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재선충]
2021-08-23 11:41:52 게재
애국가에 나오는 '철갑을 두른' 소나무, 십장생 중 하나, '세한도' 등 전통 산수화에 많이 나오는 나무,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고 늘 푸르름을 간직하는 나무 …
우리나라 사람들은 최소한 조선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온 것으로 생각한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산림청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소나무를 꼽았다.
이런 까닭에 도시 공원이나 아파트에도 소나무를 즐겨 심고 자연림에서도 소나무가 우점해야 좋은 숲으로 인식한다. 소나무가 다른 활엽수의 성장세에 눌려 수세가 약해지거나 곤충 등의 영향으로 고사하면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다.
그러나 숲에서 소나무가 우점종을 차지하는 기간은 자연스러운 숲의 천이과정에서 매우 짧다. 이러한 숲의 변화를 이해하면 소나무에 해를 가하는 벌레의 창궐 또한 일시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70년대 소나무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송충이나 1980~1990년대 솔잎혹파리 창궐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전국의 소나무숲을 완전히 없애버릴 것 같았던 소나무재선충도 최근 들어 잦아들고 있다.
재선충을 핑계로 한 싹쓸이벌목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편집자주>
'소나무에이즈' 아니다 …
싹쓸이벌목 이제 그만
소나무숲 쇠퇴는 자연스런 천이과정
항공방제·모두베기 오히려 '역효과'
"홍천군 두촌면에서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는 채 10그루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목상들과 산림조합이 산주들에게 '재선충 감염되면 나무값이 폭락한다'며 벌목을 권했고, 결국 싹쓸이벌목 사태가 벌어졌다."
박성율 원주녹색연합 공동대표의 말이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일대는 대부분 재선충에 감염되지 않은 건강한 숲이었다.
이 일대가 싹쓸이벌목이 된 것은 재선충 우려 때문이었다. 재선충에 감염되면 나무를 팔 수 없으니 그 전에 베어서 나무를 팔아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한 것이다.
소나무에 소나무재선충이 감염되면 일반 병해충과는 달리 회복이 불가능하고 죽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특히 소나무를 우리나라의 상징적 나무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 재선충은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로 여겨진다.
소나무재선충병에 걸리지 않도록 무조건 막아야 하고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가 발생할 경우 주변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언론들도 우리나라 산에서 소나무가 죽으면 숲이 황폐화되고 사라질 것처럼 보도하기 때문에 국민들은 재선충이 번지면 푸른 숲이 다시 민둥산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숲 천이과정 =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은 최근 '소나무림 병해충 방제실태 문제점과 개선방안' 보고서를 내고 지금까지 해온 벌목과 약품방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소나무는 헐벗은 산에 가장 먼저 자라는 대표종이다. 산림 표토가 벗겨지고 유기물이 없는 척박한 흙이 드러나면 소나무는 빠르게 자리를 차지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솔잎에 다량 함유된 항생물질이 이 역할을 하는데, 솔잎이 내뿜는 물질 중 대표적인 게 바로 피톤치드다.
피톤치드를 다량 함유한 솔잎은 매년 바닥에 쌓인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항생물질은 사라지고 토양을 덮은 솔잎이 썩어 토양에 유기물이 풍부해진다. 이렇게 되면 토양에 있는 다른 식물들이 싹을 틔우게 된다.
발아한 수목은 소나무에 둘러싸여 바람이나 추위를 적게 받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유기물과 수분을 기반으로 빠르게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나무숲 바닥에 주로 참나무류가 발아한다.
참나무류는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는 소나무보다 크게 자라기 위해 자신을 보호해주던 소나무를 공격한다. 그 방법은 자신에게는 해가 없으면서 소나무를 죽일 수 있는 곤충을 유인하는 것이다.
숲은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점점 성숙해가는데, 나무들끼리 서로 경쟁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가는 과정이 숲의 발달이다. 이렇게 일정 정도 지나면 숲은 평형상태를 이룬다. 이런 단계를 식물 생태학에서는 극상림(極相林, climax forest)이라고 한다.
◆소나무는 초기 30년 우점종 유지 = 소나무는 숲의 발달과정에서 큰나무 가운데 가장 먼저 출현한다. 그러나 숲속에서 경쟁이 일어날 경우 소나무숲이 유지되는 기간은 매우 짧은 편이다.
숲이 안정화되는 과정에서 소나무는 매우 빠르게 출현하면서 동시에 빠르게 사라지는 종으로 유지기간은 15~20년 정도다. 발아에서 우점종으로의 성장하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30년 전후다.
소나무들은 산림식생이 훼손된 지역에서 한꺼번에 싹을 틔우고 자랐기 때문에 이들이 다른 수목과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현상도 특정 시기에 한꺼번에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소나무에 피해를 주는 곤충이 확산된 시기를 구분해보면 △1970~1980년대에는 소나무 잎을 먹이로 하는 '송충이'(솔나방 유충) △1980~1990년대에는 유충이 솔잎에서 수액을 빨아먹는 '솔잎혹파리' △2000년대부터는 솔수염하늘소를 매개로 하는 '소나무재선충'이 확산됐다.
1960~1970년대 일괄적으로 소나무를 심은 시기를 고려하면 1990년대 초반은 소나무 단순림이 발달한 시기였다. 이때 소나무를 먹이로 삼는 곤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빽빽하게 자라던 소나무숲의 자연적인 개체수 조절이 빠르게 진행됐다.
1990년대 이후 소나무 개체수가 조절되면서 소나무숲 바닥에서 참나무류 및 낙엽활엽수, 남해안 섬 지역에는 일부 상록활엽수가 집중적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이들 낙엽활엽수가 어느 정도 성장한 2000년대 이후 소나무와 활엽수들이 경쟁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생태학의 눈으로 보면 재선충은 2000년대 이후 소나무들이 활엽수와의 종간경쟁에서 도태되는 과정에서 확산 속도가 빨라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재선충 방제작업이 자연스러운 숲의 천이를 방해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크다. 항공방제의 경우 솔수염하늘소만 죽이는 게 아니라 숲속의 모든 곤충을 죽인다. 특히 소나무숲을 대체할 참나무류와 낙엽활엽수들을 모두 잘라내는 싹쓸이벌목은 숲 전체를 황폐화시킨다.
◆"소나무숲 고집할 이유 없어" = 정인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국장은 "재선충 방제작업을 하지 않으면 활엽수가 더 빠르게 성장해 낙엽활엽수림으로 천이가 이루어진다"며 "왕릉이나 금강소나무숲 등 일부지역을 제외하면 차라리 방제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숲의 혜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윤여창 서울대 산림과학부(생태경제학) 교수는 "소나무 재선충은 미국 남부지방에서 일본과 한국으로 전파됐는데,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무역을 통해 부산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며 "1988년 부산 금정산에서 처음 발견된 재선충병이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된 시점은 소나무와 낙엽활엽수의 종간경쟁이 본격화된 시기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윤 교수는 "재선충 방제작업이 항공방제나 모두베기 등 숲 생태계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며 "우리나라 숲의 천이과정에 맞게 소나무숲을 고집하지 말고 참나무류 등 낙엽활엽수를 중심으로 100년숲을 가꾸는 쪽으로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일신문 남준기 기자 namu@naeil.com
사진1 :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일대는 대부분 재선충에 감염되지 않은 건강한 숲이었다. 이 일대가 싹쓸이벌목이 된 것은 재선충 우려 때문이었다. 재선충에 감염되면 나무를 팔 수 없으니 그 전에 베어서 나무를 팔아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했다. /사진 남준기 기자
사진2 : 재선충 방제작업을 하다가 포기한 제주도 서귀포시 도청오름 일대. 방제작업을 하다 포기했지만 기존의 곰솔 군락이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재선충을 이유로 싹쓸이벌목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현장이다. /사진 다음지도 스카이뷰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