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 <마르코 5, 21-43> 5월 27일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갈려있어 눈으로 보고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의술이 발달하여 예전에는 해결하지 못하는 병을 지금은 걱정 없이 해결하고 병을 낫게 하지만 아직 죽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암도 극복해가고 있고, 나병은 거의 완치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인간의 죄가 크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 옛날 소돔과 고모라에게 형벌을 내려주시며 죄의 무서움을 깨우쳐주십니다. 요사이 지구 곳곳에서 이변이 일어나 기후의 변화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도 하나의 경고 현상입니다. 요사이 접근 금지, 차별 금지법을 만들어 축제를 지내고 허용한 나라는 이상한 비바람과 우박의 피해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은 필요한 것이고, 깨끗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의 열정이 없으면 인류의 존속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다만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것이면 어떻게 살아도 되고 이것이 창조의 목적과 상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 없이 인간을 만들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순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며 행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친구 나자로의 죽음을 살리시고, 오늘 회당장의 딸을 직접 살리시는 장면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모습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부인의 치유는 건강한 몸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각 하나 잘못하고 사회주의적 발상으로 세상을 위한 세상의 결정을 타당한 결정이라 생각하고, 바른 사람의 사랑을 뭉개버리는 망각을 의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그것이 진실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반드시 어떤 형상으로든지 무너트리고 바른길로 인도하십니다. 이 세상의 고통, 죽음의 고통까지도 주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세상이 전부가 아니지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세상의 올바른 질서가 성립되어 순리대로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저는 가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되도록 이끄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보고 느끼며 감탄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짓고 시달리는 사람을 자비로 용서하시고 그 용서를 의식한 사람은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있으면 길을 만들어주시고, 어떤 때는 저 같은 사람을 이용하시어 치유 은사를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 묵상 전날 꿈을 꾸는데 어떤 소녀가 어머니 옆에 앉아 응얼거리며 불만을 품고 울고 있어 내가 가까이 가서 “무엇을 바라냐?” 하니 소녀가 봉숭아밭으로 가자고 하여 데리고 가다가 소녀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며 꿈을 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어린 소녀의 죽음을 해결하신 주님을 묵상하다가 어제 순심학교 소년들 지도하는 신부님 불러서 “신부님 어린 소녀들 지도하느라 수고합니다. 적은 돈이지만 이 돈으로 방학하기 전 아이들 간식을 사주며 기쁨을 나누세요.”하고 약간의 돈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몽을 하면서 소녀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고 깨달으면 주님의 손이 움직이듯 사랑이 펼쳐지기를 기도합니다. 왜관 수도원 이석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