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만히 있으면 심심해서 주체를 못한다. 컴퓨터도 하루종일은 못한다. 지겹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버릇 때문에 고생한 것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중1때는 시흥시청 앞에서 버스비로 낼 동전이 떨어지자 한 장 있던 천원짜리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기 위해 무려 8km를 걸어 시화지구까지 간 일도 있는데다가, 얼마 전에는 시흥 월곶포구에서 인천 연수구청까지 무려 10km를 걸어간 일도 있었다(이유는 라면 한그릇에 1500원인 분식집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걸어간 것만 이 정도고, 그 외에 혼자 돈 모아 열차나 버스타고 가 본 것은 셀 수도 없다.
이런 내 ‘방랑’ 중에서도 최악이…. 바로 그저께, 9월 13일의 ‘수인선 답사 방랑’이었다.
수인선…. 우리나라의 유일한 협궤열차…. 시외버스라는 것이 생기기 전만 해도,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은 수인선 꼬마열차는 수원에서 인천가는데 있어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다(물론 실제로는 타 본 적이 없다. 내가 수인선이란걸 처음 알았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때던가, MBC ‘인간시대’에서 수인선의 마지막 운행을 보여줬을때였다.)
인터넷이란걸 접하기 전부터 나는 유독 도로나 철도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그것은 내가 워낙 여행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던 것이 인터넷을 접하고 나서는 더더욱 그런 분야에 관심이 많아졌다. 특히 수인선에 관한 갖가지 사실들 - 예를 들자면 국내 유일의 협궤열차라든지, 사라진 철도라든지, 그 외에 여러 가지…. - 은 평범한 것 보다는 좀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내 심리에도 딱 들어맞았다.
그러던 중에, 얼마전에 어느 철도매니아가 만든 수인선에 관한 홈페이지 하나를 보았다. 그 홈페이지에서는 주로 수인선의 안산 구간을 다루고 있었는데, 그 몇주 전에 소래철교를 건너 옛 소래역 터까지 갔다 와 본 나로써는(위에서 언급한 10km 방랑의 시발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왕이면 안산 외의 구간도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 아쉬움이 원인이 되어, 나는 약 1주일을 벼르고 벼른 끝에(원래는 추석 전 일요일에 시도하려 했으나, 하필 그 일요일에 동아리 회의가 있어서 포기해야했다.) 추석 연휴이자 딱히 할 일도 없고 마침 비도 다 개인 오늘 수원에서 인천까지 폐쇄된 수인선 철로를 따라 걷는 ‘대방랑’을 시도하게 되었다.
#1. ‘대방랑’의 시작.
1호선 전철을 타고 수원역에 내려서부터 고생은 시작되었다. 내가 보유한 지도책의 수원시가지 지도에는 수인선 철로가 표시되어있기는 한데, 문제는 이것이 옛 수인선 철로가 아니라 현재 철도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수인전철의 ‘예정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로써는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가 이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우선 지도책에 표시된대로 태안 방향으로 1번 국도를 따라 쭉 걸어갔다. 걸어가던 도중에 웬 창고 입구같은 것을 발견한 나는 곧 환호를 지를 뻔 했다. 그 ‘창고 입구’처럼 철문으로 막힌 곳이 바로 옛 수인선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지도에 ‘예정선’이라고 표시된 철도는 옛 수인선 철도의 자취와 완전히 일치했다.
‘수인1로’와 ‘수인2로’, 나란히 닦여진 두 골목길 사이의 옛 수인선 철로는 여태 옛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폐쇄된 지 10년도 안되어서, 국유지도 사유지도 아닌 철로 양 옆에는 각종 채소밭들이 한가득 들어서 있었다. 괜히 철도 따라 걸어보려고 밭을 따라 쳐진 울타리를 넘은 나는 곧 엄청난 호박잎들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그리고 이것이 오늘 나의 ‘무한 생고생’의 시작이었다.)
아마 옛날에는 1번국도, 그리고 경부선 철도 위를 가로지르는 철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철교는 모두 철거되었다. 언덕처럼 높은 둑 위에 놓여진 철로를 따라 걷던 나는 곧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국도야 횡단보도를 건너면 되지만, 전철 철로는 그것이 안되기 때문이다(함부로 철로에 들어섰다가는 벌금이 10만원이다. 나같은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런 돈이 어딨냔 말이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은 한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경부선 철로의 담벼락을 따라 쭉 남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얼마 안 가서 철도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지하도를 발견했다.(그런데 문제는 허리를 구부리지 않으면 천장에 헤딩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지하도 저편은 완전 깡촌 그 자체였다. 바로 이것을 두고 지상 철도가 도시를 양분시킨다고 하는 모양이다.
#2. 대체 화성은 언제쯤에….
지금의 화성시에는 단 한개 노선의 철도, 경부선 철도만이 지나간다.
그러나 과거 화성에는 두개의 철도가 지나갔다. 하나는 경부선, 또 하나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수인선이다.
내가 수인선을 따라 걸으면서 보고 싶은 한가지가, 화성 그 시골동네에 철도가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쯤 가야 화성이 나오는 것인가….
철도는 계속해서 언덕을 따라 나 있었다. 문제는 그 철도 위에까지 호박 넝쿨들이 한가뜩 뻗쳐서 호박잎에 철로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날씨는 저 위에서 말한대로 ‘원망스러울 정도로’ 맑았다. 잠시 구름이 몰려오나 싶더니 그나마도 얼마 안 가서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오갈데 없는 언덕 위에서 엄청난 호박잎들의 압박을 뚫고 간신히 평지까지 내려와보니, 이번에는 바로 앞에 경기고속 차고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철로 옆에 있는 고철야적장을 통해 잠시 밖으로 빠져나와보니 S모 전자의 화성총판이라는 곳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여기가 화성인가보다’하고 기쁜 마음에 그 대리점에 들어가서 물을 얻어마시고 있는데…. 대리점장의 전화 통화는 나의 기운을 쫙 빠지게 만들었다.
“여기요? 수원 고색동이요. 네.”
가도가도 보이는 것은 ‘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색동 주민일동, 고색동 재개발위원회’라는 플랜카드들 뿐…. 지도책을 꺼내보니, 의외로 수인선의 수원 구간이 길었다. 고색동을 지나고 오목천동을 거쳐야 드디어 화성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젠 철로를 가득 메운 각종 잡풀과 밭작물들은 신경쓸 거리도 안되었다. 가볍게 밟아주고 나중에 신발과 바지를 좀 털어주면 끝이니까. 그러나 정작 다른 문제거리가 생겼다.
내가 어제 수인선 답사를 포기하게 만든 요인…. 그래, 어제 대량의 비가 쏟아진 것은 비가 그친 오늘에 와서도 나를 골치아프게 만들었다.
바로 수인선 곳곳에 ‘늪’이 만들어 진 것이다….
전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철도의 양 옆이 둑방처럼 높은 곳이 있다.
수인선도 쭉 따라가다 보면 그런 구간을 볼 수 있다. 수인선에서 이런 구간들은 예외없이 ‘다리 밑’을 지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가? 여기는 상당히 지대가 낮은 곳이라서 물과 흙이 한번 들어차면 잘 안빠진다. 그리하여 ‘늪’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목천동 입구에서 처음으로 이런 ‘늪’을 만났다. 그때는 다행히도 급히 그 늪을 빠져나와서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목천동과 화성 봉담읍의 경계 지점에서 벌어진 어떤 사태다.
‘늪’이 형성된 수인선 철로에서 벗어나 한참을 가던 나는 우연히 수인선 철로에 다시 접하게 되었다.
‘하늘이 나에게 다시 수인선을 따라갈 의무를 부여하신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결정을 내린 나는 다시 철로를 따라가다가 이번에야말로 엄청난 ‘늪’에 두 발이 푹 빠져버렸다. 신발이 몽땅 빠져버리고, 천만다행으로 흙 묻지 말라고 미리 걷어두었던 바지는 빠지지 않았다.
우선 흙이 단단한 부근의 언덕으로 올라간 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안에 진흙이 가득 차 있었다. 이래서는 계속 걸을수가 없었다.
갖은 방안이 다 떠올랐다. 추석때 받은 돈이 아직도 거의 온전하게 지갑에 두둑하게 남아있으니 부근 아파트촌 상가의 세탁소에 찾아가서 빨아볼까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그 때 내 좋지도 않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으니, 수인선 철로와 합류하기 직전에 보았던 어느 집이었다. 마당이 널찍한 게 수도가 있을 법 했다. 우선 양말과 신발을 다 벗고 바지를 한껏 걷어올린 나는 그대로 진흙탕 속을 걸었다. 이대로 그 집까지 찾아가서 염치불구하고 수도를 좀 빌릴 생각이었다. 모기떼가 한가득 날아와 내 종아리와 발을 사정없이 물어댔다. 가시돋친 넝쿨들이 발등을 계속 할퀴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찾아간 그 집은 하필이면 추석이라고 친지들이 모두 모여서 한창 놀고 있었다. 얼굴에 철판깔고 수도꼭지를 빌려 발과 양말과 신발을 씻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 집 주인아저씨께서 약주 한잔 하신 말투로 이왕 왔으니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나를 잡아끄셨다. 그 집 어르신들께서 계속 말리셨으니 다행이지, 정말 죄송해서 혼났다.
#3. 드디어 화성땅에….
지금까지 원주에 있는 카페 동생 녀석을 만나러 간 것 빼고는 한번도 누군가와 함께 ‘방랑’을 다닌 적이 없다. 여기에 대해 내 친구 K모양은 언제나 이렇게 묻곤 했다.
-혼자다니면;;;;; 안 심심해;;;?
솔직히 말하자면 심심하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동행자가 있다.
‘이시호’라는…. 17살, 고등학교 1학년 여자애….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서둘러 그 집 어르신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큰길로 나온 나는 곧 수원과 화성의 경계지점을 만났다. 길을 가시던 아주머니께서 여기저기 흙탕물이 튄 내 바지를 보고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냐고 물으셨다. 수인선 철로를 따라 걷던 도중에 늪에 빠졌다고 말씀드리니까, 거긴 지금 사람이 안 다녀서 뱀이 나오는 곳인데 뭣하러 들어갔냐고 하신다. 배, 뱀이라니….
여기서부터는 서서히 다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만 합해도 벌써 5km다. 말이 5km지, 여기에 가파른 언덕 오르내린 것을 고려하면 다른날에 평탄한 길 10km를 걸어다닌 것 이상으로 다리 근육이 고생을 한 셈이다.
그리하여 나는 매송까지 버스를 타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 썩을놈의 버스들이 다들 좌석버스만 지나가는 것이다(내게 1000원이면 도서관에서 두끼를 해결할 수 있는 거금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좌석버스 타고 대부도에 가 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다….
매송에 이르러 나는 고픈 배를 달래기 위해 생라면 한봉지를 사서 부숴먹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눈에 띄는 어르신들마다 붙잡고,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버스와 열차가 충돌했는데 버스는 멀쩡하고 열차는 넘어진’사건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이 없었다.(나중에 집에 와서 안 일이지만,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야목리로, 매송과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이다. 물론 오늘 야목리도 거쳤다.)
매송까지 와서는 더 이상 수인선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가까운 역은 안산의 사리역이었다. 일단 나는 매송에서 사리로 넘어가는 길로 들어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가야 할 길은 이 길이 아니라 좀 더 서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느 아주머니를 붙잡고 길을 물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아주머니의 옆에서 일하시던 아저씨께서 굳이 매송까지 다시 내려가지 않고도 원리를 거쳐 사리 가는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산길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나는 정작 원리가 아닌 야목리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야목리, 이곳이 바로 수인선이 지나가는 길목이자 역이 두개나 있었던 곳이다. 잡초가 무성해서 마치 논둑처럼 변해버린 수인선을 발견한 나는 기뻐서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수인선 철로로 들어선 나는 얼마 안 가서 머리털이 쭈뼛 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정신없이 풀을 헤치며 걷던 내 발 밑에…. 뭔가가 스르륵 지나가는데…. 그랬다…. 아까 수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아주머니 말씀대로…. 뱀이…. 뱀이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필이면 철로 양 옆은 논이라서 빠져나갈수도 없다. 갑자기 언젠가 어떤 선생님 - 아마 문법선생님이었을 것이다. - 이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뱀이나 각종 벌레들에게 물리지 않으려면, 그것들이 놀라지 않도록 멀리서부터 자신이 지나간다는 신호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훠어이~! 훠어이~!”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중에는 그것도 목이 아파서 못하고 손뼉을 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나마도 손이 아파서 더는 못 치고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걸어나갔다(다행히 뱀은커녕 벌에게도 안 쏘였다.)
야목리에 이르러서 내 다리는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젠 발바닥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트럭이라도 한대 얻어타고 싶은데 승용차만 지나가고 트럭은 한대도 안 지나간다.
시호는 이럴때를 위해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극도로 괴로울 때 그나마 누군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가면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 시호도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나처럼 무책임하게 걷기만 해대는 사람과 같이 다녔으니….(물론 어디까지나 가상이지만 말이다…. 시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K모 양은 이 한마디로 이시호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토마스 친구네;;;;”)
#4. 나는 왜 걷고 있을까?
태양이 점점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는가?
내 안의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지금까지 수인선, 저 빌어먹을 것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 앞으로도 저것 때문에 계속 걸을테지,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어!”
다시 그 누군가가 물었다.
수인선,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찾아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인가?
내가 또 대답했다.
“기억하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지. 봐, 이제 폐선된지 겨우 10년 되었는데도 벌써 멀리서는 흔적도 못 찾을 정도가 되었잖아. 나같은 희안한 놈들이 있어서 기억해 주려 하지 않으면…. 더는 추억이란 이름으로도 남아있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우리들도 마찬가지…. 우릴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수십년의 세월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것에 도대체 누가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래, 그러니까, 난 저 보잘것없는 잡초 무성한 철로를 찾아서 이렇게 걷고 있는거야.“
기억한다는 것…. 그래서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역사란 것을 배우는 이유가 아닐까. 수탈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철도, 그리고 민초들의 삶을 고스란히 싣고 달린 꼬마열차…. 철도와 나란히 놓여진 지방도를 따라 걸으면서, 어설픈 사학도인 나는 저 보잘것없는 폐쇄된 철도에 역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보고 있었다.
내가 전에 소래철교 건너 소래포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제는 잡초만 가득한 철로를 따라 쭉 걸어가보니, 갑자기 잡초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멘트와 왕모래로 포장이 된 넓은 터가 하나 나왔다. 한쪽에서는 어느 할머니께서 고추를 말리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느 중년 부부 두 쌍이 도시락을 펼쳐놓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할머니께 이곳이 소래역이었냐고 여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소금창고였고, 내 앞에 보이는 시멘트땅이 바로 소래역 플랫폼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미 역사는 흔적도 없었다. 다만 부근에 ‘역전 상회’니 ‘역전 철물점’이니 하는 간판들이 있어 이곳에 역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 할머니댁이 있는 안성에도 옛날에 열차가 다녔다. 안성선, 역시 지금은 폐선되었다. 지금까지 그 흔적도 한번 본 적이 없다. 1989년에 폐선되었다는데,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통 감을 잡을수가 없다.
야목리에서 어느 할아버지께 여기에 정거장이 있었느냐고 여쭈었다.
“저기 야목리쪽에 야목역이 있었고, 저쪽으로 쭉 가면 빈정이라고 또 역이 있었어. 저기 저 집 짓는곳 있지?”
그러나, 그 두 역 모두 지금 흔적조차 없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거쳐온 선로들 중에서 역이었나보다 하고 짐작할 수 있는 곳들이 전혀 없었다. 서글퍼졌다. 만약, 내가 매일같이 보면서 살아오던 곳이 잡초에 뒤덮여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5. 안산, 새로운 고생의 시작! 그리고 귀환.
가까스로 안산에 들어선 나는 드디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미 해는 완전히 사라지기 일보직전이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잡풀만 가득한 철로를 따라 걷는 것은 힘들다.
아쉽지만 안산 입구에서 방랑을 단념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의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광명시로 돌아오는 방법은 대략 두가지다,
하나는 안산에서 전철을 타고 오는 방법인데…. 시간과 돈 모두 영 맘에 안든다.
또 하나는 안산에서 버스를 타고 시흥까지 가서 다시 11-2번 버스를 타는 것이다. 바로 우리 집 앞에서 내릴 수 있는데다가 전철 타는것에 비해 시간과 비용 모두 만족스럽다.
문제는…. 버스를 타려면 또 한참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내가 있는 곳은 어디까지나 안산의 변두리에 불과했다.).
가끔 시흥에 갈때면 안산 버스를 보곤 했다.
내가 가장 잘 기억하는 놈은 30-2번이었다. 아마 안산 상록구청쪽엘 간다고 하던 것 같았다(실제로는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안산 상록구청쪽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구청이 이렇게 먼지 알 수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구청 가는 길에는 높은 언덕까지 하나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발바닥이 찢어질 지경인데 정말 상투적인 표현으로 ‘죽을맛이었다’.
그러나…. 무려 한시간 걸려 도착한 상록구청 앞에 오는 버스는 겨우 마을버스 하나였다….(돈이 아까워서 시흥 가는 버스를 찾기 전까지는 계속 걸어다녔다.) 안산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면 버스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생각다 못한 나는 일단 한양대 안산캠퍼스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여기에 오는 버스는 수원에서 오는 수원여객 소속 11-1번 버스…. 왜 하필이면 고생의 시발점이었던 수원에서 오는 버스란 말인가….
안산천을 건너 전철역을 향해 기어가던(웬만한 인간들은 이쯤 되면 그냥 아무 버스나 잡아탔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문득 누군가가 생각났다. 우리 카페…. 지금이 7시 40분쯤 되었으니 아마 8시에 하는 정팅을 위해 몇몇 사람들이 인터넷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대전에 사는 ‘라데니조아’, 본명 ‘송명흡’이란 놈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다. 안산에서 월곳 가는 버스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3분 걸려서 찾더니 가르쳐주기를, 안산역에서 33번이란 버스가 있긴 한데 한시간에 한대 온댄다.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어느 정류장에 그냥 털썩 앉았다. 아주머니들께 월곳 가는 버스 있냐고 여쭈었다. 안산역까지 가면 버스가 두 개 있다고 하셨다. 그것도 자주 온다고 하셨다. 아니 도대체 라데니녀석은 뭘 찾아서 가르쳐준 것이란 말인가….
오이도역에서 월곳까지 걸어갈까, 아니면 안산역에서 월곳가는 버스를 갈아탈까를 생각하던 중에(당시 내 체력으로 안산역까지 걸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오이도역 가는 62번 버스가 왔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버스를 탔다. 시내를 지나 안산역을 거쳐 시화지구로 들어섰다. 오이도역에서 내려 아까 버스를 타고 지나왔던 상업지구로 되돌아가(한 400m를 되돌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다리아픈데….) 라면에 공기밥으로 저녁을 먹고 월곳 가는 1번 버스를 탔다.
당시 내 버스카드에는 단 800원이 남아있었다. 광명 버스를 한번 타면 250원이 남는다. 지금 내 다리 상태를 봐서는 일단 월곳까지 한번, 다시 월곳에서 집까지 한번, 두 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카드로는 한번밖에 못탄다. 결국 나는 프롤레타리아적 양심을 잠시 버리기로 했다. 정가 500원 대신에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500원으로 위장해 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시흥 사람들은 카드를 잘 안쓰고 현금을 주로 사용하는지라 나의 위장 전술은 쉽게 먹혀들었다(기사아저씨께는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월곳에서 다시 11-2번으로 갈아탄 나는 앞좌석 등받이를 붙잡고 내내 졸았다. 연휴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길에는 차도 별로 없고, 버스는 아주 날아서 왔다. 집에서 출발할 때가 9시 40분쯤이었건만, 집에 도착하니 11시가 되어버렸다. 내가 오늘 걸은 거리를 계산해보니 무려 25km였다. 기존의 내 기록 10km는 간단히 깨버렸거니와, 언제나 ‘서울시내에서 15km’를 자랑하던 서식지 카페의 S모군도 더 이상은 내 앞에서 방랑 기록을 가지고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양말은 급히 화장실 빨래통에 넣었고, 신발과 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흙이 튄 것에 대해서는 도서관 옆 체육시설에서 물 먹다가 잘못해서 흙탕물이 튀었다고 할 참이었다. 만약 수인선을 따라 걷던 도중에 늪에 빠졌다고 했다가는 난 그날로 외출금지를 당할 것이다….
첫댓글 시베리아의 눈님에게 동료애를 절실히 느낍니다...저는 skyscrapers카페에 도시기행을 연재한다고 1년동안 발품 진짜 많이 팔았죠...^^; 물론 보람은 있었지만 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