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 / 김주완
옷깃 여미고 다둑여도
살 속으로 파고드는 추위
칼날 같다
끝부터 비집고 들어오는 비비송곳이
찌릿하게 감전시킨다, 전신을
간 떨리고
이 떨리게 한다
멀리 끌고 와 상처 난 몸
오늘쯤 동사凍死할지 모르겠다
12월-2 / 김주완
늑골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든다
냉기가 번지는 온몸
12월은 외롭다
혼자 가는 먼 길, 어둡고 춥다
끝을 모르면서 끝을
잠시 느낀다
꺼질듯이
흔들리는 촛불 하나 아직은 타고 있다
12월-3 / 김주완
또 한 해를 살았다는 거
기뻐할 일이 아니다
누군가 치워야 할 낙엽 같은
죄업罪業들 군데군데 흩뿌리고 온 것이다
책임지지 못한 사랑의 잔해
천지사방에 흘려 놓고 온 것이다
어지럽게 여기저기 어질러 놓고
또 한 해를 살았다는 거
그저 미안한 일일 뿐이다
12월-4 / 김주완
4막 3장은 나른하다
배우도 피로하고 관객도 시들하다
그래서 반전이 있고 판타지가 있다
정신 번쩍 들게 하거나
몽롱하게 기분 좋게 하는 무엇이 있다
성공하는 연극이 그러하다
그러나, 반전도 환상도 없는 무대
구석을 전전하는 우리는 늘 조연이었다
간혹 가물가물하게 혼곤한
말석의 관객일 때도 있었다
누구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가운데
지루한 연극이 끝날 때를
하염없이 기다릴 때가 있었다
12월-5 / 김주완
여기까지 왔다, 이만큼
준비는 없었다
바쁘게 오느라
아무 것도 정리하지 못했다
뭔가를 꼭 남겨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상 남은 것이 없는 지금에 와서 허전하다
한 치 앞도 모른다
잠시 숨결 고른 뒤, 빈 몸으로
그래서 또 가야만 한다
기약할 수 없는 돋을볕을 그리며
12월-6 / 김주완
매듭달은
매듭, 암팡지게 묶어두고
가야만 한다
숨어서 서러웠던 일들
못내 발설하지 못한 말들
끝끝내 내색하지 않은 마음들
꽁꽁 하나로 묶어
서낭당 금줄처럼
굵은 솔가지에 걸어두고 가야만 한다
이미 내 것이 아닌 것들
모두 짊어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12월-7 / 김주완
낮아질 대로 낮아진 해가 자꾸 짧아진다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돌아서면 새날이 올 것이라
찬란하게 오는 눈부신 새것들에 밀려
슬프게 버려지는 묵은 것들
돌아갈 쉴 곳, 마련되어 있을까
등록이 말소된 폐차처럼
이쯤에서 머물고 싶다, 깊어가는 강물
표정 없는 어둠 아래로
12월-8 / 김주완
내 손 잡고 먼 길 이만큼 온 당신
이제 놓아 드리겠습니다
어쩜, 당신이 먼저 나를 보내는 거지요
함께 한 우리는 여기까지입니다
처음부터 안 일이지만,
작별은 산뜻하지 않고 어수선 하네요
영 개운하지가 않네요
당신은 말없이 남고
나는 황망히 떠나야 하니까요
바로 저기, 또 다른 손이 나를 붙들겠지요
그러나
끌려가다가 문득 버려질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다시 가는 길, 살얼음판 같을 거니까요
12월-9 (인디어의 12월 이름) / 김주완
‘태양이 남쪽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산과 들이 ‘침묵하는’ 사이로
‘늑대가 달리는’ 검은 숲이 늘어서 있다
‘늙은이 손가락’ 같은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소리
‘다른 세상의’ 풍경이다
‘첫 눈발이 땅에 닿는’ 계절
가진 것 모두 버린 ‘무소유의’ 세상이다,
강에는 ‘물고기 어는’ 추위가 와 있다
‘하루 종일 얼어붙는’다
‘작은 정령들의’ 춤이 천지 가득 너울거린다
‘큰 곰의’ 가족들 어슬렁거린다
* 인디언들은 부족별로 900여 개의 다양한 언어가 있으며 달(Month)의 이름도 부족마다 다르다.
12월에 대한 부족별 이름은 다음과 같다. <태양이 북쪽으로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남쪽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달>(주니 족), <침묵하는 달>(크로크 족), <늑대가 달리는 달>(샤이엔 족), <늙은이 손가락 달>(후치놈 족),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수우 족), <다른 세상의 달>(체로키 족), <첫 눈발이 땅에 닿는 달>(동부 체로키 족), <무소유(無所有)의 달>(풍카 족), <물고기 어는 달>(파사마쿼디 족, 후치놈 족), <하루종일 얼어붙는 달>(벨리 마이두 족), <작은 정령들의 달>(아니시나베 족), <큰 곰의 달>(위네바고 족)
12월-10 / 김주완
옷 다 벗고 목욕까지 한 나무
새 날에 입을 새 옷 필요하여
얼어붙은 허공을 깨고
푸른 비단 한 필 잘라낸다
놓을 것 모두 놓아버린 산
새 날에 품을 새 숨결 간직하려고
얼어붙은 발밑으로
잠든 생명들 불처럼 움켜쥔다
흐름을 멈추고 서 버린 강
새 날을 적실 새 생명 지키려고
식어서 굳은 몸 속으로
맑고 고운 물살 품는다
할 일 다 못하고 여기까지 온 사람
새 날에도 꺼내 들 소망 하나 간요하여
절망 덩어리 보얗게 닦아
숯검정 낀 가슴 깊이 담는다
첫댓글 2010년 12월 중순입니다. [12월]이라는 제목의 시 몇 편을 올려 봅니다. 칠사모 회원님들 행복한 연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선배님의 좋은 시를 감상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칠사모 회원님들에게 아름다운 등불이 되어 주십시요.
칠사모의 든든한 지킴이_초롱이 님! 연말 잘 마무리 하시고 대망의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초롱이 님이 있어 칠사모가 행복하고 칠곡군민이 행복합니다.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