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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16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산상강론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인 것을 확인하였다.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 애통하며 사는 것, 온유하게 사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 위로, 땅의 상속, 배부름’이라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자는 것도 아니며, 우리 안에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찾아오심의 회개를 이루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산상강론을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완성하셨고 또한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은혜로 부르신다. 이제 우리는 다섯 번째 복을 통해 그 은혜, 긍휼을 확인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절). 직역하면 ‘복이 있다. 그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왜냐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씀도 표면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먼저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푼 대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식으로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내가 주체가 되어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란 형용사 ‘엘레에몬’은 ‘자비로운, 은혜로운, 동정적인’이라는 뜻이다. 동사 ‘엘레에오’(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에서 유래하였고 명사형은 ‘엘레오스’(긍휼, 자비)이다. 이렇게 형용사로 표현된 것이 신약 성경에서 단 두 번 기록되었는데 이 본문과 히브리서이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엘레에몬)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여기서 “그”란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하나님의 일에 긍휼히 여기시며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죄를 속량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긍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70인역에서 ‘엘레에몬’은 히브리어 ‘하난, 한눈’(호의를 베풀다, 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이나 ‘라함, 라훔’(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롭다), ‘헤세드’(선함, 친절, 은혜, 긍휼)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몇 구절만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참고 느 9:17, 시 111:4 등).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한눈) 자임이니라(출 22:26-27)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들에게서 자비를 입어(라함)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한눈) 자비하신지라(라훔)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대하 30:9)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한눈)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라함)(시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한눈) 긍휼이 많으시며(라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헤세드) 크시도다(시 145:8)
헬라어 ‘엘레에몬, 엘레에오, 엘레오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한눈, 라훔’은 구약에서 인간에게 사용된 단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사용된 단어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속성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으로 언제나 주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언약을 어긴 죄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나 아무렇게나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길 자에게만 긍휼을 베푸신다.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엘레에오)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엘레아오)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엘레에오)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5-18)
이 말씀은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하난)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하난) 긍휼히 여길(라함)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함)”(출 33:19)라는 말씀의 인용이다. 바로도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선택의 방향성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 이름이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긍휼 베푸심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하나님의 긍휼 베푸심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고 살리신 것이다. 아니 긍휼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의 긍휼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긍휼의 현장이 죽음과 부활로 나타내신 십자가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 표현은 수동태로 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엘레오스)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알지 못하여 그저 자기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였다. 자기 의가 앞서 있었기에 제사 속에 담아 놓으신 긍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셔서 죽음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엘레오스)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6)
이것이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어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화목의 관계 안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죄인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앞서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음녀 고멜을 취하는 것을 통해 이미 보여 주셨던 것이다. 자식을 낳아 “이스르엘”(하나님이 씨를 뿌리신다, 호 1:4),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 호 1:6),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 호 1:9)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음란함을 폭로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근거하여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할 것이기에 “암미”, “루하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호 1:10-2:1). 로루하마, 로암미가 우리이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긍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루하마, 로암미를 암미, 루하마가 되게 하신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28-32)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복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는 것이 천국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라고 하였다.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하나님의 긍휼, 즉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그 자체가 심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못하여 관계없는 상태,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상태, 그것이 심판 가운데 있는 것이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으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내가 긍휼을 입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 교회는 없다. 그러나 긍휼의 예수 그리스도만 말하는 교회는 찾기 힘들다. 긍휼의 예수 그리스도만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요 성도에게는 반드시 자신의 죄가 전제되어 죄인 중의 괴수(우두머리)로서 인간의 의가 무너질 때 십자가가 긍휼로 베풀어졌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202405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아멘 귀한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