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한국과 중국의 수교 2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중국 대중문화시장은 K-POP 마케팅의 대폭발이 시작된 교두보이자 아시아 한류 진출의 거점이었다. 또한 현재는 물론이고 성장 가능성이 무한대인 미래의 중심 시장이기도 하다.
국경을 굳게 닫고 적대하던 한중관계가 20년 만에 긴밀한 상생관계로 변화해 문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눈부신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과의 수교가 없었다면 한국 경제의 비약적 도약은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 역시 한국의 자본주의 경험과 각종 기술 전수가 없었다면 지금의 급속한 번영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당시, 일부 성인가수들의 중국교포 위문공연이 간헐적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중국 현지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흔적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실제로 당시에 베이징 도심의 음반가게에는 북한 민요 음반이 몇 개 있을 뿐 한국 대중가요 음반은 거의 전무했었다. 1992년 8월 24일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한중 수교가 성사되면서 한국 대중문화의 중국 진출은 급물살을 탔다.
수교 초기, 한국 드라마의 활발한 중국 진출에 비해 대중음악의 움직임은 미세했다. 당시 한국대중음악은 내수시장이 활황기를 누렸기에 해외진출을 시도할 필요성을 느꼈던 기획사는 없었다. 한국드라마는 1993년 드라마 '질투'가 신선한 반응을 던진 여파로 대박이 터진 19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까지 5년 동안 꾸준하게 수출되며 한국대중음악의 중국진출에 튼튼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1997년 이후 온 나라를 휘청거리게 했던 IMF 경제 환란 속에 한국 대중음악시장도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사회적으로 막 광범위한 구축이 시작된 인터넷에 만연된 불법 디지털음원 MP3로 인해 음반시장이 추락을 거듭하면서 아이돌그룹들도 음반판매에 비상이 걸렸다. 이에 SM엔터테인먼트를 필두로 대형기획사들은 위기극복을 위해 해외진출을 꾀하기 시작했다. 중국 시청자들의 눈길을 단숨에 잡아끈 원조 한류스타는 1998년 방송된 드라마 '별은 내가슴에'의 주인공 안재욱이다. 안자이쉬로 불린 그는 행사장마다 5만~6만여명의 중국 팬들을 끌고 다녔다. 드라마에 삽입된 안재욱의 'Forever'가 현지에서 대성공을 거둔 후 한국대중음악의 중화권 진출 가능성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1998년 5월, 중국 엔터테인먼트 회사 우전소프트는 중국 최대음반제작사인 샹하이셩상과 계약해 한국 대중가요계를 제패한 SM소속 아이돌 그룹 H.O.T의 히트곡 중, 중국인들의 기호에 맞는 10곡을 선곡한 베스트 앨범 '행복'을 현지에서 제작 발매했다. 한글가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어 해석을 달아 제작된 이 앨범은 한국가수로는 최초로 중국 현지에서 정식 발매된 역사적인 음반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가수 첫 中서 정식 발매
당시 H.O.T 멤버는 섹시가이 강타, 위트가이 문희준, 무드가이 토니 안, 와일드가이 장우혁, 샤이가이 이재원으로 구성된 5인조였다. 1997년에 발표된 H.O.T의 2집은 '행복', '늑대와 양'등 여러 곡의 동시 다발적 히트 퍼레이드로 국내 여름 음반시장을 강타했다. 무려 150만장이 팔려나간 2집은 1997년 한국대중음악시장의 유일한 플래티넘 셀러로 기록되었다. 찬송가 '천사들의 노래가'의 후렴구 네 소절을 빌려온 빅 히트곡 '행복'의 경우,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에서 3주간 1위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각종 차트를 올킬한 킬러 콘텐츠였다.
데뷔 2년 차였던 H.O.T의 '행복'과 막 데뷔한 잭스키스의 '폼생폼사'로 구축된 양측 팬들의 라이벌구도도 후끈했다. 각종 차트에서 1위를 다퉜던 이들의 팬덤은 최근 엄청난 관심을 이끌어낸 케이블 TV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중요 소재로 다뤄졌을 정도로 뜨거웠다. 당시 H.O.T의 팬덤은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부터 중학생로 구성되었는데 그들로 인해 문구, 신발, 완구, 팬시, 의류에 이르기까지 멤버들의 얼굴이 새겨진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며 대중음악산업의 영역을 확대시켰다.
H.O.T의 성공은 탁월한 비주얼 음악의 매력에다 효과적인 홍보 전략도 한몫했다. 대형기획사의 전략 아래 무분별한 방송출연을 자제했고 2∼3곡의 레퍼토리를 정기적으로 교체하며 앨범의 생명력을 연장시켰다. 또한 신드롬으로 이어진 춤과 가창력이 담보된 노래들은 단숨에 당대의 10대 신세대문화를 장악하며 우상으로 떠올랐다.
2000년대 초반 한류는 중국에서 대폭발했다. 이는 개별적으로 진행된 이전의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진출역 사에서 드러난 한계를 극복한 여러 가수에 의해 집단적이고 지속적으로 소비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화려했던 외형적 성과에 걸맞은 실질적 이윤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에 한류 거품론이 대두되었다. 국내가수들의 현지에서의 인기가 앨범 판매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은 중국 사회에 만연된 불법 음반시장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의 불법 음반 비율은 전체 시장의 90%이상으로 복사판이 난무했다.
H.O.T 와 NRG는 중국에서 20만장이 넘는 판매기록을 세웠는데 불법 복제음반은 그보다 20배가 많은 400만장 정도가 팔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현지에서 발매된 '행복'등 히트곡들이 수록된 HOT의 음반은 한 달 만에 5만여 장이 팔려나갔고 1, 2집 합쳐 14만장을 판매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에 힘입어 남성듀엣 클론, 박미경, NRG, 베이비복스, 유승준 등 국내 인기가수의 앨범들이 대거 중국에서 발매되었다. 하지만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던 중국 대중음악 음반시장의 특수성으로 인해 하나같이 경제적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지금에 비해 턱없이 낮았던 중국의 환율도 한국가수들의 발목을 잡았다. 2001년 당시, 문화관광부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서 획득한 인세가 한국의 1/20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K-POP에 열광적인 중국 청소년들의 뜨거운 반응을 접한 문화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은 1998년 11월, 김대중대통령의 중국방문 시기에 맞춰 한국대중가수들의 히트곡을 편집한 CD 5,000개를 제작해 중국의 방송사와 청소년, 대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CD에는 H.O.T의 '행복', 송창식의 '우리는', 조용필의 '친구여', 김건모의 '핑계', 박정현의 '나의 하루'등 15곡을 수록했다. 한류 초기, 중국에서 K-POP이 음반 시장이 아닌 공연시장에 집중되었던 것은 공연의 성공을 보장했을 정도로 인지도가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발매한 음반을 통해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H.O.T는 2000년 2월 중국 문화부 초청으로 베이징 공인체육관에서 공연을 열었다. 무려 1만 2,000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놀랍게도 공연장에는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는 중국 여학생들도 있었다. H.O.T와 함께 클론, N.R.G, 베이비복스, 태사자 등도 중국 팬들의 마음을 달궜다. 이에 후난(湖南)위성TV는 '쾌락대본영(快樂大本營)'이란 프로그램에 한국의 인기 아이돌그룹 NRG를 출연시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코요테, 구피 등 수많은 한국가수들이 중국 TV에 줄을 이어 출연했다.
현지 발매 음반 인기 폭발
관영 CCTV까 지 한류 보급에 가세해 2000년 5월 계림에서 열린 NRG와 베이비복스 공연실황을 소개하며 한국음악 특집을 방송했다. 또한 '상하이 음악세계'등 중국에서 발행되었던 수십 종의 잡지는 매호마다 한국 가수들을 소개했다. 특히 '청춘지성(靑春之星)'은 1997년 이래 빌보드차트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한국가요 톱10'을 게재했다. 1999년 한국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자국 청소년들의 열기를 중국 공산당 청년기관지 '중국 청년보'가 최초로 '한류'로 표현한 뒤 2000년부터 모든 미디어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 진출 초기, 거대한 불법복제 시장, 중국 정부의 자국문화 보호정책 등으로 한국의 음악기획사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폐쇄적인 환경을 감수하고 중국 진출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은 기업형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가장 먼저 구축한 SM엔터테인먼트 밖에는 없었다. 중국 현지 법인을 추진한 SM은 2001년 12월 강타, 문희준, SES, 신화, 플라이투터 스카이를 참여시킨 'SM 사대천왕 콘서트'를 시작으로 현지화 전략을 시도했다. 이후 SM 소속 가수들은 서서히 중국에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