그 합격 통지서야 말로 인근 의 내노라하는 중학교의 비까뻔쩍한 졸업장에 비길 바가 아니 었다. 그래봤자 겨우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에 불과한 것일 뿐이었지만 자칫 중등과정조차 공부할 수 있는 기 회조차 얻을 수 없을 뻔했던 필자가 고등학교를 갈 수 있게 된 상황이 되었으니 속리산의 문장대 정도는 그야말로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 그 어렵다는 검정고시를 합격하였 으니 그냥 썩힐 수야 없지 않겠느냐는 마을 사람들의 이구동성 에 ‘합격 못하면 끝이여!’ 하는 허락이 떨어진 상태였으니 한라 산 백록담에 못 오르게 된다 한들 무슨 대수며 백두산 천지에 발을 못 담근들 무슨 대수였으랴!
어쨌든 사전 값과 맞바꾼 속리산 문장대. 아마도 책상을 닮 았으리라 상상되는 문장대, 언젠가 한번 기필코 올라보리라 마 음속에 품고 있었으면서도 아직 미답지의 산이 되어 있었기에 어찌 아니 마음이 설레지 않았으랴! 필자가 산행부장으로 있을 때 한번 추진해 볼까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개인의 욕구 를 반영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기에 뒷날로 미루어 둔 산이었 던 것이다.
하여 이 달의 산행 후기는 반드시 필자가 써야 하겠구나, 마 음을 굳힌 가운데 밤잠을 설치고 당일(4월 6일) 아침 06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인천예술회관으로 차를 몰아 필자의 지정 차 고(?)에 파킹하고 나니 06시45분, 필자가 맨 먼저가 아닐까 생 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필자의 뒤를 이어 산행부장의 임 무를 맡게 된 조성범 시인님이 먼저 나와 필자를 반긴 것이다. 그리고 저만치에 등산복 차림의 어느 낯선 사람이 서성거리 고...
뒤이어 시인 임노순 전 회장님, 시인 박경하님, 인천문협 회 장을 역임하신 바 있는 소설가 서동익 회장님, 언론계의 중추 역할을 맡고 계신 김재덕 선생님, 시인 한상준 전 교장선생님, 시인 임동숙 총무님, 시인 이담하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 하며 인사를 나누다보니 웬걸 먼저 와 서성거리시던 낯선 사람 이 소설을 쓰시는 박홍식 선생님이라며 회장님이 합류 시킨다. 이렇게 하여 총 참가 인원 10명!! 비록 총 회원의 3분의 1 정도 밖에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산행하기에는 딱 알맞은 인원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 인산, 즉 인천문인산악회의 오늘의 멤버는 회장님과 박경하 선생님의 승용차에 분승 07시 10분에 인천예 술회관을 출발해 제179회 째 산행의 장도에 올랐다.
(안성휴게소에서의 아침 요기)
출발한지 꼭 1시간을 달려 안성휴게소에 들러 30여 분간 간 단하게 아침 요기를 하고 다시 달려 청낙고속도로(경부고속도 로 청원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낙동분기점까지 새로 개 통 된 고속도로 : 도로명을 몰라 한국도로공사 홈페이지에 들 어가 보았으나 필자가 무지해 찾을 수 없었던 탓인지 개통은 되었으되 아직 이름이 없어 필자가 지은 이름) 보은 나들목을 나서는데(09:52) 운전하던 회장님 ‘여기까지 딱 222Km네’ 하신 다.
맨티재 입구에서 대형 바위에 음각되어 씌어있는 <동학농민 혁명공원>이라는 검은 글씨를 한눈에 일별하고 204m의 동학 터널을 지나는데 터널이 기존의 터널들과는 좀 다르다. 한마디 로 옆구리 터진 김밥터널(?)이라고나 할까? 터널의 오른쪽이 기둥으로 되어 있어 계곡의 경치가 훤히 내다 보였던 것이다. 터널 치고는 좀 특이한 구조다 생각하고 있는데 곧바로 1,198m의 속리터널 속으로 차가 돌진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 긴 터널도 금세 빠져 나오고 선행 차가 갑자기 어느 한 음식점 앞에서 멈춘다.
속리산 산채순대집 앞에서
<속리산 산채순대(보은군모범음식점 : 043-543-7770)>라는 간판이 마중 나와 있고 통나무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건물이 지 나가는 이의 향수를 자극한다. 임노순 전회장님이 가끔 들렸던 모양인지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에 막걸리 두 병을 사 들 고 나오며 오늘의 뒤풀이는 예서 하자 하신다.
다시 차의 가속페달을 밟아 법주사 건너편까지 직행하여 차 를 주차하며 휴대폰 시계를 보니 10시 45분, 법주사 경내는 하 산 길에 둘러보기로 하고 곧바로 산행에 접어든다. 30여분 걷 다가 개울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 온 막걸리 중 한 병을 조금씩 나누어 마시는데 술을 전혀 못 마시는 필자도 한 모금 맛을 본다. 막걸리의 걸쭉한 맛이 특이하다. 술지게미를 먹으 며 맛보던 밀주 맛보다 더욱 걸쭉하다. 이를 두고 농투성이보 다 더욱 농투성이 같다 하면 어울린 표현이 될까?
드디어 산행은 시작되고~~~~~~~~~~
어쨌든 우리 일행은 막걸리 기운에 일한다던 그 옛날 농투성 이들 마냥 막걸리 기운을 받으며 걷는다. 승용차도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산길을 가는데 왼쪽으로 조그마한 저수지 가 나타나고 그 저수지의 시작 부근을 다리로 건너는데 문 득 물고기 떼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수지 사진 왼쪽 하단 즈음에 놓여진 다리 아래에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 고기 떼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어릴 적 고향마을을 가로지르던 ‘흐르내’라는 시내에서 맨손으 로 더듬어 고기를 잡고 각 논들마다 다 있게 마련인 물고에서 성긴 체를 거치해 놓고 쪼르륵쪼르륵 거슬러 오르는 송사리를 잡던 생각이 절로 떠오르며 풍덩 뛰어들어 물고기들과 한바탕 놀아보고 싶은 욕구를 사진 한 컷으로 대신하고 지나 오르던 길을 계속하는데 재선충 신고 안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하늘소를 잡아 '식식이'라 부르며 가지고 놀던 것하고는 사뭇 잔등이가 흉물스럽다.)
새삼 정2품송은 안전할까 하는 염려와 함께 미처 보지 못하고 들어왔다는 생각에 하산 시에 꼭 찾아보리라 마음먹으며 신고 전화를 보니 필자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1588- 3294)와는 다르다. 043-542-5268!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장의 전화번호인 모양이다. 아니면 관할 보은군의 전화번호이거 나... 그리고 이어지는 산행 길 곁 굵은 참나무 아랫도리에 <참 나무 시듬병 약제방제지 접촉금함>이라는 문구가 붙여진 누리 끼리한 거즈(?)가 드문드문 감싸여 있는 게 보기에 안타까웠 고, 정2품송과 같은 DNA를 가졌을 적송들이 시원스레 하늘을 향해 치솟은 자태를 보며 뿌듯함과 함께 혹시 재선충이 예까지 침투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마치 시루떡 단면 같다.
(저수지에서 올라온 자라인가?)
차곡차곡 쌓아놓은 듯한 거대한 바위 아래를 지나 조금 올라 가다 보니 조선조 7대왕 세조가 국운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법 주사에서 대법회를 연 후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서 목 욕을 하고 있는데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명을 받고 온 월광태 자라는 미소년이 나타나 세조의 병이 곧 완쾌 될 것이라 하고 사라진 후 목욕을 끝내고 나니 피부병이 깨끗해졌다 하여 목욕 소라 했다는 안내문이 있다. 피부병(나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 다) 치료차 속리산에 갔던 세조가 뱃길로 올라오던 길에 양수 리 근처에서 1박을 하게 되는데 어떤 은은한 소리에 이끌려 올 라가 보니 거대한 바위 틈 사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인지 라 거기에 절을 짓게 하고 수종사라 하였다 하는 이야기를 접 한 바 있고 실제 산행 중 수종사에 들러 물방울 떨어지는 바위 틈을 확인한 바 있고 다산 정약용이 머물며 정착시켰다는 다도 법을 배우며 녹차도 얻어 마신 적이 있다.
(목욕소)
<洗心亭(세심정)입니다>라는 간판 곁에 나 있는 조그마한 다리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 왼쪽에 <是甚麽橋>, 오른쪽에 < 이뭣고다리>.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이뭣고다리?”
왼쪽의 한문 ‘是甚麽橋(시심마교)’를 해석한 게 오른쪽의 ‘이 뭣고다리’라는 얘기인 모양인데 한자의 사용이 야릇하다. 남녀 가 짝(匹)을 이루니 즐겁다(甘)는 뜻이 들어있는 심할심(甚)자 가 다리 이름에 들어간 게 재미있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남 녀가 거시기 하는 것 하고 이 다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주에서 가장 올바른(是의 아랫부분:正) 것이 해(日)라는 뜻 에서 생겨났을 옳을시(是)와 甚이 함께 했으니 다리에서 거시 기 하는 게 옳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아직 둘러보지는 못했지 만 이쯤에서 다리의 이름이 ‘是甚麽橋(이뭣고다리)’가 되었을 법한 법주사와 속리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간단하게나 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뭣고다리 앞에서)
옛날 정월 대보름마다 사부대중들이 손에손에 남근 목각상을 들고 허옇게 눈 덮인 법주사 경내를 지신이라도 밟듯 몇 바퀴 돌곤 했다 한다. 다른 산과 달리 이 속리산 산신이 성모대자재 신(聖母大自在神)이라는 여신이라 이 여신에게 남근을 먹여(?) 산자락에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였는데 이는 불교가 전 래되기 이전부터 있어온 토속신앙의 한 형태로 불교와 조화롭 게 잘 융합되었던 것을 말하고 있음일 터, 다리의 이름도 여기 에서 빚어진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 것이다.
부부송?
연인송?
바위를 깔고 앉은 이 소나무의 키가
(이렇게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두 번째 휴식(12:00)을 취하며 세심정 휴게소를 지나 용바위 골 휴게소에 오르는 도중 보랏빛 현호색과 일명 오랑캐꽃이라 고도 하는 샛노란 노랑제비꽃과 잠시 연정의 눈길을 주고받기 도 하고, 是甚麽橋에 걸맞는 소나무 두 쌍, 부부송(?) 연인송 (?)도 있어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 한 쪽 눈 찔 끔 감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안타깝게 바위 위에 주저앉은 채 아름드리로 자란 소나무의 굳건한 삶도 바라보며 가지를 물에 담그면 물이 푸르게 되어 물푸레나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는 명찰도 읽어보고 곧잘 눈에 띄는 겨우살이(桑寄生)의 삶과 한약재로 쓰이게 된 동기도 생각해 본다.
현호색
노랑제비꽃
까치집을 닮은 겨우살이
옛날 한 양반이 무릎이 안 좋아 몇 십리 밖 의원 집에서 약재 를 가져다 달여 먹곤 했다. 한데 약재 심부름을 하며 몇 십리 길 다리품에 지친 양반집 마당쇠가 오가는 길에 약재와 비슷하 게 생긴 것이 뽕나무에 잔뜩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꾀를 내어 그것을 채취해 가져가서는 의원 집에 다녀 온 양하며 달여 올 리기를 계속했다. 몇 달을 그렇게 하자 양반의 병이 치유되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의원은 양반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의아해 한다. 약재를 지어 간 게 몇 번 안 되 고 그것도 오래전 그만두었는데 병이 치유되었다니 이상할 수 밖에. 하여 의원이 직접 양반집을 찾아 연유를 묻게 되었고, 마 당쇠의 잔꾀로 그리 된 것을 알고는 의원도 같은 병에 마당쇠 가 따다 달여 바쳤다는 겨우살이를 사용해 효험을 보기 시작한 이후 한방약재로 쓰이기 시작했다 한다.
냉천골 휴게소를 조금 지나자 이게 어인 일, 봄도 한가운데 접어든 4월인데 커다란 바위 틈 아래 두께를 짐작키 어려울 듯 한 두꺼운 얼음이 아직도 허옇게 남아 있었다. 휴게소 이름을 ‘냉천골’이라 한 이유를 알겠으나 어떤 연유로 아직도 그리 얼 음이 남아 있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얼음골?
산죽
빼꼼하게 얼굴 내민 화사한 들꽃과 벗하고, 산죽을 쓰다듬는 바람과 벗하며, 노랗게 꽃핀 생강나무 향을 맡고, 모든 것을 다 내어준 어버이 같은 고목 곁에 앉아 늘씬한 여인의 다리인 양 쭉쭉 뻗어 올라간 아름드리 적송에 부끄러운 눈길도 주며, 이 제 곧 파랗게 입이 피어날 삭정이 같은 갖가지 나무들의 긴 겨 울도 생각해 보며, 정상 목전까지 오르는데 그리 험준한 산도 아니요, 몇 날 며칠을 가야 하는 깊고 깊은 산도 아니건만 어인 일인지 정상 문장대 바위 아래에서 또 하나의 휴게소와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을 다 내어준 어버이 같은 고목
(정상휴게소 풍경)
이름 하여 정상휴게소! 한두 개 쯤의 대피소 정도라면 모르 되 호객까지 하며 온갖 음식물을 파는 휴게소가 어찌 이리도 많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법주사를 지나 문장대까지 놀며 쉬며 세월아 네월아 유유자적 3시간여를 오르는데 휴게소가 자그마치 태평, 세심정, 용바위골, 보현재, 냉천, 정상, 이렇게 여섯 개나 되는 휴게소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정화시설을 잘 갖추고 쓰레기 수거를 철저히 한다 해도 건물이 거기에 있 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연을 훼손한 꼴이 아니던가. 문득 필자 의 발자취 편린 하나가 떠오른다. 200여 년 전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이래 6.25를 겪으며 한때 80가구 500여 명까지 불어났 던 대표적 오지 마을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전기 없는 마을로 유일했던 경북 주왕산의 내원마을도 국립공원 정비 계획에 따 라 마지막 예닐곱 남았던 가구마저 철거한 사례가 있고, 서울 에서 가까운 삼성산에 그리도 많던 행상들을 모두 금지시켜 쾌 적한 산행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적어도 국립공원이라는 속리산에 휴게소를 빙자한 잡상 아닌 잡상인(?)이 이렇게 많은 숫자로 있어야 하는지 국립공원 관리자에게 묻고 싶다. 오랜 세월 꿈속에서조차 오르고 싶었던 그 문장대 정상을 밟기 전에 씁쓸함부터 먼저 느껴야 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구 표지석에도 각종 기록과 높이가 다르다)
(신 표지석에는 그나마 산의 높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신 표지석 앞에서의 단체사진)
정상휴게소 앞을 지나 뒤편 문장대(文藏臺:1,033m) 바위 아 래 섰다. 오른 쪽에 한글로 커다랗게 표지석이 새로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는 문장대 바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문장대를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는데 안내판에 는 본래 큰 암봉(岩峰)이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에 감추어 져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라 하였으나,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어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찾았는데 정상에 오륜삼강(五倫三綱)을 명시한 책 한 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文藏臺)라 불리게 되었다한다, 고 나와 있다. 그러고 보면 과연 왕조시대 왕의 권력이란 대단한 것이었던 것임에 틀 림없는 모양이다. 하루 종일 글을 읽었을 뿐인데 원래 있던 뜻 과 다른 뜻인 ‘글 속에 감추어진’ 이름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13시 50분, 철제 난간이 있는 계단을 올라 문장대에 올랐다.
가운데 있는 것이 칠형제봉
각종 기록과 다른 문장대의 높이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산 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라는 최치 원의 시를 빌어 쓴 ‘속리산 문장대........박찬선 글짓고 김정홍 글쓰다’의 글 내용과 표지석에는 산의 높이가 1,054m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각종(산행 안내책자나 인터넷상에 올라온 신문 사 기자들이 써놓은 뉴스들) 기록에 1,033m로 나와 있는 것은 무엇인가. 1,2m도 아니고 무려 21m의 차이가 나는데 이 높이 가 틀리지 않는다면 각종 기록에 나와 있는 높이(1,033m)는 문 장대 바위 아래까지를 말함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산의 높이를 잴 때 바위를 제외한다는 뜻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둘 중 하나가 틀렸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하루 속히 바로잡아 놓아야 할 것이다. 문장대를 오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야 기 시킬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신문사 기자들이 써 놓은 기사 내용에도 속리산국립공원에서 표기해 놓은 높이를 적용 하지 않은 이유는 무슨 까닭일까. 보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국토지리정보원 홈페이지로 들어가 산의 높이가 어떻게 등재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려 하였으나 필자가 무지해서 그런지 쉽 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문장대 바닥은 평평한 바닥이 아닌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 다. 마치 성숙한 자궁의 단면 같다고나 할까? 사람이 태어나기 전 머물던 아늑한 어머니의 자궁 속! 그러고 보니 불교가 전래 되기도 전의 토속 신앙적 이야기, 즉 속리산 산신이 성모대자 재신(聖母大自在神)이라는 여신이었다는 설이 이곳 문장대의 바위 생김새에서 연유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앉아 글을 읽 었다는 세조는 어쩌면 글을 읽은 게 아니라 성모대자재신의 아 늑한 자궁 속에 들어앉아 왕위를 차지하고 지키느라 지친 심신 을 치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한 바퀴 휘~ 둘러보는 데 법주사를 가운데 놓은 채 외곽으로 둘러싼 주능선의 천황 봉(1,058m)과 비로봉(1,032m), 문수봉(1,031m), 그리고 필자 가 올라 있는 문장대(1,033m:가장 많은 기록에 올라 있는 높이 를 채택)를 비롯해 관음봉(982m), 묘봉(874m), 형제봉(803m), 수정봉(667.4m), 입석대 등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능선 이 장쾌하다. 봉우리가 아홉 개 있는 산이라고 해서 신라시대 이전에는 구봉산이라고도 불렸다는데 그 이유를 알만 하겠다.
우리는 기념으로 사진을 몇 컷 찍은 후 문장대 아래 널찍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문장대 오찬을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회원님 저 회원님 배낭에서 나온 것은 밥을 빼고도 13가지의 찬과 3가지의 주(酒)가 나왔다. 그야말로 잘 차려놓은 한정식 식단을 통째로 옮겨온 듯하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꽃 을 피우며 1시간 남짓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15시 15분, 하 산을 시작했다.
(정상 아래서의 식사)
하산은 계속 이어진 바위 돌들 때문에 걷기에 불편했지만 오 르는 것보다 빨랐다. 한참을 내려오는데 저만치 산 능선 어디 에선가 딱따구릿과(까막딱따구리, 쇠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크낙새 따위) 새가 먹이 찾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작은 망치로 속이 핀 나무판 상자를 두드리는 듯한 공명소 리였다. 녹음된 소리가 아닌 딱따구릿과 새의 먹이 찾는 실제 의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는 일인데 아마도 오늘 산행은 꽤나 재수가 좋을 모양이다.
(금동미륵보살상)
산행을 시작한 사적 명승지 4호인 법주사에 도착하니 17시 30분, 30여 분에 걸쳐 높이 33m의 금동미륵불상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법주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내부기둥과 기둥 사이 4면 에 석가의 일생을 표현한 8폭의 그림이 봉안되어 팔상전(국보 제55호)이라 불리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목조 탑을 비롯해 큼직한 바위에 양각된 6m의 보물 제216호 마애여 래의상,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살 때 밥 을 하거나 장국을 끓이는데 사용했다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무쇠 솥인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나 되는 보물 제 1413호 철확 등을 둘러보고 18시에 법주사를 벗어났다.
(법주사 팔상전)
나오는 길에 일명 ‘연걸이 소나무’라고도 불리는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2품송(正二品松)을 알현했다. 법주사 경내에서 얻은 ‘Let's go 속리산’ 안내 팜플릿에는 수령 600년 정도로 추 정된다고 나와 있는데 정2품송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수령 800 년 정도로 추정된다고 되어 있다. 인터넷 상이나 필자가 가지 고 있는 안내 책자에 나와 있는 정2품송에 관한 내용에도 대부 분 팜플릿과 같은 수령 600년이다. 그렇다면 기타 다른 관광 안내 책자나 팜플릿이 200년 전에 제작된 것이 아닐 것은 분명 한데 대체 어느 쪽 것이 올바로 추정된 수령이란 말인가. 수령 추정을 아무 데서나 마음대로 하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조선 세조(1455~1468, 재위)가 속리산에 행차할 때 임금이 탄 가마연이 나무 가지에 걸려 가마가 지나가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소나무 가지에 연이 걸린다”고 하자 밑가지 가 저절로 들려 그 밑을 통과하게 되어 이를 신기하게 여긴 왕 으로부터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 벼슬을 하사 받은 소나무로 기품 있었고 수려한 자태 그대로였다. 안타깝게도 오 랜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노쇠할 대로 노쇠해 한쪽 방향의 가 지 속이 썩어 강풍에 부러져 균형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 함에도 수려한 기품은 여전했다. 요즘의 장관들과 품위를 겨룬 다면 어느 쪽이 더 높은 품격을 받을까? 잠깐 생각해 보면서 그 곁에 2대 정2품송이 자라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더욱 안타 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스컴을 통해 듣기로는 정2품송을 남 자로 보고 10km 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어머니 치마폭처럼 넓게 펼쳐져 있는 소나무를 부인송으로 선정, 정2품송의 송홧 가루를 채집해 수정해 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는데 현재 정2품 송 DNA를 가진 2대가 몇 그루나 육성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정2품송을 쏙 빼닮은 2대가 수없이 많이 육성돼 '남산 위 에 저 소나무~'하고 애국가에 나오지만 남산에서 소나무 볼 기 회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 앞으로는 남산 위에서도 정2품송 2 대가 자리를 틀고 앉아 품위를 드러내주기를 기대해 볼 뿐이 다.
우리는 정2품송에 기대어 먹고 사는 상인 아주머니의 선 제 의에 단체 사진을 찍고 호의 표시로 노랗게 대껴진 조 한 됫박 을 산 후 정2품송의 무사 안녕과 자손 번창을 기원하며 자리를 떴다.
이랬던 정2품송이
안타깝게도 이렇게 되었다.
(정2풍송 앞에서 찰칵)
아침에 잠깐 들렀던 속리산 산채순대 집에 도착한 것이 18시 40분, 순대와 순대국, 묵말이로 간단하게 1시간 남짓 뒤풀이를 한 후 20시에 식당을 나서는데 모양새 특이한 나무가 잎도 거 의 없는 가운데 연녹색 꽃이 피어 있는 게 신기해 디카를 들이 대며 식당 주인에게 물으니 ‘청사의 나팔꽃’이라 한다.
속리산 산채순대에서의 뒤풀이
청사의 나팔꽃 나무와
그 꽃
돌아오는 길은 예상보다 빨랐다. 어중간하게 출발한 게 아니 라 아예 늦게 출발하다 보니 부지런 떤 상춘객들이 앞서 올라 간 탓인 모양이다. 아침에 출발했던 인천예술회관에 도착하니 24시를 살짝 넘긴 시간, 모든 일정을 무사하게 마무리 하면서 필자는 어린 시절 영어, 국어사전과 맞바꾼 속리산 문장대 수 학여행을 뒤늦게 다녀온 셈이 되었다. (뒤늦게나마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애써 주신 현 임원진께 감사드립니다)
산행 길이 달라 비록 들리지는 못하였지만 천황봉 아래 있는 상환암에 권상로 선생의 현판 글씨로 단아하게 쓰여 있다는 우 암 송시열의 시 한 수를 사족으로 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인 연유일까?
도도하게 흐르게 망정인 것이 물인데,
어쩌자고 여기서는 바위 뒤에서 물소리만 울리는가.
때 묻은 세간 인간들이 행여 여기 발을 씻을까 두려워서
흐름은 감추고서 소리만 내는구나!
필자의 생각이 물의 심정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필자가 한갓 세간의 때 묻은 인간일 뿐이어서 그런 것일까? |
첫댓글 양승근 부회장님, 애 써 찝필한 산행기가 화면상에 너무 꽊 차서 계속 밑에 있는 바를 옮겨 가면서 읽어야만 한 문장의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라 여간한 인내를 갖지않고는 산행기를 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빨리 한 문장의 길이를 재조정하시어 읽는 분의 편의를 제고해 주세요. 가능하면 화면의 삼분의 2 정도만 차게 문장을 중간에 잘라서 다음행으로 넘겨 주시고 사진도 좀 줄여주시고..........
길고 긴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근데 넘 길었어요. 그것도 바를 여기 저기 옮겨가며 초등시절 어려웠더 시절을 읽으니 눈물이 납디다. 양부장님 께는 문장대가 정말 추억이 어린 곳이었네요.. 언제 사진을 저렇게 많이 찍으셨는지 참 꼼꼼도 하셨어라 근디요. 목욕소는 세조가 피부병을 낫게 했을까요? 피부병이 아니고 성병이라 하대요. 차마 그당시 왕인디 성병이라하면 쪽팔리잖아~~ 역사는 진실이라기 보다는 권력자에 의해 진술되어지는 정사에 불과 한게지요.. 엥~~ 역사 못믿어~~
그렇게 듣기는 했는데 안내판에는 피부병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자료에도 그리 되어 있기에 그리 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