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米)
굶주린 백성 생각하며 밤새워 '米(쌀 미)' 쓴 태종
벌써 10년 전 이야기지만 '쌀 시장 전면 개방'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어요. 우리나라가 10년 만에 다시 쌀 시장 개방 여부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는 이전 2005년 WTO(세계무역기구)와 10년간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대신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쌀을 매년 2만t씩 늘리기로 약속했어요. 그 약속 기간이 이제 끝나가기 때문에 당시 9월까지 2015년 부터 쌀 시장을 개방할 것인지를 WTO에 통보해야 했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의무 수입량을 더 늘려 쌀 시장 전면 개방을 미루면 오히려 피해가 커져 이번에 전면 개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일부 농민 단체 등은 전면 개방은 안 된다고 주장했지요.
쌀은 우리 민족과 오랜 역사를 함께 해 온 곡식이에요. 쌀로 지은 밥은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주식이 되었어요. 쌀은 한자로 '米(미)'라고 쓰는데, 우리 조상은 '米'자를 쪼개어 '팔십팔(八十八)'이라는 벼농사 원칙을 만들었대요. '볍씨를 뿌리고 그것이 밥이 되어 사람 입에 들어가기까지 농부의 손을 88번 거쳐야 한다'는 뜻이에요.
'쌀 미' 하면 떠오르는 역사 속 인물도 있어요. 바로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이에요.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넘겨주기 전 일입니다. 나라에 가뭄이 계속되자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백성이 늘고, 쌀 한 됫박 때문에 형제가 싸우다가 죽는 사건까지 벌어졌어요.
가뭄 때문에 괴로워하는 태종에게 또다시 우울한 소식이 전해졌어요. "전하, 어젯밤에 관창(★)에서 쌀을 훔친 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옵니다." "뭣이라?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느냐?" "제삿밥 한 그릇을 마련하려고 쌀을 훔친 것인데, 옥에 갇혀 제사를 지내지 못하자 절망하여 그런 것 같사옵니다." "제삿밥 한 그릇 때문에 아까운 목숨이 사라지다니 안타깝구나. 이 모두가 과인이 부덕한 탓이로다. 그자의 집으로 제사에 쓸 쌀을 보내 위로하도록 하라."
그날 밤 태종은 심한 가뭄으로 백성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자기 탓으로 여겼어요. 자신이 덕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태종은 세자인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에게 양위할 결심을 했다고 해요. 그리고 상선(★)에게 종이와 벼루, 먹과 붓을 가져오도록 하여 글자를 쓰기 시작했어요. '米, 米, 米, 米, 米, 米….' 그날 태종이 쓴 글자는 모두 '쌀 미(米)' 자였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수백 자를 썼다고 해요. 태종은 자신이 쓴 글자들이 모두 쌀이 되어 백성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씨를 쓴 것이에요.
'양위(讓位)'란 무엇인가요?
임금이 살아 있는 동안 후계자에게 왕권을 넘겨주는 행위를 말해요. 조선시대에는 제1대 태조, 제2대 정종, 제3대 태종 등 세 임금이 양위했지요. 제26대 왕 고종도 순종에 양위하였지만, 이는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어요. 왕이 실제로 권력을 넘겨줄 마음이 없으면서 양위하겠다고 선언하여 세자와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양위 파동’이라고 해요. 조선 제14대 왕 선조가 양위 파동을 여러 번 일으킨 대표적인 임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