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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세속의 법[속수법(俗數法)]과 가장 공한 법[제일의공법(第一義空法)]으로 구별하였다. [번야 경전에서는 이를 각각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라 하였다.] 이 둘을 간략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세속의 법은 인연의 법으로서,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에 관한 법이다. 가장 공한 법은 열반의 법으로서, 모든 인연이 끊어져고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진 법이다. 이 둘은 불법의 두 측면을 이루는 것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연의 법에 공한 법이 있고 공한 법에 인연법이 있다. 이 둘은 하나인 듯 하면서도 다른 것이다.불경을 읽을 때는 이 두 가지 측면의 법 가운데 어느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인지를 구별해서 이해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 말씀을 읽을 때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자칫하면 잘못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1. <제일의공경>과 이 글의 구성
1.1. 경의 내용과 구성
인연법과 가장 공한 법을 설한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하는가?
모든 비구들아,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하고 마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이 음(陰)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다만 세속의 수법(數法)은 제외된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겠으나,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세속의 수법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으며, …… (이 사이의 자세히 말은 앞에서와 같다.) ……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고 일어나느니라.
또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며, …… (이 사이의 자세히 말은 앞에서와 같다.) ……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나니,
비구들아, 이것을 제일의공법경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이 경에서 ‘이것’과 ‘저것’은 12인연법의 구성요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경의 구성을 보면, 첫 번째 단락에서 가장 공한 법을 설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에서 세속의 법인 12인연법에 대하여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생겨나고 없어지는지를 설한다.
1.2. 이 글의 구성
이 글에서는 경의 내용의 순서를 조금 바꾸어 논의하기로 한다.
먼저 세속의 법[인연법]을 논의하고, 그 다음에 가장 공한 법을 논의하며, 마지막에 12인연법을 논의한다. 경에서 보면 공에 대한 논의의 끝에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로 했는데, 이 말은 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속의 법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인연법에 대해서는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생겨나고 없어지는지를 살피는데, 아함경의 인연법에 관한 경들을 참고하여 인연법이 관찰자의 몸과 마음에 의존한다는 것을 논의한다.
공에 대해서는 아함경에서 공을 설한 경들을 참고하여 공의 성품을 살피고, 궁극에는 인연법도 공하다는 것을 논의한다.
그리고 12인연법에 대해서는 12인연법이 중생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과 그 세상에서 중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의 총체임을 논의하고, 앞서 살핀 인연법과 공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마지막으로 수행의 최종 단계인 무상정등각에서 본 인연법과 공의 위상을 논의한다.
2. 인연법
2.1. 인연법의 근본: 명제와 상호 의존성
인연법은 다음의 네 가지 명제로 이루어진다. (잡아함경_335.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앞의 두 명제는 ‘있음과 없음’[유무]에 관한 것이고,
뒤의 두 명제는 ‘생겨남과 없어짐’[생멸]에 관한 것이다.
이것과 저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아함경에서 중생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5음과 12입처와 18계이다. (아함경의 세계관(1)를 참고하세요.) 그리고 이것들과 관련하여 생겨나는 12인연법의 구성요소들이다. 따라서 세계는 인연법에 의하여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다. (<잡아함경_53. 바라문경>)
이것과 저것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은 상호의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저것의 인이 되며, 저것은 이것의 인이 된다.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함께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 없이는 저것도 없고, 저것 없이는 이것도 없다.”
(연기법, 세 개의 갈대의 비유를 참고하세요)
이러한 인연법은 세계의 어떤 사물이나 일이 있고 없음과 생겨나고 사라짐이 일어나는 것을 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2.2. 인연의 발생 근거: 관찰자와 인식
인연은 무엇에 의존하여 일어나는가?
<잡아함경_238. 인연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눈이 빛깔을 인연하여 눈의 인식이 생기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눈의 인식이 생겼다면, 그 일체는 눈이 빛깔과 인연이 되었기 때문이니라.
귀는 소리를 인연하고, 코는 냄새를 인연하며, 혀는 맛을 인연하고, 몸은 감촉을 인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뜻[마음]이 법을 인연하여 의식이 생기나니, 왜냐 하면 모든 의식, 그 일체는 다 뜻이 법을 인연하여 생기기 때문이니라.
이것을 비구들아, 눈의 인식은 인연으로 생기고 ………… 나아가 의식도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아함경에서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은 6내입처라 하고(잡아함경_323. 육내입처경),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은 6외입처(잡아함경_324. 육외입처경)라 한다. 6외입처의 ‘빛깔’은 눈으로 보는 빛깔과 모양 등의 물질의 속성이다. [‘빛깔’은 환유적 표현이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과 마음의 인식[의식]은 6인식(잡아함경_325. 육식신경)이라 한다. 6내입처와 6외입처를 묶어 12입처라 하고, 12입처에 6입처를 묶어 18계라 한다. 그리고 6내입처와 6외입처와 6인식이 화합한 것을 6접촉(잡아함경_213. 법경, 잡아함경_326. 육촉신경)이라 한다.
위 경의 서술에서, 6내입처는 인식의 주체이고 6외입처는 인식의 대상이다. 곧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객체를 인연하여 인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은 서로서로 인이 되고 연이 된다. 곧 인식의 주체가 있으므로 인식의 대상이 있고, 또 인식의 대상이 있으므로 인식의 주체가 있는 것이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눈이 먼저인가 빛깔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5음의 ‘빛깔’은 12입처에서 마음과 법을 제외한 10색입처를 가리키는데, 다섯 가지 감각 기관으로 인식하는 물질의 총체적 속성을 가리킨다. [‘빛깔’은 환유적 표현이다.] 그리고 ‘느낌, 생각, 의도’는 6접촉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6느낌, 6생각, 6의도’이며, ‘인식’은 18계의 ‘6인식’이다. (잡아함경_61. 분별경(分別經)①)
여기서 인식의 주체는 바로 관찰자의 몸과 마음이다. 물론 어떤 관찰자의 몸과 마음은 다른 관찰자에 의하면 인식의 대상이 된다. 이 글에서 ‘몸과 마음’이라 할 때의 ‘마음’은 아함경의 지각 기관[6내입처]의 마음[manas, 意]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글에서 사용한 ‘인식’은 6식의 식(識, vijñāna)에 대응하는 것인데, 간략히 말하면 ‘분별하여 안다’는 뜻이다.
아함경에서 ‘관찰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잡아함경_1. 무상경(無常經)> 등은 6내입처와 6외입처, 18계, 5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비아/무아임을’을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관찰자는 지각 기능이 있는 모든 유정물[중생]이다. 관찰자가 없으면 인연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연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의 상태는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혼돈(카오스)이라 할 수 있다. 관찰자가 없으면 그 세계의 모습과 성질을 전혀 알 수 없고, 또 그 세계의 모습과 성질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은 관찰자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물들과 일들인 ‘이것과 저것’이라는 분별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식되는가는 기본적으로 관찰자에 의존한다.
이에 대하여 대강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관찰자의 종이 다르면 이것과 저것이 달리 인식된다.
서로 다른 종들은 생존의 방식, 몸의 모양과 크기, 수명, 지각 기관 등이 다르다. 예컨대 새와 물고기와 길짐승, 개미의 몸과 인간의 몸, 하루살이의 수명과 인간의 수명, 박쥐의 지각능력과 개의 지각능력과 인간의 지각능력 등에서 다르다. 그러한 차이로 말미암아 다른 종들은 사물들을 구별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종이라면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므로 많은 점에시 유사한 방식으로 분별한다. 그렇지만 또 자연의 환경적 요인이나 사회적 개인적 요인 등의 여러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여러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마음과 몸의 성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몸의 성질은 지리적 환경, 성별, 나이 등과 색맹 등의 건강 상태 등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마음의 성질은 인식의 능력ㆍ느낌ㆍ생각ㆍ의도 등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평정한 마음과 탐욕ㆍ어리석음ㆍ성냄이 있는 마음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다.
(<잘못된 소견을 생각하다(2): 세계의 형성>을 참고하시오.)
간추려 말한다면, 인연법은 기본적으로 관찰자의 몸과 마음에 의존하며, 어떤 사물이나 있음과 없음, 생겨남과 없어짐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진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관찰자에 관한 것이다. 관찰자는 인연법에 따라 그 관찰자에 대응하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관찰자도 세계의 일부로서 인연법에 의존하여 존재하며, 인연이 끊어지면 당연히 관찰자도 사라지게 된다.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그런 관찰자는 없다.
그리고 관찰자는 바로 ‘나’이다. <잡아함경_18. 비피경(非彼經)>의 ‘나’의 용법을 보면 말할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잡아함경_1. 무상경(無常經)>의 “빛깔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라는 말을 고려하면, 말할이 자신인 ‘나’는 바로 관찰하는 주체[관찰자]일을 알 수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관찰자인 ‘나’는 세계를 관팔자는 자인 동시에, 내가 관찰하는 세계의 일부이기도 한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관찰자가 세계를 관찰할 때 관찰자인 ‘나’는 세계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인식한 대상과 세게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한 대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본래부터 어떤 이름과 성질을 가진 사물이 존재하고, 우리는 눈과 귀ㆍ코 ㆍ혀ㆍ몸ㆍ마음으로 그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컨대 오랜 관습으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임시로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우리가 인식한 대상은 우리의 관찰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가 인식한 결과물이다. 곧 대상의 결정은 관찰자의 인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찰자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사물들을 달리 분별하여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관찰자가 달라지면 인식된 대상들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관찰된 대상이 달라지면 또한 그 대상들로 구성되는 세계가 달라진다. (아함경의 세계관(2)를 참고하세요.)
우리는 보통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컨대 같은 장소에 있는 개미와 코끼리를 생각해 보자. 그것들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같은 장소나 같은 세계로 보이는 것도 인간이 보는 세계에서 보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 세계에 한정하여 보더라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은 동일한 성질을 가진 관찰자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인간들은 차이가 나는 다양한 관찰자들로 나누어진다. 물론 개미에 견준다면 그러한 인간 관찰자들 사이의 차아는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 세계에 한정해 본다면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차이를 세계관의 차이라고 말하지만, 관점의 차이라기보다는 세계 그 자체의 차이다. 곧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단지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에서 제각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함경에서 관찰자인 중생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계가 달라지게 하는 것은 ‘업’이다. 업은 5음의 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업에 대해서는 업과 과보에 관한 경들을 참고하세요.)
2.3. 생멸과 유무의 양상 및 관찰자의 현재
이제 관찰자가 생겨남과 없어짐, 있음과 없음의 모습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피기로 한다.
생겨남과 없어짐은 어떤 것들이 모이고 흩어짐으로 일어난다. 예컨대 산은 땅이 한데 모여 생긴 것이며, 한데 모인 땅이 흩어지면 산은 없어진다. 물, 얼음, 꽃 등의 다른 것들도 다 그러하다. 나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그러하다.
그런데 모이는 것과 흩어지는 것은 한꺼번에 보면 하나의 일의 다른 측면이다. 곧 이쪽으로 보면 모이는 것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흩어지는 일이다. 여기로 모인다는 것은 다른 곳에 모여 있던 것들이 흩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흩어지는 것이 없으면 모이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모이는 것이 없으면 흩어지는 것도 없다.
생기는 것과 없어지는 것도 한꺼번에 보면 하나의 일을 다른 두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무엇어 생긴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없어진다는 것을 전졔한다. 또 무엇이 없어진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생긴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생기고 없어지는 것들은 항상 모이고 흩어지는 양상에 따라 서로서로 얽혀 있으며,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
여기서 유의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겨나는 매 순간에 존재할 때의 ‘순간’에 관한 것이다. 이 순간은 단지 ‘아주 짧은 동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의 ‘현재’를 말한다. 관찰자의 현재는 아주 짧은 동안을 가리킬 수도 있고, 상당히 또는 아주 긴 시간일 수도 있다. 긴 시간의 현재는 아주 짧은 동안의 연속 또는 집합으로 구성되는데, 관찰자의 기억에 의하여 그것들의 동일성이 확보된다. 그리고 어떤 관찰자의 기억은 동일한 현상을 관찰한 많은 관찰자들의 기억을 통합하고 확인함으로써 그것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상황에 따라 기억에는 기억들이 저장된 모든 기록들을 포함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생겨남과 없어짐이 ‘동시에 함께’ 일이난다는 것은 생겨남과 없어짐이라는 둘이 일어나는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겨남이나 없어짐이라는 일 자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 생기거나 없어지는 과정의 어떤 한 순간에 그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이 있다’라고 인식하거나 또는 ‘무엇이 없다’라고 인식한다. 곧 어떤 것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그것을 연속적으로 보면 생기거나 없어진다고 하고, 어느 한 순간에서 보면 있거나 없다고 한다.
이렇게 있음과 없음을 생겨남과 없어짐의 과정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있음과 없음은 생겨남과 없어짐의 과정에서 어느 한 순간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컨대 생겨남의 과정을 ‘처음-중간-끝’의 모습으로 보면, 처음의 순간에도 무엇이 있고, 중간의 순간에도 무엇이 잇고, 끝의 순간에도 무엇이 있다. 그 세 순간에는 각각 세 가지 다른 무엇이 생겨나고 무엇이 있는 것이다. 사실 생겨남의 매 순간마다 무엇이 생기나고 무엇이 있는 것이다.
이 무엇이 있음은 ‘생겨남의 과정 속에서 잠시 지속되는 상태’를 뜻한다. [여기시 ‘잠시’는 앞에서 말한 관찰자의 ‘현재’의 시간 동안을 뜻한다.]
없어짐의 과정은 생겨남의 과정과 비교할 때 모임과 흩어짐의 순서가 거꾸로된 과정이다. 생겨남의 과정이 일어나면 없어짐의 과정이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 따라서 없어짐의 모든 과정에서 보이는 무엇이 없이지고 무엇이 없는 모습은 생겨남의 과정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무엇의 없음은 ‘없어짐의 과정 속에서 잠시 지속되는 상태’를 뜻한다.
우리는 이렇게 무엇이 생겨남과 없어짐, 있음과 없음을 분별하여 인식하고는 ‘무엇’에 이름을 붙여 말한다. 생겨남과 없어짐의 서술에서 산과 물, 얼음, 꽃 등의 예를 들었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하기 이전에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 있음들을 분별하여 인식하고 그것들에 산과 물, 얼음, 꽃 등의 이름을 붙이고는, 그것들에 대하여 있음과 없음, 생겨남과 없어짐을 말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2.4. 생겨남/없어짐의 세 가지 양상, 슌환론적 해석
이제 생겨남과 없어짐에서 ‘이것’과 ‘저것’의 관계에 대하여 좀더 상세히 살피기로 한다.
법의 구성요소들 사이에는 ‘인과 관계’와 ‘의존 관계’라는 두 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이 관계의 본질은 순서의 유무에 있다. 인과 관계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간적 선후가 분명한 순서가 있는 관계이며, 의존 관계는 서로를 조건 지으며 성립하는 순서가 없는 관계이다.
인과 관계는 이것과 저것이 순차적으로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곧 이것과 저것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차례로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는 빗물과 웅덩이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빗물과 웅덩이가 생기고 없어지는 것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어야 한다. 빗물이 생겨나고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웅덩이가 생겨나고, 빗물이 없어지고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웅덩이도 없어진다.
이 경우에는 빗물과 웅덩이의 순서를 바꿀 수 없다. 곧 이것과 저것을 바꾸면 진리값에 변화가 생긴다.
의존 관계는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함께 생겨나고 없어지는 경우이다. 곧 이것과 저것이 시간적으로 동시에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는 산과 골짜기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산이 생겨나면 골짜기도 동시에 함께 생겨나고, 산이 없어지면 동시에 함께 골짜기도 없어진다.
이 경우에는 산과 골짜기의 순서를 바꾸어도 마찬가지이다. 곧 이것도 저것을 바꾸어도 진리값에는 변화가 없다.
그런데 이 경우들과는 또 다른 경우가 있는데, 복합적 순환 관계이다. 이에 대한 예로는 열매와 나무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열매가 생겨난다고 해서 나무가 동시에 함께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열매가 생겨나고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무가 생겨난다. 그리고 열매가 없어지면 나무도 없어진다. 이러한 것은 빗물과 웅덩이의 경우와 같다.
그런데 열매와 나무의 괸계에서 (시간을 고려히자 앓고) 순서만 고려한다면, 산과 골짜기의 경우와 같다. 곧 열매가 생겨나면 나무도 생겨나고, 나무가 생겨나면 열매도 생겨난다. 또 열매가 없어지면 나무도 없어지고 나무가 없어지면 열매도 없어진다.
따라서 열매와 나무의 관계는는 순환적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로서 인과성과 상호 의존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 세 경우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열매와 나무는 순환적으로 존재하는 두 사물이다. 그런데 빗물과 웅덩이나 산과 골짜기는 만일 그것들에 한정하여 본다면 복합적 순환 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빗물과 웅덩이나 산과 골짜기도 그것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바라본다면, 지각 변동이나 물의 순환의 일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컨대 빗물에 대응하는 웅덩이는 빗물과 함께 순환적으로 작동하는 존재들, 곧 강물과 바다, 호수 등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강물과 바다, 호수 등이 있기 때문에 빗물이 생겨나고 없어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웅덩이도 그러한 순환 속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산에 대응하는 골짜기는 산과 함께 순환적으로 작옹하는 평원과 작은 언덕 등과 함께 순환에 참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빗물과 웅덩이의 관계나 산과 골짜기의 관계도 열매와 나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더 큰 순환 고리(Cycle)의 한 부분이 드러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순환에 참여하는 요소들이 모두 다 꼭 필요한 필연적 요소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나머지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요소가 상호 필연적이라면, 웅덩이가 없어지면 빗물도 없어진다.] 그리고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러한 순환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4장에서 서술하는 12인연법의 구성요소들의 순서도 이와 같이 모든 요소의 필연적 상호 의존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2.5. 생멸의 연쇄성과 관찰자의 한계
어떤 한 사물이나 일의 생겨남/없어짐은 다른 사물이나 일의 생겨남/없어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산이 생겨나면 골짜기도 함께 생겨나고, 산이 없어지면 골짜기도 함께 없어진다. 또 산이 없어지면 다른 곳에서 다른 산이나 또다른 어떤 것이 생겨나며, 산이 있던 자리에도 평원이나 또다른 어떤 것이 생긴다. 또 골짜기에 물이 모이면 호수가 생기고, 물이 골짜기에 모이면서 다른 곳에 있던 물이 흩어져 없어지고, 그곳에 또다른 것이 생긴다. 그러한 과정에서 갖가지 생물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온갖 일들이 생긴다.
이와 같이 사물이나 일들이 생겨남과 없어짐은 서로 얽혀 있으며,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나 일들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양상은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과정에서 무엇이 있음과 없음이 수없이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인식하지는 못하며, 다만 어느 정도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들을 선택적으로 인식할 뿐이다. 우리는 보통 생겨남의 시작점과 끝점의 모습을 보고서 무엇이 생겨남과 무엇이 있음을 인식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시작점도 끝점도 없다. 중간 지점도 없다. 매 순간이 시작점이자 끝점이고 중간 지점이다. 시작점과 끝점과 중간 지점은 관찰자가 그렇게 보는 것일 뿐이다.]
사실 이렇게 무엇이 생겨나는 과정에 대한 인식의 한계 외에도, 우리가 생겨남과 없어짐, 있음과 없음을 보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있다. 우리는 보통 산이 생겨나는 과정을 볼 수 없다. 우리의 눈으로는 보통 물과 얼음, 꽃이 생겨나는 과정도 보기 어렵다.
이렇게 우리가 현실에서 실제로 보는 데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관찰자의 생활 환경, 지각 기관, 몸의 모양과 크기, 수명 등이 보는 것에 영향을 준다.
몸의 조건이 동일한 관찰자인 경우레도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보는 데에 영향을 준다.
시간에 대한 인식:
생겨나고 없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거나 너무 쩗으면 그것을 보기 어렵다. 인간이 보기에는 산이 생겨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너무 길고, 꽃이나 얼음이 생겨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너무 짧다. 그런데 집이나 김치가 생겨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인간이 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공간에 대한 인식:
어떤 사물이 너무 크도 보기 어렵고 너무 작아도 보기 어렵다. 너무 멀리 있어도 보기 어렵고 너무 가까이 있어도 보기 어렵다. 인간이 보기에 적정한 크기와 적정한 거리에 있는 사물이라야 충분히 잘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은 관찰자의 몸과 관련하여 주어진 조건이다. 곧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인식은 몸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만일 몸이 없다면 시간과 공간을 재는 척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은 마음이다. (<잡아함경_214. 이법경(二法經)> 참조.) 여기서 ‘마음’은 정신 작용의 총체인 마음[citta, 心]을 가리키며. 지각 기관[6내입처]의 마음[manas, 意]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2.6. 결론: 가능세계와 인연법에 의해 형성되는 세계
간추리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그러한 관계는 관찰자의 몸과 마음, 인식의 작용에 의존하여 성립한다. 곧 일체는 인연법에 의하여 결정된다. [일체는 마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체유심조 비판, 아함경에 비추어 보다>을 참고하세요.]
따라서 특정한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그 중생들의 인식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드러난 세계이다. 중생의 인식이 달라지면 형성되는 세계의 모습 또한 달라지므로, 세계는 갖가지 인식의 층위들이 서로 겹쳐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 무수한 가능세계 가운데 자신의 연기적 조건에 의해 포착된 하나의 세계일 뿐이다.중생들은 그들과 동시에 그리고 함께 생겨난 각자의 세계에서 살면서, 동시에 다른 중생들의 세계들과 접촉하고 공유하며 저마다의 업에 따른 삶을 이어간다.
3. 가장 공한 법
3.1. 초기 경전과 ‘공’의 속성
고타마 붓다께서는 잡아함경의 첫 번째 경인 <1. 무상경(無常經)>을 비롯한 많은 경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세계[5음과 18계 등]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니라고 바르게 관찰하라.’
여기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인연법의 속성이고, 공하고 ’나‘가 아닌 것은 가장 공한 법의 속성이다. 그리고 바르게 관찰하는 것은 중도에 바탕을 둔 바른 수행이다.
가장 공한 법은 바른 수행으로 성취되는 높은 경지의 상태이다.
가장 공한 법에 대한 서술은 인연법과 대비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공법에 관한 아래의 서술에서 유의할 것이 있다. 공법도 인연법[임시로 붙인 이름]의 언어로 서술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눈이 생겨나고 없어짐을 안다. 그런데 눈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은 인연법에 따른 것이다.
눈은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가장 공한 법에서 보면, 눈은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눈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도 그러하고, 또한 빛깔ㆍ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도 그러하다. 나아가 인연법으로 이루어진 모든 법이 다 그러하다.
<잡아함경_265. 포말경(泡沫經)>에서는 5음은 물거품ㆍ아지랑이ㆍ파초나부ㆍ허깨비 같은 것이며,
“자세히 관찰하고 분별할 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단단한 것도 없고, 알맹이도 없으며, 견고함도 없다. 그것은 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가시와 같고 살기와 같으며,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공한 것이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공’은 ‘아무 것도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음을 관찰하는 관찰자인 ‘나’도 세계의 일부이므로 ‘나’도 있을 수 없다. [‘관찰자=나’에 대한 것은 앞의 논의(2.2)를 참고하세요.] 그리고 ‘나’가 없으니 ‘짓는 이’도 있을 수 없다.
<잡아함경_297. 대공법경(大空法經)>에서는 공한 법에서는 짓는 이가 없음을 설하고 있다.
또 <중아함경_191. 대공경(大空經)>에서는 바깥의 공ㆍ안의 공ㆍ안픾의 공을 성취하고 선정을 행하는 것과, 5욕ㆍ3독ㆍ5음 등을 생각하지 않는 바른 앎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중아함경_190. 소공경(小空經)>에서는 공을 성취하는 법을 설하고 있다. 이 경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아난아, 너는 그 때 내 말을 진실로 잘 알고 잘 받아 가졌다. 왜냐 하면 나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공을 많이 수행하였다.
아난아, 이 녹자모 강당은 텅 비어 코끼리ㆍ말ㆍ소ㆍ염소ㆍ재물ㆍ미곡ㆍ종들이 없다. 비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오직 비구들뿐이다.
아난아, 만일 이 가운데 그것이 없다면 그 때문에 나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마을에 대한 생각[村想]을 하지 말고, 사람에 대한 생각[人想]을 생각하지 말며, 오로지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無事想]만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마을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사람에 대한 생각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할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만은 비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혹 어떤 피로는 마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혹 어떤 피로는 사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피로가 있다면, 오직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다.’
만일 그것이 그 가운데 없다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도 비우고, 나아가 땅에 대한 생각ㆍ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ㆍ한량없는 식에 대한 생각ㆍ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생각을 비워야 하며, 무상심정(無想心定)에도 머무르지 않고, 탐욕의 번뇌ㆍ생명의 번뇌ㆍ무명의 번뇌도 비워야 함을 설한다.
여기서 ‘비어 있음’은 ‘공’이다. 그리고 인연법에 따라 인식이 세계를 분별하는 과정과 대비하여 본다면, ‘생각하지 않음’은 ‘분별하지 않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소공경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공은 ‘분별하지 않음으로써 비어 있음’을 뜻하며, 인연법으로 일어나는 분별이 없는/없어진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공은 어떤 세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상태’를 말하며,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을 행하는 궁극적 목표는 ‘인식의 분별이 그친 청정한 상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공의 성품은 <잡아함경_80. 법인경(法印經)>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비구가 공적하고 한가한 곳이나 나무 밑에 앉아,
‘빛깔은 무상하고 닳아 없어지며, 그것에 대한 탐욕을 떠나야 할 법이다’라고 관찰하고,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도 무상하고 닳아 없어지며, 그것에 대한 탐욕을 떠나야 할 법이다’라고 관찰한다고 하자.
‘그 5음이란 무상하고 닳아 없어지며, 견고하지 않고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라고 관찰하여,
그 마음이 즐겁고 청정하며 해탈하면 이것을 '공'이라 하느니라.”
그리고 <잡아함경_232.공경(空經)>에서는 공의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인연법으로 일어난 것들이 모두 공한 것임을 서술한 것이다. (<공경>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의 텍스트 분석>을 참고하세요.)
“눈이 공하고,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란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빛깔ㆍ눈의 인식ㆍ눈의 접촉과, 눈의 접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인,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공하고, 영원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ㆍ코 ㆍ혀ㆍ몸ㆍ마음도 또한 그와 같나니,
이것을 공한 세간이라고 하느니라.”
3.2. 인연법의 부정과 무위법으로서의 ‘공’
인연법으로 보면 눈은 ‘저것에 대응하는 이것’이거나 ‘이것에 대응하는 저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은 인연법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공한 법에서 보면, 인연법에서 말한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이것과 저것이 없으므로 ‘있음과 없음’도 없고 ‘생겨남과 없어짐’도 없다.[곧 인연법은 유위법이여, 가장 공한 법은 무위법이다.]
그리고 공은 인연법의 모든 인과 연이 완전히 끊어져서 인연법으로 생겨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
[곧 가장 공한 법은 무생법이다.]
그것은 공의 세계에서는 어떤 본별도 없으며, 나아가 일정한 이름과 성질을 가지고 존재하는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분별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대승경전에서 ‘제 성품[자성]이 없다, 차별이 없다, 평등하다, 둘이 아니다’ 등으로 표현한다.]
이와 같이, 가장 공한 법에서는 분별이 없으므로 분별함으로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부정된다. 따라서 인연법의 명제에 대한 부정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겻에 대한 부정도 분별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정된 것들도 다시 부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공한 법에서는 인연법의 명제을 부정하는 명제로 표현된다.
(이것들은 <잡아함경_249. 구치라경(拘絺羅經)>의 논리에서 추론한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이것이 아닌 것도 아니고 저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가장 공한 법에서는 5음ㆍ12처ㆍ18계도 모두 부정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불법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모든 법들도 모두 분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두 부정될 수밖에 없다.)
“빛깔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도 그러하다.
눈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도 그러하다.
빛깔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그러하다.
눈의 인식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과 마음의 인식[의식]도 그러하다.”
이것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빛깔은 빛깔이 아니고 빛깔이 아닌 것도 아니며,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도 그러하다.
눈은 눈이 아니고 눈이 아닌 것도 아니며,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도 그러하다.
빛깔은 빛깔이 아니고 빛깔이 아닌 것도 아니며,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그러하다.
눈의 인식은 눈의 인식이 아니고 눈의 인식이 아닌 것도 아니며, 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과 마음의 인식[의식]도 그러하다.”
그리고 어떤 존재의 속성이나 존재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들도 당연히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잡아함경_265. 포말경(泡沫經)>의 논리에서 추론한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거에 속한 것도 아니고 미래에 속한 것도 아니고 현재에 속한 것도 아니다.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거친 것도 아니고 미세한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공의 세계에서는 일정한 이름과 성질을 가지고 존재하는 어떤 것도 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진술에서 ‘없다’라는 것은 ‘있다’에 대립하는 ‘없다’가 아니라, ‘있다’와 ‘없다’가 분별되지 않는 또는 분별되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5음도 없고 12입처도 없고 18계도 없다. 6접촉도 없고 6접촉으로 생긴 느낌도 없다.
6계도 없다. 12인연법도 없고 4성제도 없다. 4념처나 8정도 등과 같은 수행법들도 없다.
기억도 없고 지혜도 없다.
공간도 없고 워와 아래 등의 방향도 없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임시로 붙여진 이름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증일아함경_13. 이양품(利養品)[7]>에서 설하고 있는데, 위의 진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제환인이여, 이와 같이 일체의 존재는 다 공(空)으로 돌아갑니다. 즉 나라는 것도 없고 남이라는 것도 없으며, 수(壽)도 없고 명(命)도 없으며, 선비도 없고 지아비도 없으며, 얼굴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다음과 같은 명제도 도출될 수 있다.
[아함경과 반야 경전의 진술들을 참고한 것이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고 어디에 머무를 것도 없다.
어떤 모양과 성질을 가질 것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움직이는 것도 없고 고요한 것도 없다.
합쳐지는 것도 없고 흩어지는 것도 없다.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도 없다.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지는 것도 없다.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다.
즐거워할 것도 없고 과로워할 것도 없다.
기뻐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다.
탐낼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얻을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다.
가르칠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
3.3. 관찰자(나)와 ‘공’의 공함
이제 관찰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관찰자의 문제의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
어떤 관찰자도 여러 다른 관찰자에 의존하여 그 성질이 달리 결정된다. 이때 다른 관찰자는 나 아닌 남일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관찰자인 나도 인연법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며, 그 성질도 인연법에 따라 결정된다.
예컨대 나는 갖가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그리고 만남도 잠깐 동안 이루어지기도 하고 비교적 오랜 기간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들은 나를 그 만난 시간 만큼 기억한다. 나는 그거한 갖가지 관찰자에 따라서 갖가지로 인식된다. 그 관찰자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나의 정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나라는 존재도 고유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결정된 존재가 아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도 공일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는 말하는 이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공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관찰자의 관찰의 결과로 인식된 것이다. 따라서 공의 성품을 분별하여 말할 수 없다. 공은 어떠한 성질을 가진 것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 순간에 분별에 떨어지기 때문에, 공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따라서 공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밖에 없다.
“공도 공하다. 또한 공은 공이 아니며, 공이 아닌 것도 아니다.”
3.4. 공한 법과 인연법의 통일
그런데 공한 법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공한 법과 인연법의 구별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비분벌의 세계에서는 공한 법이 인연법이고, 인연법이 공한 법이다. 당연히 연기법의 구성요소인 5음과 12입처와 18계도 공한 것이며, 공한 그 모습이 바로 5음과 12입처와 18계이다.
나아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에서도 그러하다.
4. 12인연법
4.1. 12인연법의 역할: 괴로움의 인식
<잡아함경_285. 불ㄷ박경(佛縛經)>에서는 중생이 연기법에 따라 고통받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과거 아직 정각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를 기억하고 있는데,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골똘히 정밀하게 선정에 들어 사유하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세상은 고난 속에 빠져있다. 말하자면 혹은 태어나고 혹은 늙으며, 혹은 병들고 혹은 죽으며, 혹은 옮겨가고 혹은 다시 태어남을 받는다.
그런데도 모든 중생들은 태어남ㆍ늙음ㆍ병듦ㆍ죽음과 그것이 의지하는 바를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중아함경_031.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에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4.2. 중생들의 총체적 삶의 순환 구조의 생겨남과 없어짐
12인연법은 부처님께서 바라본, 중생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과 그 세상에서 중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12인연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중생들의 세계와 삶의 총체이다. (이에 대해서는 <12연기법, 다시 생각해 보다(2)>를 참고하세요.) 이들을 대강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잡아함경_298. 법설의설경)
① 무명: 중생들은 이런저런 상태의 무명에 빠져 있다.
② 행[의도]: 중생들은 이런저런 의지나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
③ 식[인식]: 중생들은 이런저런 사물과 일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인식한다.
④ 명색: 중생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명색[마음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⑤ 6입: 중생들은 이런저런 상태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을 가지고 있다.
⑥ 촉[접촉]: 중생들은 이런저런 몸과 마음의 지각 기관으로 이런저런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현상]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인식한다.
⑦ 수[느낌]: 중생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느낌을 받는다.
⑧ 애[애욕]: 중생들은 이런저런 욕망과 이런저런 존재와 존재없음에 대한 애욕를 갖는다.
⑨ 취[취함]: 중생들은 이런저런 탐욕과 견해와 계율, 그리고 이런저런 나에 대하여 집착한다.
⑩ 유[존재]: 중생들은 이런저런 세계들, 곧 욕계에서 살아가거나 색계나 무색게에서 살아간다.
⑪ 생[태어남]: 중생들은 이런저런 시간과 공간, 이런저런 환경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태어난다.
⑫ 노사[늙고 죽음]: 중생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늙고 죽는다.
12인연법은 이러한 구성요소들의 관계를 인접한 요소들의 짝, 곧 ‘<무명, 의도>, <의도, 인식>, ... <태어남, 늙고 죽음>’의 인과 관계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짝들의 관계는 앞서 인연법에서 서술한 복합적 순환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순환적 관점에 대해서는 <12연기법의 순서, 순환의 관점에서 보다>를 참고하세요.)
복합적 순환 관계를 바퀴의 비유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무명, 의도> 등에서 무명과 의도의 관계를 바퀴의 태에서 보면 인과 관계로 드러나고, 바퀴의 살에서 보면 의존 관계로 드러난다. 여기서 바퀴의 테와 바퀴의 살을 함께 본다면 인과 관계와 의존 관계가 함께 드러난다. 그리고 바퀴가 굴러가게 되면 이러한 관계들이 순환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중생은 바퀴의 축에 비유할 수 있다. 축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명에 의해 형성된 가설적 중심을 가리킨다.
12인연법은 크게 두 가지 논리적 흐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있음과 생겨남’의 과정이다. 이는 인연에 의해 형성된 현상인 유위법의 발생 측면을 다룬다. 무명으로 인해 의도가 생기고, 최종적으로 태어남으로 인해 늙고 죽음이라는 ‘순전한 괴로움의 큰 무더기’가 일어나는 역동적인 순환을 보여준다.
둘째는 ‘없음과 없어짐’의 과정이다. 이는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여 소멸로 나아가는 환멸의 측면이다. 무명이 사라지면 의도가 사라지고, 태어남이 없으면 늙고 죽음 또한 사라진다. 이는 인연으로 생겨난 유위법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연이 다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는 온전히 비어 있는 상태(공), 즉 무위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결국 12인연법은 중생이 살아가는 세계의 순환 구조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러한 중생들을 위하여 인연의 사슬을 벗어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삶의 요소들이 실상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형성된 유위법일 뿐임을 드러냄으로써, 그 구조를 깨뜨리고 해체하여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구체적인 해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4.3. 12인연법의 공함과 부정
이러한 12인연법은 세속의 법이다.
그런데 <잡아함경_11. 인연경(因緣經) ①>에서는 ‘인과 연도 무상하다’고 하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12연기법의 모든 구성요소들도 무상한 것이며, 마치 물거품ㆍ아지랑이ㆍ파초나부ㆍ허깨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가장 공한 법의 시각에서 보면 12인연법의 구성요소들도 다음과 같이 부정된다.
“무명도 없고 의도도 없으며, 인식도 없고 명색도 없으며, 6입도 없고 접촉도 없다.
느낌도 없고 애욕도 없으며, 취함도 없고 존재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늙음과 죽음도 없다.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도 없다.”
이에 따라 괴로움에 관한 진리인 4성제도 당연히 부정된다.
[곧 인연법은 유루법이며, 가장 공한 법은 무루법이다.]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도 없으며, 괴로움의 사라짐도 없고 괴로움을 없애는 길인 8정도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12인연법과 가장 공한 법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단순한 관념적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 직면하는 무명을 실시간으로 타파하는 지혜로 이어져야 하며, 그때 비로소 인연의 사슬은 해체되기 시작한다.
5. 수행과 무상정등각
5.1. 수행의 경로와 무상정등각
그리고 인연법과 12연기법에서 벗어나 가장 공한 법으로 올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4념처와 8정도를 포함한 37도품을 수행해야 한다.
수행법에는 4등심과 6념처도 있고, 10일체처도 있다.
[이른바 대승 경전에서는 6바라밀다 또는 10바라밀다가 있다.]
5.2. 깨달음 이후의 공(空)
그러한 수행으로 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가 바로 무상정등각[삼막삼붓다, 아뇩다라 삼막삼보리]이다. 만일 수행자가 이 경지에 이르렀다면, 12인연법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완전히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12인연법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완전히 깨끗하게 사라졌다면, 그때는 불교의 수행법도 더 이상 있을 까닭이 없고, 깨달음이니 지혜니 하는 것도 있을 까닭이 없다. 수행법도 없고 깨달음도 지혜도 없으니, 달리 깨달아 얻을 것도 없다. 나아가 붓다도 붓다의 말씀도 있을 까닭이 없다. (뗏목의 비유, “좋은 법초차 버려야 하거늘”)
[반야 경전은 부처님의 법과 수행과 깨달음과 설법 등 불교의 모든 것을 모두 공의 세계의 관점에서 설하고 있다.]
[덧붙여는 말]
| 1. 공과 행 공은 누구라도 논리적 추론에 의하여 관념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공의 세계는 수행으로 성취되는 세계이다. <잡아함경_80. 법인경(法印經)>에서는 “‘그 음(陰)이란 무상하고 닳아 없어지며, 견고하지 않고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라고 관찰하여, 그 마음이 즐겁고 청정하며 해탈하면 이것을 공(空)이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중아함경의 <소공경(小空經)>과 <대공경(大空經)>은 공을 성취하는 수행법을 설하고 있다. |
| 2. 중도 인연법에서 보면 이것과 저것의 관계가 달라지면 ‘있다/없다’의 관계나 ‘같다/다르다’의 관계가 달라진다. 따라서 만일 중생들의 모든 세계들을 함께 고려한다면, ‘있다/없다’의 견해나 ‘같다/다르다’의 견해와 같은 양 극단의 견해는 생각할 수 없다. 만일 모든 것이 완전히 결정된 상태에 있는 특정한 세계 안에서는 ‘있다/없다’ 또는 ‘같다/다르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세계에서도 관찰자의 인식에 따라 ‘있다/없다’나 ‘같다/다르다’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한 양 극단의 견해가 성립하려면 엄밀하게 조건지어진 상황이 주어져야 한다. 가장 공한 법에서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으므로, 있다거나 없다거나 또는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것은 당연히 성립하지 않는다. 중도는 이처럼 모든 개념적 양 극단을 떠나서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연기법과 공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올바른 수행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중도에 관한 경들) |
| 3. 뗏목을 버린다는 것 강을 건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뗏목이 필요 없다. 그의 눈앞에 뗏목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뗏목이 애초에 없는 것과 같다. 그에게 뗏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그는 뗏목을 타거나 뗏목을 버리거나 할 일이 없다. 강을 건너려면 먼저 뗏목을 타야 한다. 그런데 뗏목을 탔다 하더라도 그 뗏목이 튼튼하지 않으면 중간에 뗏목이 부서져서 물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 뗏목을 타기 전에 먼저 뗏목이 튼튼한지를 점검해야 한다. (<대반야바라밀다경_1.44. 중유품[2]>의 배의 비유를 참고하세요.) 또 튼튼한 뗏목을 탔다 하더라도 강을 다 건너고 난 뒤에야 비로소 뗏목을 버려야 한다. 뗏목이 없으면 강을 건늘 수 없는데, 만일 강을 건너기도 전에 뗏목을 버린다면 곧 강물에 빠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뗏목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
[참고] 관찰자의 몸의 위상에 대한 글들
1. 마크 존슨의‘마음 속의 몸’과‘몸의 철학’, 제미나이
4. 아함경의 몸과 마음의 관계와 몸의 위상, 제미나이
2016. 01. 22, 수정함.
[덧붙임]
1.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
2024. 5. 5.
안녕하세요.
오늘은 물리학자이자 철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책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내용 일부를 전달드려봤습니다.
시간과 실재, 본질 등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네요.
2. 존재에 대한 관점을 뒤엎는 '천재 철학자'의 최신 이론 (feat. 마르쿠스 가브리엘 '허구의 철학')
2024. 10. 18.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즘 활발히 활동하는, 독일의 천재 철학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책 '허구의 철학'에 나온 내용을 다뤄봤습니다.
당연히 이 영상에서는 이론의 일부만을, 그것도 아주 단순화해서 다룰 수밖에 없었고요.
이 시대 서양철학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은 한번 독서에 도전해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어려운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