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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서곡, 기다림의 시간
― 윤지양의 신작시에 부쳐
최 진 석
1. 발랄한 출발, 순수하고 가혹한 시의 과정
윤지양의 신춘문예 당선작을 처음 읽은 누구라도, 당혹과 재미가 뒤섞인 오묘한 즐거움을 쉽게 잊을 수는 없을 듯하다. 「전원 미풍 약풍 강풍」이라는 다소 뜬금없는 제목으로 독자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시인은, 매 연의 첫 행을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숫자들로 바꿔가면서 다음 두 번째 행마다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의 다양한 정취를 탁월하게 연출해 냈다. 시 전체를 한번 내리 읽어내리자마자 독자는 매 연의 숫자들이 바람의 강도를 나타내는 선풍기 버튼임을 짐작하게 되고, 제목의 네 단어는 그 버튼들이 가리키는 바람의 종류임을 알아차린다. 0100, 0010, 1000, 0001로 오르내리는 숫자들의 리듬은 쉽게 가시지 않는 더위와 씨름하는 한여름의 기억을 되살려내고, 기발한 비유로 일상의 현장을 묘파한 즐거운 상상력에 절로 찬사를 보내게 한다. 관건은 두 번째 행들에 있다. 단지 선풍기를 끄고 켜는 낯익은 생활상을 그리는 데 멈추었더라면, 윤지양의 시는 발랄한 비유를 동원하고 있으되 결국은 평범할 수밖에 없는 일상소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적 화자는 더위와 바람의 출렁이는 만곡 속에서, 신기할 것 없이 단조로운 생활의 풍광 속에서 점점 자신이 지워지는 과정을 그려 넣었다. 숫자로 환원된 일상사물의 흐름 가운데 화자가 사라지는 서늘한 한 순간이 시로 기술되는 것이다. “0010/(이곳에 없다.)”(「전원 미풍 약풍 강풍」 중).
등단작이 안겨주는 신선함과 절묘함을 갈무리하며, 나는 윤지양의 다음 작품들이 어떤 모양새를 띨 것인지 궁금했다. 세상에 자신을 알리는 첫 번째 작품이 이렇게나 재치있는 것이라면 이후의 시작(詩作)은 정말 ‘어디로 어떻게 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함께 읽던 다른 친구들 역시 윤지양의 다음 작품에 대해 호기심을 밝히면서도, ‘너무 튀어버린’ 시인의 행보에 걱정을 덧붙여 두었다. 자칫 언어를 상대로 한 밑도 끝도 없는 말놀이에 빠진다든지, 혹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너무나 진지해져버림으로써 초심의 영기발랄함을 잃지는 않을는지 걱정이 되었던가 보다. 시인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언어와 세계를 다듬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 세상만사가 그렇듯, 조급해 할 필요는 없을 터. 시인의 숙성을 기다리는 것도 독자의 일이라면, 모쪼록 등단작의 재기(才氣)가 시들지 않길 바라며 우리는 기꺼이 그녀의 소식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나, 마침내 이번 여름에 받아든 그녀의 최근작 다섯 편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를 감응케 한다. 이 글과 이어지는 윤지양의 새로운 시편들을 읽어본다면, 그녀의 첫 작품이 보여주었던 참신한 발상과는 이질적인 정조를 금세 가득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식상한 소재나 둔감한 언어에서 비롯되는 실망감과는 다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작품들에서 시를 낳기 위해 부단히 자신과 세계를 관찰하고 실험하는, 그런 가운데 환희에 젖었다가 다시 의혹에 잠기고, 그러다 문득 시작(詩作)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답하려는 시인의 격한 몸짓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언어의 형식적 실험이나 기상천외한 소재의 착안과 같은 기교의 곡예, 또는 무리하거나 과장된 엔터테인먼트를 보지 않는다. 시인이 우리 앞에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등단이라는 제도의 문턱을 지나며 그가 마주친, 시적 조형의 순수하고도 가혹한 내적 과정들이다.
2. 재채기와 도끼질, 초록의 명멸
시는 언제, 어떻게 쓰여지는 것일까? 이는 문학의 오래된 물음이자 비밀이다. 어떤 시인도 이 질문을 회피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네들의 말을 빈다면 그들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불가지 불가촉의 순간이 시적 조형의 찰나일 것이다. ‘영감’이라는 낭만적인 단어조차 그 신비로운 뉘앙스를 한풀 벗겨 읽어본다면, 거기엔 저도 모르게 문자를 토해내는 감각의 변용만이 있지 않을까. 시인은 철학자가 아니니, 어떤 논리적인 개념이나 초월적인 형상도 빌리지 않은 채 다만 그 순간의 형용을 엿보아야 할 터. 그러니 시인의 느낌을 따르고 그의 발자취를 좇기만 하자. 그가 문득 감각의 착란을 겪는 그 때야말로 시의 순간이 아닐까.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시인은 묻는다. 재채기라도 그것 아니겠느냐고.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른 시심(詩心)이 명멸하는 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코끝을 간질이는 괴로움을 단숨에 해소시키는 생리현상, 곧 재채기 같은 게 아니겠느냐고. 혀끝을 맴돌던 언어가 감각의 말단을 통과해 터져나오는 그 찰나, 거기에 시가 존재할 것이다. 마음 속 여기저기 부유하던 어떤 파토스를 문자로 옮기려는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재채기”를 통해 “미소” 끝에 매달린 “초록”을 발견하는 일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초록이 미소 코끝에
재채기
재채기
재채기
날아가는 미소 곧
떨어진다
- 「초록 알러지」 부분
“재채기”의 쾌감이 자아내는 “미소”는 “초록”이라는 시를 영글게 한다. 여기엔 과중한 관념의 무게나 도덕적 부채감, 혹은 형이상학적 난맥도 뿌리내리지 않았다. 시를 구하는 마음은 “축구공”을 차는 마음처럼 가볍고, 혹여 “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조마조마해 하는 가슴처럼 순전하고 부드럽다. 시인은 사물의 이면을 보지 않는다. 눈앞에 어리는 “초록”은 감각적 세계의 저편 어딘가에 감추어진 번외어린 진리가 아니다. 즐거운 삶의 감각으로서 “초록”은 심오한 철학적 탐구나 우울한 반성의 대상이 아니라 우연한 재채기 한번으로 자기도 모르게 도달하는 지금-여기의 진실이니까. 하지만 시인은 모른다. “초록”은 오직 “알러지”에 걸리고 난 다음에야, 곧 “재채기”를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진실이라는 사실을. 안타깝게도 재채기의 즐거움을 알아챈 아이가 그것이 신병(身病)을 알리는 “알러지”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는다. “미소”는 병의 산물이며, “초록” 또한 병듦 없이는 궁구할 수 없다는 삶의 역설을 어찌할까. “돌 구른다/미소만 남은 재채기.”
비릿한 추억이다 나의 선생은 생선
가시만을 발라 나에게 주었다
바다 냄새는 더 이상 맡고 싶지 않아
살을 뱉고 떠났다
- 「카프카, 책을 사랑한 물고기」 부분
우리는 언제 지나간 것을, 추억을 비릿하게 떠올일까? 인생의 문턱에서가 아닐까. 지난 추억이 더 이상 싱그럽거나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을 때, 인생은 또 다른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다. 모든 것은 거부된다. “비릿한 추억”은 그래서 “선생”을 “생선”으로 뒤집고, 앞서 있던 것들을 불편한 “가시”로 받아들인다. 대개 사람들이 동경하다는 “바다”는 식상하고 지겨우며, 떠나야 할 장소로 터부시된다. 그러나 이 출발은 정처없는 모험이나 설레이는 여행이 아니라 정착을 향한 여정, ‘발딛고 등비빌’ “육지”를 찾아 헤매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비릿한 추억”에 누군들 눈감고 싶지 않으랴. 차마 거기서 남은 것이라곤 “가시”일 뿐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결코 무(無)의 존재는 아닌 바, 한낱 “가시”일지라도 “한 나무 아래 묻”고 “때때로 제사를 지내러” 돌아올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고통스럽고 고뇌에 가득 찬 추억일지라도 깨끗이 삭제하고 비워낼 수는 없는 것이다.
시를 짓는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순결한 동경과 섬세하게 직조된 언어는 찌우거나 뺄 수도 있는 “살”처럼 잉여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결코 제거할 수 없는 것은 “비릿한 추억”에 남아있는 “가시”의 “무덤”, 언제고 버리고 떠난 지난 시간의 자취다. 그러므로 아예 포기하고 버리지 않는다면야, 시를 위해 시인은 “사람을 피해 매번 기억에 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렇다면 지나간 것, 예전의 것, 망각되지 않는 모든 것에 우리는 여전히 매달리고 끄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그 역시, 시를 시로서 궁구하기 위해서는 벗어나야 할 현실의 족쇄는 아닐는지. 해서 “무덤”에 심겨진 나무를 두고 시인은 기로에 선다.
이 장을 떠나면
앞으로 누가 나무에 물을 줄까
나의 유언은 도끼다
- 「카프카, 책을 사랑한 물고기」 부분
3. 시의 고통, 동굴에 숨은 시인
절연(絕緣)이라는 언어가 있는 이상, 우리는 결코 인연을 끊을 수 없다. 끊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이미 연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가 자신의 운명을 증오한다면, 거기엔 자기 출생의 시초, 사랑을 통한 탄생의 기원이 있기 때문 아닐까? 그러나 “고통”의 근거에 “사랑”이 있다 해도, 그것이 현재의 삶을 보상해 줄리 만무하다. 재채기로 초록을 발견하여 미소를 띠던 행복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서로의 동굴 속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이를 낳았다. 그게 나다. 빌어먹을 고통 하나가 태어나버렸다.
짖는 것들의 풀숲
찌르기 위해 돌멩이가 자란다.
자신의 잎은 혹은 입게 되는 삶은 남에게 무기가 되고 나는 태어나자마자 인질이다. 자루를 잡은 적도 없는데 운명이 찔러댔다.
- 「언덕에 앞서」 부분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 벌써 타인을 향한 무기가 되고, 남을 해치고자 한 적이 없음에도 자신은 이미 침해받고 있다는 이 모순적인 감정. “태어나자마자 인질”이 되어버렸다는 종생(終生)의 의식은 지금-여기의 삶을 “짐승”의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런데 ‘자연상태’란 본시 그런 게 아닌가? 날것 자체로서의 삶이란 되는 대로, 살아가는 대로 타인과 부딪고 부딪히며 생존을 개척하는 “고통”의 연장이 아니던가. 그런 자연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계약이 도입되고 사회가 구성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바꿔 말한다면, 생래적인 말이 갖는 무질서를 넘어서고자 우리는 언어의 질서를 맞아들이고, 그것을 시화(詩化)하려 애쓰는 것은 아닐까. “이 짐승 같은 놈아 너는 법이란 것을 배워라.” 하지만 “법”은 자신의 진리를 재채기를 문득 내뱉을 수 있는 초록의 미소 같은 것으로 평안무사히 제공하지 않는다. 법은 우리 짐승들에게 폭력과 강제를 통해 삶을 배우도록, 만들어가도록 명령한다. 그렇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사회는 투쟁이며 폭력의 순환이다.
우리는 도끼로 손질하는 법을 배웠다.
양념 하는 법 굽는 법 찢는 법 먹는 법
배가 고플 때면 누군가를 찢어 먹어요.
- 「언덕에 앞서」 부분
시 또한 그와 멀리 있지 않다. ‘영감어린 미학적 기예’라는 문예학의 설명을 내려둔다면, 시란 결국 자연의 언어를 비틀고 구부리고 모로 세워 정제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동굴”에 숨어서 쓰다 망친 “종이”를 찢어 삼키면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며, 그러면서 끝끝내 버텨야 하는 순간들이 시의 조형이다. 그렇게 재채기의 생리는 인고(忍苦)의 노역이 되고, 이런 고통의 과정은 끝날 길이 없다.
동굴에 종이들이 쌓여있다. 나는 종이를 찢어 먹어요.
누군가에게 동굴은 숨기 좋은 장소다.
나는 돌도끼를 들고 그를 따라갑니다.
- 「언덕에 앞서」 부분
유의하자. 법을 주조하여 삶을 조율하고 언어를 세공하여 시를 조형하는 과정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자연의 폭력과 삶의 무분별에 질서를 이입하는 작업은 사회와 시에 공통적이지 않다. 전자가 이성과 합리에 연연한다면, 후자는 낯선 감수성의 배치와 합리를 넘어서는 역설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감은 검은 혹은 먼」에 제시된 시구들은 일상의 상궤를 벗어나는 생소한 감각들을 이접적으로 종합(disjunctive synthesis)하는 실험의 기록이다.
태풍이 분다 하나의 눈에서
사람이 들어갔다 나왔다
(풀어놓지 말았어야했어)
사람을 찾는다
외투를 빼앗긴
그는 다리 한 짝이 사라졌을 수 있다 팔 한짝 혹은 귀 한짝 혹은 하나 뿐인 입으로
부르는 소리가 사라졌을 수 있다
(바람을 말았어야했어)
들어가지 말라는 소리를
(눈이 하나뿐이므로) 듣지 못했을 수 있다
남은 바람이 마저 불었다
(놓지 말았어야 했어)
- 「감은 검은 혹은 먼」 부분
이 시의 특징은 정념의 표출이나 숙고된 사유, 또는 재간어린 말놀이와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여기에는 언어의 자연적 용법이 시의 비일상적 의미론과 결합하여 어떻게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는지 살펴보려는 유별난 실험주의가 있다. 예컨대 “태풍”의 “눈”은 “사람”을 연상케 하고, 하나뿐인 눈구멍에 휘말려 “외투를 빼앗긴” “그는” “다리”나 “팔”, “귀”와 “입”도 “하나 뿐인” 신세일 것이란 상상에 빠져든다. 평상의 논리라면 얼토당터 않은 망상이겠으나, 기억하라. 여기는 숨은 ‘동굴’의 어딘가이고, ‘종이들에 쌓여있’는 시인은 사회적 일상과는 다른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래서 시야가 “검은 혹은 먼”, 눈멂의 상황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의 지각은 정지하고, 오로지 ‘다른 것’이 ‘다른 것’을 부르고 연결되고 언어화하는 장면만을 떠올려 보자. 괄호의 안과 밖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며, 기묘한 의미의 연결고리를 만들려 한다(“들어갔다 나왔다”⍀“풀어놓지 말았어야했어”, “입으로 부르는 소리가”⍀“바람을 말았어야 했어”, “눈이 하나뿐이므로”⍀“듣지 못했을 수 있다”, “바람이 마저 불었다”⍀“놓지 말았어야 했어”).
부자연스럽고 비논리적이며 이질적인 말들의 배치, 그것이 시적인 조형일까? 선풍기 버튼을 0과 1의 조합 속에서 유비해 내고, 있음과 없음의 변증을 짚어냈듯이. 그런데 “태풍”의 “눈”에서 길어낸 이 기묘한 시적 논리는 등단작의 유쾌함과는 사뭇 다른 정동을 표방한다. 아이의 재채기 같은 원초적인 생리현상을 통한 시의 궁구는 ‘비릿한 추억’의 성년에 도달해 버렸고, ‘돌도끼’를 들어 삶을 다듬질하는 과정에 동원되었으며, 이제 언어를 연마해 일상 너머로 강제로 구축되어야 할 지점까지 와버린 탓이다. 무심하고 무감한 생활의 풍광을 각성하도록 촉구하는 말의 빈 자리를 시인은 어떻게든 메워야 할 운명이 아니겠는가.
남은 사람이 잡은 외투 속으로
( ) 들어갔다
4. 초록의 환상, 흔쾌한 기다림
시적인 순간, 그것이 정말 언어로 탁마될 수 있을까? 재기어린 단어의 유희, 참신한 어구의 발명, 또는 무릎을 탁 칠만한 혜안의 발견이 시가 될 수 있을까? 무심하고 무감한 일상의 언어를 낯설게 가공하는 것, 나아가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시를 만들지는 못할 듯하다. 절연이 인연을 전제하듯, 시는 비시적(非詩的)인 것 곧 일상의 언어를 앞에 두어야 하는 탓이다. 때문에 시인은 흐르는 사태를 흐르는 대로 놓아둔 채 관찰해 보기로 결심한 듯하다.
눈물이 흐른다 머리칼 만진다 머리칼 만진다 햄릿은 잔을 들고 마셨다 눈물이 흐른다 햄릿 역을 맡은 오필리어가 눈을 빠뜨렸다 머리칼 만진다 저어기 셰익스피어가 걸어온다 (일동정렬) 머리칼 만진다 그는 대머리다 식물은 아직도 포도주를 찾는다
- 「~」 부분
범상한 단어들, 반복되는 어구들, 잘 아는 이름들, 익숙한 형식들. 여기에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사소한, 상식에는 어긋나는 지점들이 몇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는 “햄릿”과 “오필리어”가 결코 뒤섞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작품 속에 원작자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평범하게, 이미 고지된 앎의 무대에 생경하고 불편한 배치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과연 시적일까? “햄릿은 잔에게 편지를 쓴다.” 잔은 잔[杯]일까 잔(John)일까? 이렇게 뒤섞고 혼합한다면 무언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을까?
2연에 이르면 혼돈은 더욱 배가되는데, “잔”은 “호두를 깠”고 “코르크”와 “잭나이프”를 갖고 다니며 생전의 위업을 “자랑”하기도 하고, “술에 취한 나머지 비틀거리다 잔을 쏟”기도 하는 탓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급기야 “햄릿”이 원작에도 없는 고백을 하며 비통에 빠지는데, “목이” 맨 “셰익스피어”가 “펜을 놓”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원작과 가공, 일상과 시. 다름, 차이, 엇나가고 빗나감... 물론 이 연극적 상황의 맥락을 부러 상상하고 끼워 맞춰볼 필요는 없다. 다만 여기서 시인이 무엇을 시험하고 있는지, 자신의 말을 어떻게 담근질하고 있는지는 예의주시하며 지켜볼 일이다. 감각이 흐르고 언어가 흐르는 이 현장에서 무엇이 생겨나고 있는가? 시인은 다시 펜을 집어들어 쓰고자 할 것인가?
*
아마도 언젠가 시인은, 시를 씀으로써 그리고 시인이 됨으로써 막연히 동경하던 “초록”이 궁극을 엿보았을지 모르겠다. 그게 시적인 것이든 혹은 찰나가 빚어내는 착오나 몽상이든,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계속해서 쓰게 만드는 아궁이불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번 다섯 편이 드러내는 다양한 시작(詩作)의 양상들은, 그가 아직 자신의 발성법을 연습하고 있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필연코 모든 시인들이 거쳐야 하고,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시의 조형은 윤지양에게도 이제 시작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모든 시인들도 그렇듯 모든 시작은 단지 초록의 서곡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언젠가, 그가 아직 시인이기도 전에 바라보았던 초록의 환상은 여전히 명확한 자신의 성좌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재채기하며 미소짓던 시인이 그만의 초록을 발견하고 명명하기 위해 고심하고 번민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독자에게도 고통스런 노릇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목격자의 소임이야말로 시인의 성장을 증언하고 확언할 수 있는 권리일 듯하다. 시인에게도 우리에게도 아직 더 기다려야 할 시간들이 흔쾌히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