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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발현(聖母發顯) 성지순례(巡禮)<3>
4.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Compostella) 대성당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 / 길 표시 가리비
포르투갈의 중세도시 포르투(Porto)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30분을 달려 스페인에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가톨릭 성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였다.
포르투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주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언제 국경을 지났는지 스페인의 작은 도시 비고(Vigo)를 지나는데 작은 강과 그 주변으로 그림처럼 들어선 조그만 도시의 모습이 환상적이다.
스페인 북부 갈라시아(Galacia) 지방에 있는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 산티아고(Santiago)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평생에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종착점이다. 이곳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에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제일 먼저 순교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별빛 들판의 성 야고보’ 라는 의미로,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고 별빛이 비치는 들판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 야고보 이야기>
성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데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로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데 어머니는 살로메이다. 이들 형제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애제자로, 항상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최측근이었고 예수님이 야고보를 아꼈을 뿐 아니라 야고보도 예수님을 극진히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성질이 불같아서 예수님이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고 한다. 신심이 깊었던 살로메는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묻는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그러자 둘이 동시에 “예, 할 수 있습니다!” 이 맹세를 들은 주님은 예언의 말씀을 하신다.“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이 말씀하신 잔은 바로 죽음의 잔, 고통의 잔,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잔이라는 뜻을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낙담에 빠져있던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라고 하시자 야고보는 즉시 실천에 옮긴다.
당시 땅의 끝은 동쪽은 히말라야, 서쪽은 이베리아반도였다고 한다. 야고보는 두 제자와 함께 수만 리 떨어진 땅끝 이베리아반도(스페인)의 갈라시아 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주후 44년) 야고보는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했으며”(사도 12,2) 이리하여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되는데 이는 어머니 살로메가 간청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예수님의 오른쪽에”,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모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 야고보를 중세 스페인어로 “성 이아고(Saint Iago)”라고 했는데 이 말이 합쳐져서 산티아고(Santiago)가 됐다.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곧 ‘성 야고보’ 이다. 또 일명 산디에고(San Diego)로 표기되기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성 야고보는 제자 둘과 함께 스페인 북부 갈라시아(Galacia)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오며 자신이 죽으면 복음을 전한 이곳 땅 끝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야고보 순교 후 두 제자는 야고보의 시신을 모시고 이곳 갈라시아로 와서 묻으니 곧 오늘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야고보의 무덤이 잊혀져 찾지 못하다가 814년, 은수자(隱修者) 성 펠라지오가 한밤중에 빛나는 이상한 빛을 보고 부근의 동굴 속에서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즉시 성 야고보의 유해를 모시고 이곳 산티아고로 와서 모셨다고 한다. ‘별빛이 비치는 들판을 따라 걸어서....’
그 후 유해를 봉안하기 위한 성당 건축에 착수해 829년 첫 성당 건물이 완공되어 유해를 모셨고, 현재의 건물은 18세기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 야고보의 유해를 모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가는 순례길은 보통 프랑스의 생장(Saint-Jean- Pied-de-Port)에서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Pyrénées) 산맥의 기슭을 따라 걷는 길인데 대략 800km 정도라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25일 정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한 달 반 정도 걸린다고 하며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이 밖에도 여러 갈래의 순례길이 있다. 이곳은 세계 여러 나라의 순례자들이 찾지만 특히 한국의 순례자들이 많아서 우리가 갔을 때도 여러 한국 팀을 만날 수 있었는데 단체로 오는 사람들도 있고 혼자 오는 젊은이들도 있어서 놀라웠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데 우선 웅장한 건물에 놀라게 된다. 본당 건물 앞에는 널찍한 광장이 시원스럽고 부속건물들도 엄청나게 많고 웅장하다. 뒤쪽에도 널찍한 공원도 조성되어있고 건물들 사이로 여유 있는 공간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시내 어느 곳에서나 성당을 향하여 언덕의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길바닥에 놋쇠로 2m 정도 간격으로 가리비모양을 붙여 놓았는데 방사선 모양의 선들이 모이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성당에 도착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천년의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매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온 길로,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위와 같은 가리비껍질 표식이 이어져 있다고 한다. 성당 앞 광장에는 조개껍질과 조롱박을 매단 순례지팡이를 팔고 있다. 이 순례길의 순례자들을 지키기 위하여 12세기에 “산티아고 기사단(Orden de Santiago/일명 성 야고보의 검우회(劍友會)”이 조직되었다고도 한다.
이 기사단은 1160년경 순례자들 보호와 함께 스페인계 이슬람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이었다고 한다.
1174년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7세는 이 기사단의 중앙 수도원이 있는 우클레스 시를 이들에게 주었으며, 1493년, 이 기사단은 약 7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는데 그해 이사벨 여왕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후, 스페인군은 전쟁 때 돌격 함성이....‘¡Santiago y cierra, España!’(산티아고와 함께 돌격, 에스파냐!)
대성당의 입구에는 야고보 성인의 동상이 있는데 모두들 만지고 입을 맞춘다. 대성당은 내부수리를 하는 중이어서 어수선한데 특히 이 성당의 자랑은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라는 이름의 어마어마하게 큰 향로(香爐)를 성당 천정에 매달아 사제 8명이 줄을 당겨서 분향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수리를 하느라 칸막이를 하고 천으로 막아놓아 보이지 않는다. 이 향로를 매단 철로 만든 줄이 두 번 끊어져 큰 사고가 났는데 다행히 사람들 머리위에 떨어지지 않고 옆 창문을 들이받고 떨어졌다고 한다.
성 야고보 유해 참배 / 법석이는 참배객들 / 혼자 순례를 온 청년
다행으로 성 야고보의 유해는 참배할 수 있었는데 본당 제단 밑 지하에 모셔져 있는데 너무나 작고 소박해서 서글픈 느낌이 들었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는데 눈물이 난다.
이곳에서 혼자 순례길을 걸어온 전북대 출신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회사 입사시험에 합격하고 짬을 내서 25일 동안 걸어 오늘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너무 대견해서 격려의 말을 건네고 순례 내내 들고 왔다는 태극기 귀퉁이에 격려의 글도 써 주었다. 맨 마지막에 “73세 세계배낭여행가 白忠基Augustino..”그런데 이 녀석, 말은 안했지만 태극기의 깃대를 반대쪽에 매었다!! 멍청한 녀석... ㅎ
이곳에서 2박을 했는데 다른 곳은 가지 않고 이곳을 두 번 와서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그늘에 앉아 쉬다가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 둘을 만났는데 45일 동안 걸어서 도착했다고 한다. 헐~<2019>
4. <스페인> 고도(古都) 세비야(Sevilla)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 히랄다 탑 / 탑 정상의 히랄다 풍향계
세비야 대성당(Catedral de Sevilla)은 1248년 카스티야왕국의 페르난도 3세가 세비야를 탈환한 후 가톨릭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슬람 사원을 개조하여 1401년부터 가톨릭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의 이슬람 사원보다 몇 배나 크게 짓는 바람에 100여 년이나 흐른 뒤인 1519년에야 완공되었다고 하며 개축보다는 신축 건물이 많아 옛 이슬람 사원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성당의 외부는 고딕(Gothic) 양식으로, 내부는 르네상스(Renaissance) 양식과 바로크(Baroque)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크며 세비야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히랄다탑(Torre de la Giralda)은 높이가 105m나 되며, 정상에는 높이가 3.5m나 되는 거대한 풍향계가 있는데 이 종탑은 원래는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Azan)을 낭송하던 미나레트(Minaret)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상의 돔(Dome)을 떼어내고 종루(鐘樓)를 설치하여 28개의 종과 가톨릭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다고 하며, 1568년에야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탑의 이름 ‘히랄다(Giralda)’는 풍향계를 뜻하는 스페인어라고 한다.
이슬람 사원이었을 때 이 종루 꼭대기까지 이슬람 술탄들이 말을 타고 편하게 오를 수 있도록 계단으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빙빙 돌면서 올라가도록 설계 했는데 지금도 그대로이다.
이 세비야 대성당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San Pietro Basilica), 런던의 성 바울 대성당(St. Paul's Cathedral)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라고 하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입장권을 사면서 다른 성당이나 비슷하겠지 하고 들어갔는데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선 들어가는 입구의 조그만 마당에 첨탑 꼭대기의 여인이 바람개비를 잡고 있는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리고 입장하고 보니 미사를 드리는 공간이 아니고 박물관인데... 전시된 미술품, 조각들이 엄청나게 크고 화려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내부에는 그림은 물론, 조각품, 목조 조각 등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플라테레스크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모두 수천점이나 될 것 같은 소장품들은 모두 황금색이라 흡사 황금궁전에 들어온 느낌이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으로 제작한, 네 사람이 들고 있는 콜럼버스의 관이다.
콜럼버스의 관 / 인증 샷 / 소장품
세비야성당 박물관에 들어서면 화려한 가지가지 장식품들과 성물(聖物)들로 눈이 어지러운데 그 가운데 특히 사람들 이목(耳目)을 끄는 것이 왕관을 쓴 네 사람이 콜럼버스의 관을 어깨에 메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 콜럼버스의 관(棺)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어 조금 덧붙여 이야기해 본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배 세 척과 선원들, 그리고 식량을 지원받은 콜럼버스는 금과 진주, 그리고 향료가 무진장이라는 인도(India)를 향해 대 항해를 시작하는데 그가 탔던 배가 산타마리아(Santa Maria) 호다. 당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 지동설이 처음으로 제기되고 지구는 둥글다는 이론이 나오자 모두들 반신반의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지구는 평평하고, 땅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멀리 나가면 폭포처럼 공중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서 근해에서만 고기를 잡거나 항해를 하고 먼 바다는 두려워서 나가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중국에서는 커다란 지각판(地殼板)을 네 마리의 거북이 받치고 있는데 이따금 거북이들이 꿈틀거리면 지진이 일어난다는... ㅎㅎ
당시 모험가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사막을 지나고 산맥을 넘어 무작정 갔더니... 인도라는 나라가 나타났는데 밀림 속에 황금으로 된 도시가 있고 코가 긴 코끼리라는 짐승이 있고, 사막근처 바위 밑에 샘물이 있어 목이 말라 마시려고 했더니 냄새가 나서 마실 수 없었다.
낙타도 못 마셨는데 불을 붙이니 불이 붙었다(원유)....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들 거짓말쟁이, 허풍쟁이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코를 손처럼 사용하는 동물이라구? 샘물에 불이 붙다니.. 말 같지도 않은 말을... ㅎㅎ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니까 동쪽으로 가지 말고 서쪽 바다(대서양)로 배로가면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돈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나에게 배를 대어 달라. 나는 서쪽 바다로 인도를 가겠다. 인도는 황금도시도 있고 진주와 향료가 무진장이라고 하니 한 번만 다녀오면 그 몇 배로 갚아 주겠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콜럼버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모두들 정신 이상자로 취급했다.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스페인 여왕 이사벨을 찾아가서 배를 대어줄 것을 요청하는데 이사벨 여왕은 자신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까지 처분하여 콜럼버스에게 배를 세척 대어주고 계약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산타페 협약(Santa Fe Capitulations)이며, 이른바 벤처 투자였던 셈이다.
산타페 협약은 무슬림 국가인 그라나다가 함락된 몇 개월 후인 1492년 4월에 체결하는데 협약의 내용은 콜럼버스 자신에게 작위를 부여하고 앞으로 발견되는 지역의 대제독과 식민지 총독으로 인정하며 이러한 직위들은 그의 자손들에게 영구히 상속되고, 그 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귀금속의 10분의 1을 콜럼버스가 소유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산타페 협약 체결모습의 동상이 그라나다(Granada) 대 성당 앞 광장인 ‘이사벨 라 까톨리카 광장(Plaza Isabel la Catorica)’ 가운데 우뚝 세워져있다.
항해를 떠나 70일 만에 미국대륙 앞 바하마 제도의 작은 섬에 첫 발을 디딘 콜럼버스 일행은 그곳이 인도인 줄 알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도사람이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인디오(Indio)라 불렀는데 영어로 하면 인디언(Indian)이다.
콜럼버스가 첫 발을 디딘 곳은 바하마제도의 쿠바 북쪽에 있는 작은 섬인 구아나아니(Guanahani) 섬이었는데 이름을 ‘구세주’라는 뜻의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미국 앞의 바하마제도를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라 부르고, 미국 원주민을 인도사람들이라는 뜻의 인디언(Indian), 중남미 원주민을 같은 의미의 스페인어 인디오(Indio)로 부른다. 그리고 동양의 진짜 인도(印度/India)는 ‘동인도(東印度)’라고... ㅎ
콜럼버스 / 첫 항해 성공 / 무자비한 금은보화 착취
첫 항해를 성공하고 돌아오자 엄청난 환영을 얻었지만 그 이후 항해에서 금과 향신료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자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콜럼버스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모양이다.
그는 그 후로도 세 차례 더 신대륙을 다녀왔지만 세 번째 항해에서 총독 지위는 물론이고 그동안 신세계에서 얻었던 모든 재산을 잃고 죄인 취급을 받으며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그가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며칠 후 자신을 가장 믿고 지지해 주었던 이사벨 여왕이 죽었고, 콜럼버스도 2년 뒤 바야돌리드에서 숨을 거뒀는데 스페인에 서운한 감정을 가졌던 그는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스페인 땅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결국 자신이 발견한 쿠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러나 스페인은 훗날 그들에게 엄청난 부와 영광을 가져다 준 콜럼버스를 기리기 위하여 콜럼버스의 시신을 스페인으로 모셔오는데 그의 유언을 거스를 수 없어 땅에 묻지 못하고 세비야 성당에 모시면서 지금처럼 공중에 붕~ 떠 있게 설계하고 스페인의 네 명의 왕이 관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설계하여 최고의 존경을 나타냈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은 작은 왕국 4개가 있었는데 콜럼버스 항해를 찬성했던 왕들은 관 앞을 들고 있는, 머리를 꼿꼿이 세운 왕들이고 반대했던 왕들은 뒤에 머리를 푹 숙이고 들고 있는 왕으로 조각했다.
콜럼버스 사후, 멕시코에서 아즈텍(Aztec) 제국을 무너뜨린 코르테스(Hernán Cortés), 남미에서 잉카(Inca) 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Gonzalo Pizarro)로 대변되는 스페인의 정복자, 탐험가들의 활약으로 스페인은 엄청난 부를 쌓게 된다. 이처럼 탐험가들이 발 벗고 모험에 나서게 된 직접적인 발단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황금도시 엘도라도(El Dorado)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엘도라도(El Dorado)는 콜롬비아의 산간오지 어디가 아닌가하는 추측으로 수많은 탐험가들이 찾아 나섰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전설 속의 엘도라도는 도시의 모든 건물이 황금으로 되어있으며 길바닥도 황금으로 깔았다고 알려졌다. 또 축제 때가 되면 제사장들은 벌거벗은 온 몸에 금가루를 칠하고 황금 마스크를 쓰고 제사를 지낸 후 신전 앞 호수에 들어가 금가루를 씻어내는데 축제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가지가지 금붙이를 가지고 왔다가 제물로 호수에 던진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황금도시로 꿈의 도시요, 이상향이었다.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볼리바르 광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황금박물관(Museo del Oro)이 있는데 이 박물관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수많은 황금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어 그 엄청난 양과 아름다운 세공기술(細工技術)을 보면 정말 이곳 어디쯤에 엘도라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추측컨대 정복자들이 멕시코, 콜롬비아를 비롯한 중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을 약탈해 유럽으로 가지고 가자 사람들이 어떻게 이 많은 금붙이와 보석을 구했는지 묻자 차마 약탈했다는 말은 못하고 엘도라도(El Dorado)라는 황금도시가 있는데 황금이 무진장이라 그냥 주워올 정도 어쩌구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멕시코에 있던 아즈텍(Aztec) 제국을 무너뜨린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즈(Cortes)는 아즈텍의 마지막 왕이었던 쿠아우테목(Cuauhtemok)을 인질로 삼고 그의 방에 황금을 가득 채우면 왕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즈텍 사람들은 황금을 가지고와서 왕이 있던 방을 가득 채우고 석방할 것을 탄원하지만 결국 왕을 죽여 버리고 마는 만행을 저지른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남미의 콜롬비아(Colombia)는 탐험가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을 지었다.
콜롬비아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은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가 세계 살인율 1위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니...
또, 콜럼버스(1451~1506)가 조금 서운할 일은 그가 발견한 신대륙의 이름을 첫 번째 탐험가였던 자신의 이름을 따지 않고 후배 탐험가였던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1454~1512)의 이름에서 따서 아메리카(America)라고 하였으니 억울한 일이겠다.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콜럼버스는 인도(India)인줄 알았고 후에 신대륙(New World)이라고 부르다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냉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America)라고 하였다. 나쁜 놈...<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