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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30일 주일1부 예배-요한복음 7:37-44
(나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말하면 일종의 장막절, 일종의 추수절입니다. 추수절기인데 이 절기는 7일째 계속되는 절기인데, 후기에 올수록 8일째 계속되는 절기, 초막절 행사의 마지막 날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구원의 감격을 항상 극적으로 되새기기 위하여 광야에서 생수를 공급받은 경험을 reacting을 했습니다. 실로암 물가에서 그 안에 물을 채워놓고 실로암에서 사람들이 그 물을 퍼마시는 행사를 함으로써,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크게 공급했던 사실을 celebrating, 기리는 행사를 했습니다. 이날 예수님이 큰 소리를 지른 것을 볼 때 엄청난 인파가 모여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제 칠일 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건 이사야 55장 1절의 거의 축자적인 용어입니다. 이사야 55장 1절은 이사야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하면서, 신적 1인칭을 구사해서 쓴 말입니다. 예수님의 언어적 행태가 보통 예언자들이 겸양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간접화법을 직접화법으로 옮길 때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인용부호를 두면서 일인칭 을 씁니다.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차이는 이런 직접화법을 도입하는 인용부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건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보통 예언자들은 이렇게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기를 믿고 영생을 얻으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발언, 이 발언에 예수님이 감히 접근했는데, 이 발언은 보통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닙니다. 이건 진짜 미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진짜 이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하는 언어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인생의 문제가 누구를 믿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문제가 누굴 믿어서 간단히 해결된다고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지성인들은, 머리가 복잡한 정교한 사고의 사람들은 누구를 믿어서 영생을 얻는다는 도식을 보면 일단 기분이 나빠집니다.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를 믿어서 생수를 받아서 인생의 문제가 다 끝나는 것처럼, 이런 손쉬운 답변 앞에 많은 지성인들이 실족합니다. 그런데 이 발언 자체가 결코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예수님은 성경인용을 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분이고 구약성경을 참조하신 분이고 구약성경을 실현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인용적인 하나님, 성경실현적인 하나님, 성경 의존적인 하나님, 예수님의 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정확하게 이 구절은 없습니다. 성경 어느 구절에서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즉 메시아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라는 말이 없습니다. ‘나를 믿는 자’ 시리아 사람들이 읽었던 타르굼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타르굼 성경에서는 매우 번역적인 성경구절이 많습니다. 번역적 성경구절은 시리아 다마스쿠스 사람들이 쓴 번역성경 이름이 타르굼 성경입니다. 타르굼 성경의 특징은 종말론적인 성경이면서 모든 걸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는 성경입니다. 웬만한 성경구절은 전부 다 그리스도에게 갖다 붙였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갈릴리에서 다마스쿠스까지 40km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갈릴리 지역은 시리아 일대라고 보면 거의 맞습니다. 40km밖에 안 걸리는 다마스쿠스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다메섹까지 올라갑니다. 너무 가까운 거리죠? 타르굼 성경 같은 데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성경구절을 느슨하게 인용해서 하나로 만든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약속한 성경구절은 많은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한 말은 없습니다. 가장 근접한 말이 에스겔 47장 1-13절, 스가랴 8장 14절, 시편 46편 4절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그 성중에 흘러나간 강이 있고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려오는 생명의 강이 아르밧 강에 흘러 모든 사람을 살려낸다, 모든 피조물을 살려낸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 여호와의 성전 동편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그 생명의 강이 성령을 가리킨다고 타르굼 성경은 해석을 했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곳에서,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성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서, 성전 동편에서 생명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뜻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공동체는 생명의 강으로 충만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말이 바로 ‘나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구약성경의 하나님 전폭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완벽하게 구현하신, 화육하신, 성육신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통치권역으로 흡수됩니다. 예수님을 믿자마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믿는 순간 예수님에게 임했던 성령의 감화 감동권역으로 편입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예수님을 강력하게 둘러싸고 있던 영적 자장, 영적 에너지 장이 우리를 흡수 병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성령의 감화 감동권역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이 예수님과 인격적 연대를 하는 순간인데, 여기가 복잡합니다. 누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김홍도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조용기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애매모호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던 영적자기장, 성령의 감화감동권으로 들어갑니다. 성령의 감화감동권으로 들어가면 순종이 너무 쉬워집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준행할 수 있게 만드는 설득의 영이고, 보혜사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힘을 더하시면서 보혜사이십니다. comforter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격려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을 했느냐? 성령의 전폭적 사역의 격려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한걸음 한걸음 생애가 성령에 인도 받고 성령의 권고함과 격려를 충만히 받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능력 안에 들어간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언행, 예수님의 말에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파워가 나왔고 연약한 자를 고치는 치료의 힘이 나왔습니다. 이건 오늘 날 특히 장로교인들은 자기가 이 경지까지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치료가 일어났다고 하는 걸 믿지 않는답니다. 그건 매우 잘못된 겁니다. 순복음교회 교인들이 이 구절을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면 지금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연약한 자가 고쳐지고 귀신들린 자가 깨끗해지는 게 너무 당연한 겁니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생수의 강이라고 할 만한 충만한, 주체할 수 없는 성령의 자기장, 성령의 에너지 장으로 들어가게 돼서 순종이 너무 쉬워지고, 단순히 감미로운 순종만 가능할 뿐만 아니라 능력을 발출하는 일종의 작은 발전소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겁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메신저,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평신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설교자가 숱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만지는 곳마다 치료가 임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 경지까지 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구절의 뜻을 축소 해석해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장로교인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장로교 전통이 매우 이런 부분에서 어리석고 완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가 누구냐? 사도행전 2장 34-38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믿는 자이고, 하나님의 독생성자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절대 복종을 바치신 분이다, 그걸 믿는 사람이 나를 믿는 자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김회권 너의 불순종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네가 믿는 순간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제가 정확하게 이 공식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압니다. 저는 저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몰아갔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힌 손자국은 나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서 못 박는 장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그걸 믿는 순간 성령이 선물로 임했습니다. 보십시오. 김회권 네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네가 배척했던 숱한 말이 그게 바로 십자가다, 우리에게 진리의 권면을 주고 지혜로운 권면을 주는 사람을 배척하죠? 그게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제가 좋은 아티스트가 아닙니다. 제가 그림을 못 그립니다. 그런데 저를 훈련시키는 스승이 저에게 그림이 나쁘니까 더 배우라고 세차게 징계를 했습니다. 내가 그림을 잘 못 그리니까, 이 그림으로는 도저히 화가가 될 수 없으니까 나에게 옳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옳은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옳은 말을 배척하면 나에게 그 말을 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우리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말씀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입니다. 시드기야란 왕이 예레미야 시대 때 예레미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옷을 찢고 말씀을 에스겔처럼 받아 삼켜서 두루마리를 먹고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가위로 잘라서 불에 태웠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김회권 네 인생의 숱한 죄 때문에, 네가 배척했던 나의 선의 나의 호의 나의 모든 선물들, 그게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다, 그런데 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부활시켜 승천하심으로 예수를 죽인 모든 자들을 화해하도록 다시 파송할 것이다, 그 예수를 영접하면 성령의 선물, 화해의 선물이 네게 떨어질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사람이 예수로 믿는 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나, 나는 무엇이죠? 예수님의 착한 마음을 믿는다, 그런 애매모호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특정한 개개인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율법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살렸다는 말은 내 죄의 용서의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내 죄를 우리 하나님께서 심판 당했을 뿐만 아니라 심판당한 예수를 다시 살렸다는 말은 심판당한 김회권의 죄악된 인생을 재생시킬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뜻이죠? 그게 바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회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올라가시지 못하셨다면 회개할 기회는 영원히 없어집니다. 내가 아무리 회개해도 화해할 길은 없습니다. 없어지는 거죠.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는 그 사실을 믿고 뉘우쳐서 마음에 찔려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이 성령이 바로 생수의 강이다, 성령이 생수의 강이라면 성령이 임하면 우리 몸에 생화학적 반응이 분명히 옵니다. 성령의 생화학적 반응은 무엇일까? 성령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동반하는 통전적인 것입니다. 성령은 액체와 물과 같습니다. 성령은 물과 같고 바람과 같다고 했기 때문에, 바람과 물과 유사한 metaphorical, 바람과 물과 유사한 은유적 역사가 우리한테 나타납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떤 생화학적 반응이 오는가? 참 중요합니다. 성령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면, 제가 하나님께 예수님을 믿겠다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이 하나님 편에 승인이 됐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김회권이 예수를 영접했다는 의사표현을 승인할 때, 승인표시가 바로, 약속에 인을 치는 행위가 바로 성령입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에 시민이 되겠다고 사인을 했습니다. 김회권 오늘부터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사인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심사숙고 끝에 내린 제 판단을 보시고, 숙고 숙고를 거듭한 예수 믿기로 한 결단을 보시고 하나님 편에서 약속의 인을 딱 쳐 줍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을 치는 순간 성령이 저에게 임하면서 가장 첫 번째 생화학적 반응,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는 기도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선물로 주어진 사람의 가장 긴급하고도 가장 우선적인 생화학적 반응은 기도입니다.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 이런 겁니다. 넉넉한 소유의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순간, 이건 어마어마한 겁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자마자, 보통 성령을 받으면 미혼처녀들은 애인이 생긴 것과 똑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보통 처녀가 예수 믿으면 남자 생겼냐는 말을 대개 듣게 됩니다. 처음 예수를 믿으면 너무 기뻐서 황홀한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애인이 생겼냐고 대개 묻게 됩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욕정,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를 급격하게 무한간극 만큼 떨어뜨리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들을 같잖게 여기는 과격한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만큼, 저에게 그런 급진성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가난도 두렵지 않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동창생들이 잘 풀리는 데 나는 형편없이 산다? 안 부럽습니다. 전혀 두렵지 않고, 훌륭한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 가서 얼굴 내밀지 않아도 전혀 두렵지 않았고 전혀 소외된다는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내가 어울리지 못해서 억울하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했다는 거대한 확신 때문에, 확신의 파도, 희락의 파도, 소유, 거대한 기이한 상속자가 됐다는 자기존엄성의 비약적 증가가 일어납니다. 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쁨은 세상에 이미 많은 소유물로 자기를 충족시키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을 때는 극한 가난이었습니다. 독재자가 18년 동안 지배를 했고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서 양민을 탱크로 갈아죽이던 시기입니다. 교수들은 아무 핏기도 없었고 이 세상 어디를 봐도 소망이 없는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절박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너무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 20대의 영적갈증에 응답해주실 것을 믿고 계속 성경을 읽었습니다. 아마 집중적으로 성경을 읽은 것은 1979년 5-11월까지 6개월 동안 열심히 읽었습니다. 142번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서울대기숙사, 꽤 멀죠? 그 먼 거리를 다니면서 142번 버스를 타고 이화여대 대현동 37-3번지까지 성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승장 목사님께서 그때 성경을 가르치셨는데, 일주일에 두세 번 그 먼 거리를 다니면서, 그때가 데모하면서 성경 공부하러 다니던 때입니다. 데모와 성경공부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데모하고 성경공부하고, 데모하고 성경공부하고 철야농성가고 또 데모하고, YH농성장 가고, 수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다만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그때 왜 우리는 미국에서 푸에르토리코 시민으로 태어나지 않았는가? 영어를 하지 못한 자기를 저주하면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 때문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6-7개월 동안 intensive한 간절한 추궁 끝에, 6-7개월 정도도 안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을 저는 봤습니다. 넉 달 동안 말씀에 깊이 사로잡혀서 예수 믿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목마른 내 영혼, 갈증이 깊은 사람에게 갈증의 임계점에서 주님이 나타났다는 것은 공통점입니다. 전혀 갈증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타나서 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 갈증이 너무 심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일 안 계신다면, 김항묵이라는 제 친구가 한강에서 자살해버렸습니다. 김항묵 사회학과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실제로 자살을 많이 하던 시대였습니다. 78학번 서울대 음대 학생은 기숙사에 살다가 성대 결절 수술을 잘못돼서 그냥 서울 댐에 가서 물에 풍덩 빠져 죽었습니다. 우리시대는 자살이 많았던 시대입니다. 참 험악한 시대인데, 지금 여러분께서 구차한 목숨 살리려고 시급 4500원 받으면서 패밀리마트에서, 저 같으면 굶으면서 공부하겠습니다. 나는 시급 4500원 받고 20대 한 시간을 빼앗아가는 것, 저는 완전히 미개한 족속이라고 봅니다. 우리 아이들 학생들 보고 그럽니다. 시급 5천원 받고 일하느니 배 굶으면서 공부해서 출세하는 게 낫겠다, 20대 한 시간은 70대 100시간 보다 더 귀한 것이다, 80대 1000시간 보다 20대 한 시간이 더 귀하다, 어떻게 20대의 1시간을 쓰면서 5천원 밖에 안 주냐, 4800원 밖에 안 주냐, 이 악한 놈들아, 이렇게 불러서 하고 싶은데 불러도 오지 않습니다. 20대를 4500원 주고 쓰는 악덕기업주들, 20대의 한 시간은 80대 70대의 천 시간, 만 시간보다 귀한데, 일당 10만원을 줘도 모자란데 우리 20대를 노예처럼 바벨론 포로처럼 써 먹는 놈들은 누구냐? 이렇게 혼내고 싶은데, 혁진 형제 한 번 모아주세요. 제가 혼내겠습니다. 모으는 과정이 힘듭니다. <뉴스앤조이>에 광고 낼까요? 국민일보 광고 내야 해요? 20대 때는 굶으면서 공부할 때다, 토플 1점에 장학금 1천불이다, 토플 1점에 장학금 1천불이면 미국 유학 갈 때 신학대학원 유학 갈 때 마찬가지입니다. IBT 110점 맞은 사람과 IBT 100점 맞은 사람은 장학금이 1년에 3만 불 차이 납니다. 110점 받은 사람은 full scholarship 받고 갑니다. 100점 받은 사람은 엄마 아버지 돈을 갈취해서 돈을 냅니다. 20대 때 공부해야 하는데, 제 말은 갈증이 있는 사람 갈증이 깊은 사람이 intensive하게 4-5개월 또는 6-7개월 동안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말씀 찾고,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내가 한발자국도 인생을 살지 못하겠다는 절박함이 있을 때는 하나님 나라내부에서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리면서 내 인생 전체를 강력하게 도장을 찍어버립니다. 김회권 너는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엄청 비범한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저를 보고 비범하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비범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저는 정말 비범하지 않고 너무 냉소적이었고 비판적인 지식인이었고 완전 소시민이었습니다. 누구의 일에 간섭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이 세상에서 너무 모나지 않고 사는 게 저 소시민의 꿈이었습니다. 아버지께 효도하며 사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님의 은혜가 임하고 성령의 선물로 받으면서 그 배에 생수가 흘러넘침으로 말미암아 내 주변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전도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을 열어 가르치는 순간 전도가 되고 구원이 일어나고 결실이 일어났습니다. 그걸 보고 제가 생수의 강의 생화학적 반응이 이렇게 크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을 영적이라고 보지 않고 영적/물질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성령은 반드시 생화학적 반응, 갈증을 충족시킨다는 표현 외에는 다른 표현이 없을 정도로 내 삶의 불멸한 가치, 이런 삶이야말로 불멸의 삶이겠구나, 이렇게 살면 영원히 죽지 않겠구나, 하는 불멸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사랑은 불멸한 것입니다. 사랑은 indestructible 라고 합니다. 이웃 사랑, 자기 몸을 바쳐서 세상을 살리는 사람,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할 때 우주를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자기의 엄청난 에너지를 써가면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지탱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엄청난 우주를, 엄청난 광대무변한 우주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엄청 애를 쓰고 계십니다. 자기를 소모하시고 자기를 끊임없이 폭발시키십니다. 리처드 스웬슨이란 사람이 쓴 <과학으로 만난 하나님> 이란 책에 보니 태양은 지구로부터 1억 5천만 km 떨어진 수소폭탄입니다. 지구로부터 1억 5천만 km 떨어지니까 수소폭탄이 지금 우리에게 이 정도밖에 영향을 못 미칩니다. 왜 수소폭탄이냐? 핵융합반응, 태양은 이렇게 생깁니다. 핵을 먹고 폭파시키고 폭파시킨 그 쓰레기를 다시 먹고, feedback을 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핵을 융합시키고 폭파시켜서 자기를 소모시키는 끊임없는, 그래서 태양이 하나님 같은 느낌이 듭니다.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사람입니다. 우상숭배자 중에 태양숭배자들은 전부 다 농민들입니다. 우상숭배자 중에서 대지를 숭배하는 것보다는 태양을 숭배하는 게 매우 고상한 우상숭배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제가 볼 때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볼 때, 너희는 왜 나를 숭배하지 않고 태양을 숭배하니? 기분 나쁘다, 라고 생각하시기 보다는 태양을 숭배하는 그 숭배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숭배하는 것을 분명히 봤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만큼 태양이 하나님다운 겁니다. 성령은 영적/물질적인 하나님입니다. 영적/물질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물질인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바람과 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증을 충족시킨다는 말은 살고 싶은 의욕, 하나님 앞에 내 고귀한 인생을 불태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기 때문에 갈증이 충족됩니다. 바람은 무엇입니까? 기쁨에 의해서 고도의 자발성에 의해서 추동되는 삶이 바로 바람에 의한 삶입니다. 신바람이란 말을 하죠? 고도의 자발성에 충동되어 사는 삶이 바로 성령에 가득 찬 삶이죠. 이게 바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삶이죠. 여러분 20대 때는 순결한 때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순결한 때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이를 막을 결정적 죄가 없습니다. 죄라고 해봤자 같잖은 죄입니다. 누구 좀 미워한 죄, 양목사한테 덤볐던 죄, 그런 죄는 죄도 아니죠. 여러분은 실제로 야동 몇 번 봤다고 영혼이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야동 봐도 됩니다. 여러분은 결정적으로 회개를 가로막는 어떤 장애물도 없기 때문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 저편, 하나님 나라 그 내부로부터 문이 열려서 인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셔야 합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인생이 너무 바뀝니다. 저는 지금 너무 바뀌었습니다. 지금 진주고등학교 48회 동기들은 제가 천재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래 천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들과 저를 비교해보면 제가 분명히 천재 같습니다. 48기 대부분 총명이 없어집니다. 술을 다 먹고 엉망이 돼서 머리 다 벗겨지고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해서 다 시들시들합니다. 동창회를 가보면 저만 온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저를 천재라 부르는 게 당연합니다. 성령이 30년 동안 저와 우리 친구들을 갈라놓은 겁니다. 제 친구들은 예비고사 만점 받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총명했던 친구들이 살다가 죄로 말미암아 육신이 다 팽개쳐져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주셔서 아직도 이 세상에 더럽게 물들지 않게 하시고 이 세상과 고투하긴 하지만 이 세상을 창조적으로 거리감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성령, 거룩의 영, 분리의 영을 제게 주셔서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영적 물질적 영이신 생화학적 반응은 고도의 자존감, 끊임없는 아바 아버지의 부르짖음, 이 세상과의 창조적 이격감, 거리감입니다. 성령은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은 성령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 적응하지 않고, 그런데 적응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둬도 적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여러분이 만일 이 약속의 의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지금이라도 신앙을 처음 생각한다는 마음으로, 하나님 요한복음 7장 37-38절의 뜻 그 하나만 제게 젊은 날 깨닫게 해주십시오, 약속되신 말씀처럼 생수의 강이 제 뱃속에서 흘러넘치는 역사, 스가랴 8장 14절과 에스겔 47장 1-13절 말씀이 제게 임하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 물을 부어다가 우물에 부으면서, 이사야 12장 2-3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게 바로 실로암 물가에서 물을 기르던 초막절 행사 이야기거든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샘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성령의 부단한 생수의 공급 없이는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살 수 없습니다. 을지로와 충무로와 가혹한 노동의 세계에서 성령의 충만한 공급 없이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인간스러운 모드로 살 수 없습니다. 짐승모드로는 살 수 있지만 인간성 모드, 하나님과 감미로운 교제를 유지하는 영인 모드, 영적인 사람 모드로 살려면 부단한 성령의 공급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갈증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갈증은 얼마나 좋은지, 우리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갈증, 성령 충만의 가장 역설적인 장면은 갈증을 남겨놓는 충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제게 성령 충만을 줄수록 저는 너무 갈증을 느낍니다. 성령 안에서의 신비인데, 제가 성령을 맛보면 그 다음 성령을 맛보고 싶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제가 밥을 좋아합니다. 밥을 먹고 충만하면 그다음 밥을 먹고 싶지 않죠? 물질적 충만함의 특징은 그다음 한계령을 뚝 떨어뜨리죠? 영적 물질적인 성령 충만은 내가 성령 충만했는데 여전히 갈증이 남아 있어서 그다음 날 또 성령을 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영적 물질적 성령 충만의 특징은 허기를 남겨두는 충만 입니다. 역설적이죠? 결핍을 주는 충만, 그래서 다음날 아침 또 찬송가가 불러집니다. 목마른 내 영혼 주가 이미 허락한 그 귀한 영생수 주여 갈망합니다, 이런 찬송이 일어나는 거거든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 연령대 그 배에서 생수를 공급해주시는 보혜사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인간다움을 유지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게 되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전심으로 찾으시기 바랍니다. '내게로 와서' 너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 간다는 말은 예수님을 이렇게 만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열심히 전심으로 읽는 겁니다. 두 번째는 찬송가를 많이 들으시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기도에 몰두합니다. 네 번째로 신령한 교제권에 몰두하여 내게 영적인 스승 같은 사람들과 감미로운 교제를 일삼으십시오. 그다음 말씀대로 순종하는 순종을 누적시켜 가십시오. 예수님께 간다는 말은 다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께 간다, 첫째 예수님을 이렇게 만든 하나님의 말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몰입하고 갈증을 가지고 호소할 것, 두 번째로 기도에 몰입할 것, 세 번째로 예수님을 찬양하는데 몰입할 것, 그다음 신령한 영적동아리에 가서 친교를 나눌 것, 마지막으로 작은 실천을 누적시켜서 반복적으로 순종해볼 것,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문을 여시면서 인을 쳐주는 신적 소유권의식이 우리에게 생화학적 반응으로 올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영적이면서 물질적인 성령을 받으셔서 구원의 우물물을 날마다 길어 올리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나라가 지금 혈과 육의 축제에 빠져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의 역사에 구원을 주지 못했던 유교질서, 죽은 조상에 대한 숭배가 대기업의 산업전선과 상업계획과 이 나라의 경제부흥을 이끄는 세속적인 정부사회의 담합 때문에 또 몇 천 만 명이 기름을 쓰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축제가 기독교적인 수평 축제, 이웃을 돌보는 이웃사촌들과 춤추는 공동체의 축제로, 기독교적 축제로 질적 전환을 하는 날을 속히 보내주소서. 모든 교회가 요셉처럼 쌀자루를 풀 수 있게 도와주시고, 모든 교회가 동네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리는 축제의 한판을 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죽은 조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교의 추석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연약한 사람을 돌보는 사랑의 축제, 교회가 중심이 되는 예수가 중심이 되는 추석이 되게 도와주소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 한국의 추석이 공자중심의 축제가 아니라 예수 중심의 추석으로 거듭나게 도와주시고, 모든 교회는 요셉처럼 쌀자루를 풀어서 이 땅의 모든 가난한 빈민들을 먹이고 살리고 갈증 있는 사람들을 예수의 생수로 공급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저희는 너무나 부족하고 철들지 않아서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나아가서 영생수 마실 수 있도록 복을 내려 주소서. 아버지 가향에서 비산동으로 창조적 분리를 감당하는 아들딸들 결코 외롭지 않게 하시고, 그곳에서 번성하게 하시고, 성령 충만 받고 와서 약속의 인친 자녀들의 동아리가 되게 도와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풍족히 채워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비산동형제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성장시켜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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