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30】 12
4) 법에 나아가서 밝히다
如是聰慧眞佛子가 志願堅固不動搖하고
以其智力善通達하야 入於諸佛方便藏이로다
이와 같이 총명하고 진실한 불자
뜻과 원이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고
지혜의 힘으로써 잘 통달하여
부처님의 방편장(方便藏)에 들어가도다.
▶강설 ; 진정으로 지혜롭고 진실한 불자는 선근회향으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다. 지혜의 힘으로 잘 통달한 사람은 선근회향으로 삶의 최고 가치를 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동요하지 않는다. 눈앞의 이익과 손해에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과 중생에게 이익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중생을 위한 방편이다.
覺悟法王眞實法호대 於中無着亦無縛하니
如是自在心無礙하야 未曾見有一法起로다
법왕(法王)의 진실한 법 깨닫고 보니
그 가운데 집착도 속박도 없어
이와 같이 자재한 마음 걸림 없으니
한 법도 일어남을 보지 못하도다.
▶강설 ; 법왕의 진실한 법이 무엇일까? 일체 선근으로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것이다. 6바라밀과 10바라밀과 10선과 사섭법과 사무량심과 인의예지로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일이다. 법왕의 법을 이와 같이 깨달으면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다. 마음은 자유자재하여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오로지 요익중일뿐 어떤 한 법도 일어남을 보지 못한다.
如來法身所作業이여 一切世間如彼相이라
說諸法相皆無相하니 知如是相是知法이로다
여래의 법신(法身)으로 지으시는 업(業)이여
일체 세간이 저 모양과 같거든
모든 법의 모양이 다 없다 설하나니
이와 같은 모양을 아는 것이 법을 아는 것이로다.
▶강설 ; 사람이 짓는 업도 모두 진여로 짓는 것이며 여래의 법신으로 짓는 것이다. 일체 세간도 모두 여래의 법신이며 진여다. 그렇다면 달리 다른 형상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 일체 세간의 모양을 이와 같이 아는 것이 법을 아는 것이다.
菩薩住是不思議하야 於中思議不可盡이라
入此不可思議處하야 思與非思皆寂滅이로다
보살이 이러한 불가사의한 데에 머물렀거든
그 가운데서 사의하려 해도 다할 수 없어
이러한 불가사의한 곳에 들어가면
사의와 불가사의가 모두 적멸하도다.
▶강설 ; 예로부터 화엄경의 명구로 꼽히는 구절이다. 진여와 여래법신과 중생의 업이 혼연히 일체여서 달리 다른 상을 구하려 해도 상을 구할 수 없는 경지에서 보면 모두 불가사의한 경지에 머물러 있다. 불가사의한 경지에서는 아무리 사의해도 그 사의는 끝이 없다. 끝내는 사의와 불가사의가 모두 적멸하기 때문이다.
如是思惟諸法性하야 了達一切業差別하야는
所有我執皆除滅하고 住於功德無能動이로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성품을 사유하여
일체 업의 차별을 통달한다면
지니고 있던 ‘나’라는 집착을 모두 소멸하고
공덕에 머물러서 동(動)할 수 없도다.
▶강설 ; 모든 법의 성품은 진여와 여래법신과 중생의 업이 혼연히 일체여서 달리 다른 상을 구하려 해도 상을 구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아 일체 업의 차별을 통달하면 나와 나의 것이 다 소멸한다. 그래서 오로지 중생들의 이익을 위한 선근회향만이 보살의 삶이 될 때 그 공덕은 어느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
菩薩一切業果報가 悉爲無盡智所印이니
如是無盡自性盡일새 是故無盡方便滅이로다
보살의 모든 업과 모든 과보는
다함없는 지혜로 인증한 바라
이와 같이 다함없는 성품이 다하여지니
그르므로 다함없는 방편마저 소멸하리라.
▶강설 ; 선근회향으로 삶을 살아가는 보살의 모든 업과 업의 과보는 역시 다함이 없는 지혜라야 인증할 수 있는 경지이다. 또 나아가서 다함이 없는 자성마저 다하므로 다함이 없는 방편마저 소멸하게 된다.
菩薩觀心不在外하며 亦復不得在於內하니
知其心性無所有하야 我法皆離永寂滅이로다
보살은 마음이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안[內]에도 있지 않음을 관찰하여
그 마음이 없는 줄을 알게 되어서
나와 법을 다 떠나 길이 적멸하도다.
▶강설 ; 마음이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밖에 있는 것도 아님을 관찰하여 끝 내에는 마음이 있는 바가 아님을 알아 나와 경계인 법을 다 떠나 적멸하다고 하였다. 능엄경에서 마음의 소재를 밝히는 칠처징심(七處徵心)이라는 내용이 있다. 또 보조(普照)스님의 진심직설(眞心直說)이라는 저서에서 참마음의 실체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한 바도 있다. 또 심왕(心王)이니 심부(心賦)니, 유심결(唯心訣)이니 관심론(觀心論)이니 하는 글에서도 많이 다루고 있다. 불교는 어떤 면으로 보면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치 마음에 대해서 특별히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론도 스스로 채득하기 전에는 마치 수박의 겉을 핥는 것과 같아서 참맛을 알 수 없는 것이 또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영원한 화두로 남아 있는 것이 마음이다.
5) 이익을 이루다
彼諸佛子如是知 一切法性常空寂하면
無有一法能造作하니 同於諸佛悟無我로다
일체 법의 성품이 항상 공적함을
저 모든 불자들이 이와 같이 알게 되면
한 법도 지을 것이 없어서
모든 부처님과 같이 무아(無我)를 깨달으리라.
▶강설 ; 일체 존재의 공성(空性), 공적성(空寂性), 적멸성(寂滅性), 무아성(無我性)을 발견한 것은 진여성(眞如性), 불성(佛性), 법성(法性), 자성(自性)의 발견과 아울러 불교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있다. 같은 것이면서 다른 것이고, 다른 것이면서 같은 것이다. 보살이 선근을 닦아 회향하여 공성에서 불성을 보고, 불성에서 다시 공성을 보는 것이 큰 이익임을 밝혔다. 일체 존재의 이 두 가지 입장을 명백하게 깨닫지 못하면 선근회향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 진정한 선근회향은 공성과 불성을 명백하게 깨달아야 가능한 일이다.
了知一切諸世間이 悉與眞如性相等하야
見是不可思議相하니 是則能知無相法이로다
일체 모든 세간이
진여의 성품과 모양과 평등함을 알아
이 불가사의한 모양을 본다면
이것이 모양 없는 법을 아는 것이로다.
▶강설 ; 일체 세간이 곧 진여다. 성품도 진여고 형상도 진여다. 진여는 세간과 평등한 성품이며 평등한 형상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형상이 본래로 형상이 아닌 법을 아는 것이다.
若能住是甚深法하야 常樂修行菩薩行하며
爲欲利益諸群生하야 大誓莊嚴無退轉하면
만약 이러한 매우 깊은 법에 머물면
즐겁게 보살행을 항상 닦아서
무수한 모든 중생에게 이익 주려고
큰 서원(誓願)으로 장엄하여 퇴전치 않도다.
▶강설 ; 보살이 머물러 보살행을 항상 즐겁게 닦는다는 매우 깊은 법이란 일체 존재가 모두 진여라는 법이다. 법의 성질도 진여고, 법의 형상도 진여다. 중생도 진여고, 여래도 진여고, 업장도 진여인 법이다. 이러한 이치에 머물면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하여 큰 서원으로 장엄하여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是則超過於世間이라 不起生死妄分別하고
了達其心如幻化하야 勤修衆行度群生이로다
이것은 곧 세간(世間)을 초월하여
생사의 헛된 분별 내지 않으며
마음이 환영인 줄 통달해 알고
온갖 행을 부지런히 닦아 중생을 제도하도다.
▶강설 ; 진여의 이치는 상대적이고 비교하는 일체 세간법을 초월한다. 그래서 생사와 갈등하는 헛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마음마저 환영과 같은 줄을 통달하여 6바라밀과 10바라밀과 10선과 사섭법과 사무량심과 인의예지를 부지런히 닦아 일체중생을 제도한다.
菩薩正念觀世間의 一切皆從業緣得하고
爲欲救度修諸行하야 普攝三界無遺者이로다
보살이 바른 생각으로
세간이 다 업으로부터 생긴 것임을 관찰하여
중생을 건지려고 온갖 행을 닦아서
삼계를 널리 포섭하고 남김이 없도다.
▶강설 ; 보살이 바른 생각으로 일체 세간을 면밀히 관찰해보면 모두가 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임을 알게 된다. 보살업과 불업(佛業) 등으로 온갖 난행과 고행과 보살행을 부지런히 닦아서 중생을 제도하고 교화한다. 그래서 삼계의 모든 중생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了知衆生種種異가 悉是想行所分別하고
於此觀察悉明了호대 而不壞於諸法性이로다
중생의 가지가지 차별한 것이
생각과 의식의 작용으로 분별하는 것임을 알아
이런 일에서 관찰하여 다 밝게 알지만
그래도 법의 성품 파괴하지 않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