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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여자의 구원/딤전 2:11-15
성경본문 디모데전서 2:11-15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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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경호목사
여러분은 이 말에 ‘아멘’하십니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된 사람 아니고는 적어도 이 말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문은 여자가 구원 받는 길을 다르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숙과 해산(표준새번역), 정절과 출산(개역), 순결과 출산(공동번역)으로..... 여자는 이런 것들을 통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는 왜곡된 번역의 경우를 소개했지만 이것은 번역상의 잘못이 아니고 본문 자체가 가진 한계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다행히 창세기의 인간창조이야기를 재해석한 것이기에 이 본문 자체가 이미 성서의 권위를 부여 받고 있기는 하지만 창세기의 원문을 바르게 해석한 것인가를 따져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창세기 본문이 1차 자료이고 딤전의 본문은 그것을 해석한 제 2차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야할 두 가지 이유를 듭니다.
첫째는 순서로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지음 받았고,
둘째는 여자가 먼저 속임 당해 죄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지 창세기를 살펴봅시다.
첫째,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창조되었습니다.
먼저 지음받은 ‘아담’(Adam)은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인류’라는 뜻입니다. 아담 말고 분명하게 남자를 지칭하는 말은 이쉬(ish)이고, 여자는 이샤(isha)입니다. 이 구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에서 입니다. 번역에서는 그 맛이 깨집니다. 원어로는 “ish에서 나왔으니 isha라 하리라” 예를들면, “곰에서 나왔으니 곰탱이라 하리라”와 같이 말의 반복되는 맛을 살린 언어유희적 표현입니다. 여기서야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나타납니다. 하긴, 여자가 없는데 어찌 남자가 있겠습니까? 아담은 남녀를 구분하기 전에 “사람, 인류”를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자를 만드시므로 그와 동시에 그의 상대인 남자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전 아담은 성의 구분이 없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영어의 Man을 사람 또는 남자로 보듯이(사실 이것은 “남자만이 사람이다”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다)백번 양보해서 아담을 남자로 본다고 하면, 창2:17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여자는 생겨나기도 전에 남자와 맺은 계약입니다. 그때 여자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책임은 여자에게 묻고, 죄는 여자에게 뒤집어씌웁니까? 적어도 둘 중에 하나를 말해야지 둘을 다 말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바울에 대한 변론
그 당시의 유대교의 상황을 보면 이런 배경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는 여자는 인격이 아니라 단지 물건입니다. 여자에게는 교육을 하지 않으며 유대인에게 생명같이 중요한 율법의 교육도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가르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성들은 배우기 위해 회당 모임에 나갔지만 단지 여성들은 듣기위해서 갈 뿐입니다. 그들이 회당 모임에 참석하더라도 한 쪽 구석에 막을 치고 그 안에 격리된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여성이 앞에 나와 순서를 맡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성이 회중 앞에 몸을 드러내는 것은 회중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결혼한 여자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혼의 사유가 됩니다. 여성은 종교적 절기에 참여할 의무도 없습니다. 여성은 노예와 동일한 등급이었습니다. 이 때 랍비들은 공식석상에서 “하나님, 나를 이방인, 노예, 여자로 만들지 않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랍비 벤 요하난은 “너희 가정을 개방하고 가난한 자를 영접하라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여자들과는 많이 이야기 하지 말라 여자들과 얘기를 많이 하는 자는 자신에게 악을 초래하고 율법의 일을 게을리 하게 되어 마지막에는 게헨나(지옥)에 사는 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대교가 이런데 비해 그 당시 교회는 노예와 여성과 가난한자를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형제 자매로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교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바울 서신에도 보면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이 남편보다 항상 먼저 언급되는 여성도 있습니다. 유일하게 해방된 공간이 교회였으므로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으며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교회에서 드러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그 속도를 조정하고 싶었으며 여성들이 지나치게 발언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로마라는 사회와의 심한 격차를 가지는 것을 조정해 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여성차별적 발언들을 변론하는 논리입니다.
분명 이런 변론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 공동체가 가지는 혁명성과 하층민들에게 무서울 정도로 파급해 나가는 속도감이 로마 정부가 기독교를 박해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바울도 이를 우려해 조정하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 가능한 설명입니다만 아무튼 이 본문은 오늘 우리가 대하기에는 아무리 성서에 대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신자라 할지라도 매우 곤혹스러워하는 본문이고 역사적 한계를 명확히 가진 본문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세계는 양성 간에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남성지배의 문화는 아무리 저항하고 발버둥치며 과거로 돌아가려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남성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지나가는 시대의 그림자입니다. 남성들은 남성이 가정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던 시대의 향수를 아쉬워하지만 이제 이미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을 손바닥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의 욕망 충족의 구조는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고 보았습니다. 동물은 일차적 욕구가 채워지면 만족하지만 인간은 일차적으로 욕구가 채워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타인에 의해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때라야 만족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합니다. 좋은 집에 사는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남들이 그것을 부러워하고 인정해주고 나아가서 칭찬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한 여성에게 푹 빠진 남성이 그 여성과 친해지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바라던 것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그 둘의 사이를 인정해 주어야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의 인정을 욕구 충족의 기반으로 할 때, 필연적으로 인간은 사로의 투쟁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채워지면 곧바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일차적 욕구충족인데 비해 인간은 그에 만족치 않고 무수한 타인의 인정을 받기위해 무한정으로 욕구충족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조건이나 자연 재화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또 다른 인간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서로간의 결전의 장이 됩니다. 이러한 결전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최후의 강자 두 사람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간에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여기서 승리한 사람은 영원한 주인이고 여기서 패배한 사람은 노예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까지는 매우 목표가 뚜렸하고 활기 넘치는 삶이 되지만 막상 자신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은 심한 허무감에 사로잡힙니다. 이미 주인과 노예로 나누어진 다음에는 주인은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인은 기껏해야 노예에게서 자신의 욕망을 인정받을 뿐인데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노예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 초에 신혼부부들이 서로 초기에 잡아 놓아야 된다는 생각에 힘겨루기를 하는 것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은 누가 누구에게 잡혀서 살 수는 없는 존재이고 잡고 살아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상대를 완전하게 휘어잡아서 내가 무엇이라고 해도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같이 삶을 살아갈 가치가 없는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는 한쪽의 불행이 아니라 양쪽 모두의 불행입니다. 배우자는 이미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고 자신의 동물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으로 전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존중하며 영혼의 교감이 없는 삶,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생활이겠습니까?
우리는 지배하고 종속 시켜야 만족을 누리는 욕망의 체계를 변화시켜야합니다. 사실 우리의 교육구조 인간관, 세계관은 능률과 성과, 업적 위주의 물질주의적 가치척도로 포장한 세계를 우리들 앞에 제시합니다. 일등, 일류학교, A학점, 출세, 성공, 높은 자리, 부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삶을 측량하는 성공의 척도가 아닙니까? 이런 가치관 속에서 어떤 인간이 나오겠습니까? 더불어 함께 살고 공존하고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데서 자신의 기쁨을 찾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구조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씨 폐지에 대하여
우리교회에 문양**전도사님이 양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표현하십니다. 가부장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우스개 삼아 “문양**”와 “이최**”가 만나면 그들이 낳는 아이의 이름은 “문양이최** ”(웃음) 이렇게 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몇 대 지나면 세상의 온갖 성씨가 다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하고 염려합니다.
저는 우리들의 부르는 이름으로 그냥 각자의 이름이면 되지 꼭 성씨를 꼭 부쳐야 되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면 호주제니 뭐니 하는 것도 자연히 없어지게 됩니다. 성씨를 통해 그 가문과 혈통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당장 바로 위의 어머니부터 모계 일체의 혈통이 사라지는 반쪽 혈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좋은 조상에 대한 기억이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한 행적에 대한 기억이면 그것은 스스로에 채워지는 족쇄요 또한 또 다른 연좌제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서의 이름도 성이 없습니다. ‘엘리야’ ‘엘리사’하니까 성이 ‘엘’씨 인 것 같지만(웃음) 그냥 모두가 이름입니다. 제 이름이면 됐지 뭘 자기가 책임도 못 지는 조상의 이름을, 그것도 반쪽짜리 이름을 줄줄 달고 살아야 합니까? 저는 이혼한 후, 다시 재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한 가정 안에 다른 성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인해 부작용이 심각한 것을 보게 됩니다. 호주제 때문에 성을 바꾸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재판 등 복잡한 절차와 그럴만한 사유 없이는 성을 바꿀 수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존재
창 2:18에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개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존재'로 지음 받았으니 남자 시중이나 드는 것이 여성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에첼(ezer)인데 이것의 동사형인 아찰(azar)은 주어가 하나님일 때만 쓰는 동사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시는 존재'란 뜻입니다. 여자를 '남자를 돕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그(남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도우시는 짝을 주셨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배필이란 말 크네그도(kenegdo)역시 correspondence, counterpart로서 대등한 위치의 상대자를 말합니다. 창세기의 남녀관계는 사랑과 존경으로 이루어지는 남녀결합을 말합니다. “당신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입니다”(창 2:23) 이보다 더 한 사랑의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녀는 구원의 동반자로 서로 보완, 성숙해 가면서 완성해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성차별주의자들은 말합니다. “사람의 뼈가 200여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부분인 하나로 만들었으니 여자는 남자보다도 엄청 그 재료에서 부터 모자란 존재다”고 합니다. 또는 평등주의자들은 말합니다. 머리뼈로 했으면 남자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발뼈로 했으면 짓밟히며 살 텐데 갈비뼈로 하셨으니 얼마나 평등하게 지음 받았느냐고요(일동 웃음). 그런데 이 이야기가 태초의 사람인 아담을 누가 보고 쓴 것이 아니라 다윗 왕조 때에 쓰여진 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볼 때, 이미 자신의 짝이 그의 부모에서 유래되었고 그가 속한 가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쯤은 발생학적으로 자명히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우자의 사랑스러움과 정겨움이 너무 넘쳐서 이 사람은 도대체 나 아닌 어떤 다른 존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기 힘들다. 당신의 그 사랑스러움과 정겨움으로 보니 당신이야말로 다름아닌 내 몸의 일부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입니다”라는 고백 일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그 부모들이 흔히 던지는 말처럼 “이런 놈(존재)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그 뿌리에 대한 답변일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고 한 말 “당신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입니다”라는 고백에 대한 증빙적 이야기가 여자를 갈비뼈로 지으셨다는 여자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 알몸으로 어울려 살되 부끄러움을 모르는”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완벽한 조화와 완전한 개방을 말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꾸며대지 않아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도 꾸밈없이 가감 없이 그를 다 이해하고 받아 줄 수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무슨 일이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남에게 신뢰를 잊게 될 까봐 얼마나 많은 일에 자기를 꾸며대고 치장하며 삽니까? 주변의 사람들과 말할 수 없는 벽을 쌓고 그 담 안에 스스로 갇혀 답답해하며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래 에덴에서의 이상적인 관계는 남녀, 빈부, 신분, 학력, 나이 등등의 모든 차이가 갖는 배타성을 극복하고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회입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누구를 부끄러워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사회를 말합니다.
오늘 여성의 주간을 맞이하여 여자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여성의 종속은 곧 남성의 동물적
삶을 의미하며, 여성의 구원은 곧 더불어 남성의 구원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