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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생애와 사상'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 프러시아령 작센 주의 한 시골 마을인 뢰켄에서, 루터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알 루드비히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어머니 쪽인 엘라 가, 할머니 쪽인 클라우제 가도 각지에 있어서 목사 또는 지방 감독 목사의 요직에 있었다. 생애를 통해 기독교에 대하여 가장 파괴적인 공격자였던 니체는, 이러한 종교적인 가계의 출신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카알은 신경질적이지만 온화하고 상냥한 인품으로, 특히 음악을 좋아했다. 니체의 음악에 대한 애호는 아버지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싹텄다. 어머니 프란시스카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분이었다.
니체에게는 두 살 아래인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와 남동생 요셉이 있었는데, 요셉은 두 살 때 죽었다. 니체가 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뇌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아버지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니체의 일가는 나움부르크로 이주했다. 시골의 평온한 생활에서 도시 생활로 바뀐 것이다.
순종적이고 성실하고 섬세한 성격의 니체는, 고독을 좋아하고 예의 범절을 잘 지켰으며 근엄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작은 목사님>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는 일찍부터 시를 짓기도 하고 성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열 네 살 때, 엄격한 수도적 생활과 인문주의적 교육으로 유명한 포르타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의 6년 동안은, 니체의 고전적 교양의 기초와, 고대에의 관심을 넓힌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그의 왕성한 지적 정열은 고전학에 한하지 않고, 문학. 철학. 음악. 종교 등 모든 방면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병적인 욕망>이었다. 그는 문예와 예술을 위한 작은 서클 <게르마니아>를 만들어, 그 동인지에 수필. 시. 음악 등을 발표했다. <나의 생애>가 씌어진 것도 이 시기이다.
이 때 그는 셰익스피어. 휠더린. 쉴러 등을 애독하고, 피히테, 에머슨을 존경했다. 이 때부터 평생토록 그를 괴롭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이 빈번해졌다.
1864년, 그는 본 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 그는 신학과 철학을 동시에 연구하면서, 어머니의 희망에 따라 목사가 될 것인가, 자유로운 지적 모험가로서 학문의 길을 갈 것인가, 잠시 진로 선택에 대해 고뇌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대학에서의 전공을 고전 문헌학으로 결정했다. 포르타에서 받은 고전 교육의 영향, 그 자신의 고대에의 사랑, 문헌학자 리첼 교수에 대한 존경과 그의 권유, 그리고 신학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본 대학에서 일 년을 공부한 다음, 그는 리첼 교수를 따라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겼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식에 이르기 위한 신중함이나 정밀함을 마지막까지 잃지 않으려 하는 문헌학자의 인내력은, 언뜻 보아 니체적인 정열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이것이, 그의 인식에의 길, <지적 성실>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정신의 열광을 진정시키고, 생활을 규제하는 합리적인 힘으로서, 후년의 니체에 의해 자주 주창된, 생에 필요한 훈련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라이프찌히로 옮긴 지 얼마 안 된 어느 늦가을 날, 니체는 헌책방에서 한 권의 책을 집어들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였다. 그는, 그 책의 우울. 부정. 체념의 기분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자기의 사명을 확신하는 듯한 문체와 저자의 인격에 끌려 들어, 홀린 듯이 그 책을 탐독한다. 참으로 극적인 정신의 만남이었다.
이 열독은, 철학상의 현실은 처음부터 문제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생을 부정하는 입장인 염세 사상가 쇼펜하우어의 설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생을 긍정하는 사상가가 되는 니체의 생각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만년에 그가 감사해야 할 이 스승을 부정하는 것을 기다릴 것까지도 없다. 당시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씌어진 수기 <쇼펜하우어에 관하여> 속에서 이미 그는, 이 사상가의 학문적 결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의 학설은 10여년간 니체에게 최고의 감동과 경악을 주고, 그의 삶의 방법을 인도했다.
쇼펜하우어 속에서 니체가 본 것은, 생의 부정. 가차 없는 자기 부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응시하는 용자의 자세였는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증명을 위한 증명을 한 것이 아니라, 증명의 결과에 참으로 경악했으며, 그것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불행과 절망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계산한 것이 아니다. 그의 위대한 점은, 그가 그것을 직시하고 그것을 견디어 낸 데에 있다. 니체는 그렇게 생각했다.
쇼펜하우어를 체험한 3년 후(1868년), 니체는, 그의 전생애 중 가장 복잡한 애정과 증오의 파문을 일으키게 되는, 리하르트 바그너와 그의 부인 코지마를 처음으로 만난다. 그 감격의 대면 이래 10년동안 30세의 나이 차이가 있는 두 정신은, 이른바 <별의 우정>을 맺게 된다. (니체 24세, 바그너 55세)
1869년 5월, 바젤 대학의 젊은 조교수가 된 니체는, 구름 걸린 알프스의 산정이 바라다보이는 바그너의 별장식 저택을 방문했다. 당시의 바그너는, 시인이며 작곡가이고, 정론가이며, 철학자, 혁명가이기도 한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니체는 바그너의 가장 열렬한 이해자. 귀의자가 된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무엇을 힘입고 있는지를, 또 쇼펜하우어야말로 음악의 본질을 인식한 유일한 철학자임을, 비할 수 없는 열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의 기쁨. 아아, 그것은 너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그너와의 첫 대면의 모습을 친구 로데에게 전한 편지글이다.
그러는 한편, 니체는 세심 엄밀한 방법에 의한 고전 문헌학의 연구에 몰두했다. 라이프찌히에서는 데오그니스. 호메로스. 디오게네스 등을 연구하여, 그 성과에 대해 리첼 교수의 상찬을 받기도 하고, 금발의 여배우에게 구애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움부르크 야전 포병 연대에 입영했다가, 낙마로 부상하여, 일 년 후에 제대했다.
1870년, 아직 25세의 니체는 바젤 대학 고전 문헌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아카데미즘의 세계에서 공전절후라 할 수 있는 이례적인 발탁이었다. 리첼 교수는, 니체의 그 때까지의 업적을 평가하여 무시험으로 학위를 주고, 바젤 대학으로부터의 조회에 이렇게 답했다. <... 그는 장래 도이칠란트 문헌학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설 것입니다. .... 이 라이프찌히의 젊은 고전 문헌학자 사이들에서 그는 우상입니다. ... 그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것입니다.>
학자로서 실로 화려한 데뷔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학문에의 의혹, 고전 문헌학에의 불신, 학자풍에의 경멸감이었다. 여기에서도 니체 특유의 자기 부정. 자기 극복의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는, 종래의 문헌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유형의 문헌학을 만들어 내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과학. 철학. 예술>의 공동이라는 사고 방식이 된다. 결국은 문헌학. 쇼펜하우어. 바그너의 공동이다. 이에의해, 고대 그리스인의 생 본연의 모습의 근저를 해명하고, 바그너로 구현되는 현대 도이칠란트 문화의 발전을 신뢰하여, 양자의 결합에 의해 게르만적 헬레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재흥하려는 강한 열정이 끓어올랐다.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1872년>은 이렇게 하여 태어났다. 여기서 나타나는 소위 염세주의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빌지만, 이미 그 페시미즘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삶의 근본을, 의미도 목적도 없는 맹목의 의지 로 생각하는 쇼펜하우어는, 생을 부정적으로 보고, 최종적으로는 생으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하지만, 니체가 취한 것은 의미도 목적도 없는 암흑의 생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하려고 하는 입장이다. 쇼펜하우어의 <약함의 페시미즘>에 대하여 <강함의 페시미즘>이다. 넘쳐나는 힘으로, 생의 가혹함과 파괴를 시인하는 염세주의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 니힐리즘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후년의 디오니소스적 긍정. 운명애의 싹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긍정이나 시인의 형식은, 그러나 당분간 이 책에서는 예술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예로 인용하여 공격한 것은 언뜻 기이하게 생각되지만, <그리스 비그그 시대에 있어서의 철학-1873년>을 최초로 하는, 그 즈음 씌어진 많은 양의 유고단편군이,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사로고라스 등의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및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 시대를 이상시하고 있음을 종합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포와 심연이 내비치는 생의 근저를 예술에 의해 긍정하려고 하는 그리스인의 생활 방법을, 니체가 여기서 강조한 또 하나의 큰 동기는, 이것이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도이칠란트에 있어서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기쁨과 신뢰감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영지와 바그너 음악이 일체가 된 형이상학적 예술, 도이칠란트 음악에 의한 그리스 문화 부흥의 가능성, 니체는 그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탄생과 성장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그너 부부가 <비극의 탄생>을 감사와 감격으로써 환영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가. 시인. 학자들 사이에서는 박수 갈채가 있어났으리라. 그러나 니체의 은사 리첼 교수는 이 사건에 경악하였다. 은사를 버리고 문헌학을 바그너의 선전에 바친 애제자에게, 그는 냉정했다.
이 책이 출판되고 몇 개월 후, 니체의 포르타 학교 동창생이며 후년 도이칠란트 문헌학계의 대가가 되는 빌라모비치 메를렌돌프가 <비극의 탄생>을 학문의 사도로서 격렬하게 공격하고, 니체의 친구 로데와 바그너가 신문 지상을 통해 이 공격에 대해 반박하는 사건이 있었다. 요컨대, 니체의 처녀작에 대한 학계의 반향은 최악이었다. 대충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학문의 세계와 니체가 나아가려 했던 진리에의 길이 결별하게 된다. 니체가 이윽고 일체의 이해자를 잃고 고독과 냉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이에 의해 확실히 예시되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생애를 통해, 이 처녀작 출판 후 몇 년 동안처럼 이중의 정신 생활이 기이하게 교착된 시기는 없다. 학계의 혹평과 은사의 차가운 침묵은, 분명 그에게는 괴로움이었지만, 바그너의 감격은 <별의 우정>을 더욱 깊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사건과는 별도로, 내면에는 조용히 영위되는 사색에의 침잠이 있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 연구였으며, <진리의 파토스에 관하여> <도덕 외의 의미에 있어서 진리와 허위에 관하여>라는 중요한 두 논문을 중심으로 한 상당량의 단편군을 쓴 일이었다.
그것들 속에서, 니체는 이미 만년의 근본 사상을 취하고, 일체 공무의 우주 공간 속에서 진리를 구하는 인간의 파토스는 허위에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모든 진리난, 공포와 심연 속에서 인간 지성이 개체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그것으로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착각이며, 착각인 것을 잊은 착각이 진리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생에의 깊은 필요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모든 허위도 그 한계에서는 진리라는 사실 등을, 니체 특유의 언어론으로써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미 예술에의 도취는 없다.
이러한 냉정한 회의적 사색이 진행되는 한편, 생의 입장을 강하게 긍정하는 정열적인 <반시대적 고찰> 네 편을 발표한 일이, 앞에서 말한 기이한 이중의 정신 생활이다.
그 제1편 <신앙 고백자로서의 저술가 다비드 슈트라우스>(1873년)는, 당분간 계속되는 바그너에의 기묘한 우정의 표시이다. 당시 화제가 되어 있던, <신구의 신앙>의 저자이며 유행 사상가인 슈트라우스를 들어, 독불 전쟁의 승리에 의한 외적 융성의 그늘에 숨은 도이칠란트 문화의 내용 없음을 고발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바그너의 신비주의보다 슈트라우스의 합리주의에 가까운 지점에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진보주의자로 대표되는 <교양속물> 전부를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적으로서 신랄하게 공격한다.
제2편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1874년)는 특히 중요하다. 이 책은, 당시의 너무나도 역사주의적인 학계의 풍조에 대한 비판으로, 과도한 역사 의식은 생을 압살하는 까닭에, 개인. 민족. 문화 등에 있어서 역사에 대한 적당한 망각과 망은이 필요하다는 것, 비역사적인 것, 초역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조적 정신이야말로 역사적인 것과 나란히 인류의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임을 역설한다.
제3편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1874년), 제4편은 복잡한 심리적 뉘앙스하에 씌어진 찬가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1876년)이다.
이 후, 바그너와의 사이는 급속히 벌어진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스스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니체 자신의 자각에 있었다.
제4편 출판 직후, 바이로이트 극장 낙성의 기념 축제극에 참석한 니체는, 거기서 단지 큰 성공에 취한 대가의 오만과 군중의 어리석은 속물근성(Snobism)을 보았을 뿐이었다. '이것이 그리스의 정신의 부흥인가' 그는 자신이 꿈꾸어 오던 이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바그너만이라도 흥분된 성공의 공허함을 느껴 주기를 바랐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바그너는 이미 기독교적인 <파르지팔>의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신앙에의 성실함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고, 거장의 배우적인 몸짓만이 있을 뿐이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해다>와 그 밖의 작품 속에, 이후 바그너는 가짜 위대함을 나타내는 자로서, <광대> <배우> <마술사>로 희화화되게 된다. 니체의, 천재를 숭배하고 예술에 의한 생의 긍정을 원했던 시대는, 이렇게 바이로이트의 환멸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 환멸이 너무나 컸던 까닭에, 그에 이어지는 것은 극단적인 고독과 부정의 시기였다. 이제가지 <천재>로부터 받고 있던 압력에서 벗어나, 해방된 <자유 정신>, 자유로운 독립인으로서, 문화. 도덕. 종교 등, 일체의 가치를 냉엄하게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 비판의 척도로서, 이제까지 예술이 차지하던 위치를 <과학>이 대신하게 된다. 때문에, 이 단계를 <실증주의적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니체에 있어서 과학이나 실증에 대한 신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부정을 위한 무기, 단순한 가면의 역할을 할 뿐이다. 이 시기부터 니체는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이 심해졌다. 네덜란드의 여류 음악가 마틸디 드란페다하를 처음 만난 날,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한 엉뚱한 사건도 있었다(1876년). 지칠 대로 지친 그는 1879년, 정식으로 대학을 떠난다. 10년간의 교수 생활이었다. 바젤 시는 연 4천프랑의 은급恩給을 지급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중병을 짊어진 이 고독한 정신의 유랑 생활이 시작된다.
병고와 방랑으로 점철된 이 시기의 대표작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이다. 이것은 <비극의 탄생>의 열광, <반시대적 고찰>의 투쟁과는 달리, 차갑고 투명한 모럴리스트적인 지혜의 책이다. 형식은 모두 아포리즘 스타일. 니체는 그 즈음 확실히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인 몽테뉴. 파스칼. 라 로슈푸코. 퐁트넬. 쟝 포올 등의 잠언적인 표현에 익숙해 있었다. 거기에는 도이칠란트적인 무거움을 피하려 하는 의도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 이유는, 이러한 단편 형식이, 이 암중 모색의 회의적인 시기의 사색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독자를 설득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선도 악도 필연이다. 우리는 오로지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주시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악의 대립. 도덕 감정을 초월하여 진실에 견디는 강한 인간을 육성할 수 있다. 냉엄 가혹한 인식은 인간을 단련하고 높일 것이다. 종래 진리로 간주되어 온 일체의 것은, 선악을 초월한 이 '과학'의 입장에 서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비참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것은 결국 상대적인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몇 년 전 소크라테스의 과학적 정신을 맹렬히 매도하던 니체가, 이 책에서는 과학의 이름을 빌어, 과학의 수단으로써, 예술. 종교. 도덕률을 기만, 망상, 착각이라고 몹시 꾸짖는 것이다.
1879년은, 니체 자신에 의해서 <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어두운 겨울>이라 불리었다. 그 해, 그의 병은 극도로 악화되어, 생애의 마지막을 각오할 정도였다. 두통. 구토. 현기증이 극심해지고, 시력은 급속히 감퇴되었다.
생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고뇌 속에서 엎드려 있는 인간이 , 마치 고뇌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비밀은 그 가면성에 있다 할 수 있다. 가면이란 교활이나 연기의 의미가 아니다. 존재의 보호이다.
그런데 그의 내부에서 어떤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지를 모르는 독자는, 이 책에 있어서 저자의 너무나 변한 모습에 아연한다. 그의 절친한 친구 로데조차, '온실에서 갑자기 빙실로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평했다. 이 저작으로 니체는 한꺼번에 독자층을 잃었다. 그 즈음 바그너로부터 보내 온 <파르지팔>은 예기했던 대로 기독교적 구원의 취기, 히스테릭한 신비적 탐닉에 넘쳐 있어, 그를 극도로 환멸시켰다. 니체가 보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전권에 대하여, 바그너로부터 온 것은, 잡지에 실린 니체에 대한 공격문이었다. 코지마는 <배반자> 라는 저서에서 '천박함과 어린아이같은 궤변'이라고 공박했다. 이리하여 '별의 우정'은 파국적인 결말에 달한다.
니체는 이 저서에, 바그너 부부가 격노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부정되고 있는 예술가는 모두 바그너로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니체의 말을 빌면, 기독교적인 구제,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퇴폐의 징후이며, 그런 의미에서 바그너는 전형적인 데카당스이다. 일찌기 위대한 천재라 믿던 상대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퇴폐적인 약자였다. 존경의 대상이었던 그 권위로부터 자기를 해방한 '자유 정신'은, 이렇게 하여 이제 서양 서양 2천년의 역사적인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와지려 한다. 그러나 권위로부터의 해방 그 자체는 참된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속의 부자유란, 다른 의미에서 비예속을 의미하며, 해방 역시 또 다른 부자유를 의미한다. 거기에 인간성의 패러독스가 있다.
니체가 '생명력의 최저점'을 느꼈던 최악의 병상은, 1880년부터 약간 회복된다. 충실한 제자 페터 가스트를 데리고 베네치아에서 몇 달 체재하면서, 니체는 독서욕과 창작욕의 회복을 느낀다. 그리하여 베네치아는 '나의 사랑하는 유일한 도시'가 된다. 한 여름에는 마리엔바드로 거처를 옮겨, <서광>의 집필에 힘쓴다.
1880년 11월 제노바. 니체에게 있어 상당히 의미 깊은 이 도시에서의 첫 월동. 바다의 정복자들의 도시. 콜럼버스의 고향. 고독한 산책자는, 햇빛이 빛나는 날에는 해변 바위 위에 올라가 시간을 보낸다. 적요의 극을 구하는 것처럼 바다로 돌출해 있는 암초. '.... 이 거대한 침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전율이다. 나의 가슴은 터질 듯하다'고 니체는 노트에 썼다.
1881년 1월, <서광>이 완성, 여름에 출판되었다. 니체는 스스로 이것을 '긍정의 책'이라 불렀다. 여기에는 '공격'도 '악의'도 없으며, '화약의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이 책은, 바위 사이에서 볕을 쬐고 있는 한 마리 바다 동물처럼, 따뜻한 햇볕 아래 몸을 둥글게 하여 행복하게 뒹굴고 있는 것과 같다. 결국, 그 바닷가의 동물은 나였다.'
이 말처럼 <서광>의 성격과 당시 그의 심경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 밝음, 이 상냥함의 밑바닥에는, 역시 일종의 까닭 모를 우수가 감추어져 있다.
1881년 7월 10일까지, 니체는 엔가딘 협곡의 작은 마을, 실스 마리아에 체재했다. 은백으로 빛나는 봉우리. 투명한 하늘. 거기에 가득 차 있는 태양빛. 시간은 정지해 있는 것 같다. 이 '사람과 시간의 저편 6000피트'에서, 니체는 생애에 있어서 가장 신비스러운 체험을 했다. 8월의 어느 날, 실버 플라나 호반 숲속을 산책하다가 즈루라이트 마을 가까이에 있는 거대하게 솟은 바위 근처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 때였다. '인생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있어서, 의미도 없고, 목표도 없고, 무에의 종곡음도 없이 불가피하게 회귀한다. 즉, 영겁 회귀, 이것이 니힐리즘의 극한의 형태, 무의 영원!' - 후에 영겁 회귀 사상으로 표현되는 것이 갑자기 그를 덮쳤다. 이 체험, 이 광경의 너무나도 강한 확실성에 그는 전율했다. 그는 환희의 눈물을 흘리고, 몸을 떨며 웃었다.... 날카롭게 관찰하는 동시에, 원래 환시의 증세도 가진 그가 본 그 광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다만 그의 말에 의해서, 그 사상의 개요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니체의 내면을 지탱하는 가장 강렬한 사상의 기둥이, 여기에서 비로소 그의 세계에 출현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서광>의 속편으로서 이 즈음부터 쓰기 시작하여, 다음 해 6월에 탈고한 <즐거운 지식>은, 말하자면 이 때에 '수태'된 광경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서 '분만'되기까지 18개월 동안의 회임기의, 점점 높아져 가는 흥분과 새로운 자유의 지평에서의 긍정에의 예감을 이야기한 것이다.
<즐거운 지식>의 원제는 Die fröhliche Wissenschaft, 따라서 '지식'은 과학과 학문으로, 일찌기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생을 훼손하는 것,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는 생을 보호하는 환상으로서의 가면이었던 것이, 여기에서는 기쁘고 즐거우며 화려한 것으로서 생의 유희가 되어 있다. '유희'라는 말은, 니체 자신이 사용한 말이다.
니체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신의 권위, 이제까지 존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온 그것을, 자각적으로 부정한다. '신의 죽음'이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이 단장에서이다. 이 말을 사변적으로 가장 깊이, 역사적으로 해석한 것이 하이데거이다. 그는 그의 논문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에서, 이 신은 플라톤 철학 이래의 것, 따라서 초감성계 일반, 넓은 의미에서의 피안의 세계. '진리'의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신의 죽음'이란 플라토니즘의 종언, 기독교를 포함한 유럽 형이상학 전체의 종언을 의미한다. 그것은, 피안과 차안, 진리의 세계와 허위의 세계와 같은 대립적 사고 자체의 종언이다.
1882년, <즐거운 지식>이 진행되는 도중에, 37세의 니체가 한 지적인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실연당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 여성은 러시아 장군의 딸로서, 이름은 루 폰 살로메. 21세의, 인습에 구애되지 않는 분방한 생활을 사랑하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이 사건은 철두철미 니체의 짝사랑으로 끝난다. 이 심산 유곡에서 나온 것 같은 남자에게, 21세의 살로메는 존경과 호기심과 반발을 느꼈을 뿐이었다. 살로메와의 사건으로, 니체는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와도 어머니와도 사이가 나빠져, 누이동생과는 거의 절교 상태가 된다. 니체는 실연과 의심과 소문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 즈음 누이동생은, 니체가 싫어하는 바그너 주위의 한사람, 광신적인 반유태주의자와 약혼하여, 1885년에는 부부가 남미의 파라과이로 떠난다. 이렇게 하여 니체의 곁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 간다. 애제자 페터 가스트를 제외하고, 그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없어졌다 해도 좋으리라. 그 즈음, 병도 돌발적인 발작을 되풀이했다. 상처받은 마음은 이미 아무것에서도 위안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야 말로 니체의 기본적 자세이다 -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약과 환희였다....
'..... 돌연,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확실함과 정묘함으로,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흔들어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눈에 보이게 되고 귀에 들려 온다는 의미에서, 계시라는 말은 사실을 명쾌하게 나타낸다. 사람은 듣는 것이지, 찾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닞 받아들일 뿐 누가 주는지를 묻지 않는다. ...... 실제로, 사물이 스스로 와서, 자기 자신을 비유로서 제공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 이것이, 나의 인스피레이션의 체험이다.' (이 사람을 보라 中)
1883년 2월 3일부터 13일까지 겨우 10일 동안 단숨에 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집필의 흥분 상태를, 니체는 위와 같이 전하고 있다. 실버 플라나 호반에서의 기적적인 체험으로부터 18개월, 차츰 성숙한 구상이 폭발적으로 표현 형식을 얻었던 것이다. 그 겨울을 제노바 근처 라팔로의 고요한 바닷가 작은 집에서 지낸 니체는, 날마다 산책을 즐겼다. 어떤 날은 후미를 돌아 프르트피노 곶까지 산책하기도 했다. 그런 산책길에서 <짜라투스트라> 제1부 전체가 니체의 마음에 떠올랐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짜라투스트라가 나를 덮친 것이다.'
이렇게 제1부가 단숨에 써지던 날, 그 날 바그너가 죽었다. 그 소식을 듣고, 운명은 신성한 시간을 일치시켰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과거의 스승이 죽은 날, 그의 '초인'이 탄생한 것이다. 니체 만년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가 이렇게 하여 시작된다. 천재 숭배의 시대, 부인의 시대에 이어 제3의 창조의 시대이다.
이와 같은 니체의 정신적 전개에 있어서 세 단계는, 그 자신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기의 자기 초극으로서 증기가 생겨나고, 중기의 자기 초극으로서 후기가 생겨났다고 말하는 그의 생각은 '짜라투스트라' <설교>의 첫머리 '세 단계의 변화'에서,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변화의 비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거기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진 '낙타'는 의무와 금욕을 의미하며, 존경할 만한 것에 복종하고, 적극적으로 배우는 정신이다. '그것은, 그대, 해야 한다'의 계율에 따르는 시대이다. 그러나 사막에 들어섰을 때, 낙타는 '사자'로 변한다. 사자는 자유를 탈취하고, 고독에 견디며, 스스로 주인이려 한다. 단단히 묶여 있던 존경과 복종의 고삐를 풀고, '나, 원한다'의 자유 정신으로 들어간다. 비판. 투쟁의 시대이다. 그러나 사자는, 이제부터의 창조를 위해 자유를 확보했을 뿐이다. 새로운 모든 가치의 창조는 사자로서는 할 수 없다. 자유를 획득했어도 그것만으로는 자유가 아니다. 이렇게 하여 니체는 다음 단계를 말하게 된다.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하지 못하는 일을, 어린아이가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그렇다>라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니체가 이 시기에 어떠한 자유감을 쟁취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정신권이 열리고, 사상과 말이 넘쳐 <짜라투스트라>는 물론, <선악의 피안>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안티 크리스트> 등, 가장 주목해야 할 저작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그가 참으로 적극적인 창조의 자유, 즉, 그가 말하는 어린아이의 단계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짜라투스트라>라고 하는 작품의 혼돈된 성격은, 그 주인공이 '초인'으로 높아져 가는 발전의 형태를 빌어, 니체가 자기의 '운명'의 일부를 토해 내고 있음에 기인한다. 동시에 그것은, 인류의 운명을 문제삼는다. 저자는 자신의 운명은 인류의 운명이라는 신념하에 이것을 쓴 것으로, 비유나 상징의 형태로 암시한 방향은, 문제의 소재가 인간 존재의 구원, 다시 말해, 일체의 구원이 없는 공간에 있어서 구원은 어떻게 하여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있음을 보이고 있다. 니체는 후에, 자신에 관해 말한다.
'나의 사명은, 인류의 최고 자성의 순간 즉, 인류가 과거를 바라보고 미래를 바라보고, 우연의 지배. 사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어째서?> <무엇을 위하여?>와 같은 물음을, 처음으로 인류 전체로서 발하는 정오를 준비하는 데에 있다......' <이 사람을 보라 中>
그렇게 보면, '3단계 변화'는 단순히 니체 자신의 내면의 발전을 비유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기독교에 의해서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어 온 유럽 정신사의 비유이다. 일찌기 사제의 지배하에 '낙타'였던 정신은, 먼저 '신의 죽음'의 확인에 의해 사막의 '사자'가 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인간 존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온 그 신의 죽음은, 그 존재의 무의미, 무가치를 의미하게 된다. 인간 존재는 우연이다. 세계와 우주에도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이와 같은 니힐리즘의 확인, 그 공포의 직시가 짜라투스트라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나는 인간들에게 그의 존재 의미를 가르치려 한다. 그 의미란 곧 초인이다'라고 하는 그의 진로가 결정된다.
이 절대자가 없는 지상에서 초인을 가르친다는 것은, 새로운 절대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절대자도 존재하지 않는 것, 모두가 상대적인 것, 우선 그것을 확인할 일이다. 짜라투스트라가, '자유의 사막'에 있는 사자로 하여금 전통적 도덕의 상징인 '초룡'과 싸우게 하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니힐리즘을 직시하고, 이제부터의 진행에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사자가 가진 힘의 한도로, 그로부터 앞이, 완전히 독자적인 니체 사상이 된다. 우선 초인은, '지상의 의의'로, 지상을 떠난 어떤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천상으로부터의 의의를 거절하고, 어디까지나 지상에 충실하려 하는 의지이다. 그러나 지상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의도 없다. 그것은 추악하고 더러우며, 오류이고 허위이며 무이다. 결국 그것은 '큰 추악, 큰 불행, 큰 실패'이지만, 이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는 생을, 그렇기 때문에 긍정하는 것, 거기에 전신이 일어난다. 니힐리즘의 자각에 의한 생의 부정, 그것을 감히 긍정하는 단계, 부정에의 새로운 사랑, 그것이 그가 말하는 '운명애'의 의미이다.
기독교의 신이 없으면, 신의 나라를 목표로 하여 과거에서 미래로 직진하는 직선적인 시간 관념도 있을 수 없다. 그러한 목적론을 거절하고, 어디까지나 이 추악한 우연적인 지상의 생에 충실하려고 하는 니체에 있어서, 시간의 관념이 고대 그리스식의 원환적인 것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이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종국이 없으면, 시간은 둥근 고리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 속에서 연출되는 것은, 이 추악하고 무의미한, 목적에 의한 구제를 빼앗겨 버린 지상의 생에서, 그것은 영원히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된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만큼 견디기 힘든 것은 없지만, 그것을 확실히 자각한 것이 그의 영겁 회귀설이다. 따라서 그것은 '니힐리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든, 아니, 견디기 힘들면 힘들수록, 그것을 긍정에 의해 돌파하려고 하는 것이 니체의 태도이다. '이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결단에 의한 돌파, 자기 해방이야말로, 니체가 영겁 회귀라는 말로 표현하려 하는, 신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유감이다. 이리하여 니힐리즘의 극단적인 형태인 영겁 회귀설은, 동시에 '생의 긍정의 최고 형태'가 된다.
<짜라투스트라> 제2부는 제1부가 탄생한 같은 해인 1883년 여름, 실스 마리아에서, 이것 역시 겨우 2주일 동안에 씌어졌다. 또 제3부를 다음해 1884년 1월, 남프랑스의 니이스에서 10일 동안에 완성한다. 제4부는, 약간 사이를 두어, 1885년 2월, 니이스에서 완성했다. 제4부는, 약간 사이를 두어, 1885년 2월, 니이스에서 완성했다. 그러나 제4부는 원고를 받아 주는 출판사가 없어서, 자비로 40부를 인쇄하여, 가까운 사람들에게 증정했을 뿐이다.
니체가 40세 전후에 집필한 이 4부로 이루어진 <짜라투스트라>는, 그의 저작 중에서 가장 통일적인 형태를 지닌 것이나, 그 통일적인 파악이 쉽지 않다. 이 책의 큰 특색은, 시가 부수물이 아닌 사색 그 자체가 되어 있는 것으로, 높은 의미에서 시와 사색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암시 속에, 니체의 사색의 살갗을 드러내는 듯한 정직함이 있다.
유고 단편을 통해 관찰해 보면,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속고를 쓰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에 이르지 못했다.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새로운 계획이 싹터, <짜라투스트라>의 근본문제를 산문적. 이론적으로 표현하여, 오해의 여지가 없이 조명하고자 하는 데에 열의가 옮겨졌기 때문이다. 니체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보인다. '결의, 내가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다. 인제 짜라투스트라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1882년에 계획이 싹터, 1884년부터 실제로 원고를 쓰기 시작한 듯한, 그 이론적 주저의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는, 발표되지 않은 단편군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처음 몇 차례에 걸쳐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하에, 마지막에는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제목하에, 체계적 저술이 구상되었다. 그러나 니체가 발광하지 않았다고 해도, 구상대로 저술이 완성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니체는 1884년. 1885년 경에는 아직 자신의 철학에 대한 체계화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던 듯하나, 그 후 1888년 말까지 이 문제와 직접 상관이 없는 많은 저작을 차레차례로 발표하고, 발광 직전에는 자신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자족심과 일찌기 없었던 성공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니체의 이론적 주저로서 알고 있는 <힘에의 의지>는, 니체 사후, 동생 엘리자베트가 편집한 것으로, 그것이 니체 본래의 의도에 의해 정리된 것이라고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한자 출판사의 니체 3권 저작집(1954~1956)의 편저자 슐레히터가, 처음으로 동생의 작위적인 편집상의 편향을 지적하고, <힘에의 의지> 전체를 해체하여, 이것을 <80년대의 유교에서>라는 이름하에 아포리즘을 모은 체재로 고쳐 발표했다. 슐레히터에 의하면, 누이동생 엘리자베트는, 그 밖에도 30통에 이르는 니체의 편지에 손질을 했다. 파라과이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남편이 자살하여 고국으로 돌아온 이 야심만만한 여성은, 그 후 오빠의 철학 선전에서 보람을 찾았다. 그녀는 오빠의 편지류를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게 개찬하기 위하여, 편지의 가장자리를 태우거나, 잉크로 이름 부분을 지우는 등 여러 가지 손질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누이동생의 위조 사건이다.
그러한 작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니체의 전체상이 그것으로 일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발광하기 몇 년 전에 이 중요한 단편이 씌어졌다는 것은 사실로서, 이미 간행된 다른 저작과 함께, 니체 마지막 고투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1885년부터 1887년에 걸쳐 니체가 정력을 쏟은 것은 <선악의 피안>(1886년)과 그 보설로서씌어진 <도덕의 계보>(1887년)이다. 모두 자비로 출판했다. 니체는 그 즈음, 여름은 실스마리아에서, 겨울은 니이스에서 지내면서, <짜라투스트라>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를 조용히 견디며, 자연 과학이나 법학 영역의 넓은 독서에 의해서 적요함을 달래고, 특히 마키아벨리를 열심히 읽어, 정치와 도덕의 근저에 대하여 생각을 단련했다. 그 최초의 성과가 <선악의 피안>이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의 유럽 정신 상황을 다방면으로 비판하여, 다기한 사상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위대한 정오>에 자연적으로 익어 떨어진 과실처럼, 독특한 경쾌함과 아름다운 음조를 지녔다. 도이칠란트어의 언어적 창조로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없었다. 일찌기 절친한 친구였던 로데조차, '이 속에 씌어진 철학적인 부분은 빈약하여 아이들 장난과 같다. 정치적인 면은 어처구니 없으며, 세상 물정에 너무나 어둡다. ..... 오직 남의 흉내를 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있는 이 정신의 불모함'이라고 말했다. 베른의 어떤 잡지에는, '니체의 위험한 책'이라는 혹평문이 실리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 유일한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프랑스의 거두 이뽈리트 테누의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이에 니체가 감격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같은 악평에 대답하기 위해, 니체는, 주저의 일부로 예정해 두었던 자료를 기초로 하여, 1887년 여름, <하나의 논박서>라는 부제를 가진 <도덕의 계보>를 2주일 동안에 썼다. 전작의 그와 같은 반응이 아포리즘이라는 가장적 표현 형식에 있었음을 안 니체는, 이 책에서 오랜만에 일반적인 논술 형식을 취했다. 첫번째 논문에서는, 세인이 이제까지 신봉해 온 도덕적 가치 판단은, 고대 지배자의 고귀한 도덕에 대한 기독교적 노예들의 원한 감정, 후자의 전자에 대한 커다란 반란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하며, 그것은 그대로 <안티 크리스트>에 이어져 <기독교의 심리학>을 제시한다. 두 번째 논문은, 일반이 신의 목소리로서 믿고 있는 양심을 밖으로의 방출을 막아 안으로 향한 잔인한 본능으로 한 <양심의 심리학>이며, 허무에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데, 그 이상을 열렬히 구하는 것은,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무를 원한다!'고 하는 데카당의 현상이라고 단정하여, <사제의 심리학>을 시도했다. 이렇게 하여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행하던 기독교 공격은, 소리 높여 그 자신의 말로서 직서되게 되었다.
1888년, 그의 정신적 활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일 년만큼, 생애를 통하여 다작이었던 해는 없다. 일몰 전 한순간의 찬란한 빛, 불 붙은 화약의 마지막 폭발과도 비슷한 백열적인 문장이 씌어진다.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 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니체 대 바그너>, 그리고 <디오니소스 취가> 등이 완성되는데, 어느 것이나 탄력 있는 독특한 문체로 씌어져, 세상의 무시도 고독도 병고도 초월한 자기 황홀감, 싸움에 이긴 승리자의 만족스러운 미소와 해학,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암흑을 예지하고 있는 듯한 과거 생애에의 감사와 애정이, 그것들을 관통하는 주조를 이루고 있다.
1887년부터 1888년 사이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읽고 감동하며, 스탕달을 애독하고, 비제의 <칼멘>을 사랑한다. 코펜하겐 대학에서 브란데스가 니체의 철학을 소개하는 공개 강연을 한 것도 이 해 4월이었다.
<바그너의 경우>는, 니체 자신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근대적 정신의 진단학>의 소산으로, 바그너를, 근대적 인간의 모순을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증례, 근대병의 전형으로서, 어디까지나 상징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우상의 황혼, 또는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길>은, 말할 나위도 없이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을 비꼰 제목이다. 우상이란, 이제까지 진리라 부르던 것 일체를 가리키며, 망치가 이것을 산산 조각으로 깨뜨려 간다는 것이다. '이 저작은 나의 철학의 압축판입니다'하고 니체는 브란데스에게 쓰고 있다. 거기에서는 소크라테스는 퇴폐의 전형으로서 부정되고, 이성도 도덕도 뒤엎어진다. 기독교에는 천민의 도덕이라는 낙인이 찍혀지고, 괴테나 빈켈만 식의 그리스 상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의해서 흔들린다. 추호의 가차도 없는 그 비판은, 한 마디도 소홀히하지 않는 언어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니체의 아포리즘 문체는 이 책에서 정점에 달했다 해도 좋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안티 크리스트>이다. 거기에는 잠언체 형식으로서의 시적인 완성도는 없지만, 그대신 집요하게 같은 주제를 되풀이하는 끈기와, 니체의 기독교관의 가장 단적이며 이론적인 표현이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역사적 기독교를 격렬히 비판하는 니체가, 예수 그 사람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도의 입장에서 예수를 신성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르낭 식의 인간론적 척도로써 예수를 해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신앙자의 입장에서 예수를 본 것도 아니고, 자유 사상가의 입장에서 예수를 본 것도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말하면서, 니체는 그 순수한 기독교인, 즉 예수에게 깊은 이해를 보인다. '사도들의 작은 교단이, 가장 중요한 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명백하다. 예수의 죽음 같은 모범적인 죽음, 르산티망(ressentment : 원한, 한)' 의 감정을 모두 초월한 저 자유감. 초월감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 그들의 마음에 기세를 더해 간 것은, 다름 아닌 가장 비복음적인 감정, 복수감이다. 이와 같은 죽음으로 사건이 결말지어져서야 되겠는가! 그들에게는 보복. 심판이 필요했다. 그러나, '보복'하고 '심판'하는 것 이상으로 비복음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상과 같은 인용으로 니체의 기독교관을 일정한 방향으로 특징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여기에, '어린아이'를 최고의 단계로 한 니체 그 사람의 종교성에 관하여 특히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안티 크리스트>에 이어, 좀 색다른 <이 사람을 보라>를 놀랄 만큼 단시일 내에 쓰고, <니체 대 바그너>를 정리하는 것으로, 그의 정신활동은 끝을 고한다.
1888년 말부터 정신 착란의 징후가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토리노 광장에서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그가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이틀 낮 이틀 밤을 소파에서 혼수 상태를 계속하다가 눈을 떳을 때에는, 그는 이미 그가 아니었다. 마구 노래하고, 마구 춤추었다. 거리를 헤매면서 통행인이게, '나는 신이다. 이와 같이 변장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친구들이나 만난 일도 없는 저명인에게 영문을 알지 못할 편지를 쓰고, 거기에 디오니소스. 십자가에 매달린 자. 안티 크리스트 등을 서명했다. 디오니소스와 크리스트가 마지막가지 그에게서 떠나지 않은 상념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리아도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디오니소스'라고 쓴 수수께끼 같은 편지로, 그것을 받은 사람은 코지마 바그너 부인이었다. 생각해 보건대 그는, 바그너를 부정하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의 저 행복한 토리프셴의 나날을 부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이상한 편지를 받은 오버벡이 바젤에서부터 달려 왔다. 니이체는 그 친구의 얼굴을 보자, 흐느끼면서 그 가슴에 쓰러졌다.
자기에게 가장 성실하고, 스스로 운명을 헤쳐 온 사람의 정신은 이렇게 하여 꺼졌다.
그 후, 나움부르크의 어머니 집에서 8년간, 어머니의 사후에는 바이마르의 누이동생 엘리자베트 곁에서 2년간을, 썰물처럼 높아져 가는 명성도 알지 못한 채, 니체는 생애를 통한 정신의 폭풍우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자신의 그림자처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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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시마 겐이치라는 일본분이 쓴 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아뇨.. 전 그 분이 쓴 것은 못 보았구요, 박병덕님이 번역하신 육문사 1992년 버젼의 책의 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