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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장
핍박받는 성도를 통한 유대 사라미아 전도: 집사 빌립을 통한 사마리아 지역 전도와 이디오피아 사람 전도(찬송 30장)
2017-4-25, 화
맥락과 의미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 교훈으로 읽어야 합니다. 자유주의자는 성경에 쓰여 있는 기적은 실제 일어난 일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부활, 빌립 집사가 기적을 행한 것(6절), 성령님의 능력으로 갑자기 사라진 것(39절)같이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편, 어떤 사람은 성경을 역사로만 이해하고 현재 주시는 유익이 없는 걸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역사로서 성경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첫째, 삼위 일체 하나님이 과거와 현재에 동일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교회가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를 잇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어느 시대나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교회의 성도는 어느 시대나 하나님과 관계 때문에 “의롭게 된 죄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한 때에 교회에 일어나게 하신 일은 어느 시대에나 주시는 보편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8장은 핍박 때문에 제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성령이 임하는 사건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건을 자세히 전합니다.
1.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 (1-8절)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다 흩어 졌습니다. 사도들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흩어지는 성도들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온 유대 지역,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려 내 증인이 되리라.”(1:8) 이렇게 약속하시고 승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북부 갈릴리에서 시작된 복음은 남부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지역, 중부 사마리아 지역(하나님 신앙과 우상 숭배가 섞여서 예배하는 민족이 삼는 곳)으로 확장됩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에서 복음ㅇ르 전했습니다. 6절, 사마리아 사람들이 일심으로(하나의 마음으로), 무리가 빌립의 말과 표적을 보고 그의 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로 큰 기쁨(8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병 고치고 복음을 전하던 예수님의 일을 사도들이 계속했습니다(2-6장). 이제 집사들도 복음을 전하고(스데반, 6,7장). 기적을 행합니다. 그 때 집사는 그냥 집사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일도 함께 했습니다. 그 때 집사가 하던 일을 다시 지금의 목사, 장로, 집사가 나누어서 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기도할 때 성령님이 신비하게 기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고 같은 삼위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계속 예수님을 새롭게 믿고 구원얻는 사람이 늘어 나고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회개와 치유의 나라에 들어 온 것을 감사합니다. 개인적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감사합시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므로 감사하고 기뻐합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 때문에 기뻐합시다(5:41). 우리의 고난을 통해 복음이 전해질 것을 기대합시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전한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에게 다시 기쁨이 넘치도록 성령님이 일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지금의 육체적 어려움, 여러 어려움은 기도할 때 해결해 주시든지 혹은, 그 고난의 의미를 알고 견디게 하십니다.
2.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 (9-25절)
사마리아에 마술사 시몬이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뭔가 되는 듯이 말했습니다” (9절). 전에 드다라는 사람이 자기가 뭔가 되는 것 처럼 말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모든 것과 비슷합니다(5:36). 사람들은 이 사람을하나님(신, 神)의 능력’으로 불렀습니다(10절)” “ 사실은 그가 행한 마술은 마귀의 기술이었습니다. 그는 사탄의 능력으로 마술을 행했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는 것(12절)을 보고 시몬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표적과 능력을 보고 따라 다닌 위선적인 믿음이었습니다(13절). 복음을 전하는 수단인 표적에 집착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날도 기적이나 돈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것을 하나님 처럼 높이며 찾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4절,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가서 사마리아 교회도 성령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성령님이 방언을 주신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사마리아 교회도 오순절 성령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의 교회임을 표시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특별히 일어나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를 받은 사마리아 성도들도 전도하고 성도를 세울 수 잇는 은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례 받은 후 다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모든 성도는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님을 선물로 받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방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구원하신 일에 대해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목적이므로(고전 14:13-16), 한국 말로 온전히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체험합시다.
그런데 시몬은 아직도 악한 습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19절). 베드로는 책망하며 악함을 회개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22절).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한 것은 돈의 우상에 빠진 것입니다.
21절, 베드로는 관계(메리스)도 없고 분깃(클레로스)도 없다고 했는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들입니다(신12:12). 마술사 시므온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3절, 악독이 가득한 것은 악독 충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과 대조가 됩니다. 그는 사탄이 충만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5:3)와 같습니다. 복음을 들은 백성들이 사도들과 교회에 몰리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충만했던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5:17)같이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에 안에 일어났던 사단의 일함이 사마리아 교회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사단에 흔들리는 교인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너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다.”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받을 심판을 선언해 줍니다. 24절, 시몬은 교회의 권징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에게 기도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완전히 회개했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를 돌아 보게 합니다. 우리도 자기 잘못을 알고 교회의 직분자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과연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매일 회개하고 변화됩시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려는 생각을 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오직 자비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간구합시다. 말씀의 종을 통해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시는 은혜를 감사합시다.
3.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 (26-40절)
주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가사로 내려 가는 길로 가라고 합니다. 감옥에 갇혔던 사도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계속 나아 가라(포루오마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서 (이스테미) 복음을 전하라.” (5:19). 주님의 천자가 이제 집사에게 나타나서 말합니다. “일어나라 (아나-히스테미). 가라(포루오마이)다. 가사로 가는 길까지” 그 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을 만났습니다. 그는 하나님 신앙, 유대교회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 예배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가사라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이디오피아로 갈 것입니다. 그는 ‘큰 권세’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29절,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하십니다. “마차로 가까이 나가라.” 내시는 메시야를 예언한 성경, 이사야 53장 을 읽고 있었습니다. 내시는 말합니다. “지도하는 (길을 안내하는) 가자 없으니, 성경을 읽지만 어찌 깨닫겠습니까?” (31절) 하나님은 교회에 말씀을 가르치고 목자로서 인도하는 직분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는 사지(죽음의 땅)으로 가는 양 같이 끌리었고 털 깍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겸손하여 낮아질 때)에 공변된 판단(정의로운 판결을 받지 않았다.” (32-33절, 이사야 53:7,8)” “여기 나온 그는 누구를 말합니까? 선지자 이사야 자신을 가리킵니까? 다른 사람을 가리킵니까?”
빌립은 대답하여 깨닫게 했습니다(32절). 그 성경 뿐 아니라 다른 구약 성경을 가르칩니다. 메시야 예언은 예수안에 이루어 졌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35절). 예수님이 구약 성경으로 자신의 부활의 복음을 전한 일을 이제 집사=전도자가 합니다(눅 24:43-47), 사도들이 복음 전한 일(행 5:28-32)을 계속합니다.
내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세례 받았습니다. 38,39절 내시가 빌립과 물에 내려갔다가 같이 올라온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을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39절, 주 예수님의 성령님이 빌립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냥 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은 그런 기적적인 일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기적적인 현상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를 보게 합니다. 그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갔습니다. “기쁘게” 그의 길을 갔습니다.
그가 걸어 간 것(포루오 마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세우시기 위해 기도하며 가신 것입니다 (눅 4:2, 7:6) 예루살렘을 향해 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가신 길입니다(눅 9:51-53).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 길입니다(행 5:20,41). 빌립이 간 길입니다(8:36). 예수님을 따라, 사도들을 따라, 집사 빌립을 따라, 이제 이방인 내시가 복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
복음의 길은 기쁨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마리아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내시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병고치는 것과 기적을 경험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아도 이 땅에서는 우리의 몸에는 다시 병도 생깁니다. 그런 기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여기에 우리의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그 당시 이디오피아는 세상의 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세상 끝에서 온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스베반의 순교 가운데서, 지중해의 터키, 그리이스, 로마로 복음을 들고 갈 사울/바울을 준비하셨습니다(1절). “예루살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중인이 되리라.” 그 일이 완전히 이루어 지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나라 한반도에 있는 우리에게도 복음과 함께 기쁨이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이 은혜의 복음을 계속 들읍시다. 그리스도를 계속 잡읍시다. 그 분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의 확신 가운데 살아갑시다. 그 분이 보내 주신 성령님 안에서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오래 참음 그 성령님의 열매 가운데 살아갑시다(갈 5:22,23)
믿고 복종할 일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보내셨습니다. 핍박 때문에 성도들은 흩어져서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디오피아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악도 계속 정화해 가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 온 세계에 복음이 계속 확장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있는 곳에서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고 순종할 때,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과 핍박은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을 확장하고 복음대로 살 수 있도록 연단하기 위해 고난을 주십니다. 인내하며 오늘도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겨 주신 직분을 다합시다.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세우고,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합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나눕시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고 고백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순간 순간 모든 행동이 복음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일하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시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들으십니다.
<참고>
믿고 세례 받음, 성령, 방언
모든 성도는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님을 받지 않을까요? 세례 받은 다음에 성령님을 받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령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모두는 다 성령님을 받습니다. 오신 성령님은 성도를 더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믿도록 은혜를 주신 성령님은 교회/성도를 섬기도록 성령님의 은사를 계속 주십니다. 또 초대 교회에 특별히 방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를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의 연속성과 그리스도의 약속이 이루어 지고 있음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성령의 은사 방언이 예루살렘 교회(2장), 사마리아 교회(8장), 로마인 고넬료(8장), 소아시아=터키의 에베소(19장)에 오십니다. 다 같은 보편적 교회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세계 교회의 하나됨을 확증한 이 시대에는 그런 방언의 필요는 없어 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방언과 같은 은사는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잘라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 교회와 개인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주권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앞에 우리의 말은 항상 겸손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이미 방언이 풍성하던 초대 교회 고린도 교회에 성령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 14:39). 더구나 우리 시대에는 방언을 사모하면서 구할 일은 아닙니다. 예언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예언은 원래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미래에 관한 일도 포합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에 말씀을 풍성히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자기 자랑하듯이 방언을 구하지 맙시다. 그러나 방언을 구하지 않는데도, 성령님이 필요하여 방언을 주시면 감사히 받읍시다. 성도들에게 방언을 주실 때 금하지 맙시다.
방언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고전 14:14-16). 우리가 잘 아는 한국말로 찬양하고, 축복하고 기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다. 알아 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간구하는데 시간을 쓰지 맙시다. 지금 우리도 다른 사람도 듣고 유익이 있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한글을 사랑합시다. 우리 말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런 사람에게 꼭 필요하실 때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도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찬양과 기도를 방언으로 하거나 한국말로 하거나 하나님 앞에서는 같은 가치를 가집니다. 그러나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찬양하는 것 보다 알아 듣는 보통 말로 찬양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다른 성도를 위해서 더 좋은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더 좋은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