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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2. 제2장 음식 품
♦ nidānavaggo ♦ 1. nidānasaṃyuttaṃ (SN 12.1)
♦ 2. āhāravaggo ♦ 1. āhārasuttaṃ (SN 12.11)
제2장 음식 품 Āhāravagga 음식 경(S12:11) Āhāra-sutta
♦ 11.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 pe ...
etadavoca —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3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74) 중생들을 도와주는75)
네 가지 음식76)이 있다.
74) '생겨나려는'은 sambhavesin을 옮긴 것이다. 이것은 보디 스님의 지적처럼 빠알리어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미래 능동 분사이다.(Geiger, §193A, EV1, 527에 대한 주 참조) 그러나 주석서는 이 단어를 sambhava+esin으로 이해하여 “생겨남, 출생, 태어남을 구하고 찾는 자(ye sambhavaṃ jātiṃ nibbattiṃ esanti gavesanti).”(SA.ii.22)로 풀이하고 있다. PED와 BDD도 이를 따라서 각각 'seeking birth'와 'one who is seeking birth'로 설명하고 있다.
75)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은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m vā anuggahāya역하여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여기서 bhūtānaṃ(이미 존재한 자들)을 번뇌 다한 [아라한]으로 설명하고, sambhavesīnaṃ을 미래(ayati)의 태어남을 찾는 자들(sambhava+esin)로 이해해서 유학과 범부들(sekkha-puthu-jjanāna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23)
그런데 주석서의 이러한 입장은 너무 무리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원문에는 이미 존재한 중생(sattānaṃ)이라고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아라한이라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음식의 역할을 설명한 평범한 문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유지하게 하고(ṭhitiyā)'와 '도와주는(anuggahāya)'은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뜻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Ibid)
76) “여기서 '음식(āhāra)'이란 조건(paccaya)들이다. 조건들은 자신의 결실(phala)을 가져오기(āhārati) 때문이다. 그래서 조건들을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다.”(SA.ii.22)
bhūta : 有된. bhavati의 pp. (有: bhava)
이미 變成된 즉 태어난.
sattānaṃ ṭhitiyā : 業有와 관련된 표현.
sambhavesīnaṃ anuggahāya : 生有[死後-生前 사이(antara)에서 일어나는 법]
현생에서 행한 업에 따라 금생에서는 業有가 생겨나고
이렇게 생겨난 業有와 비슷한 형태로 異熟과가 생겨나는 것이 生有(再有 - punabbhava)
다음 경문(S12:12)
*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識食 · 能招未來有 · 令相續生 · 有有故 有六入處 · 六入處緣觸'
* [今生에서의] ① 識食(viññāṇāhāro)은 未來(āyatiṃ)
再有(punabbhava)를 能招(abhinibbattiyā)하는 緣(paccayo)이다.
相續(tasmiṃ 막상)
② 有됨(bhūte = 名色 nāmarūpa)이 有(있으면, sati), ☞ 慾界(名色)
③ 六入處(saḷāyatanaṃ = 生 jāti)가 有(있고, hoti) ☞ 慾界를 의미한다.
③ 六入處(saḷāyatana)을 緣(paccayā)하여
④ 觸(phasso)이 있다.
*(5)蘊를 愛取 [食(viññāṇāhāro) = (5)取蘊] 하면
② 有[됨 = (5)取蘊의 名色화]
☞ 욕계에 어울리는 5온. 그러나 색계에 어울리는 5온은 아님. 무색계(4온)는 아예 아님.
*여기서 단식(kabaḷīkāro āhāro)은 욕계에만 해당되고
나머지 食들은 삼계에 공통된다.
katame cattāro?
kabaḷīkāro āhāro —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ṃ catutthaṃ.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 [첫 번째요], 감각접촉[觸]이 두 번째요,
마노의 의도가 세 번째요, 알음알이가 네 번째이다.77)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이 있다.”78)
77) 이 네 가지 음식은 빠알리어로는 각각 kabaḷīkāra-āhāra, phassa-āhāra, manosancetanā-āhāra, viññāṇa-āhāra, 이다. 중국에서 각각 단식(段食), 촉식(觸食), 의사식(意思誠), 식식(識食)으로 옮겼다.
78) “그런데 만일 조건이라는 뜻(paccay-aṭṭha)에서 음식이라고 한다면, 왜 중생들에게는 다른 조건들도 많은데 유독 이들 넷만을 음식이라고 적용시키고 있는가? 이들은 중생들의 내적인 존재지속[相續](ajjhattika-santati)을 [유지하는데] 특별한 조건이 되기 때문(visesa-paccayattā)이다.
즉 '덩어리진 [먹는] 음식(kabaḷīkāra-āhāra)'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는 중생들의 육체적인 몸(rūpa-kāya)에 대해서 특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nāma-kāya)에 대해서 '감각접촉(phassa)'은 느낌(vedanā)의 [특별한 조건이요], '마노의 의도(mano-sañcetanā)'는 알음알이에게 [특별한 조건이요], '알음알이(viññāṇa)'는 정신·물질(nāma-rūpa)에게 [특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SA.ii.25)
계속해서 주석서는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이 어떻게 조건이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덩어리진 음식은 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하는 물질들(ojaṭṭhamaka-rūpāni)을 생기게 한다. 감각접촉의 음식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 가지 느낌들을 생기게 한다. 마음의 의도라는 음식은 업(kamma)을 통해서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삼계의 존재(tayo bhavā)를 생기게 한다. 알음알이의 음식은 재생연결에 관계된 정신 · 물질(paṭisandhi-nāma-rūpa)을 생기게 한다.(SA.ii.25~26)
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하는 물질들은 분리할 수 없는 물질(avinibbhoga)들의 최소단위를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6장 §7 (10)의 해설 등을 참조할 것.
한편 네 가지 음식은 본 「인연 상윳따」(S12)의 S12:12; 31; 63; 64에 계속 나타나고 있다. 네 가지 음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서 제5권 S46:51과 제6권 S55:31에서도 음식은 특별한 조건으로 언급되어 있다. 네 가지 음식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청정도론』 XI.1~3을 참조할 것.
♦ “ime, bhikkhave, cattāro āhārā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
ime cattāro āhārā taṇhānidānā taṇhāsamudayā taṇhājātikā taṇhāpabhavā.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은 무엇이 그 근원79)이며, [12]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네 가지 음식은 갈애가 그 근원이며 갈애로부터 일어나고
갈애로부터 생기며 갈애로부터 발생한다.”80)
79) 여기서 '근원'은 nidāna의 역어이고, '일어남'은 samudaya의, '생김'은 jātika의, '발생'은 pabhava의 역어인데, 주석서는 이 넷이 모두 이유(kāraṇa)를 나타내는 동의어라고 밝히고 있다.(SA.ii.27)
80) “여기서 '네 가지 음식은 갈애가 그 근원이다(cattāro āhārā taṇhānidānā).'라고 하신 것은, 재생연결(paṭisandhi)이 일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자기 존재(atta-bhāva = 몸)라 불리는 음식들은 이전의 갈애(purima-taṇhā, 즉 재생을 있게 한 이전 생의 갈애)가 그 근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알아야한다. 어떻게? 재생연결의 순간에(paṭisandhi-kkhaṇe) 중생들에게는 중생이라는 존재지속[相續, 흐름, santati]을 통해서 생겨난 [몸이라는] 물질들인(uppanna-rūpabbhantara)에 영양소(ojā)가 생겨난다. 이것이 갈애를 근원으로 한(taṇhā-nidāna) 업에서 생긴 덩어리진 [먹는 음식(upādiṇṇaka-kabaḷīkārāhāra)이다. 그러면 이러한 재생연결식(paṭisandhi-citta)과 함께하여 일어난 감각접촉과 마음의 의도와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뜻하는 알음알이가 각각 갈애를 근원으로 하여 일어난 업에서 생긴 '감각접촉'과 '마음의 의도'와 '알음알이'라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재생연결의 순간에 음식은 전생의 갈애를 근원으로 하여(purima-taṇhā-nidānā) 생긴다. 이러한 재생연결의 순간에서와 같이 그다음의 최초의 바왕가의 마음의 순간(paṭhama-bhavaṅga-citta-kkhaṇa) 등의 경우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SA.ii.28)
네 가지 음식의 조건 짓는 역할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23음식의 조건(食緣, āhāra-paccaya]을 참조할 것.
*갈애를 연하여 생겨나는 법: 行 = 取 (결박, 欲貪, 邪見, 食, 우빠디, 빠빤짜. 伺) 등
taṇhā cāyaṃ, bhikkhave,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
taṇhā vedanānidānā vedanāsamudayā vedanājātikā vedanāpabhavā.
5. “비구들이여, 그러면 갈애는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갈애는 느낌이 그 근원이며 느낌으로부터 일어나고 느낌으로부터 생기며 느낌으로부터 발생한다.”
vedanā cāyaṃ, bhikkhave,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
vedanā phassanidānā phassasamudayā phassajātikā phassapabhavā.
6. “비구들이여, 그러면 느낌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느낌은 감각접촉이 그 근원이며 감각접촉으로부터 일어나고
감각접촉으로부터 생기며 감각접촉으로부터 발생한다.”
phasso cāyaṃ, bhikkhave, kiṃnidāno kiṃsamudayo kiṃjātiko kiṃpabhavo?
phasso saḷāyatananidāno saḷāyatanasamudayo saḷāyatanajātiko saḷāyatanapabhavo.
7. “비구들이여, 그러면 감각접촉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여섯 감각접촉은 여성 감각장소가 그 근원이며 여섯 감각장소로부터 일어나고
여섯 감각장소로부터 생기며 여섯 감각장소로부터 발생한다.”
saḷāyatanañcidaṃ, bhikkhave, kiṃnidānaṃ kiṃsamudayaṃ kiṃjātikaṃ kiṃpabhavaṃ?
saḷāyatanaṃ nāmarūpanidānaṃ nāmarūpasamudayaṃ nāmarūpajātikaṃ nāmarūpapabhavaṃ.
8. “비구들이여, 그러면 여섯 감각장소는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여섯 ●감각장소는 정신 · 물질이 그 근원이며 정신 · 물질로부터 일어나고
정신 · 물질로부터 생기며 정신 · 물질로부터 발생한다."
nāmarūpañcidaṃ, bhikkhave, kiṃnidānaṃ kiṃsamudayaṃ kiṃjātikaṃ kiṃpabhavaṃ?
nāmarūpaṃ viññāṇanidānaṃ viññāṇasamudayaṃ viññāṇajātikaṃ viññāṇapabhavaṃ.
9.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신 · 물질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정신 · 물질은 알음알이가 그 근원이며 알음알이로부터 일어나고
알음알이로부터 생기며 알음알이로부터 발생한다.”
viññāṇañcidaṃ, bhikkhave, kiṃnidānaṃ kiṃsamudayaṃ kiṃjātikaṃ kiṃpabhavaṃ?
viññāṇaṃ saṅkhāranidānaṃ saṅkhārasamudayaṃ saṅkhārajātikaṃ saṅkhārapabhavaṃ.
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알음알이는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알음알이는 의도적 행위들이 그 근원이며 의도적 행위들로부터 일어나고
의도적 행위들로부터 생기며 의도적 행위들로부터 발생한다.”
saṅkhārā cime, bhikkhave,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
saṅkhārā avijjānidānā avijjāsamudayā avijjājātikā avijjāpabhavā.
11. “비구들이여, 그러면 의도적 행위들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의도적 행위들은 무명이 그 근원이며 무명으로부터 일어나고
무명으로부터 생기며 무명으로부터 발생한다.”81)
81) “여기서 음식과 갈애 사이에(antare) 하나의 연결(sandhi)이 있고, 갈애와 느낌 사이에 하나의 연결이 있으며, 알음알이와 의도적 행위 사이에도 하나의 연결이 있다. 이와 같이 세 개의 연결과 네 개의 집합(ti-sandhi-catu-saṇkhepa)을 가진 윤회(vaṭṭa)를 가르치셨다.”(SA.ji.29)
“처음에는 과(果)와 인(因)의 연결(hetu-phala-sandhi), 가운데는 인과 과의 연결, 마지막에는 과와 인의 연결이 되어서 세 개의 연결과 네 개의 집합(saṇkhepa)이 되는 것이다.”(SAȚ.ii.28)
♦ “iti kho, bhikkhave,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12.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82)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82) Ee와 Be에는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부터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까지와 §13의 환멸문의 해당 부분이 '… pe …'로 생략되어 나타나지만 Se에는 이처럼 생략되지 않고 나타난다. 이 부분이 생략되어 버리면 위의 §11까지에서 나타난 무명-행…애-음식의 연기구조인지 아니면 12지 연기의 정형구인지가 분명하지 않게 되어서 역자는 Se를 참조하여 이 부분을 다 살려서 옮겼다.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13.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하고,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83)
83) 본경은 특이하게도 ●4식 음식에서부터 출발해서 역으로 갈애-느낌…으로 그 조건발생(연기)을 구명(究明)해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무명에 도달한다. 그런 뒤에 다시 무명에서부터 생-노사까지의 12지 연기로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하여 경을 마무리 짓고 있다.
paṭhamaṃ.
♦ 2. moḷiyaphaggunasuttaṃ (SN 12.12) 몰리야팍구나 경(S12:12) Moḷiyaphagguna-sutta
♦ 12. sāvatthiyaṃ viharati ... pe ...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ḷīkāro āhāro —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ṃ catutthaṃ.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ā”ti.
3. “비구들이여, [13]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네 가지 음식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 [첫 번째요], 감각접촉[觸]이 두 번째요,
●마노의 의도가 세 번째요, 알음알이가 네 번째이다.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네 가지 음식이 있다.”84)
84) “세존께서는 이쯤에서 가르침을 멈추셨다. 왜? 몰리야팍구나 비구라는 삿된 견해에 빠진 자(diṭṭhi-gatika)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스승께서는 그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가르침을 멈추신 것이다.” (SA.ii.29)
♦ evaṃ vutte, āyasmā moḷiyaphagguno bhagavantaṃ etadavoca —
“ko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aṃ āhāretī”ti?
4. 이렇게 말씀하시자 몰리야팍구나 존자85)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알음알이의 음식을 먹습니까?”86)
85) “몰리야팍구나 존자(āyasmā Moliyaphagguna)는 재가자였을 때(gihikāle) 큰 상투(moḷi)를 틀고 있었다. 그래서 몰리야팍구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출가하고서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SA.ii.30)
『맛지마 니까야』「톱의 비유 경」 (M2l/i.122~123)에서 세존께서는 그가 비구니들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고 교계를 하셨다. 본서 「깔라라 경」(S12:32) §3에 의하면 그는 환속하여 재가자가 되었다.
86) 팍구나 존자는 음식이 있다면 그 음식을 먹는 자도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고 이렇게 질문을 드린 것이다. 만일 알음알이도 음식이라 부른다면 이러한 음식을 먹는 어떤 상주불변하는 자아가 알음알이의 배후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인 무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가정이다. 그래서 주석서는 그의 잘못된 질문에 대해서 그의 이름조차도 언급하지 않고 삿된 견해에 빠진 자(diṭṭhi-gatika)라는 용어로 그를 지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해서 호된 평을 하고 있다.
“이 삿된 견해에 빠진 자는 미친 사람과 같다(ummattaka-sadisa). 예를 들면 미친 사람이 바구니(pacchi)를 가지고 길에 나가서 쇠똥이든 돌이든 사람 똥이든 음식 부스러기든 마음에 드는 것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든 아무거나 집어서 바구니에 담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이 이론가도 타당한 것(yutta)이든 타당하지 않은 것(ayatta)이든 아무렇게나 질문을 한 것이다.”(SA.i.30)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āhāretī’ti ahaṃ na vadāmi.
‘āhāre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āhāretī’ti ?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ssa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o’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87)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알음알이의 음식을 먹습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알음알이의 음식은 어떤 [법의 조건이]88) 됩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87) “'나는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āhāretīti ahaṃ na vadāmi).'라는 것은, 나는 어떤 중생(satta)이나 사람(puggala)이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SA.ii.31)
88) [] 안은 주석서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는 “어떤 법의 조건이 됩니까(katamassa dhammassa paccayo)?”(SA.ii.31)를 번역하여 넣은 것이다.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알음알이의 음식은 내생에 다시 태어남[再生]의 발생이라 [불리는 정신 ·물질]의 조건이 된다.89)
그러한 [정신 · 물질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90)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89) “여기서 '알음알이의 음식(viññāṇ-āhāra)'은 재생연결식(paṭisandhicitta)이다. '내생에 다시 태어남再生, 再有]의 발생(ayatiṃ punabbhava-abhinibbatti)'은 이 알음알이와 함께 일어난 정신 · 물질(sahuppanna-nāma-rūpa)이다.”(SA.ii.31)
본서「의도 경」1(S12:38)의 주해도 참조할 것.
『앙굿따라 니까야』「존재 경 (A3:76)에서 세존께서는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저열한 [욕]계에 … 중간의 [색]계에 … 수승한 [무색]계에 알음알이를 확립한다. 이와 같이 하여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punabbhava-abhinibbatti)이 있게 된다.”라고 천명하신다. 이것은 전생에서부터 찰라생 · 찰나멸하면서 상속하는 알음알이가 알음알이의 음식의 역할을 하여 모태에서 금생의 최초의 재생연결식이 되고, 이것이 음식이 되어서 함께 일어나는 정신 · 물질을 생기게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존께서는 연기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알음알이를 알음알이의 음식으로 말씀하고 계시며, 주석서는 이것을 한 생의 최초의 알음알이인 재생연결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을 정신 · 물질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것은 재생연결식이라는 음식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연기의 정형구의식과 명색을 한 생의 최초의 재생연결식과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명색으로 설명하고 있다.
90) “그러한 존재가 있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란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āyatiṃ punabbhava-abhinibbatti)이라 불리는 정신 · 물질이 있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는 뜻이다.”(SA.ii.31)
'識食 · 能招未來有 · 令相續生 · 有有故 有六入處 · 六入處緣觸'
♦ “ko nu kho, bhante, phusa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phusatī’ti ahaṃ na vadāmi.
‘phusa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phusa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ṃpaccayā nu kho, bhante, phasso’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ti.
5.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감각접촉을 합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감각접촉을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감각접촉을 한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감각접촉을 합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고”
♦ “ko nu kho, bhante, vedayatī”ti ?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vedayatī’ti ahaṃ na vadāmi.
‘vedaya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vedaya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ṃpaccayā nu kho, bhante, vedanā’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ti.
6.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느낍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느낀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느낀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느낍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다.'라고.”
♦ “ko nu kho, bhante, tasatī”ti ?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tasatī’ti ahaṃ na vadāmi .
‘tasa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tasa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ṃpaccayā nu kho, bhante, taṇhā’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7.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갈애합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갈애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14]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갈애한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갈애합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고,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다.'라고.”
♦ “ko nu kho, bhante, upādiya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upādiyatī’ti ahaṃ na vadāmi.
‘upādiya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upādiya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ṃpaccayā nu kho, bhante, upādānan’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ti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8.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취착합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이나 사람이] 취착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중생이나 사람이] 취착한다.'고 한다면,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취착합니까?'라는 그대의 이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그것이 타당한 질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타당한 설명을 할 것이다.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고, 취착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다.91)
… 태어남이 있다. …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라고.”
91) “그런데 왜 그는 여기서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존재합니까?'라고 질문을 드리지 않는가? 이 삿된 견해에 빠진 자는 중생(satta)이 바로 존재(bhūta)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에 위배(laddhi-viruddha)되기 때문에 질문 드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존으로부터 계속해서 이것은 이것에 조건된다(idappaccayā idaṃ)라고 듣고 있기 때문에 [연기의 가르침에 대한] 인식(saññatti)이 생겨서 질문을 드리지 않았다. 스승께서도 그가 쓸데없는 질문(tuccha-puccha)을 계속하자 더 이상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서부터는 연달아서(ekābaddhaṃ) 설법을 하신 것이다.” (SA.ii.31)
♦ “channaṃ tveva, phagguna,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ṇhānirodho; 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9. “팍구나여, 그러나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92)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93) 94)
92)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왜 순관과 역관이 다른가? 연기의 가르침에 관한 다른 경들과는 달리 본경에서는 연기법의 역관이 순관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즉 순관에서는 식-명색-육입-촉-수-애…의 10지 연기로 전개되었지만 여기 역관의 시작점에서는 식-명색-육입이 나타나지 않고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六觸處]로부터 시작해서 육촉처-촉-수-애…의 8지 연기로 전개가 되고 있다.(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에 대한 논의는 본서 「외도 경」 (S12:24) §13의 주해를 참조할 것.) 주석서와 복주서는 순관과 역관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이렇게 순관과 역관이 다르게 나타날까? 역자의 견해를 적어 본다. 본경과 주석서에서 보듯이 식은 재생연결식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식과 함께 일어나는 명색과 육입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역관의 시작은 감각접촉의 장소(육촉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석서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식과 명색은 각각 재생연결식과 이 재생연결식과 함께하는 정신 · 물질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본경의 역관에서는 왜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入, saḷāyatana] 대신에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六獨處, cha phassāyatana]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것도 감각장소 자체의 남김 없는 소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곳의 역할을 하는 장소가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이지 감각장소 자체가 남김없이 소멸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문맥에서도 육촉처(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는 적지 않게 나타나지만 연기의 정형구에서 육촉처가 나타나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역자가 컴퓨터로 검색한 바에 의하면 육촉처가 연기의 정형구에서 나타나는 경은 본경과「외도 경」(S12:24) §8과 『디가 니까야』「범망 경」(D1) §3.71의 세 곳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12지 연기가 아닌 연기, 즉 10지 연기를 설하는 본경이나 8지 연기를 설하는 「외도경」 (S12:24) §8에서 역관의 출발점은 육입이 아니라 육촉처이다. 왜 그럴까? 육입이나 식-명색은 소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범망 경」(D1) §3.71에서도 감각장소-감각접촉-느낌-갈애-취착-존재-생-노사의 8지 연기로 62견이 일어남을 밝히신 뒤에 감각접촉의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아서 62견을 극복하는 것을 설하고 계신다. 이 경우도 62견의 소멸은 육촉처를 바르게 앞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말씀이 된다.
그러면 왜 12지 연기에서는 무명멸측행멸, 행멸즉식멸, 식멸즉명색멸, 명색멸즉육입멸, 육입멸즉촉멸이 나타나는 것일까? 12지 연기에서는 그 출발점이 전생의 무명-행이기 때문에 전생의 무명과 행이 소멸하면 금생의 최초의 재생연결식도 소멸하고 아울러 명색과 육입 등도 소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과 행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의 식과 명색은 소멸할 수 없다. 실제로 무명과 행이 나타나지 않는 연기의 정형구에서 'A가 소멸하기 때문에 B가 소멸하고'라는 역관의 공식은 육촉처가 나타나는 경우를 제외한 다른 정형구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10지 연기를 설하는 『디가 니까야』「대전기경」(D14)과 9지 연기를 설하는 「대인연경」(D15)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8지 연기나 10지 연기에서 역관이 육촉처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명백하다고 생각된다. 식과 명색과 육입은 결코 소멸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93) “본경에서는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 사이에 하나의 [인-과의] 연결(sandhi)이 있고, 느낌과 갈애 사이에 하나의 [과-인]의 연결이 있으며, 존재와 태어남 사이에 하나의 [인-과의] 연결이 있다.”(SA.ii.31)
“'알음알이의 음식은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의 조건이 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이전의 존재(purima-bhava)로부터 다음 생의 존재(āyatibhava)의 조건이 되는 근본원인(mūla-kāraṇa)에 의해서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 사이에 하나의 연결(sandhi)이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알음알이란 업형성의 알음알이(abhisaṅkhāra-viññāṇa)를 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SAȚ.i.30)
한편 『맛지마니까야 복주서』는 “업형성의 알음알이란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을 말한다.”(MAȚ.ii.118)라고 설명하고 있다.
12지 연기에서 식과 명색은 둘 다 과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3의 해설 참조) 그런데 본경처럼 무명과 행이 나타나지 않는 연기구조에서 식과 명색이 하나의 연결이 되려면 인과나 과인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복주서는 이처럼 본경에서 식은 인이고 명색은 과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 「의도 경」1(S12:38)의 주해도 참조할 것.
94) 이처럼 주석서는 본경의 가르침을 식-명색-육입-촉…의 10지 연기로 해석하고 여기서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설명한다. 이것은『디가 니까야』「대인연 경」(D15)이 식으로부터 연기를 설명하면서 그 경문에 식을 한 생에 최초로 모태에 드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21)과 궤를 같이 한다. 이처럼 초기불전과 주석서들은 연기각지(緣起各支)에 나타나는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해석하며 특히 식으로부터 출발하는 10지 연기나 9지 연기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dutiyaṃ.
♦ 5. kaccānagottasuttaṃ (SN 12.15) 깟짜나곳따 경(S12:15) Kaccānagotta-sutta
♦ 15. sāvatthiyaṃ viharati.
atha kho āyasmā kaccānagott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kaccānagotto bhagavantaṃ etadavoca —
2. 그때 [17] 깟짜나곳따 존자98)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깟짜나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98) 깟짜나곳따는 Ee: 깟짜야나곳따(Kaccāyanagotta) 대신에 Be, Se: 깟짜나곳따(Kaccānagotta)로 읽은 것이다. Ee: 「찬나 경」(S22:90)에도 깟짜나곳따(Kaccānagotta)로 인용되고 있다.
이 깟짜나곳따 존자(āyasmā Kaccanāgotta)는 우리에게 가전연 존자로 잘 알려진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혹은 마하깟짜야나(Mahā-Kacāyana, 니까야에는 두 가지 표현이 다 나타난다. 마하깟짜나 존자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할릿디까니 경」1(S22:3)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존자와는 다른 사람이다. 깟짜나곳따는 깟짜나 족성을 가진 자라는 뜻인데 깟짜나는 그 당시 유명했던 바라문 가문의 족성이다. 깟짜나곳따라고 이름한 이유는 마하깟짜나 존자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본서 제1권 「깟사빠곳따 경」 (S9:3)에는 깟사빠곳따 존자(āyasmā Kassapagotta)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깟사빠 족성을 가진 자란 의미이다. 깟사빠도 그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인도에서 잘 알려진 바라문 가문의 족성인데 마하깟사빠존자와 구분하기 위해서 깟사빠곳따라 불렀을 것이다.
아무튼 깟짜나곳따 존자는 본경에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본서 제3권 「찬나 경」(S22:90) §9에서는 아난다 존자가 본경의 §4~6을 찬나 존자에게 인용하여 설하는 것이 나타난다. 본경은 이처럼 연기의 가르침에 관한 한 초기부터 잘 알려진 경이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도 중도를 표방하는 근거로 인용되고 있어서 한국 불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경이라 할 수 있다.
본경의 주제는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이며, 세존께서는 12연기가 바로 바른 견해임을 명쾌하게 표방하신다.
“‘sammādiṭṭhi sammādiṭṭhī’ti, bhante, vuccati.
kittāvatā nu kho, bhante, sammādiṭṭhi hotī”ti?
3.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正見], 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는 어떻게 해서 있게 됩니까?”
♦ “dvayanissito khvāyaṃ, kaccāna, loko yebhuyyena — atthitañceva natthitañca.
4.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99)
99) “'대부분(yebhuyyena)'이란 성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많은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두 가지를 의지한(dvaya-nissita)'이란 양 극단(koṭṭhāsa)을 의지한 것을 말한다. '있다는 관념(atthitā)'이란 영원하다는 [견해[常見, sassata] 이다. '없다는 관념(natthitā)'이란 단멸한다는 [견해][斷見, uccheda] 이다.”(SA.ii.32)
“'이 모든 세상은 있고 항상 존재한다.'는 삿된 견해에 빠진 자(diṭṭhi-gatika)가 국집하는(gaṇhāti) 견해(diṭṭhi)가 '있다는 관념'이다. '이 모든 세상은 없고 단멸한다.'라는 삿된 견해에 빠진 자가 국집하는 견해가 '없다는 관념'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형성된 세상(유위의 세상, saṅkhāra-loka)을 뜻한다.”(SAT.ii.32)
역자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으로 풀어서 옮긴 원어는 각각 atthitā와 natthitā이다. 이것은 있다와 없다를 뜻하는 동사 atthi와 natthi에다 추상명사 어미 '-tā'를 붙여서 만든 추상명사이다. 단순하게 취급하여 이 두 단어를 그냥 '있음'과 '없음'으로 옮기면 본서 제3권 『꽃 경」 (S22:94)에서 세존이 인정하시는 '세상의 현자들이 있다(atthi)고 동의하는 것과 없다(natthi)고 동의 하는 것'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본서 제3권 「꽃 경」(S22:194)과 그곳 §3의 주해 참조)
역자는 복주서의 해석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복주서는 "sā diṭṭhi atthitā"와 "sā diṭṭhi natthitā”(SAȚ.ii.32)로 표현하여 atthitā와 natthitā가 단순한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 '있다는 견해(diṭṭhi)'와 '없다는 견해'로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보디 스님의 제안도 받아들이면서 역자는 이 둘을 각각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으로 풀어서 옮겼다.
lokasamudayaṃ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lokanirodhaṃ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atthitā sā na hoti.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100)
100) “'세상의 일어남(lokasamudaya)'이란 형성된 세상(saṅkhāra-loka)의 생겨남(nibbatti)을 뜻한다. '바른 통찰지(sammappaññā)'란 위빳사나와 함께하는 도의 통찰지(savipassanā maggapaññā)를 뜻한다.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는 것은, 형성된 세상(saṅkhāra-loka)에 대해서 법들이 생겨나는 것(nibbatta)을 통찰지로 보게 되면, 없다는 단견(natthīti uccheda-diṭṭhi)이 일어나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의 소멸(loka-nirodha)'은 형성된 것들의 부서짐(bhaṅga)이다.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yā loke atthitā sā na hoti),'는 것은, 형성된 세상에 대해서 법들이 부서지는 것(bhijjamāna)을 통찰지로 보게 되면, 있다는 상견(atthīti sassata-diṭṭhi)이 일어나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아가서 '세상의 일어남'은 순관(유전문)을 통한 조건의 형태(anuloma-paccay-ākāra)이다. '세상의 소멸'은 역관(환멸문)을 통한 조건의 형태(paṭiloma-paccay-ākāra)이다. 왜냐하면 [조건이라는] 세상의 의지처(loka-nissaya)를 보는 자는 조건들이란 단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건 따라 일어난 것(paccay-uppanna)은 단멸하지 않음(anuccheda)을 본다. 그래서 그에게는 없다는 단견(natthīti uccheda-diṭṭhi)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건들의 소멸(paccaya-nirodha)을 보는 자도 조건들이란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 따라 일어난 것의 소멸(paccay-uppanna-nirodha)을 본다. 그래서 그에게는 있다는 상견(atthīti sassata-diṭṭhi)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뜻이다.” (SA..ii.32~33)
여기서 단멸(uccheda)과 소멸(nirodha)을 구분해서 음미해야 한다. 단멸은 없어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멸절과 단절을 말하고(단멸론), 소멸은 일어난 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upayupādānābhinivesavinibandho khvāyaṃ, kaccāna, loko yebhuyyena.
tañcāyaṃ upayupādānaṃ cetaso adhiṭṭhānaṃ abhinivesānusayaṃ
na upeti na upādiyati nādhiṭṭhāti — ‘attā me’ti.
‘dukkhameva uppajjamānaṃ uppajjati, dukkhaṃ nirujjhamānaṃ nirujjhatī’ti
na kaṅkhati na vicikicchati aparapaccayā ñāṇamevassa ettha hoti.
ettāvatā kho, kaccāna, sammādiṭṭhi hoti.
5.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 101)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102)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103)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104)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105)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106)
101)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는 긴 합성어 upay-upādāna-abhinivesa-vinibaddho를 옮긴 것인데, upaya는 '집착'으로(문맥상 Se, Fe의 upāy-대신 Be의 upay-로 읽었음), upādāna는 '취착'으로, abhinivesa는 '천착'으로, vinibaddha(Be, Ee의 vinibandho 대신 Se의 vinibaddho로 읽었음)는 '묶여 있음'으로 옮긴 것이다. 이렇게 옮긴 것은 주석서가 제시한 대로 합성어를 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여기서 집착과 취착과 천착은 모두 갈애(taṇhā)와 사견(diṭṭhi)에 의한 집착과 취착과 천착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중생들은 갈애와 사견 때문에 삼계의 법(tebhūmaka-dhamma)들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는 등의 형태(ākāra)들로 집착하고 취착하고 천착하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SA.ii.33)
물론 여기서 갈애에 의한 집착과 취착과 천착은 대상을 좋아해서 생기는 것이요, 사견에 의한 집착과 취착과 천착은 대상을 상 · 락 · 아 ·정(常樂我淨) 등으로 잘못 알아서 생기는 것이다.
102) Ee에는 'attā na me(나의 자아가 아니다.)'로 나타나지만 Be, Se에는 'attā me(나의 자아다)'로 나타난다. 문맥상 Be, Se의 '나의 자아다.'가 적당하다. 보디 스님도 이렇게 옮겼다.
103)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는 tañcāyaṃ upayupādāmaṃ cetaso adhiṭṭhānaṃ abhinivesānusayaṃ na upeti na upādiyati nādhiṭṭhāti 'atta me'ti라는 해석하기에 쉽지 않은 문장을 주석서에 입각하여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tañcāyaṃ(= taṃ ca ayaṃ)'은 '그러나 이(ayaṃ) 성스러운 제자(ariya-sāvako)는 이러한(taṃ) 집착과 취작을 …'로 읽어야 한다. 'cetaso adhiṭṭhānaṃ'이란 마음이 머무는 곳이 됨(cittassa patiṭṭthana-bhūtṃ)'을 말한다. 갈애와 사견에(taṇhā-diṭṭhisu) 해로운 마음[不善心, akusala-citta]을 확립하면(patiṭṭhāti) 거기에 대해서 천착하게 되고 잠재성향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둘을 마음이 머무는 곳(adhiṭṭhāna)이라 부르고 천착과 잠재성향(abhinivesa-anusaya)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고 고수하지 않는다.” (SA.ii.33)
104) “'단지 괴로움(dukkham eva)'이란 것은 단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일 뿐(pañc-upādāna-kkhandha-matta)이란 뜻이다.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na kaṅkhati na vicikicchati).'란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어서 여기에 다른 어떤 중생(satta)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SA.ji.33)
이 문맥에 가장 적당한 것이 와지라 비구니의 게송(본서 제1권 「와지라 경」(S5:10) {553)}~{555})이다. 이렇게 하여 중생이라는 고정관념[衆生相, satta-saññā]이 극복되는 것이다. 105)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aparapaccayā ñāṇaṃ).'는 것은 남을 의지하지 않고(aññassa apattiyāyetvā)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지혜(atta-paccakkha-ñāṇa)를 말한다.”(SA.ii.33)
여기서 paccakkha는 눈앞에 드러난(prati+akṣa)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명학(因明學)에서 말하는 직접지[現量, Sk. pratakṣa]와 같은 말이다. 추론지[比量, anumāna]나 비유지[譬喩量 upamāna]나 성인의 가르침[聖言量, āpta-vaca]을 통해서 알게 된 지혜가 아니고 직접 체득한 지혜라는 뜻이며, 온 · 처 · 계 · 근 · 제 · 연으로 대표되는 법에 대한 지혜가 생긴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류과 이상의 성자의 경지이기도 하다.(SA.ii.282)
✼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지혜(atta-paccakkha-ñāṇa)'를
.............................................아빈냐(自內證 abhiññā)라고 말한다.
106)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중생이라는 고정관념(satta-saññā, 衆生相)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바르게 봄(sammā-dassana)이 있게 된다고 혼합된 바른 견해(missaka-sammādiṭṭhi)를 말씀하셨다.”(SA.ii.34)
여기서 혼합된 것(missaka)이란 세간적인 것(lokiya)과 출세간적인 것(lok-uttara)에 다 통용되는 것을 말한다.
♦ “‘sabbaṃ atthī’ti kho, kaccāna, ayameko anto. ‘sabbaṃ natthī’ti ayaṃ dutiyo anto.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6.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107)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108) 여래는 법을 설한다.
107) “'하나의 극단(eko anto)'이라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정점이 되는 극단(nikūṭanta)이요 저속함의 극단(lāmak-anta)인 첫 번째 것으로 상견(sassata)을 말한다. '두 번째 극단(dutiyo anto)'이라는 것은 두 번째 [견해로써] '모든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 생겨난 견해(uppajjanaka-diṭṭhi)인데 이것도 정점이 되는 극단이고 저속함의 극단이다. 이것이 두 번째인데 단견(uccheda)을 말한다.”(SA.ii.34)
108) '중간[中]에 의해서'는 majjhen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와 복주서는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래「나체수행자 깟사빠 경」(S12:17)에서는 이 majjhena를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는 것은 상견과 단견이라 불리는 양 극단(ubha anta)을 의지하지 않고(anupagamma) 제거하고(pahāya) 집착하지 않고(anallīyitvā),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에 서서 설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법을 설하셨는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는 것 등이다.”(SA.ii.36)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이처럼 양극단을 여읜 중간[中, majjha]을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초기불전 자체를 두고 보자면 중도는 팔정도를 말한다. 예를 들면 4부 니까야(Nikāya)에는 본서 제6권 「초전법륜 경」(S56:11)을 위시하여 대략 6군데에서 중도(majjhimā paṭipadā)가 나타나는데 4념처와 37조도품을 중도라고 설하고 계신『앙굿따라 니까야』「나체수행자 경」 1/2(A3:151~152/i.295)를 제외한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이 되고 있다.(본서 제4권 「라시야 경」(S42:12) §4 참조) 물론 37조도품도 팔정도가 핵심이요 4념처는 팔정도의 바른 마음챙김의 내용이다. 그리고 『무애해도』(Ps.ii.147)에도 팔정도가 중도로 표방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석서 문헌을 제외한 모든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팔정도를 뜻한다고 이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역자는 중간과 중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본경에서처럼 유무의 양극단의 중간이며 고락(苦樂)과 단상(斷常)의 양극단의 중간(본서「나체수행자 깟사빠 경」 (S12:17) §7 이하 참조)으로 바른 견해(정견)의 내용이지만, 중도는 팔정도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하면 팔불중도(八不中道, 팔불중도는 중국 길장(吉藏) 스님의 「중관론소」(中觀論疏)에 여러 번 나타나는 대승불교에는 잘 알려진 술어임.)나 공 · 가 · 중도(空·假·中道)로 정리되는『중론』(中論, 中論頌, Mula-madhyamakakarika)「관사제품」의 삼제게(三諦偈, 24:18)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불전에서의 중도는 이처럼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특히 삼제게는 연기(緣起)적 현상을 공 · 가 · 중도로 통찰하는 것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중론』의 중도는 연기에 대한 통찰지이며, 이것은 본경에서 보듯이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의 내용이고, 이것은 유무의 중간(中, majjha]이다. 그러므로 용수 스님을 위시한 중관학파에서 주창하는 중도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을 말하는 것이지, 팔정도 전체로 정의되는 실천도로서의 중도는 아니라고 해야 한다.
역자가 중도를 자꾸 팔정도로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도를 일 · 이 · 거 · 래 · 유 · 무 · 단 · 상(一異去來有無斷常)의 팔불(八不)이나 공 · 가 · 중(空假中) 등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오히려 관념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아주 크기 때문이며, 실제 한국불교에 이런 모습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도가 팔정도인 이상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써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 말 그대로 도닦음(paṭipadā)을 말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道)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빠띠빠다(paṭi-padā)가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ā), 즉 도닦음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中이란 양 극단과 대비되는(반대되는) 觸滅 등 이고
(A6:61, Stn5-2: 觸이라는 극단은 연이생법이면서 연기법이다.)
中道란 고멸도(성제, 37보리분법)이고
緣起란 고집(성제)이다.
그러므로 緣起에 대한 통찰(正見)은 中道에 의해서 도달한 中이라고 할 수 있어도
고집(괴로움의 원인 - 觸 등)이 中 혹은 中道라고는 할 수 없다.
마치 <도둑질>은 나쁜 것이지만
<도둑질은 나쁜 것>이라고 [아는 것]은 좋은 것인 것과 같이.
✼ 三諦偈는 <연기를 중(도)로 통찰>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연기를 중도의 동의어>로 잘못 설명하고 있다.
명백한 오류이다.
* majjhe sitā brāhmaṇa brahmapatti.
중간[中]을 의지하여 브라흐마가 되는 것
Case s. pl.
nom majjho majjhā
voc majjha majjhā
acc majjhaṃ majjhe
ins majjhena majjhehi
dat majjhāya, majjhassa majjhānaṃ
abl majjhā, majjhasmā,majjhamhā, majjhato majjhehi
gen majjhassa majjhānaṃ
loc majjhe, majjhasmiṃ majjhesu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근심·탄식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하고,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pañcamaṃ.
S12:17
♦ “‘so karoti so paṭisaṃvedayatī’ti kho, kassapa,
ādito sato ‘sayaṃkataṃ dukkhan’ti iti vadaṃ sassataṃ etaṃ pareti.
9. “깟사빠여,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견에 떨어지고 만다.123)
123)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 ”로 옮긴 원어는 so karoti so paṭisaṃvediyatīti kho kassapa ādito sato sayaṃkataṃ dukkhanti iti vadaṃ이다.
이 문장을 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해서 옮기면 “처음부터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로 해석해야 한다. 'ādito sato(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번역이 달라지는 것이다. 역자는 보디 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 본문처럼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옮겼다. 미얀마어 번역본에도 이렇게 번역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ādito sato(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는 소유격인데 주석서는 이것을 처소격을 뜻하는 소유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35)
주석서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처음부터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여기서 ‘괴로움'이란 윤회의 괴로움(vaṭṭa-dukkha)을 뜻한다. 이 주장은(iti vadaṃ)에서 먼저 나타난 '처음에'라는 단어(ādi-sadda)는 나중에 나타나는 '상[견]'이라는 단어(sassata-sadda)와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 … 그래서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ādito va) 상견을 밝히고 상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왜? 그의 이러한 견해는 '짓는 자(kāraka)'와 '경험하는 자(vedaka)'는 오직 하나라고(ekam eva) 취하는 상견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SA.ii.35~36)
‘añño karoti añño paṭisaṃvedayatī’ti kho, kassapa,
vedanābhitunnassa sato ‘paraṃkataṃ dukkhan’ti iti vadaṃ ucchedaṃ etaṃ pareti.
깟사빠여,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견에 떨어지고 만다.”124)
124) 이 부분도 바로 앞의 주해와 같은 이유로 역자는 주석서와는 다르게 옮겼다.
주석서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처음에 '다른 사람이(añño) 짓고 다른 사람이(añño) [그 과보를] 경험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는 '짓는 자는 여기서 단멸한다. 그러면 그가 지은 것을 다른 자가 경험하게 된다(tena kataṃ añño paṭisaṃvediyati).'라는 이러한 단견과 함께하는 느낌에 의해서 두들겨 맞고(abhitunna) 찔렸기(viddha)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 단견을 밝히고 단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왜? 그의 이러한 견해는 단견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SA.ii.36)
ete te, kassap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10. “깟사빠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125)
125)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는 것은 상견과 단견이라 불리는 양 극단(ubha anta)을 의지하지 않고(anupagamma) 제거하고(pahāya) 집착하지 않고(anallīvitvā),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에 서서 설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법을 설하셨는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일어남을(kāraṇato phalaṃ), 그리고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kāraṇa-nirodhena) 그 [결과]가 소멸함을 밝히신 것이지 어떤 짓는 자(kāraka)도 경험하는 자(vedaka)도 상정하시지(niddiṭṭha) 않았다.”(SA.ii.36)
아무튼 여기서 연기는 고락(苦樂)을 여의고 단상(斷常)을 여읜 것으로 설명되며 특히 고락의 자작자수(自作自收)와 자작타수(自作他收)의 문제를 짚어보고 있다. 중간[中]과 중도(中道)에 대해서는 위「깟짜나곳따 경(S12:15) §6의 주해를 참조할 것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S12:18
♦ “‘sā vedanā, so vedayatī’ti kho, timbaruka,
ādito sato ‘sayaṃkataṃ sukhadukkhan’ti evampāhaṃ na vadāmi.
5. “띰바루까여, '느낌과 느끼는 자가 같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을 [상정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견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131)
131) “'느낌과 느끼는 자가 같다고 한다면(sā vedanā so vediyati)'이라고 시작하신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sayaṃkataṃ sukhadukkhaṃ).'라는 [잘못된] 믿음을 물리치기 위해서(laddhiyā nisedhanattha) 설하셨다.
만일 처음에 '느낌과 느끼는 자는 같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느낌은 느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vedanāya eva vedanā katā)이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 느낌이 있었음을 인정하게 되어 상견(sassata-diṭṭhi)을 설하고 상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SA.ii.37~38)
‘aññā vedanā, añño vedayatī’ti kho, timbaruka,
vedanābhitunnassa sato ‘paraṃkataṃ sukhadukkhan’ti evampāhaṃ na vadāmi.
띰바루까여, '느낌과 느끼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견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132)
132) “'느낌과 느끼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aññā vedanā añño vediyati)'이라고 시작하신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paraṃ kataṃ sukhadukkhaṃ).'라는 [잘못된] 믿음을 물리치기 위해서 설하셨다.
만일 처음에 '느낌과 느끼는 자는 다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 있었던 짓는 자로서의 느낌은 나중에 단멸하고 다른 자가 그의 행위의 결과를 경험하는 것이 된다. 그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는 이러한 단견(uccheda-diṭṭhi)과 함께하는 느낌에 의해서 두들겨 맞고 찔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 단견을 설하고 단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SA.ii.38)
ete te, timbaruk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6. “띰바루까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 9. bālapaṇḍitasuttaṃ (SN 12.19) 우현(愚賢) 경(S12:19) Bālapandita-sutta133)
133) 본경은 12연기를 네 개의 집합(catu-saṅkhepa)과 20가지 형태(vīsatākāra)를 토대로 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해석하는 전통적인 견해(Ps.i.51~52; 『청정도론』XVII.288-298; 『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4~8 등 참조)의 단초가 되는 중요한 경이다. 아래 §6의 주해도 참조할 것.
♦ 19. sāvatthiyaṃ viharati ... pe ...
“avijjānīvaraṇassa, bhikkhave, bālassa taṇhāya sampayuttassa
evamayaṃ kāyo samudāgato.
iti ayañ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itthetaṃ dvayaṃ,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 yehi phuṭṭho bālo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ayati etesaṃ vā aññatarena”.
3.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어리석은 자의 [24]
이 몸134)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 몸과 밖의 정신 · 물질135)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한 쌍이 존재하게 된다.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136)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에 닿거나 이들 가운데 하나에 닿아서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137)
134) “여기서 '이 몸(ayaṃ kāyo)'이란 자신의(attano) 알음알이와 함께한(saviññāṇaka) 몸을 말한다.”(SA.ii.38)
135) “'밖의 정신 · 물질(bahiddhā nāma-rūpaṃ)'이란 남들의(paresaṃ) 알음알이와 함께한 몸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는 [이 몸이라는 표현으로는] 자신의 다섯 무더기[五蘊, pañca khandhā]와 여섯 감각장소[六處, cha āyatannā]를, 그리고 [밖의 정신 ·물질이라는 표현으로는] 남의 오온과 육처를 드러내고 있다.”(SA.ii.38)
밖의 정신 · 물질을 이렇게 남의 오온과 육처로 한정짓는 것은 조금 의아스러운 설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히려 알음알이의 대상이 되는 모든 정신 · 물질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른 경들에서는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imasmiṃ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ā ca sabbanimittesu)”라는 표현이 나타난다.(본서 S18:21; 22; 본서 제3권 S22:71; 72 등, 본서 「잠재성향 경」(S18:21) §3의 주해 참조)
136)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dvayaṃ paṭicca phasso)'라고 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눈과 형색 등의 한 쌍을 조건으로 눈의 감각접촉 등이 설해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안의 감각장소들[內處]과 밖의 감각장소들[外處](ajjhattika-bāhirāni āyatanāni)을 말한다. 이러한 경우를 큰 한 쌍(mahā-dvaya)이라 한다. 그리고 여섯 감각장소들(saḷ`ev` āyatanāni)이란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六獨處, phass-āyatanāni]이니, 감각접촉의 원인이 되는 것(phassa-kāraṇa)이다.”(SA.ii.38~39)
137) 본경의 연기구조는 다른 경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되어 있다. 식-명색-촉-육입-수의 구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디가 니까야』「대인연경」(D15)에는 육입이 나타나지 않고 식-명색-촉-수-애…의 구조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처럼 육입이 촉과 수 사이에 나타나는 경우는 다른 연기의 가르침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주석서는 이 육입이 촉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은 하고 있다. 즉 육입이 명색과 촉 사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본경은 특이한 구조의 연기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주석서는 본경의 연기구조를 알음알이를 가진 자신의 몸과 남의 정신 · 물질(명색) 사이에만 국한해서 연기를 설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듯하다.
여기서의 身은 무명-행에 의한 (識을 지닌) 身이라고 이해된다.
그 다음에 연기된 법이 名色이다.
[이때(識을 지닌) 身의 입장에서 명색은 外이다.
지금의 상황은 사후-생전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러한 身과 名色(식-명색)이라는 한 쌍에 의해서 觸이.
그리고(혹은) 六入들이 생겨난다.
여기까지가 욕계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무명-행-식-명색-육입)이다.
그 결과 6처나 6처 중 하나에 (觸)接하여
락-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욕계에 태어난 중생들의 일상사이다.
이러한 것은 우자나 현자나 모두 과거 누겁의 업에 의한 과보이므로 동일하지만
그 이후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가 각각 갈라진다는 경문이다.
♦ “avijjānīvaraṇassa, bhikkhave, paṇḍitassa taṇhāya sampayuttassa evamayaṃ kāyo samudāgato.
iti ayañ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itthetaṃ dvayaṃ,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yehi phuṭṭho paṇḍito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ayati etesaṃ vā aññatarena”.
4.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현명한 자의 몸도 이와 같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 몸과 밖의 정신 · 물질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한 쌍이 존재하게 된다.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에 닿거나 이들 가운데 하나에 닿아서
현명한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S12:20
♦ “katamo ca, bhikkhave, paṭiccasamuppādo?
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ṇaṃ.
uppādā vā tathāgatānaṃ anuppādā vā tathāgatānaṃ,
ṭ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paccayatā.
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연기인가? 143)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144)이며, 법으로 확립된 것이고, 법으로 결정된 것이며,145)
이것에게 조건되는 성질[此緣性]146) 이다.
143) 이하 본경의 §§3~4는 『청정도론』XVII.5에 연기를 설명하는 경전적 근거로 길게 인용되어 나타난다.
144) “'존재하는 요소[界](ṭhitāva sā dhātu)'란 이 연기의 고유성질(paccaya-sabhāva)은 확립되어 있다(ṭhito va)는 뜻으로 태어남이 늙음 · 죽음의 조건이 되지 않는 경우란 결코 없다는 말이다.”(SA.ii.40)
“여기서 요소[界, dhātu]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하는 늙음 · 죽음의 조건(paccaya)을 뜻한다. 이 연기는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해 있었지만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전에는 알려지지가 않았다. 여래는 통찰지로 그 사실을 보고 깨달으셨을 뿐 없는 것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요소는 존재해있었다.'라고 했다.”(Pm.571 = 『청정도론』XVII.5에 대한 주석)
145)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는 요소가 바로 '법으로 결정된 것(dhamma-niyāmatā)'이다. 왜냐하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는 조건 혹은 고유성질이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됨(niyāmatā)이 있고 정의함이 있기 때문이다.” (Pm.571)
界(dhātu)란 鑄型 틀(혹은 기본 골격)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대상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결정짓는 틀이다.
만약 욕계 중생들이라면 대상을 慾(kāma)의 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慾界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색계 무색계도 또한 같다.
이와 같이 界에 니밋따(總相- hologram, nimitta) 형태로
대상에 대한 기억(念, sati)이 확립되어 있어서 대상이 想(산냐)으로 드러나게 된다.
<界에 확립된 相 형태의 念이 想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常樂我淨이라는 기억(Ex. 喜樂相)을
무상-고-무아-부정이라는 기억으로 대체하는 것이 수행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렇게 받아들이는 틀이 비슷한 중생들은 서로 서로 같이 어울리게 되는데(類類相從)
이러한 예는 'dhātuso, bhikkhave, sattā sattehi saddhiṃ saṃsandanti samenti.
중생들은 요소에 따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린다.(It3:29)' 등에서 나타난다.
본 경문에서 연기(無明界)도 또한 이런 틀이어서
무명이라는 기본 틀에서 행한 업들은 사후 識으로 연기되고 또한 명색 등으로 연기되는 것은
이미 그 틀은 정해져 있다(ṭhitāva sā dhātu)는 말씀이다. - 여래께서 오시던 오시지 않던.
146) '이것에게 조건되는 성질[此綠性]'은 idappaccayatā를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ida(이) + paccayatā(조건의 성질)로 분석된다. 이것은 무명연행(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고)부터 생연노사(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까지의 연기의 정형구 전체를 지칭하는 술어이다. 여기서 ida(이것)는 12가지 연기각지들 각각을 지칭한다.
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ā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passathā’ti cāha — ‘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ṇaṃ’”.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관통하였다. 완전하게 깨닫고 관통한 뒤
‘보라!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알게 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147)
147) 본 문단은 『청정도론』 (Vis.XVII.5)에 연기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문장으로 그대로 인용되어 나타난다. 이 문장을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청정도론』에서 가장 길고 가장 난해하다고 일컬어지는 제17장의 연기의 해설이 전개된다.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출현 경」(A3:134)에서 이 문장은 “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는 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 등으로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의 무상 · 고 · 무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본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는, 부처님은 없는 법을 새로 만드신 분이 아니라 연기나 제법의 무상 · 고 · 무아와 같은 세상의 진리를 드러내어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세존 스스로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없는 진리(법)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신 분이요 그분의 제자들은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도닦는 자들이다.
avijjāpaccayā, bhikkhave, saṅkhārā uppādā vā tathāgatānaṃ anuppādā vā tathāgatānaṃ,
ṭ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paccayatā.
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ā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passathā’ti cāha ‘avijjāpaccayā, bhikkhave, saṅkhārā’.
iti kho, bhikkhave, yā tatra tathatā avitathatā anaññathatā idappaccayatā —
ayaṃ vuccati, bhikkhave, paṭiccasamuppādo.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법으로 확립된 것이고, 법으로 결정된 것이며, 이것의 조건짓는 성질[此終性]이다.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26] 관통하였다.
완전하게 깨닫고 관통한 뒤 '보라!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라고
알게 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
4.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기서 진실함, 거짓이 아님,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
이것의 조건 짓는 성질,148)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
148) 여기서 '진실함', '거짓이 아님',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 '이것의 조건짓는 성질'은 각각 tathatā, avitathatā, anaññathatā, idappaccayatā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실함 등은 조건의 모습(paccay-ākāra)에 대한 동의어(vevacana)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각각의 조건들에 따라 각각의 법들이 생기기 때문에 이것을 '진실함[如如, tathatā]'이라 했다. 조건들이 모일 때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조건]으로부터 법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avitathatā)'이라 했다. 다른 조건으로부터 이 법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예를 들면, 행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생기지 다른 법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anaññathatā)'이라 했다. 앞서 말한 이 늙음 · 죽음의 조건이기 때문에 혹은 조건의 모임(samūha)이기 때문에 '이것의 조건짓는 성질(idappaccayatā)'이라 했다.”(SA.ii.41; 『청정도론』 XVII.6)
본경의 §§3~4는 전문이 『청정도론』 XVII.5에 인용될 정도로 연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경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본서 제6권 「진실함 경」(S56:20)과 「진실함 경」 (S56:27)에서는 사성제에도 이 '진실함, 거짓이 아님,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님'의 셋이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연기란 고집(성제, 이른바 유전문)을 말하지
고滅(성제, 이른바 환滅문)을 연起라고 하지 않는다.
S12:1에 연기란 무엇인가 정의 되어 있으므로 참고.
♦ “katame ca, bhikkhave, paṭiccasamuppannā dhammā?
jarāmaraṇaṃ, bhikkhave, aniccaṃ saṅkhataṃ paṭiccasamuppannaṃ
khayadhammaṃ vayadhammaṃ virāgadhammaṃ nirodhadhammaṃ.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연기된[緣而生] 법들인가?
비구들이여, 늙음 · 죽음은 무상하고 형성되었고[有爲]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며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며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며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ㅡㅡㅡㅡ
연기란 생겨남 조건짓는 성질에 방점을 두면 유전문만을 연기라 해야한다는게 적절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다음카페] S12. 제2장 음식 품 https://m.cafe.daum.net/pali-study/8Xy1/2552?svc=cafeapp
첫댓글 사식이라는 것에 대하여(1)
경전에 “食(āhāra)의 集(samudaya)으로부터 身(kāya)의 集이 있고, 食의 滅(nirodha)로부터 身의 사라짐(atthagama, 소멸)이 있다.”[●SN. vol.5. p.184]라고 설해질 때, 그 ‘食(āhāra)’이라는 것에는 4종류가 있습니다.
①덩어리로 된 음식은: 육체적인 몸을 지탱해주고
②감각접촉[觸]은: 느낌을 지탱해준다
③마노의 의도는: 삼계에 태어나는 것을 지탱해주는데, (그 이유는) 의도는 업이며 업은 재생을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④알음알이는: 정신-물질{名色)의 합성체를 지탱해준다
3. 아비담마의 방법에 의하면
①덩어리로 된 음식은 - 이 몸에서 네 가지 요인으로 생기는 물질적인 현상을 (지탱해주고), (여기서 네 가지 요인으로 생긴 물질이란: 업, 마음, 온도, 음식에서 각각 생긴 물질을 말한다)
②나머지 셋은 - 그 각각과 함께 일어나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을 지탱해준다
③이들 음식을 선, 불선, 무기로 판별해보면
㉠덩어리로 된 음식은 - 물질이므로 무기이고
㉡나머지 세 가지 정신적인 음식은 - 선, 불선, 무기 셋에 다 해당된다.
정신적인 음식(촉식, 의사식, 식식)도 먹어주어야 한다. 정신적인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 사람의 정신은 기능을 잃어버릴 것이다. 주의할 것은 먹는 음식에 적당량을 알아야 하듯이 정신적인 음식을 먹을 때에도 적당량을 알아야 할 것 같다.
㉠감각접촉(觸食)은 느낌을 가져오므로 감각접촉을 음식이라 한다. 눈에는 안촉, 귀에는 이촉, 코에는 비촉, 혀에는 설촉, 몸에는 신촉, 마음에는 의촉을 먹어주어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안보고 안 듣고 안 냄새 맡고 안 맛보고 안 몸에 닿고 마음속으로 대상과 연결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기능을 잃어버려서 잘 보지도 못하고 잘 듣지도 못하고 잘 냄새 맡지도 못하고 잘 맛보지도 못하고 잘 감촉을 느끼지도 못하고 잘 생각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의도(意思食)는 일반적으로 의도적 행위를 하여 업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음식이다. 이 ‘마음(마노)과 함께 한 의도라는 음식’(마노산쩨따나 아하라)은 보통은 선하고 불선한 의도를 가지고 지은 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살아가면서 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즉 선한 업을 짓거나 불선한 업을 지으면서 살아간다. 그 결과 욕계/색계/무색계에 태어나므로
의도(적 행위)가 다음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음식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알음알이(識食)도 음식인데, 여기서 알음알이는 먼저 한 생의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을 말하거나, 십이연기에서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발생한다(識緣名色)’할 때의 그 알음알이와 관계가 있다. 태어날 때 첫 번째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부를 때, 이 재생연결식이 제일 먼저 생겨나고, 이 재생연결식이 생겨날 때 명색(名色, 정신-물질)도 (함께) 생겨나게(가져오게) 하므로, 여기서 알음알이(재생연결식)를 음식이라고 한다. 또는 재생연결식 다음부터의 알음알이가 계속해서 일어날 때도 동시에 명색(名色, 정신-물질)을 생겨나게 하므로, 알음알이가 명색이 일어나는(발생하는)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된다는 뜻에서 알음알이를 음식이라고 한다.
참조, 음식 경(S12:11), 아들의 고기 경(S1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