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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식지 ;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6-1 |
수 령 ; | 1,100년 |
천년기념물 제30호.
높이 42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14m
가지는 동서로 28.1m, 남북으로 28.4m 정도 퍼져 있다.
나무의 나이를 추정하는 근거는 용문사의 창건연대와 관련하여 산출하고 있다. 용문사는 649년(신라 진덕여왕 3)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은행나무는 절을 세운 다음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 중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로서 조선 세종 때 당상직첩(堂上職牒) 벼슬이 내려졌다 하며, 마을에서는 굉장히 신령시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하였다는 이야기와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 5·16 때에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 *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楊平龍門寺正智國師塔─碑)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에 있는 조선 초기의 승탑과 탑비.
보물 제531호.
건립시기;조선 1398년
승탑의 높이는 2.15m이고, 탑비 몸돌의 높이는 1.10m이며,
너비와 두께는 각각 0.6m와 0.2m이다.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하였던 정지국사 지천(智泉)의 유골을 봉안한 승탑과 그의 행적과 업적 등을 기록한 탑비로, 1398년(태조 7)에 건립되었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오른쪽 산능선에 있으며, 탑비는 승탑에서 80m 정도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
승탑은 문인 조안(祖眼) 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여러 장의 길고 큰 돌로 조립한 탑구(塔區)의 가운데에 서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네모나지만, 윗받침돌과 몸돌은 단면이 8각이어서,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을 계승하였다.
바닥돌은 길고 큰 널돌을 넓게 결구(結構)하여 마련하였는데, 그 위에는 하나의 돌로 조성한 아래받침돌이 놓여 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單葉]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각 모서리마다 1개씩, 각 변에는 5개씩 모두 24개가 새겨져 있다. 윗면의 가운데에는 네모난 2단의 낮고 높직한 굄과 함께 둥글고 낮은 1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마치 북을 엎어 놓은 것처럼 위아래의 너비가 좁고 가운데의 너비는 넓은 모습인데,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부드러운 곡선을 보일 뿐이다. 윗받침돌은 밑면에 3단의 각진 받침이 있고,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16개, 각 면의 좌우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1면에만 문비(가 장식되어 있다.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각진 1단의 굄을 새겼다.
몸돌은 위아래부분에 덮개돌 모양과 굽 모양이 새겨져 있고門扉)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퇴화된 양식이다. 지붕돌은 몸돌 바로 윗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낮은 부연(副椽)이 조각되었으며, 각 모서리마다 각진 서까래를 두었다. 윗면인 낙수면에는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크게 두드러져 표현되었으며, 각 모서리의 전각(轉角)에는 퇴화된 귀꽃무늬가 장식되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완전하지 않아서, 현재는 앙련을 새긴 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탑비는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인 갈석(碣石)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윗부분은 모서리가 양쪽 모두 접힌 모습이고, 글자를 새긴 주위인 위아래와 좌우의 테두리에는 가는 선이 처져 있다. 비명은 당시에 활동하였던 권근(權近)이 지었는데, 몸돌의 앞면에 각 행마다 44자씩 모두 20행으로 새겨져 있다. 비액(碑額)은 소전(小篆)으로, 지름 4㎝ 정도의 크기이며, 비명은 지름 1.5㎝ 안팎의 해서체인 소해(小楷)로 쓰여 있다. 다만, 서형태미(書形態美)로는 소해이지만, 당시 유행하였던 당해(唐楷)의 범주에 속하는 서체이다. 몸돌의 옆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뒷면의 비음(碑陰)에는 당시의 찬조자 명단이 6단 21행으로 적혀 있다.
이 탑비는 바위 위에 있는데, 아래부분의 왼쪽이 약간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깔끔한 필치와 정갈한 구성이 돋보인다.
* *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楊平龍門寺金銅觀音菩薩坐像)
문화재 지정 | 보물 제1790호 |
크기 | 높이 72.5㎝, 무릎너비 43㎝ |
재질 | 금동 |
제작시기 | 고려 후기 |
양평 용문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전형적인 고려 후기 보살상의 모습을 보이며 조형미도 뛰어난 작품이다.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늘씬한 신체, 볼에 살이 있는 방형의 얼굴, 세밀한 머리카락과 높은 상투머리, 화려한 목걸이와 영락장식, 변형 통견식 착의에 승각기와 금구장식 등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머리카락 표현, 변형통견식 착의법, 화려한 영락 장식 등은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1330년), 일본 사가현[佐賀縣]에 있는 장득사(長得寺) 소장 금동보살좌상과 일본 보명사(普明寺) 소장 금동보살좌상, 충청남도 청양 운장암 금동보살좌상 등 고려 후기 보살상에 표현된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兩水里)에 있는 관광명소.
두물머리[兩水里]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한자로는 '兩水里'를 쓰는데, 이곳은 양수리에서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장소를 가리킨다.
예전에는 이곳의 나루터가 남한강 최상류의 물길이 있는 강원도 정선군과 충청북도 단양군, 그리고 물길의 종착지인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를 이어주던 마지막 정착지인 탓에 매우 번창하였다. 그러다가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육로가 신설되자 쇠퇴하기 시작하여,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고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어로행위 및 선박건조가 금지되면서 나루터 기능이 정지되었다.
사유지이지만,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 옛 영화가 얽힌 나루터, 강으로 늘어진 많은 수양버들 등 강가마을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웨딩·영화·광고·드라마 촬영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또 사진동호인들의 최고 인기 촬영장이기도 한데, 특히 겨울 설경과 일몰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이나 되었다.
인근에는 한음이덕형선생묘 및 신도비(경기기념물 89), 이준경선생묘(경기기념물 96), 정창손묘역 석물(경기문화재자료 85), 익원공 김사형묘역(경기문화재자료 107) 등 여러 문화재가 있다. 문호리에는 카페촌이 형성되어 데이트족이나 가족들이 많이 찾고, 금남리 국도변에는 서울종합촬영소가 있다. 서울종합촬영소와 양주골프장 사이에는 복합문화 공간인 두물워크샵이 자리잡고 있는데, 음악회·건축전·미술전·퍼포먼스 등 문화행사가 연중 내내 열린다.
(두산백과)
* * * 정약용 생가와 묘소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 |
분류 | 역사, 문화유적 |
긴 유배 후 돌아와 머문 고향집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져 하나를 이루고 있는 마현마을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자, 전라도 강진에서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머물던 곳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관료였으나, 당파 싸움과 천주교 박해에 의하여 그의 젊은 시절 대부분은 한양에서 수백 리 떨어진 남도 땅, 강진에서 보내게 된다. 18년 유배 생활 동안 그곳에서 학문을 꽃 피우는데, 다산초당에서 주변과 교류하며 쌓은 학문적 업적은 우리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시대를 개혁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담았던 그는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태어나고 자랐던 이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 이곳에는 그가 살았던 집인 여유당, 다산기념관과 문학관, 다산의 무덤이 함께 있다. 1970년대 홍수로 떠내려간 것을 복원한 집이라 옛 맛이 덜해 관람하면서 아쉬운 마음이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안식을 얻은곳임을 기억하며 둘러본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과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수원성을 쌓을 때 그가 발명했던 거중기와 녹로가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산문학관은 다산의 생애와 그의 저술들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곳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산문학관을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다산의 무덤에 올라보자. 작은 봉분의 무덤이 위대한 학자의 무덤이라 부르기에 초라한 듯하지만 한강의 도도한 흐름을 바라보며 역사 속의 큰 인물 앞에서 고개를 숙여본다.
정약용 생가와 묘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정약용[ 丁若鏞 1762.6.16 ~ 1836.2.22. ]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저서는《목민심서》,《경세유표》등이 있다.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承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정약용 연보
1776 |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
1783 | |
1789 |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 탄핵으로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나 지평으로 등용. |
1792 |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수원성 수축 기여. |
1794 |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 |
1799 |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모함을 받아 사직. |
1801 | |
1818 | 《목민심서》 완성. |
2019-7 경기양평 답사 이정표
* 마산 박물관 06;30분 ㅡ 0km
* 양평 용문사 240분 ㅡ 329km 10;30~11;30 (60분)
* 양평읍 식당 30분 ㅡ 18km 12;00~13;00 (60분)
* 두물머리 30분 ㅡ 21km 13;30~14;30 (60분)
* 다산 정약용생가 12분 ㅡ 7km 14;45~15;20 (35분)
* 마산 박물관 240분 ㅡ 329km 19;20~19;30 (도착)
마산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