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일절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해당 사건이나 인물 등을 비하하거나 정치적으로 가치판단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이 RPG는 허구적 창작물로서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처럼 고양이와 같은 민족이다.”
- 존 리드 하지
6. 이승만의 귀환과 전민대항쟁
1945년 10월 11일, 이승만 박사가 조선에 귀국했습니다. 마치 조선국왕과 같은 대접을 해주겠다던 하지 중장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한 이승만은 도착한 직후부터 비공식 일정을 수행하며 미군정의 핵심 인사들과 열일 만남을 이어갔죠.
며칠 앞서 귀국인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임정 계열 지도자들이 이승만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모시려다가 뜨뜻미지근한 거절 의사만을 돌려받았을 무렵, 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미 하원에서 신탁통치 방침을 언급하며 정국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11월 5일에는 전평 발족식 현장에서 조병옥 경무차장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실책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빈센트 발언 직후에 단호히 탁치 반대를 외쳤던 이승만은 좌우익과 중도파를 아우르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 발족을 전격 제안했습니다.
11월 8일 아침, 조선호텔 주연회장에는 당대 주요 정치세력이 총집결했습니다. 이승만과 그의 측근들, 자유민주당의 김성수, 국민당의 송진우와 윤보선, 건준 세력인 안재홍과 박헌영, 김구와 한독당, 김원봉의 민혁당, 조선공산당과 인민당, 천도교청우당까지 모두가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마치 해방 정국의 정치 지형 전체가 한 자리에 농축된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건국을 위해 기존의 모든 임시단체들을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개회사가 끝나기도 전에 김구는 벌떡 일어나 격분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이승만이 26년간 지속된 임정의 정통성을 무시했다고 보았고, 한독당 인사들은 당장 회의장을 떠날 기세였습니다.
이에 여운형은 건준 주요 인사들과 함께 조선호텔의 별실로 이동해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임정에 우호적인 국민당 인사 몇몇을 제외하면, 단파방송 밀청사건 등으로 유명세가 높은 이승만과의 협력 자체를 반대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박헌영마저 노동자 사망 사건의 책임자인 조병옥과 장택상의 경질을 조건으로 이승만과의 협력에 찬동할 정도였죠. 다만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대체 이승만이 미군정과 무얼 어떻게 협의했길래 임정을 자신의 휘하에 두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지는 알아내야 했기에, 허경훈과 신지훈은 미군정 내부의 실질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 정보 접촉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명동의 한 카페에서 전 미군정 정치고문 베닝호프를 만난 두 사람은 미국 내부의 분열된 여론과 하지의 독단을 확인했습니다. 베닝호프는 미국 내에 중국에서의 “용공 정책”에 불만을 품은 강경우익 인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정보와 함께, 하지와 그의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이 조선 전체 혹은 남조선만의 정무기구를 조기 출범시켜 우파 지도자를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구성하려 한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폭로했습니다.
허경훈은 곧장 소련영사관으로 달려가 샤브신 부영사와 접촉했습니다. 소련의 전략은 단순했습니다. 샤브신은 오히려 건준이 반탁 여론을 선도해 우남을 ‘반탁의 얼굴’로 세운 뒤, 좌익이 실질 장악하는 구조를 만들자는 이중전략을 제안했고, 허경훈은 곧장 다시 조선호텔로 달려갔습니다.
그 무렵 회의장에서는 민혁당원 주아문이 발언권을 얻어, 임정의 역사성과 민중의 눈앞에 놓인 현실 사이에서 “함께 논의하자”고 호소했지만, 신익희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에 권가연은 독촉중협을 입법기구 형태로 출범시켜 이승만을 자민당 친일 인사들로부터 이격시키고, 건준이 이승만의 배후세력으로 자리잡는 과감한 전략을 주장하기 시작했죠.
이윽고, 허경훈의 전언을 들은 박헌영과 조공 간부들은 그 ‘과감한 전략’을 더욱 전위적이고 기만적이며 폭발적인 전략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여론공세를 통해 미국 정부와 하지 군정이 조선에 신탁통치를 강요하려 한다고 선전해 조선 민중을 “반민주적 탁치 폭거에 결연히 맞서는 반미투쟁”으로 이끌고, 이승만을 그 반미투쟁단체의 간판으로 옹립하자는 급진적인 안이었죠. 한국국민당원이자 자유주의 우파 인사였던 신지훈 역시 찬탁 같은 걸 하다가 민심을 잃고 조선을 조병옥이나 장택상 같은 자들에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자신이 이전에 들은 윌리엄스 등 미군정 인사들의 망언들까지 아낌없이 공유하며 이 대열에 적극 합류했습니다.
이 결정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허경훈은 「길」 지면에 반미 반탁 논설을 게재했고, 권가연은 선전구호를 조직, 주아문은 반탁시위를 조직하는 데 돌입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정국을 강타했습니다. 경성 시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보도와 신지훈의 학무국 자료 배포, 권가연의 야학 활동 등을 통한 선동으로 가득 찼고, 미군정은 일시적으로 정국 장악력을 상실했습니다. 신지훈이 학무과장에서 사임하자, 소문은 더이상 소문이 아니게 되었죠.
참다못한 김구는 임정 명의로 “국자 1호, 2호”를 발표해 모든 행정권의 임정 이관을 선언하는 사실상 쿠데타를 단행했고, 이에 놀란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건준과 민중조직이 거리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모든 계획이 틀어져 판단력이 흐려진 하지는 경성 한복판에서 무차별 발포라는 선택지를 고르며 자멸의 길로 향했습니다. 사상자 다수가 발생하고 선교사들이 군정을 맹비난하며 일선 장교들이 항명할 조짐이 보이자, 미국 삼부조정위원회는 즉각 하지를 해임하고 아놀드 군정장관의 사직서를 수리해버렸죠.
하지의 자폭은 걷잡을 수 없는 반미 감정을 남조선 전역에 퍼뜨렸습니다. 38선 이남의 민중은 더 이상 미국을 해방군으로 보지 않았고, 그간 반탁의 선봉이자 위임통치 청원의 주창자로 낙인찍혔던 이승만은 친미 이미지를 더는 꺼낼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자 공산당, 인민당, 국민당, 조선민족혁명당, 전평, 청년총동맹, 조선민족청년단 등 좌우를 아우르는 제세력은 이승만을 반미·반탁 투쟁을 위한 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위원장으로 옹립했습니다. 기민한 정치력을 보유한 이승만은 자신의 현재 위치를 냉정하게 파악한 뒤 이를 수락, 반미 구국대오의 선봉에 과감히 서기로 결정했죠..
7. 점령, 제2기
일명 “11월 반탁전민대항쟁”의 여파는 국제 정세에까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소련 외무인민부위원장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모스크바 삼국 외무장관회의를 앞두고 “이번 회의에서는 조선의 신탁통치를 의제로 삼지 않겠다”고 천명했죠. 미국 내에서도 여론은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하지의 행보에 경악한 딘 애치슨 국무차관은 조심스럽게 신탁통치안 철회를 제안했고, 삼부조정위원회에서는 “차라리 조선을 포기하자”는 급진적 목소리마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백악관은 즉시 조선 정책의 재편에 착수했습니다. 하지의 후임 군정사령관으로는 중화민국에서 철수한 앨버트 웨드마이어 대장이 임명되었고, 군정 수반에는 군인이 아닌 민간 인사, 전직 소련군 소장 출신으로 OSS 고문이었던 알렉산더 바민이 ‘행정장관(Administrator-General)’ 자격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바민은 대숙청을 피해 망명한 반스탈린주의자였으나, 동시에 공산당 조직론에 정통한 대공 공작의 실력자이기도 했기에, 조선에 최소한 반미친소정권이 들어서지는 않게끔 하기 위한 소방수 역할을 자처했죠.
항쟁으로 치안 공백이 생긴 틈을 타, 김두한과 조선민주청년단은 민중의 분노를 대신해, 노덕술, 하판락, 김덕기, 김태석 등 해방 이후에도 특고경찰로 은신 중이던 자들을 차례로 습격해 응징했습니다. 공안 질서 재편의 필요성을 절감한 바민은 이를 기회로 활용해 곧장 경무국을 해체하고 ‘공안위원회(Public Safety Commission)’를 출범시켰습니다. 위원장은 항일운동가이자 민전에서 가장 우익에 해당하는 최능진이 맡았고, 조선인 위원으로는 이범석, 최용덕, 권준, 김홍일이 지명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항일전력과 군사 경험을 가진 인물들로, 좌우익 양측에서 거부하기 어려운 인사들이었죠.
한편, 38선 북측에서도 급변이 이어졌습니다. 조만식의 실각 이후 공석이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직에 최용건이 공식 임명되었고, 조선공산당·사회민주당·천도교청우당의 3당 연립체제가 확정되었습니다. 소련은 미국보다 한발 앞서 움직이며 모스크바 회의를 열흘 앞두고 “전조선임시인민대표회의”를 제안, 남북을 모두 포괄하는 과도입법부 창설의 단초를 꺼내들었습니다.
12월 27일,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F. 번즈,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영국 외무상 어니스트 베빈은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의 최종 결정문을 발표했습니다. 결정문 중 세 번째 꼭지인 “조선 문제(The Korean Problem)”는 각종 언론에 즉시 보도되어, 조선 내 언론사들도 일제히 인용보도를 시작했죠. 결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로 조속히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2.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전단계로 조선임시입법의회(Korean Provisional Legislative Assembly)를 설치할 것.
3. 제1항 및 제2항을 실천하기 위한 세부 방침을 논의하기 위해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 북조선 소비에트연맹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의 민주주의적 각계 인사의 의견을 수렴할 것.
4. 제3항의 공동위원회 운영을 위한 예비회담을 3주 내 개최할 것.
신탁통치 운운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임시입법의회”라는 단어가 모든 언론기사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시인민위원회같은 유사조직이 이미 세워진 북조선과 달리 남조선에는 군정당국의 승인을 받은 그 어떤 자치조직도 세워지지 않았기에, 웨드마이어 장군과 바민 행정장관은 (좌익 중심의) 민전과 (한독당 중심의) 비상정치회의를 포괄하는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설치해 행정권 이양 준비기구 겸 전조선과도정부 수립 준비기구로 사용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도쿄 GHQ가 천황까지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일본군을 재건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 안그래도 반미주의가 대세가 되어버린 남조선에서는 미군정의 보조기구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 흔쾌히 수락할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고심끝에, 바민은 OSS 대령 출신의 정보대(G-2) 대장 프레스턴 굿펠로와 정치고문 레너드 버치를 보내 여운형에게 “민주의원에 참여한다면 행정장관직을 이양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고, 차선책으로 고려한 김규식 역시 ”시기상조“라며 미군정의 연락을 피했습니다. 민전 위원장 이승만이 ”몽양은 민주의원 참여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며 공격에 나서고, 실패한 통화-물가정책의 여파로 박살난 경제 탓에 전평과 전농이 총파업-총궐기를 거론하는 상황에서, 또 우익만 끌어안아 하지의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았던 바민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8. 총파업의 함정
1946년 1월, 바민 체제 하의 남조선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초인플레이션, 식량난, 그리고 콜레라 대유행은 행정력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냈고, 11월 전민항쟁의 여파로 공안질서는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민 행정장관은 전임 하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선을 통치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는 조선노동조합총연맹(조선노총)을 통해 신한공사와의 단체협약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혁명으로 정치화된 대중의 분노 앞에서 그 구상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죠.
이러한 정세 속에서 전평과 전농은 총파업과 총궐기를 논의하며 내부 준비에 들어갔고, 민전 내 각 정파는 이에 대한 대응 전략을 두고 극심한 논쟁에 휘말렸습니다. 특히 인민당은 좌우파 간 갈등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온건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며 신중론을 폈지만, 좌파들은 반미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며 강경노선을 고수했습니다.
1월 28일, 청구동의 한 문화주택에서는 주요 좌익 인사들이 비공식 회합을 가졌습니다. 박헌영, 허경훈, 김철수, 권가연, 이여성, 인정식 등은 이 자리에서 “신전술”을 주제로 토론을 벌였습니다. 박헌영은 미군정에는 공세적으로, 국내 우익에게는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이중전술을 제안했고, 이를 기반으로 전평과 전농이 공동 참여하는 총파업-총궐기 추진을 주장했습니다. 당의 주요 이데올로그 이강국의 의견을 받아들인 박헌영은 이 전략이 조선 민중의 혁명적 에너지를 조직화하는 최선의 길이라 강조했죠.
그러나 권가연은 이를 단일노선 강요라 보았습니다. 그녀는 박헌영의 제안이 사실상 조공 중심 통일전선을 위한 장치임을 간파하고, 오히려 다양한 전략이 공존할 수 있는 통일전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녀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도 민중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며, 총파업을 강행하는 대신 미군정에 대한 경제·사회적 압박안을 제시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여성, 인정식 등 인민당 좌파는 처음에는 권가연의 제안에 회의적이었으나, 총파업이 실패할 경우 박헌영이 오히려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권가연의 논리에 점차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조공과의 전략적 균열을 유도하고, 조선노총을 재건하여 협상의 창구로 삼자는 권가연의 안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 무렵, 조공 측의 허경훈은 제24군단의 방첩참모 프레스턴 굿펠로 대령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굿펠로는 총파업을 중단하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하고, 심지어 체포하려고도 시도했으나, 허경훈은 이를 계기로 오히려 미군정의 진의를 간파했습니다. 미군정은 조공의 총파업을 오히려 부추긴 뒤 범좌익 진영의 분열 및 극좌 고립을 유도, 공산당 및 그 동조자들만 골라서 강경진압할 구실을 원하고 있던 것입니다.
허경훈은 조공 중앙에 이 사실을 보고하며, 총파업을 무기화하기보다 평화적 가두시위를 통해 미군정을 압박하자는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채택되었고, “전국노동자농민총집결대회”라는 이름 아래 전국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정됩니다. 시위일은 3월 1일로 정해졌으며, 이는 기미년 운동의 역사적 상징성을 되살리는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허경훈은 총파업-총궐기 노선에서 ‘전략적으로 후퇴’하는 대신 껍데기만 남은 조선노총에 전평 조합원들을 대거 가입시켜 장악하는 방안도 제안해 통과시켰지만, 먼저 선수친 이는 따로 있었습니다.
이범석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의 경제정책 담당자 전진한과 접촉한 권가연은 그를 조선노총 개편 과정의 실질적 협력자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조공-전평보다 먼저 조선노총 개조 작업에 나섰습니다. 3.1 집결대회를 전후하여 조선노총은 협동조합주의 노선의 ‘조선노동생산협동연맹(생협)’으로 재편되었으며, 생협은 좌우 양 진영의 주목을 받는 조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3월 1일,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수십만의 노동자와 농민은 ‘평화적 총궐기’의 형태로 서울, 대구, 전주, 광주 등 주요 도시에서 집결했습니다. 공안위원장 최능진은 진압 불가 방침을 선언했고, 바민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24군단 아이첼버거 중장의 무력진압 주장도 자결하겠다며 날뛰는 최능진의 기세에 눌려 결국 묵살되었습니다.
이 시위는 남조선 정국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조공과 전평·전농이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독기 빠진 파시스트적 협동조합” 생협은 보다 온건한 좌익 혹은 중도파의 목소리를 담는 노동계 대안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굿펠로를 본의아니게 골탕먹인 허경훈이 조공과 민전 내에서 승진하면서도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는 동안의 일이었죠.
공산당-신민당-북조선사민당이 인민민주주의 혁명과도정부를, 인민당이 사회주의적 민족경제의 전민국가 구상을 각각 주장하는 동안, 미군정은 계속해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밀가루 대량배급을 통해 당장의 식량위기는 일단 넘겼지만, 총파업 대신 감행된 대규모 민중시위로 미군정의 정당성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그가 고안했던 민주의원 구상은 주요 세력들의 참여 거부와 조직력 부족으로 사실상 폐기되었으며, 미군정 내부에서도 정책 실패에 대한 피로감이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9. 해산 명령
1946년 3월 10일, 전국노농총집결대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군정은 다시 한 번 무장단체 해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특히 조선국군준비대를 해산 대상으로 명시하며, 희망자는 ‘개인 자격’으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준비대는 전국적으로 6만 명에 달하는 조직 규모와 1만 5천여 명의 훈련 인원을 보유한, 조선 내 최대 규모의 자주적 무장조직 중 하나였습니다.
사태의 중대함을 인식한 준비대 측은 즉시 비상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사령관 박승환과 참모장 이혁기를 비롯해 박창암, 박임항, 이기건, 박정희, 이한림 등 지대장들이 참석했고, 민전 측에서는 박현우와 신지훈이 급히 합류했습니다. 박승환은 “우리는 오히려 미군정으로부터 인민을 지켜왔고, 일방적인 해산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으나, 격렬하게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인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협상력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정희는 태릉 훈련소에서 군정청까지 제식 행진을 벌이며 여론을 환기시키자고 제안했고, 이한림은 반대로 먼저 미군정과 조용한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현실적인 수습책이라 강조했습니다. 각기 다른 노선이 충돌하는 가운데, 젊은 참모장 이혁기가 발언권을 얻어 “우선은 대책부터 차근차근 세워야 한다”며 분위기를 가라앉혔고, 신지훈은 사태의 파급력을 분석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신지훈의 조사에 따르면, 준비대가 전원 유격전으로 돌입할 가능성은 낮았으나, 조직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고 현지 인민위원회와의 연계도 남아 있어 일부가 무장 투쟁으로 전환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해산 조치가 대중을 자극할 여지는 있었지만, 제2의 전민항쟁급 봉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대신, 이 조치가 좌익 전체의 무장력을 현격히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분석도 함께 나왔습니다.
이런 분석에도 불구하고 박승환은 미군정이 정말로 준비대를 강제 해산하려는 것인지 의심했고, 박현우는 미군정 내부의 입장을 파악하기 위해 행정장관 정치고문 레너드 버치 중위를 만났습니다. 버치는 아이첼버거 24군단장이 전형적인 강경파 야전군 출신이며, ‘빨갱이’와 ‘나치’에 대한 혐오감이 강한 인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준비대가 좌익적 색채를 지우지 않는 한, 그는 조직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할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버치는 동시에 “전투를 중시하는 야전 군인이니만큼, 좌익이 아니라면 더 이상 경계할 이유도 없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제시했습니다.
이에 박현우는 임정 계열의 대한건국무관단(무관단) 등 기존 무장조직들을 통합해 균형 잡힌 무장 세력을 형성하거나, 미군정이 준비한 국방경비대에 일정한 집단적 자격으로 편입하는 방안을 고려했습니다. 그는 이 방향을 추진하기 위해 주아문에게 무관단과의 접촉을 제안했고, 주아문은 조선국민혁명군 출신이자 무관단 부관으로 활동 중인 정원상을 접촉했습니다.
정원상은 회의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에서 조선인들을 때려잡는 법이나 배우던 준비대 간부들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죠. 이에 주아문은 “청산도 중요하지만, 보호도 필요하다”며, 지금 조선에 필요한 것은 책임지고 싸울 수 있는 조직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정원상은 국내에 너무 오래 있었던 주아문은 잊었을 수도 있겠지만 조선국민혁명군은 해방된 조선의 국군이며, 무관단은 그 선도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준비대가 전원 무관단에 합류한다면, 개개인의 과거는 묻지 않겠다”는 단일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고심 끝에, 주아문은 정원상의 말이 원론적으로 옳다고 판단, 마음 속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 신지훈은 다른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공안위원장 최능진을 찾아가 준비대를 공안위원회 산하의 경찰조직으로 재편해 무장 충돌 없이 존속시키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최능진은 이에 호응하며, “치안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제안은 바민과 자신 모두에게 합리적일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그는 “아이첼버거가 또다시 군대를 동원하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라”고 조언했습니다. 실제로 아이첼버거는 3.1 집결대회 당시 “머리와 몸통만 피해서 쏘면 된다”고 진압 지침을 내렸고, 이는 최능진이 자결까지 운운하며 가까스로 막아낸 일이었습니다.
이후 내부 전략회의에서 주아문과 신지훈 사이에는 명확한 노선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신지훈은 준비대를 공안위원회 휘하에 두어 정식 경찰조직으로 재편하고, 친일 경찰을 배제하며 법적·제도적으로 합법화하는 것이 최선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아이첼버거에게 조선 땅이 짓밟힐 것”이라며, “자존심보다 생존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맞서 주아문은 “공안위원회 편입은 실질적 해산과 다를 바 없다”고 반박하며, “조직의 자율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보장받는 무관단과의 통합이야말로 준비대를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조선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며, 기존의 무력조직을 허무는 대신 더 강하고 합리적인 연합을 구축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양측 모두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회의는 교착상태에 빠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박현우가 손을 들며 입을 열었습니다. 권가연과 논의한 그는 “무관단에 준비대를 합류시키되, 미군정과의 협상을 통해 장차 국군으로 승격될 예비 조직의 지위를 확보하는 방향이 가장 현실적이고도 타협적인 해법”이라는 중재안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주아문과 박현우는 이 노선을 공동 추진하기로 결정했고, 신지훈은 솔직히 이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충돌을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조선국군준비대는 명목상 해산되고, 대한건국무관단에 통합되었습니다. 무관단은 준비대 출신들 중 만주군계열은 군사참모부에, 조선국민혁명군 출신은 판공실 등 정치협의 기능 부서에 배치하며 통합 질서를 조정했습니다. 통합 조직은 ‘조선국민혁명군 선도귀향대’로 개칭되었으며, 자신들이 연합국과 함께 추축국에 맞서 싸운 교전단체라고 주장하면서 미군정에 일정한 지위 부여를 요구했습니다. 김석원, 채병덕, 이응준 등은 국방경비대를 탈퇴하고 선도귀향대에 합류했으며, 김구는 정식 지휘체계를 따를 것을 조건으로 이를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밤, 검은 군복에 부착물 없는 복장을 한 무장세력이 선도귀향대 본부를 기습했습니다. 콩 볶는 듯한 총성이 터지고, M3 기관단총과 개머리판 없는 카빈이 난사되며 기습은 전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박창암은 즉각 이들이 간도특설대라는 걸 알아차렸고, 주아문은 즉각 조명을 꺼버리고 어둠 속 백병전을 유도해 침입자들을 제압했습니다. 퇴각하면서 건물에 방화를 저지른 이들은 역시 구 간도특설대원으로, 장연청년단 소속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군정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아이첼버거는 “중단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방첩책임자 프레스턴 굿펠로를 호통쳤고, 굿펠로는 자신은 분명 중단 명령을 내렸으며 작전은 통제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결국 간도특설대 출신 간부 두 명은 민가 앞에서 공개 자결하며, 사건은 더욱 격화된 충격을 남겼습니다.
이후 아이첼버거는 사실상 치안 업무에서 손을 떼고 바민에게 전권을 넘겼습니다. 선도귀향대는 공식 군대도, 불법 무장조직도 아닌 ‘향토방위대(Home Defense Force)’라는 모호한 지위로 인정되며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소식은 베이핑의 조선국민혁명군 본부에도 전달되었고, 지청천은 좌우익이 실제로 통합되었다는 소식에 “이만하면 의는 다했다”며 귀국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로콘 당장 박헌영이 가장 온건할 가능성도 고려해봐야(...)
@로콘 선군 경제 찍자는 미치광이도 있을수 있습니다 ㅋㅋㅋ
@dear0904 박철환이겠군요(?)
@차들어 홍차야 아. 당연히 "안된다" 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면, 중간에 GM님께서 전언 주시기 전까지 대응 행동이 매우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신지훈이 없다면 (즉, 행동권을 가진 PC가 부재했다면) 적합한 NPC 들이 우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을거라는 뜻이죠.
@로콘 와우... 동조할 사람도 있으니 더 위험하네요(??)
@렌지파일 ???: 자고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이란 생산수단을 독점한 노동자가 그 누구의 억압적 통제도 없이 자주적, 주체적으로 모든 생산을 관리하는 체제 말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소련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다!
(소련 고스플란 대표단이 듣는 자리에서)
(…)
@E.E.샤츠슈나이더 홍위병도 아니고..
@E.E.샤츠슈나이더 미국하고도 틀어졌는데 소련과도 틀어지면 어디에 붙을거냐.
@E.E.샤츠슈나이더 비우익이나 할법한 행동(!)
@차들어 홍차야 중국에 붙을겁니다(?)
@dear0904 ???: 어차피 중앙통제 집산화나 추진할 거면 장제스는 뭣하러 죽였냐!
(중국 대표단 면전에서)
(…)
@E.E.샤츠슈나이더 아 이제 3편 올라오나요?
@E.E.샤츠슈나이더 이정도면 저 **를 뽑은 사람도 같이 책임지고 사임해야겠네요 ㅋㅋㅋ 아 청명계획 하려다가 죽었죠(?)
@렌지파일 네 오늘중 3편을 올려보겠습니다.
@렌지파일 사로당의 거취에 대한 답이 나와야 하지 않을지...
@렌지파일 오... 3편! 다음 일정! 보상! 직위 변화! ... GM님의 고생길(?)
@dear0904 원래 GM이 굴러야 겜이 재밌는 법입니다. 림월드처럼...
@dear0904 몇년 빠른 중소결렬이 나오겠군요(?)
@dnjdss 옛날옛날에 지들만 살겠다고 다른 국가들의 외교에 깽판치고 다니던 한 조직이 있었는데, 그 조직이 여기에도 있군요 ㅋㅋㅋ
@dear0904 마사다요?
@dnjdss 아, 사로당의 진로는 어느정도 가닥이 잡히셨을까요?
@dear0904 으헉.....! 사로당은 아닙니다(??)
@dnjdss 플레이어로서의 메타발언이지만 권가연-박현우 안이 이상하게 사로당이 조공을 때려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으로 와전되었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엄...... 중도 마르크스주의-사민주의/민사주의 정당자격으로 조국전선에 참여하겠습니다 하실리에님만 괜찮으신다면....
@dnjdss 하실리에는 무슨 축약인가요 ㅋㅋㅋ 저도 조국전선 참여 동의하겠습니다. 아마 박현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동의하겠네요
@하일레 셀라시예 엌ㅋㅋㅋ 사실 닉을 까먹어서 말이죠......
+권가연도 아마 비슷할껍니다
@하일레 셀라시예 경상도 사투리 같네요.
@dnjdss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꼭 외울 필요는 없지만 알아두시면 입에 익을.. 듯?
@하일레 셀라시예 카페 회원 중에 멩기스투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차들어 홍차야 생각해보니 셀라시예 뜻이 삼위일체, 그러니까 트리니티 였으니 트리니티 학교를 세웠으면 진짜 닉값하는 플레이가 됐겠군요(?)
@하일레 셀라시예 저도 엄연한 한 키보토스의 선생입니다.
@하일레 셀라시예 저는 하셀로 줄여서 부르니까 (다른분도 비슷합니다 ㅋㅋ 닉네임 부를 일은 줄었습니다만, 슈나이더님 제외하면 (이젠 GM님이라고 합니다) 렌파님, 홍차님, 하셀님, 로콘님, 디엔님이 되는거죠 ㅋㅋ) 왜 저랬는지 간접적으로 이해가 되더라구요 ㅋㅋ 하셀이라고 불렀는데 공적 상황이라 풀어 말해야 하는데 당황하면 어... 하실리에 줄여서 하셀인가? 하는 상황이 나오는? 그런거죠 ㅋㅋ
+ 그러고보니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도...
3화 올라왔고 차회 이벤트 부서 선택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