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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성경본문: 시편 11: 1-7
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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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82:5에 “저희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고 말씀합니다.
법을 시행하는 자들이 공의를 잃어버리면 사회가 흔들립니다.
법을 시행하는 데 부정이 끼이면 온 세상이 궤도를 이탈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새가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질 때 이 땅의 기초가 무너져 내립니다.
의인들이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면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립니다.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안전이 흔들리고, 상업적인 번영이 흔들리고, 종교적인 자유가 흔들립니다.
터란 집을 지을 수 있는 대지입니다.
그러므로 집을 지을 때는 터부터 사야 합니다.
만약 터를 빼앗기면 터 위에 있는 모든 것도 미구에 다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터가 지진으로 무너지면 그 위에 지어졌던 집도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터를 잘 선택하여 집을 지어야 합니다.
육신의 집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집을 위하여 신앙의 터를 잘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믿음의 터는 예수님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0~11).
베드로 사도는 이 터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믿음의 터가 되시고, 친히 말씀 안에서 지어져가는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우리는 주님 없이는 무너지고 마는 터와 집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생명으로 부지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손으로 지으신 영화로운 새 피조물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행한 것이 무엇인고”라고 탄식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는 주님을 믿는 성도가 곧 하나님 나라의 터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사 6:13에서 말씀합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다윗은 원수에게 쫓김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을 이 말씀으로 스스로 타이릅니다.
“나는 이땅의 거룩한 그루터기인데, 나는 이 나라의 간성이요 보루인데,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실 거룩한 터인데, 어찌 내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께 피하리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역경의 담을 뛰어넘으리라.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가실 때까지 나는 나의 위치에 굳게 서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에 충실하리라”
종교개혁을 일으킨 M. Luther의 일기책에 보면 그는 몇 번이나 개혁의 기치를 내리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치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행한 것이 무엇이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이 땅 위에 거룩한 터, 하나님이 역사하실 기지로 세움을 받은 것인데 어찌 이 부름을 포기하랴”는 말씀으로 스스로 격려하고 끝까지 사명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릴 단을 수축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기지를 먼저 정돈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제2교회당은 99. 6. 30에 첫 삽을 떴는데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제 이 기지는 오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교회로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딤전 3:15).
우리 교회는 이렇게 터를 잡았고 이 터 위에 장엄한 교회당을 세웠습니다.
보이는 건물은 멋지게 세워졌는데 아직 수축되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무너져 있고 무너져 가고 있는 터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째, “기도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주님의 탄식을 들어봅시다.
기도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하나님이여,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하나님과 함께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오늘 이루어질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호흡과 같습니다.
복음전도를 위한 영적 동력도 기도에서 나옵니다.
많이 기도함으로 먼저 영적 암흑을 내어쫓고, 마귀의 궤계를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 주의 말씀이 영롱하게 빛나며 역사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입니다(엡 6:12).
씨름이 얼마나 힘듭니까?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보세요.
거구의 장정들이 땀을 비오듯이 흘립니다.
기도는 죽는 모퉁이를 돌아야 합니다.
나의 꿈과 기도가 한 번 죽고 난 다음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창 32장을 보세요.
야곱이 얍복 나룻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뼈가 부러지면 얼마나 아픕니까?
통뼈가 쉽게 부러집니까?
통뼈 기질이 산산히 부러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도의 죽음과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31절)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세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의 병 낫기를 위하여 많이 간구합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와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에 통발이 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야이로의 꿈과 기대가 산산히 깨졌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6절).
예수님은 비웃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내신 후에 믿음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부모를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시니 소녀가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
기도는 이루어지기 전에 반드시 죽음을 통과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겪고 실패의 말들을 듣습니다.
기도 가운데 먼저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래도 두려워 말고 믿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부활의 기쁨과 승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산문창교회 청년 집사였던 고 한명동 목사님의 회고담입니다.
“옛날 주기철 목사님은 교회에 문제만 있으면 무학산 기도원에 올라가서 한나절씩 기도하고 오셨습니다. 주 목사님이 산에 가신 것을 볼 때마다 말 많은 마산에 또 문제가 있구나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일이나 설교는 준비와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때 그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경영하시는 일이나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 기도의 터가 무너지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는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것인데 우리가 무엇이관대 우리 힘대로 우리 말대로 열매가 열리겠습니까?
기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힘과 격려를 받으십시오.
무너진 기도의 제단을 다시 쌓으십시오.
개인 경건생활을 위하여, 사역의 열매를 위하여, 기적 같은 축복을 위하여 아침과 저녁의 기도를 다시 시작하십시오.
“집사님, 새벽기도 가셨습니까?” 기도 없으면 시험에 듭니다.
“구역장님은 기도하러 교회에 가셨습니다”
기도가 무너지면 영적인 생활이 무너집니다.
경건의 능력이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유약해져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걸림돌이 됩니다. 영적인 일에는 최우선적으로 기도의 터를 잡고 기도의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것입니다(대하 16:9).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어리석고 무모한 신자입니다.
☞둘째, “전도와 선교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우리 주님의 탄식을 들어봅시다.
우리의 삶은 선교적인 삶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1~16).
이 말씀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만 천국에 가고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교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개인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을 터로 삼고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말씀했고, 바울 사도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네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Have to, 의무보다는 Want to,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한 걸음씩 양보하고 한결 부드럽고 열심히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외인에 대하여도 교회의 명성에 걸맞는 선교적인 터를 닦아갑시다. 우리 교회는 외국인근로자 의료봉사, 국외단기 선교훈련, 세계선교와 국내 전도지원, 제2개척교회 설립, 건강대학 운영 등 지역사회와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 사랑의 터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신 26장에 보면, 하나님은 안식년을 기준하여 제3년째의 십일조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12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13절)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15절)”라고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19절).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실천할 그때 우리는 복의 근원으로서 복을 받게 됩니다.
선교적인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머리가 되고, 나누어주는 자가 되고,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선교를 위하여 당신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형통과 지혜, 물질과 건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후퇴가 없습니다.
전진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히 10:36~39에서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는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힘을 받고 전진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내리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옛날 신라의 화랑처럼 임전무퇴, 이 세상에서 영적 전쟁에 임하여 결코 뒤로 물러서선 안됩니다.
엡 6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보십시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6:14~17).
모든 무장이 앞면에 쏠려있습니다.
비겁하게 등을 보이면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전도하지 아니하는 신자는 이기적인 신자요, 선교하지 아니하는 신자는 비겁한 신자입니다.
☞셋째, “성경공부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주님의 탄식을 들어봅시다. 사도 바울은 딤후 3:13~17에서 말씀합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공부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행한 것이 무엇인고? 성경은 우리의 빛이요 등불입니다. 성경말씀은 우리들의 영적 양식과 지혜인데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 없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큐티 교재 “복있는 사람”을 따라서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순장대학, 교사대학, 행복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성경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인격으로 변화시킵니다. 일꾼으로 성숙시킵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는 신자는 악하고 게으른 신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디모데야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도 아는 체, 안 하고도 하는 체하는 다툼과 허영이 생기느니라”(딤전 4:13).
선교구역회와 전도사랑방에서 가르치는 일과 권하는 일에 착념하십시오. 저는 매월 선교구역회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세상 살이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합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성경공부의 터를 닦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우리 주님의 탄식을 들으십시오.
기도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행한 것이 무엇인고?
선교적인 삶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행한 것이 무엇인고?
성경공부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행한 것이 무엇인고?
예수 믿는 우리가 기도와 선교와 성경공부에서 떠나면 어찌 이땅 위의 의인이라고 자임할 수 있겠습니까?
이 거룩한 임무에서 떠나지 맙시다.
예수님은 용감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거룩한 터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용감하게 기도와 선교와 성경공부의 깃발을 세웁시다.
기도와 전도와 성경공부의 튼튼한 터를 닦고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간성이 됩시다.
터가 무너지면 어리석은 신자가 되고, 비겁한 신자가 되고, 게으른 신자가 됩니다.
터가 무너지면 누가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르겠습니까?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의 의인이 행한 것이 무엇인고”라고 질문하실 때 우리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