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백차가 이런 일까지도 …
112 신고 받고 기름 없어 출동 못 하기도
1965년 10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이 모범 농촌을 시찰하기 위해 경남 김해로 이동 중 돌발 사고가 발생했다. 비상 라이트를 켠 채 맨 앞에서 차량 행렬을 선도하던 현지 경찰차가 균형을 잃고 뒤집혔다(경향신문 1965년 10월 28일 자). 대통령 차량의 안전 운행을 위해 앞장서던 경찰 차량이 오히려 이동에 차질을 빚은 건 경찰의 수치였다.
이때 전복된 경찰차는 군용 지프에 흰 칠을 한 '백차(白車)'였다. 원래 비포장도로용 차량이므로 애초에 경찰차로 최적일 순 없었다. 차량 높이도 승용차보다 높아 전복되기 쉬웠다. 이 사고가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965년 7월 29일에도 범법 혐의자를 태우고 달리던 경찰 백차가 서울 덕수궁 앞에서 전복돼 연행 중이던 여성 1명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지프를 개조한 경찰 백차는 1959년 등장해 1977년까지 사용됐다. 깨끗한 경찰상을 심겠다며 흰 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범인 연행에 주로 쓰다 보니 백차를 보고 '하얀 괴물' 같은 공포감을 느낀 사람도 많았다. 뒷좌석엔 무전기를 싣고 앞뒤로 정복 경찰이 버티고 앉아 질주하던 백차는 경찰의 상징이 됐다. '백차 탔다'하면 '경찰에 붙잡혔다'는 뜻이 됐다.
경찰 백차가 달려온 길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나라 살림 형편이 넉넉지 못하던 시절엔 정비를 제대로 못 했는지 고장도 잦은 편이었다. 1966년엔 흉기에 사람이 찔렸다는 신고를 받고도 백차가 고장 나 경찰이 출동하지 못하는 바람에 범인을 놓쳐 언론의 몰매를 맞았다. 기름 값 때문에 경찰차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건 1974년 오일 쇼크 때다. 그해 2월 휘발유값이 폭등하자 당국은 경찰 차량의 유류 공급량을 절반쯤으로 줄였다. 순찰차 한 대에 하루 5~10L의 기름만 넣어줬다. "연료가 모자란 탓에 하루에 접수된 112 신고 20여건 중에서 중요한 사건 한두 건만 골라서 출동한다"고 경찰이 고충을 털어놓을 지경이 됐다.
경찰 백차는 본연의 업무 이외의 일들도 감당해야 했다. 늦은 밤 취객을 나르는 건 예사였다. 1966년 11월 24일 치안국은 느닷없이 전국 경찰에 "장례 행렬이 교통량 폭주로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경찰 백차가 에스코트하라"고 지시했다. 치안국장은 "인간의 마지막 행로에 장애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또 수학여행 차량이나 관광 시찰 차량도 경찰이 에스코트해 최선의 안내를 하라는 지시도 했다(경향신문 1966년 11월 24일 자). 이 시기가 6대 대통령 선거(1967년 5월 3일)를 160일쯤 앞둔 시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선거용' 아닌가 추측도 된다. 실제로 당시 이 뉴스를 보도한 신문은 '전국 경찰에 선심(善心) 지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경찰 순찰차의 성능은 계속 향상돼 왔다. 이젠 차량 크기도 커지게 됐다. 경찰청은 지난 6일 준중형급 순찰차 2140대를 4~5년 내에 모두 중형급으로 교체키로 했다고 밝혔다. 사고 때의 경찰관 안전을 고려했다니 한발 나아간 선택으로 보인다. 다만 좁은 길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작은 순찰차의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