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박정경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오래된 계절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문득 그리워지는 계절. 내게는 첫사랑이 머물렀던 그 시절이 그렇다.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한 사람이 자꾸 눈에 들어왔고, 그 사람이 있는 날과 없는 날의 빛깔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가 그 사람의 짧은 인사 하나로 특별해졌고, 별다른 의미 없이 건넨 말 한마디가 밤늦도록 마음속을 맴돌았다.
좋아한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마음을 들키는 일이 두려웠고, 들키지 않는 일이 서운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한 걸음 물러섰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사랑보다 망설임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계절을 지나갔다. 봄이면 교정에 꽃이 피었고, 여름이면 햇빛이 창가에 오래 머물렀다. 가을에는 낙엽이 쌓였고, 겨울에는 입김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 모든 풍경 속에 그 사람이 있었지만, 그 시절의 나는 풍경보다 사람을 바라보느라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 멀어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한 다툼이 있었던 것도, 마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순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느 날부터 서로의 하루에서 조금씩 자취가 옅어졌을 뿐이다. 인연이란 때로 그렇게 끝나는 모양이었다. 끝났다는 말조차 없이.
오랫동안 나는 그때 하지 못한 말들을 마음속에 남겨 두었다. 그 말을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한 걸음만 더 다가갔더라면 우리는 다른 시간을 살았을까.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나간 일에는 언제나 여러 갈래의 가능성이 있지만, 삶은 그중 하나만을 선택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짐의 아픔을 견디기도 했다. 사랑이 설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배웠다. 오래 곁에 머무는 일에는 이해와 기다림이 필요했고, 때로는 상대의 마음을 내 뜻대로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첫사랑은 조금 다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만이 아니다. 그 사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나 자신, 사소한 일에도 기뻐하고 작은 눈길 하나에 마음을 졸이던 나 자신이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한 사람이라기보다 그 시절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마음은 서툴렀지만 맑았다.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도,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부터가 욕심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랐고, 그 행복 속에 내가 있기를 바랐다. 그 두 마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가끔 오래된 노래를 듣다가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낯익은 골목을 지날 때도 그렇다. 기억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잊었다고 생각한 이름이 어느 날 마음 한구석에서 되살아나고, 오래전의 햇살이 지금의 창문에 겹쳐진다.
그럴 때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 사람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처럼 지난날을 돌아보는 저녁이 있을까. 그러나 궁금함이 반드시 만남을 바라는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어떤 사람은 다시 만나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 내 삶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하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랑이 한집에 머물고 한 생을 함께해야만 의미를 얻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랑은 짧은 시간 동안 한 사람의 마음을 밝혀 주고, 떠난 뒤에도 그 빛으로 오래 살아간다.
나는 이제 그 시절을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 못한 말도, 닿지 못한 마음도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었던 만큼 사랑했고, 그때의 내가 감당할 수 있었던 만큼 아파했다. 지나간 나를 지금의 잣대로 꾸짖는 일은 그만두어도 좋을 것이다.
저녁이 깊어 간다. 창밖의 나무들은 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하루의 빛은 천천히 사라진다.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오래전의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이제는 그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도, 대답을 기다릴 까닭도 없다.
다만 한때 누군가를 그토록 좋아했던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고맙다. 그 마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월 속에서 모양을 바꾸었을 것이다. 젊은 날의 설렘은 그리움이 되었고, 그리움은 어느새 삶을 이해하는 작은 지혜가 되었다.
첫사랑은 지나갔다. 그러나 그 사랑을 품었던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도 그 시절을 마음속에 조용히 접어 둔다. 오래된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듯이.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 늦은 인사를 건넨다.
온통 붉게 물든 이 가을의 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