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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같이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길 원하옵니다
한복 차림의 팔순 둘째 언니, 일학년 초등학생처럼 긴장된 차렷 자세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찬송가를 부르신다. 눈자위가 붉어지고 얼굴을 찡그리는가 싶더니 목이 메어 노래를 부르신다. 사오 개월 병마와 싸우느라 몸피가 반으로 줄어든 형부 앞으로 다가선 언니가 두 손으로 형부 얼굴을 어루만지신다. 언니 얼굴이 눈물 범벅이다. 형부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사랑해요 여보“ ”당신 왜 울어 울지마“ ”당신이 우니까 울지“ 팔순의 둘째 언니가 동영상을 보내왔다. 칠남매 카톡방이다. 일흔아홉살에 투병중인 형부와 그 형부를 보살피는 언니의 고통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언니들과 작은 오빠도 그러셨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한 노릇이다
석우리 고향집부터 떠오른다. 24살 결혼전까지 둘째 언니는 주로 남자들이 하는 모심기와 벼 베기를 비롯한 부모님의 힘든 농사일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다섯 분과 평택과 인천 고모집을 오가며 심부름을 맡아서 하느라 늘 분주하였다. 거기다가 농사지으랴 손님 대접하랴 등이 휘도록 일거리가 많았던 어머니 대신 나를 비롯한 여동생 3명의 건사도 언니 몫이었다. 머리를 잘라주고 땡땡이 원피스와 꽃무늬 헝겊 가방을, 명절이면 고운 색동 한복도 만들어주셨다. 손재주가 남다른 언니다. 언니 덕분에 우리 셋은 그 당시 시골 아이들에 비하면 월등히 말쑥했고 단정하였다. 언니가 시집을 가고난 뒤 5학년때부터 나는 후줄그레하고 꾀죄죄한 옷차림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십대때 언니 사진을 보면 키가 크고 늘씬한 외모에 검은색 긴 원피스를 입으시고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겨 묶으셨는데 모델 못지않다. 23살 서울 총각이 무슨 수로 한눈에 반하지 않을까 ‘너무 이쁘다고 형부가 내 손가락을 꽉 깨물었단다’ 언니의 가슴 뛰는 후일담이다. 여섯살때 어머니를 잃은 형부다. 새어머니가 계셨지만 어리광 한번 제대로 부려보았겠는가. 어미의 사랑에 굶주린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마음속 한켠에 그 쓸쓸한 아이가 살게 마련이다. 심성이 고운 언니는 형부의 엄마이지 누나이자 아내로 안성맞춤인 여자였다.
언니의 신혼살림집이었던 노량진 언덕배기 집이 떠오른다. 집은 그렇게 작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시할머니에 시부모님에 시누이와 시동생 둘까지 함께 살아서일까. 언니의 신혼 방이라고 보여주는데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고향집 건넌방의 반이나 될까. 두 사람 몸을 뉠 수 있을까 싶은 길쭉한 마루방이었다. 결혼 직후 형부가 군에 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에 내 마음이 더 언짢아졌다. 형부도 없는 집에서 시부모님 봉양에 시누이와 시동생 뒤치다꺼리까지 전부 언니 몫일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일이 얼마나 많고 힘들었으면 참을성 많고 배려심 많은 언니가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날이 많았다고 말하랴. 형부가 없는 방에서 고단함과 외로움으로 눈물 훔치는, 곱지만 슬픈 언니였다. 오죽했으면 언니는 수선화를 무더기로 내게 분가시켰다. ”난 시댁에서 혼자 살아내내 서러웠지 수선화는 함께 살아가야지“ 수선화를 보면 언니를 만난다.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부산 거제리집이 떠오른다. 형부의 직장 때문에 언니네는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가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언니가 편지로 보내온 주소를 들고 나섰다. 초행길인 거제리 골목길을 따라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채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올라가고 있을 때, 천만다행이었다. 저만치서 양손에 물통을 들고 내려오던 언니와 딱 마주쳤다. 언니! 어 막내 아니냐 꿈이냐 생시냐! 한참 가파른 골목길을 헐떡헐떡 오른 후에야 언니네 셋방이 나타났다. 수도가 없어 우물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집이었다. 둘째 조카가 아기였으므로 기저귀며 빨래며 산더미였는데, 그 많은 빨래를 물을 길어다가 빨았다. 형부의 쥐꼬리만한 월급을 쪼개어 시댁에 생활비는 물론이고 적금까지 보냈다. 뽀얗게 빨아낸 기저귀들이 앞뜰 빨랫줄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 참으로 기분 좋은 풍경이었으나 언니의 거칠어진 손을 바라보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내 남편의 직장이 고리 원자력으로 발령이 나면서 나는 일광에 신혼집을 차렸다. 그 당시에는 언니가 부산 동래에 살고 계셨다. 서울보다야 가까웠지만 두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신혼 살림집에 집들이를 한다고 아이 돌잔치를 한다고 또 김장을 담글 때마다 언니는 달려오셨다. 언니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어 요리책을 보고 음식을 만들던 내게 언니는 친정어머니였다. 내가 결혼하기 전 가을 끝무렵이었는데, 을숙도에 혼자 가겠다고 했더니, 낯선 곳을 다니는 것이 위험하다고 기어이 잽싸게 김밥을 싸 들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키가 큰 갈대들이 즐비하게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김밥을 먹었다. 언니만한 아우 있으랴. 당연하게 여겼던가. 막내의 이기심인가. 그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형부가 서울로 발령이 나시고 언니네는 서울 쌍문동에 새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한전에서 운영하는 한일병원이 아파트 뒤쪽에 있었다. 둘째 형부와 큰오빠와 내 남편이 한전 직원이었으므로 언니의 시아버지뿐만 아니라 친정어머니와 아버지, 나의 시어머님과 시아버님이 차례로 번갈아 입원을 하셨다. 언니는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해야 했다. 당뇨로 입원하셨던 내 시어머니는 병원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보리밥에 간간한 된장찌개가 생각난다고 하셨다. 지금 같으면 음식점에 가서 포장하면 될 것을, 그때는 그냥 언니만 생각이 났다. 아침밥을 준비 중이던 언니에게 달려가 부탁을 드렸다. 아침상 차리랴 내 부탁 들어주랴 허둥지둥 언니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미안했다. 물론 시어머니는 오랜만에 달고 맛있게 드셨지만, 이래저래 병원이 가까운 그곳은 언니를 고단함으로 몰아갔다. 배려심이 많은 언니였기에 너그럽게 참아내면서 잘 살아내셨다.
상도동집. 언니네가 살아온 집 중 가장 넓고 쾌적하고 멋진 공간이었다. 자식 셋도 차례로 순탄하게 분가하였고 언니는 홀가분해졌다. 학구적인 언니는 문화센터며 동사무소며 싼 비용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을 잘도 알아내서 다니느라 즐거운 얼굴이셨다. 형부는 누구보다도 계획적인 성격이셨다. 1월부터 12월까지 집안에 들어올 돈과 나갈 돈을 빼곡하게 적어놓으신 형부의 살림 계획표는 입이 떡 벌어질만큼 꼼꼼했다. 퇴직 후 형부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시골로 내려갈 계획을 세우셨는데 일 년여를 찾다가 인연이 닿은 곳이 익산이었다.
익산집은 시골이기는 해도 누군가 오래도록 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 집이었다. 거실에 대리석을 깔아놓았고 방이 네 개였으며 주방이 넓었고 주방에 딸린 창고 역시 컸다. 각 공간의 유리창도 넓어 환했다. 집 옆에 땅도 600평이 넘었다. 주변에 고사리와 두릅이 지천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텃밭을 일궈 고추며 배추며 불루베리등 각종 작물들을 풍성하게 길러내셨다. 형제들은 일 년에 한 번씩 그곳에 가서 하룻밤을 묵고 왔다. 그때마다 언니는 얼마나 다채로운 건강 밥상을 차려주셨는가. 몸이 아파 끙끙거리며 잠들었던 날에도 언니는 새벽에 일어나 음식을 만드셨다. 거기다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봉지 봉지마다 담아 주셨던가. 어느 날은 줄 것이 없다고 막 피어난 매화 가지 서너 개를 뚝 분질러 주셨다.
십여년전 내 생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에 사시는 언니들과 오빠와 형부가 내 집에 오셨다. 둘째 언니는 익산에서 쑥을 뜯어서 떡을 해 가지고 오셨다. 그 무거운 것을 들고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세시간을 달려 오셨다. 지금보다야 젊었다해도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얼굴이 헬쓱했다. 등이 굽도록 손님 밥상을 차리시던 초라한 어머니를 본듯 나는 화가나서 절대로 다음부터는 하지 마시라고 소리쳤지만, 일원동 내집에서 떡을 직접 만들어보는 신나는 경사였다. 큰상에 콩고물을 펴놓고 그 위에 찐 쑥떡을 올려 넓게 편 뒤 다시 위에 콩고물을 골고루 묻혀내어 잘랐다. 더 골고루 콩고물을 묻혔다. 쑥의 진한 향기와 콩고물의 고소한 맛이 어울려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감칠맛나는 쑥인절미가 되었다. 모두들 맛나게 드셨다. 어느 생일보다 고소하고 쫄깃한 생일이었다.
어느 해 였더라 . 그날 역시도 나들이겸 형제자매들이 익산 둘째 언니네로 향하던 중이었다. 언니에게서 카톡이 날아왔다. 팥죽을 만들었어 와서 먹어라. 하루 전날이 동지였고 팥죽이 먹고 싶다는 내 카톡과 큰언니가 한 그릇 사다 드셨다는 카톡을 읽으셨으니, 그냥 있을 언니가 아니었다. 아무 때나 비빔밥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 화롯불에 얼른얼른 뚝배기를 올리고 밥과 참기름과 김치를 섞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비빔밥을 뚝딱 만들어주시던 어머니처럼 그냥 있을 언니가 못되었다. 도착하지마자 우리는 빙 둘러앉아 따스한 팥죽부터 먹었다. 동치미와 백김치를 곁들였다. 순식간에 한 그릇씩 비워냈다. 구수하면서 아련한 어머니 손맛이었다. 많이 먹어라 한 그릇 더 먹어. 둘째언니가 말씀을 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뱃속뿐만 아니라 마음도 채워졌다.
형부께서 병마에 시달리는 지금의 고통스런 시간 앞에서 뒤돌아보면 익산은 천국이었단다. 형제자매들과 모여앉는 즐거운 날들이며 들판에 분홍빛 노랑빛 하얀빛 봄꽃들이 하늘거리던 날들이며 쑥을 캐서 쑥떡을 만들어 서울로 허위허위 달려오신 일이며 김치며 된장이며 바리바리 보따리를 싸서 자식들과 형제들에게 나눠주는 일들 속에서, 고단하지만 즐겁고 흥이나는 날들이셨단다. 형부는 산에서 죽은 나무들을 차에 가득 싣고 기쁜 얼굴로 내려오셨단다 ”부자가 된 거 같아 정말 좋아“ 형부는 붓글씨를 열심히 쓰셨는데 큰상도 여러 번 받으셨다. 바쁜 농사일 중에도 언니는 춤, 장구, 시조, 창, 한문을 부지런히 공부하며 학구열을 불태우셨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단다. 물 흐르듯 지나갔단다. 누구나 그런 평화로운 날들이 지속되리라 여기며 살아간다.
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 형부 병원 다녀오시고 둘째아들네 와 있어 익산으로 내려 가기 이쪽에서 형제들 모이면 어떻겠냐 형부가 밥보다 짜장면을 좋아하시니 편하게 중국 음식 시켜 먹는 것으로 하고“ 코로나로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고 지내온지 일 년이 넘었다. 형부가 입원해 계신 동안에도 보호자 한 명만 병원 출입이 가능하니 형부를 뵐 수 없었고 또 아들네 집에 잠시 와 계셔도 극성스런 코로나도 염려스럽고 며느리에게 더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찾아뵙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며느리 교회 다녀서 사람들 집에 오는 거 좋아해 좋은 품성을 지녔어“ 짜장면을 먹을 거라는 말과는 다르게 테이블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오전에 시장을 다녀오셨단다. 형부를 돌보느라 지쳤을 언니는, 아픈 시부모님 모시느라 힘든 며느리는 무슨 힘으로 이렇게 풍요로운 밥상을 차려낸 걸까? 어른들에게는 세배를 하고 조카와 조카 손주들에게 세배를 받았다. 화기애애했으며 어느 때보다 현재의 감사함과 고마움과 행복감으로 밥을 먹었다.
언니네 둘째 아들네 가족은 다섯 명인데 모두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 형부 몸이 언덕길을 내닫듯 빠른 속도로 악화되어갔고, 아들네에 머무는 동안 교회에 목사님이 오셔서 안수 기도를 드렸단다. 목사님께서 형부를 위해 절실하게 기도를 올리신 후 하느님 믿으시지요? 물었을 때 언니와 형부는 ’예‘라고 선뜻 대답했단다. 아들과 며느리가 환영의 박수를 보내주었단다. 어느 종교건 귀의해서 믿고 의지하면 위로가 되는 일이다. 어제의 경건한 마음이 남아있어서인가. 언니는 며느리 한복을 빌려 입고 아들네 가족 앞에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노래를 불렀단다.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에서 눈물이 쏟아지더란다. 며느리가 동영상을 찍었던 것이다. 오늘 다시 그 동영상을 보는데 또 왈칵 눈물샘이 열린다. 언니가 살아온 굴곡지고 험란했던 길들이 보이고 형부의 고통스런 지금이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리는 일 뿐이었다.
기도하옵나이다. 형부의 건강한 얼굴과 언니의 웃는 얼굴 하루빨리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산에 올라 쓰러진 나무들을 한 차 가득싣고 내려와 ’참 좋아 여기가 좋아‘ 형부의 그 기쁜 목소리 하루빨리 듣게 해 주시옵소서 동네 친구들을 차에 태워 함께 서예 학원으로 달려가는 형부의 그 행복한 모습 하루빨리 보게 해 주시옵소서 어릴적 어미 잃은 형부에게는언니가 엄마이며 누나이기도 해서 벌컥벌컥 투정을 부리고 화를 내던 형부의 그 모습도 하루빨리 보게 해 주시옵소서 형부 웃는 모습만큼 평화로운 미소 어디에서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미소 하루빨리 보게 해 주시옵소서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기까지는 2021년도에 2월에 쓴 글이다. 형부께서는 통증과 독한 약물 후유증으로 고생고생하시다가 같은 해 7월에 돌아가셨다. 팔순이라는 연세에도 형부를 보내는 언니의 사랑이 펑펑 눈물을 쏟을만큼 애틋했고, 언니와 형부의 일상을 내내 지켜보아온 내가 언니의 심정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쓸 수 있었다.
목백일홍 꽃길을 가요
-형부를 보내는 언니의 이별가
가요 가요 유서방이 가요
스물 세 살 신랑이 스물 네 살 신부 날 만나서
일흔아홉 고갯길 넘어서다 말고
가요 가요 유서방이 가요
평생 좋다좋다 하던 목백일홍
지금 여기 함렬에 한창인데
백일동안 피어나고 또 피어날진대
목백일홍 천국길로 가요
자신에게는 수전노로 살아
집사고 밭사고 논사고
유씨 집안
풍성하게 꽃피운 목백일홍 정원처럼 가꿔놓고는
유서방 가요 혼자 가요
이천이십일년칠월이십오일오전일곱시
이승 문턱 넘자마자
꽃 같던 날 업어 냇물 건너주던 나의 신랑
날 잊은 건지 날 버린 건지
가요 가요 혼자 가요
십오륙년 정 붙인 합렬, 고향이어서
눈감고도 길가 목백일홍 구경하면서 가요
꽃 필 때마다 돌아오라고
목백일홍 대문간에 선 어머니처럼 손짓 해요
가요 가요 유서방이 가요
여섯살적 생이별한 어머니 만나 실컷 투정 부리려고
가요 가요 유서방이 뒤도 안 돌아보고 가요
내 가슴 미어지게 할 때는 돌아누워 잠들었는데
벌써 그리움이 달무리처럼 앞을 가려요
가요 가요 유서방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