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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한 인간이나 집단, 또는 신념에 자기를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는 일”입니다. 충성은 중세 봉건 사회의 유물도, 제국주의 시대의 낡은 가치도 아닙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 공동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튀일리 궁에 유배당한 루이 16세는 자국 병사들과 스위스와 외국 용병들의 호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위대가 접근하자 프랑스 군사들과 외국 용병들은 하나같이 도망갔습니다. 스위스 용병들만 끝까지 그를 지켰습니다. 루이 16세는 프랑스와 상관없는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스위스 용병을 지휘하던 열두 명의 장교들은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한번 맹세한 신의는 끝까지 지키겠다.”고 결의했습니다. 만장일치로 결사 항전을 맹세했습니다. 대포로 무장한 시위대의 맹렬한 공격 속에 718명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이후, 바티칸의 경호는 역사 속에서 충성심을 인정받은 스위스 용병들에게만 맡겨지고 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인 동시에 정치가인 세네카(Seneca)는 충성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성스런 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시인 에머슨(Emerson)은 “충성심을 품지 않고 사는 것은 수치”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25:13),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얼음냉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있습니까?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아니 충성해야할 사명은 과연 무엇입니까?
목사인 그는 입원한 노인을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곧 병원을 찾은 그는 환자의 영혼이 아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병상의 노인을 심방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혈혈단신에 직업도 없었습니다. 변변치 않은 연금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작은 사글셋방에서 초라한 노후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인이 퇴원하게 되었을 때, 목사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대학 강의와 주일학교 교재를 저술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에서도 노인의 부탁만큼은 기꺼이 들어주었습니다. 자주 찾아가 몇 시간씩 머물렀습니다.
사모는 주일 저녁마다 노인을 사택으로 초대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그에게 “저에게는 형이 있습니다. 얼마 전, 형과 함께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형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이 교회에 바치기로 했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거의 없지만 형의 재산과 합하면 족히 10만 달러는 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5년 후,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두 노인이 남긴 유산으로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히13:2)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는 약속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주어지든 끝까지, 할 수 있다면 죽기까지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정말로 메시아인지의 여부를 물으러 찾아왔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소 단호하고 냉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3)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단호한 태도가 그동안 무리들이 가지고 있던 세례요한에 대한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보로 인해 잠시 흔들렸다 할지라도, 인류 구원이라는 구속사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은 약화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도 인정하실 정도로 탁월한 믿음의 사람인 동시에, 성경 전체 속에서 나타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흔들림이란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하나님의 역사와 고난 앞에서는 필연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아무리 크고 위대한 선지자였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이라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보내신 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무리들을 향해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24-28a절입니다.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당시 유대에는 일신의 안락과 부귀영화를 위해 신앙적인 양심마저 팔아버린 배교자들과 매국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여론이나 세상의 유혹에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에 충성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강직한 신앙의 소유자였었는지는 헤롯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사실 유대 지도자들은 헤롯의 악행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감히 나서서 지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묵시적으로 방관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자신이 헤롯의 악행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나섰을 때 어떤 어려움이 닥치게 될 것인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의로 무장한 그는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드러내 놓고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한편, “부드러운 옷”은 곱고 감촉이 부드럽고 비싼 옷을 가리킵니다. 또 “사치하게 지내는”은 원어 상으로 볼 때 “건강을 해치다, 쇠약해지다”는 뜻으로,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은 결국 건강을 해칠 때까지 흥청거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또 지도자들이 호의호식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피폐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절대 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며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반면, 폭군 헤롯 대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지도자들은 그러한 백성들의 팍팍한 삶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 사회적인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매우 값비싸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걸치고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자신들의 “있음”을 즐겼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의 질타와 원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정치, 종교, 경제가 유착된 유대 사회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특히 ① 유대교는 성전 종교입니다. 성전은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종교적인 장소였지만, 성전의 유지를 위해서는 성전 체제를 떠받치는 하부 구조로서의 경제가 있었습니다.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 신약성서 시대의 사회 경제사 연구”에 따르면, 신약 시대 예루살렘의 산업은 성전 건축과 제의와 관련된 수공업이었습니다. 성전 건축 수공업자로는 석수와 목수와 공예업자가 있었습니다. 성전 건축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의(祭儀) 곧 예배와 관련된 진설병 제조업자, 흠향 제물 제조업자, 성전 휘장 제조업자, 금대장장이, 이발사 등 성전의 유지와 관련된 산업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또 주전 19년에 시작되어 9년 반 만에 본채가 완성되고, 주후 63년에 이르러 비로소 부속건물이 완성된 성전 건축과 확장 사업은 경기 부양과 성전 유지를 위한 재원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② 또 유대교는 제사 종교입니다. 성인이 된 유대 남자들은 3대 절기로 불리 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되면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때 각종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 절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날마다 드리는 희생 제물은 수소 2마리와 숫양 1마리와 새끼 양 7마리가 번제물로, 숫염소 1마리가 속죄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소 한 마리 가격이 약 100데나리온, 숫양과 숫염소는 8데나리온, 새끼 양은 4데나리온으로 매일 244데나리온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지출되었습니다.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마20:2)라는 말씀에 따르면,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하루 품삯을 50,000원으로 계산할 때, 하루에 12,200,000원의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일주일을 계산하면 85,400,000에 이르는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주후 66년 유월절에는 무려 255,600마리의 양이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헤롯 대왕은 성전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무려 300마리의 황소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아그립바는 100마리의 황소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제사 외에도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물이 드려졌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성전 수입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그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나무 열매와 같은 토지소산의 십일조와 소나 양과 같은 가축의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바쳤습니다.
삼년에 한 번씩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위해 별도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십 세 이상의 성인 남자들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상관없이 반 세겔 곧 4데나리온을 성전세로 바쳤습니다. 또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일시적으로 보관하는 땅에 대한 토지세도 내야했습니다. 각종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의 예물도 성전의 수입이 되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피해자에게 죗값에 오분의 일을 더해 돌려줄 때, 받을 만한 친인척이 없으면 제사장에게 돌렸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는 각종 세금이 더 부과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이중삼중의 세금에 시달렸습니다. 아무튼 성전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재물들이 거래되었습니다. ③ 그리고 성전은 성전세, 십일조, 각종 기부금, 토지수입, 환전 등으로 벌어들인 재물을 보관하는 보고였습니다. 이 재물의 관리는 주로 문지기와 서기관이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저당을 잡고 재물을 빌려 주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고리대금업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백성들의 자녀를 첩으로 들이기도 했습니다. 행정과 법률에 익숙한 그들은 각종 토지 매매와 대여에 관련된 문서 작성에 관여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법률문제, 상거래와 관련된 맹세 등에도 관여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전 체제의 지배자들 곧 종교 지도자들은 제정일치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부를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부자와 지배 계급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가로챘습니다. 더 좋은 조건을 찾아다녔습니다.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도와주어야할 대상인 과부들의 가산까지 삼켰습니다. 재물을 위해 부모 공경까지도 저버렸습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물론 당시의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하나같이 타락했고 부자였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귀족 지도자들에게 수입의 일부를 강탈당했다고 알려진 일반 지도자들은 대부분 가난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 20,000여 명 가운데 예루살렘에 상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부를 누렸습니다. 성전 경제의 왜곡된 구조와 그 구조를 이용한 제사장 계급의 부도덕한 부의 축적과 향유는 일반 서민들의 영적 물질적 궁핍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레위인 출신이었습니다.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으로 여기는 상번제(the daily sacrifice)의 책임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백성들 역시를 그를 칭찬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그가 원했었다면 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허울뿐이겠지만 명예까지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산한 바람만 부는 황폐한 광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부드럽고 화려한 옷과는 전혀 다른 약대 털옷을 입었습니다.
달콤한 말로 권력자들에게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왕궁의 회유 따위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무력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의 치부까지도 과감하게 책망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충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돌아온 것은 투옥이었습니다. 온갖 고초였습니다. 낡고 거친 외투를 입은 가련한 죄수였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눅3:2)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400여 년 동안 유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시작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주어졌습니다. 거기다 그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라고,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유일한 선지자였습니다. 수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했지만, 그는 직접 메시아이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메시아라고 소개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아의 첩경을 평탄케 했습니다.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어떤 선지자보다 훌륭했습니다. 여자가 낳은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습니다. 세례요한만큼 위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대 광야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흔하고 하잘것없는 갈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고 위대하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외쳤을 때, 정말로 많은 무리들이 그를 보기 위해 유대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한 참으로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세례요한을 변호하셨던 이유입니다. 권상혁씨의 “배꼽 없는 사람은?”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중세 때, 한 수도원에서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련자들이 떠났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한 한 수련자는 곧 원장을 찾아가 “왜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는 것이냐?”고 따졌습니다. 원장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사냥꾼이 토끼를 잡기 위해 수많은 사냥개를 풀어놓았습니다. 순간, 처음 토끼를 발견한 사냥개가 마구 짖으며 토끼를 좇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토끼를 보지 못한 다른 사냥개들도 덩달아 짖어대며 그 사냥개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다 토끼를 직접 보지 못하고 따라가기만 하던 개들은 힘에 부치거나, 어떤 장애가 나타나게 되면 곧 포기하고 되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토끼를 직접 본 개는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좇았습니다. 사냥개라는 정체성에 충성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수련자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해서 모두가 다 끝까지 충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역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사명이 분명하지 않으면 누구도 끝까지 충성할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려워진다든지, 무엇인가 자신이 내려놓아야할 상황이 벌어지면 심각하게 갈등합니다. 방황합니다. 원망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돌아섭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얼마나 충성하고 있습니까? 죽기까지 충성하고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죽기까지 충성해야할 사명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눅7:28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으로 볼 때, 주님에게는 결코 세례요한의 위대함을 과소평가하려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가 비록 사역 면에서는 구약에 속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하였지만,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 비추어 볼 때는 여전히 옛 언약에 속한 옛 세대의 사람에 불과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예비 단계에 속한 사람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속한 저와 여러분은 비록 세례요한 같이 강하고 담대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룬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66권으로 구성되어 신구약에 기록된 계시를 늘 묵상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심령 속에 내주하십니다. 영적인 안목을 열어주십니다.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시킨 것은 아닌가? 곧 그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라는 문제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하나님만 아시는 일이겠지만, 예수께서 그를 변호하신 것에 비춰 볼 때 구원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활동 이후에 도래할 시대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말씀하신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세례요한보다 놀랍고 신비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은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야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해야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역할 곧 사명이 주어지든 끝까지 충성할 수 있어야합니다. 한편, “충성”(피스티스 : pistis)은 “신실, 성실, 믿음” 등의 뜻을 포함합니다. 또 이 단어의 어근(페이도 : peitho)은 “설득을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설득하다, 설득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단어(persuade)가 파생되었습니다. 결국 “충성”은 하나님께 설득된 마음의 상태 곧 하나님께 설득되어 마음으로 승복하는 내적인 태도입니다.
행위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내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물론 내적인 마음의 상태는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무조건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적인 승복 없이도 행동으로만 충성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는 불평불만이 가득 들어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아닌 척하며 각종 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충성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하나님께 설득된 마음의 상태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에 도무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과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오히려 바로 그 상황과 환경과 사람들을 허락해 주신 절대주권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평안과 안식과 쉼이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만 부어주실 수 있는 바로 그 마음의 평안과 안식과 쉼은 모든 경우에 충성할 수 있는 절대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놀라운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은혜를 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음은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복음 성가 가사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이 곡을 작사 작곡한 최용덕씨의 딸은 어릴 때부터 중병을 앓았습니다. 그는 그때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딸의 병이 재발되어 열여섯 살의 꽃다운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떠났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라고 찬양했습니다. 자녀를 먼저 보낸 참척의 고통 속에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아픔 속에서 영원과 영원을 이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루살이보다 못한 자신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절대 주권을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승복했습니다.
마음을 드렸습니다. 그런 그의 마음에 평안과 쉼과 안식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향해 “나는 네가 내게 마음으로 승복하기 원한다. 네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승복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마음으로 내게 승복함으로 네가 진정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한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시인을 통해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라”(시101:6a)라고 외치십니다. 우리 심령 속 깊은 곳으로부터 충성의 열매가 풍성하게 솟아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평안과 쉼과 안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평안과 쉼과 안식은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께만 충성할 수 있는 힘과 능력입니다. 세례요한이 죽기까지 주어진 사명에 충성할 수 있었던 신비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성령께서 자신을 완전히 장악하실 수 있도록 맡기십시오.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과 상황이 주어지든 철저히 설득당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주어진 사명에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는 마음의 평안과 쉼과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