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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처음에 박진환 선생님의 부르너에 관한 글을 읽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정리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일이 있어 이제야 컴퓨터 앞에 앉아 몇자 끄적입니다. 사실 부르너에 대한 제 관심은 지식의 구조에 대한 피아제의 구조주의적 분석과 푸코의 지식과 권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보는 것인데 아직 완결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기서는 부르너의 지식의 구조와 핵심역량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써보겠습니다.
1. 지식의 구조
아마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교육학 용어가 ‘지식의 구조’일 것입니다. 그만큼 지식의 구조는 유명한 개념이고, 이홍우 교수의 책을 접한 사람이라면 교과와 관련해 핵심으로 차지하는 내용이 지식의 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뭐 피닉스와 허스트의 접근도 부르너와 유사하고 이홍우 교수가 자세히 소개하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 이홍우 교수가 부르너의 지식의 구조를 교과에 대한 이론전개의 근거이론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부르너가 사용하는 지식의 구조란 단순한 사실들의 집합이 아니라 각각의 독특한 논리, 개념, 방법에 따라 대상을 이해하고 관련짓는 방식이며, 잡다한 현상들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그것들을 서로 관련짓고 체계화하는 주요개념 또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브루너는 지식의 구조의 의미를 각 학문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일반적 원리, 일반적 아이디어, 기본개념 및 원리 등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식의 구조를 개념화한 후 부르너는 교육과정과 교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부르너의 책이나 이홍우교수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잘 아실 것입니다. 교육학 요점정리 정도의 수준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죠.
- 교과는 학문의 내용이어야 한다.
- 지식의 구조를 조직하는 방법에서 나선형 교육과정 제안(계열성과 계속성)
- 탐구학습과 발견학습 강조
- 직관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에서 직관적 사고의 중요성 강조
- 학습동기와 관련하여 내재적 흥미의 기초위에서 조직되고, 다양하고 폭넓게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
- 교구의 중요성 강조(표현방식의 최적계열: 작동적 표현, 영상적 표현, 상징적 표현) : 학생들이 경험범위를 확장하고, 학습내용에 내재해 있는 구조를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학습내용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
2. 지식의 구조에 대한 비평과 부르너의 대한 단상
그럼 이 지식의 구조는 어떻게 해서 탄생된 개념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모든 지식은 역사성을 가지는 것이니 만큼 지식의 구조는 당시 미국의 교육상황과 미국내외의 정치적 긴급 상황에 기초하고 있는 용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지식의 구조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생산된 역사적 영어입니다. 마치 미래형 교육과정처럼 말입니다. 사실 모든 언어가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하는 것일 테지만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1950년대는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정권이 냉전체제에서 소련과의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 스푸트닉 사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닉을 발사하게 되자 우주경쟁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서고 있다고 생각한 미국인들은 미국의 교육이 소련의 교육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면서 그 실패의 책임을 공교육에 돌렸습니다. 그 결과 의회는 1957년에 국가방위법안을 통과시키고, 국방부는 수학, 과학, 외국어 교육을 위해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교사가 연수를 받게 되고 보다 엄격한 내용을 담은 교육과정, 즉 지식의 구조를 강조하는 교육과정이 개발되고, 영재교육프로그램이 강화되면서 미국의 교육은 수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죠. 뭐 국방부가 왜 교육과정에 나서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미국교육의 발전사는 냉전, 군수산업과의 관계와 뗄수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죠.
여기서 지식의 구조라는 비역사적 개념은 국가안보와 애국주의라는 미명하에 공교육을 상향조정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개념입니다. 당시 미국의 반공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기에 이르기까지 소련과의 경쟁에서 결정적인 우세를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희생양으로 진보주의교육을 전면에 부상시키게 됩니다. 특히 미국의 장군이었던 베스터는 미국교육이 지적 무기력증에 빠져 있음을 교육의 황무지로 비유하고, 교육과정의 초점을 학문적 지식과 이들 학문의 학자들이 그 구조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회귀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수학문의 전공자들이 경험 중심적 관점을 가진 진보주의 교육학자들을 학구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가하게 됩니다. 즉 순수학문 전공의 대학교수들은 초중등교육이 진보주의 관점을 가진 교육학자들에 의해 황폐화되었다고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서로 관점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들, 즉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정권, 교육비판가, 군비확장주의자, 대학의 전통적 인문학자들이 상호연대는 지식의 구조라는 개념을 안정적이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계기로 만들었는데 이들이 애초에 설정한 안보상의 위기는 하나의 신화이며 허구였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당시 소련과 미국의 과학수준은 중등교육의 수준에 있다기보다는 자국으로 망명한 독일 과학자들의 과학수준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판의 타깃으로 삼은 진보주의에 기반한 생활적응 교육과정은 미국 교육의 지적 목표를 상실하게 한 주된 원인이 아니였습니다.
그렇다면 지식의 구조라는 논의에서 보상과 자율성을 가지는 집단, 다시 말하면 교육과정의 중심을 차지하는 집단은 누구이며, 반대로 박탈과 제재를 당하는 집단, 즉 교육과정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집단은 누구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데 부르너를 비롯한 이홍우 교수는 이러한 지식의 구조를 둘러싼 권력관계에서 어떠한 정치성이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지식의 구조를 교육내용으로 선정함에 있어 권력의 작용과 함께 어떤 특정집단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됩니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지식의 구조라는 교육내용을 선정함에 있어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집단을 의미하는데, 브루너는 각 학문분야의 기본구조를 반영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설계하기위해 그 분야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유능한 학자와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주의적이거나 사회적 쟁점을 주장하는 교육과정학자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처럼 지식의 구조에 대한 논의는 교육과정 전문가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수준의 의사결정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교과전문가의 일방적인 의사결정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숨겨진 정치성을 들어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의 구조에 대한 논의에서 재미있는 것은 브루너가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누구나 중류계층의 잠재적인 교육과정의 혜택을 받아 이미 분석적 사고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지력의 사용에 대한 전통적인 통념을 가지고 학교에 들어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지식의 구조가 실제로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특정 일부의 학생, 즉 학구적 성격이 강한 학생들만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마치 200 개정교육과정에서 성공하는 학습자라는 개념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만. 따라서 지식의 구조라는 논의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혜택을 받은 중산층, 즉 특정학생들만을 포섭하고, 나머지 학생들을 철저히 배제시킴으로써 사회계층을 구조적으로 영속화하여 노동계층을 비롯한 잔여 집단들을 하층에 두는 권력의 효과로 기능하게 됩니다. 물론 부르너가 지식의 구조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규정한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십년 후 반성하는 고백을 하죠. 고백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육이란 중립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주제도 아니요, 따로 떼어내어 논의할 수 있는 주제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육은 어떤 사람에게는 장래를 보장해주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다른 사람을 밀어내어 버린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이다. .....속죄고백은 아니지만, 그때 나는 기꺼이 역사의 구조, 물리학의 구조, 수학적 일관성의 성격 등에 관해서는 강조를 줄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직면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와의 관계 속에서 교육과정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어서 브루너는 지식의 구조를 교육내용으로 조직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수 있는가하는 효율성의 논리를 강조했는데, 이러한 효율성은 한편으로 전체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피지배집단을 사회적으로 배제시키고 재생산하는 기제가 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70년 봄에 <오늘의 심리학>, 잡자의 편집자인 엘리자베스 홀이 그 당시 미국 교육에 관한 내 의견을 물었을 때,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미국 교육이 위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미국 교육은 사회적 필요의 변화에 반응하지 못했고, 사회적 필요를 이끌어나가기보다는 그것에 뒤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조기교육과 사회계층에 관한 내 연구결과는 우리의 교육제도가 사실상 사회계층 체제를 영속화하여 언제나 한 집단을 밑바닥에 두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확신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낮은, 전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집단의 아동이 최대한으로 사회에 참여할 능력을 짓밟아 버리고, 게다가 조기에, 또 효과적으로 짓밟아 버렸다.“
3. 지식의 구조, 알고 보면 별거 아닙니다(?)
대학자가 사용한 용어를 알고 보면 별거 아니라고 말하면 제가 지나치게 건방진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이란 결국 질서를 찾아나서는 노력이라는 뜻에서 별거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것 입니다. 잠깐 딴 이야기할까요. 학자들이 사유하는 방식 가운데 큰 특징 중의 하나가 ‘Post factum’이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후정당화’입니다. 사후정당화라고 하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를 보고 그 결과를 사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인데, 이미 나타난 결과를 보고 이 결과의 원인을 찾아가는 방식일 수도 있고, 이러한 결과가 도대체 왜 나타났을까? 찾아가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일이 치러지고 난 다음에 사후적 정당화로서 지식을 만드는 것이 학문의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학문은 사후적으로 돌아보면서 무엇을 했는지를 identify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구체적인 증상이 나타난 다음에, 그 증상을 설명하는, 사후적인 방식을 학문이 택하기 때문에 항상 학문의 철학적 사유는 후진적입니다. 전진적이지 못합니다.
스프트닉 이후 미국 교육의 문제점을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우즈워홀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질문이었고 이 회의의 결과를 정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부르너였습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구조’는 왜 미국이 소련보다 인공위성을 먼저 쏘지 못했느냐하는 질문 속에서 이러한 혼란을 교육과정의 질서 속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가운데서 나온 용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모든 학문이 사후 정당화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중지능이론을 정립한 하워드 가드너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아이들의 제 각기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것을 펼쳐나간다라는 것을 다중지능으로 질서화 함으로써 교육에 혁명적으로 기여를 했다는 것을 과소평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최근에 장하준 교수는 <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 이라는 책에서 지식기반사회라는 시대적 구분 자체가 이전까지의 시대를 비지식기반사회로 규정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알고 보면 모든 사회는 늘 당대 최고의 지식을 기반으로 산업을 발전시키는 지식기반사회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리 전개 속에서 보면 우리는 항상 지식의 구조를 가르쳐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사후정당화를 통해서 사태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일정한 규칙이나 법칙을 알게 되면, 예를 들어 x is p라고 했을 때, p를 법칙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법칙은 하나의 설명력과 예견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법칙과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구조는 바로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이전까지의 모든 교육활동을 지식의 비구조로 구별하면서 자신을 정립해 나가려고 했고 그 전략에는 분명 의도성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구조로 교육현상을 질서화하기 시작하면서 교육목표인 수월성의 함양, 교육과정의 내용조직 방식인 나선형 교육과정, 교육방법인 탐구학습과 발견학습, 직관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 학습 동기, 교구와의 관계를 강조하게 됩니다. 즉 지식의 구조는 이들 모두들 연결시켜주는 구심적 역할을 하는데 교육내용과 관련하여 지식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한 가지 현상을 여러 가지 현상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한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이러한 브루너의 지식의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는 교과의 단편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간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일반적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며, 급기야 학생 스스로가 발견과 탐구활동을 통하여 학문적 지식을 습득하게 되는데에서 교육적 의의를 가지며 지식의 구조와 관련하여 어떤 교과든지 지적으로 올바른 형태로 표현하면 어떤 발달단계에 있는 어떤 아동에게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유명한 가설을 내세웁니다. 이 말은 달리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지식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학자들이 하는 것이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하는 일이나 막론하고 모든 지적활동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핵심적 확신을 심어주게 되죠.
4. 지식의 구조와 핵심역량
지식의 구조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면 지금은 핵심역량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역량이는 용어는 말 많은 우리나라의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사용되고 있고 그 반대편에서 우리가 너무나 담고 싶어 하는 핀란드 교육과정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핵심역량이란 말은 거칠게 정리하면 역량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묶음으로 지칭한 것입니다. 여기서 역량이란 지식(특히 명제적 지식)과 대비되는 것으로 기능들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절차적 지식에 가까움)을 말하며므로 핵심역량은 인간이 전면적으로 발달하는데 핵심이 되는 기능들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교과통합 기조와 관련해서도 각각의 교과처럼 각각의 핵심 역량도 인간의 전면적 발달로 통일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며 한 인간이 필수교과를 배우듯이 모든 핵심 역량을 다 숙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교과의 지식을 기준으로 수업을 나누는 것보다는 핵심 역량을 숙달하게 하는 과정에서 제시되는 것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으로 교육과정 구성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데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 부분이 핵심역량과 지식의 구조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교육과정을 교과와 지식의 구조를 중심으로 설계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삶과 핵심역량을 중심으로 설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학문의 내용으로서 교과, 지식의 구조로서 교과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핵심역량과 관련하여 전교조는 다소 오락가락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때에는 핵심역량 자체를 비판하고 2009 교육과정을 이야기할 때에는 핀란드 교육과정의 핵심역량과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서는 핀란드에 있는 “협력하는 능력”, “정의적 능력(인간에 대한 사랑, 학습에 대한 긍정적 태도, 과업에 대한 실천 의지)”, “반성적 사고 능력”, “자기 규제 능력”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식의 접근입니다. 그러니 핵심역량이라는 아이디어 자체에 문제인지, 아니면 이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핵심역량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인지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핵심역량의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핵심역량 자체가 전통적인 학습교과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어떤 능력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결국 핵심역량이란 자본과 기업의 요구에 충실한 인간, 즉 인적자원 개발의 논리와 연결되어 인간의 전인적 성장이라는 측면에 부합하지 못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성공적인 삶과 사회발전에 필요한 요구들을 수용하여 핵심역량을 개발한다는 OECD의 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핵심역량이 아닌 인간의 마음을 계발함으로써 인간 존재 자체의 변화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핵심역량 개발에 앞서 우선적으로 계발해야 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살피는 이홍우 교수의 지식의 구조와 교과에 대한 논의가 의미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첫댓글 "우선적으로 계발해야 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지"... 전 그렇기 때문에 초등교육이 '특별히' 중등교육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하게 초등교육은 교과중심의 교육이 아니어야지 않은가 하는 것이죠.
핵심역량이라는 것이 이런 의미였군요. 최근에 이홍우교수의 책 세 권을 다시 읽고서 정리를 잘 못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정리도 잘 했습니다. 우선적으로 계발해야 할 인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그 마음이 지금 우리 현실에서 설득력 있는 말인지, 학문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지식의 구조론은 아직 저로서는 헷갈리기만 합니다. 부르너의 책을 좀 더 보고 최근 돌아가는 동향도 살피며 시간여행자님의 글을 다시 음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식의 구조라는 논의에서 보상과 자율성을 가지는 집단, 다시 말하면 교육과정의 중심을 차지하는 집단은 누구이며, 반대로 박탈과 제재를 당하는 집단, 즉 교육과정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집단은 누구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데 부르너를 비롯한 이홍우 교수는 이러한 지식의 구조를 둘러싼 권력관계에서 어떠한 정치성이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특히 공감합니다. 애플의 이데올로기와 교육을 읽으며 지식의 내용 또한 학교의 구조를 통하여 자본적으로 처리되는 부분인 것을 깊이 공감했었는데 지식의 구조론에 대한 님의 비판을 통해 다시금 일깨워졌습니다.
교육과정에서 중요한 키워드라고 보는 구성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할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초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가 튼튼하게 서는 인성교육과 자기 학습능력의 확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늘 배우려는 자세와 생명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중등으로 진학 후에도 스스로 주인이 되어 열심히 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손우정 교수가 소개하는 사또마나부 의 배움의 공동체를 보면 이론적 배경에 비고츠키의 구성주의를 들고 있습니다. 지식의 내적통합일까요? 단지 지적인 학습력에만 치우친 논리가 아닐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을 내려야할지 갸우뚱하게 되었습니다.
음, 비고츠키와 문화 붙이는 건 학문적 유행입니다. 그걸 빼고 보면, 일단 분석하기 쉽습니다. 어디까지나 경험칙에 의한 것입니다. 사또 마나부의 이론적 토대는 구성주의입니다. 이에 틀을 만든 이가 피아제입니다. 비고츠키는 이와 정반대 편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혹자는 둘의 적절한 부분을 결합하여 어떤 것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둘의 이론적 지향점이 정반대라, 이를 하나로 결합한다는 건 자신의 착각일 뿐 하나의 이론으로서 정립된다는 것 불가능합니다.
둘의 이론적 지향점이 정반대라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이 추측이 됩니다. 구성주의가 인지적 관점에서의 교육 이론이라면 비고츠키는 교육에서의 사회주의자로 들었습니다. 하나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또 하나는 사회주의적인 배경에서라면 두 이론의 결합은 어색할 것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 다만...제가 둘 다에 대해 아주 얇게밖에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고요 실은....이 이론을 왜 제가 알아야하는지조차 그 필요성을 모릅니다. 교욱과정 사회학과 예술적 심미적 교육과정에 관심이 많고 저의 앞으로의 교육적인 삶을 위해서 현대철학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지냅니다.
음, 핵심역량도 비고츠키의 고등정신기능 이 걸 저들이 각색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알맹이가 빠진 진빵과 같습니다. "핵심역량과 관련하여 전교조가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 오락가락할 만큼 전교조에서 이를 연구하는 분이 복수이면 좋겠습니다. 운동적 차원에서 어떻게 받을 것인가에 대한 단편적 현상들을 보면 그런 판단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합니다. 연구자 차원에서는 지금까지는 언제나 단 하나의 통일된 입장 뿐입니다. 왜냐구요. 연구자가 한 명 뿐이니까요. 저 뿐입니다. 인용하신 것도 아마 제가 생산해 여기저기 사용한 자료의 일부입니다. 필요에 따라 일부, 주요 측면을 부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임.
이름만 듣던 비고츠키는 혁신학교 연수 손우정교수님 강의의 파워포인트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갸우뚱해진 것이죠. ^^;; 저도 오락가락하고싶지 않습니다. 교통정리가 필요한 요즘입니다. 선생님의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이시군요.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글도 읽었구요. 그런데 왜 비고츠키 연구자가 전교조에 선생님 한분밖에 안계신거죠. 그게 이상하네요. 함께 공부한분들도 많은 것으로 아는데 ..... 최고의 전문가로서 비고츠키를 대중화시켜 주세요. 아니 나눠주시죠. 모르는 사람들이 알수있도록..
1) 한국어 책이 너무 적어서 연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어 원서를 접해야 하다보니, 결국 저 혼자 연구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비고츠키를 이해하신 분은 이제 제법 됩니다.
2) 대중화를 위해 (1) 먼저, 교수님을 목표로, 비고츠키 최후, 최고의 저작, 고전 "생각과 말"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2년 반이나 걸렸네요. 직접 읽고 비고츠키 확실하게 이야기하라고 교수님에게 주문하는 측면이 있지요 (2) 예비교사, 일반 교사 대상으로, 얼마나 풀어서 이야기해야 할지 알아보려고, 전교조 서울지부 사무실에서 놀토 오후 2시에 초보자용 비고츠키 세미나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개, 무료. 참학도 참여
2-(1)-1) 아직 어느 출판사와도 계약하지 않았지만, 내년 3월 목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3) 같이 번역하셨던 분들 대부분이 포기한 이유, 비고츠키 번역된 내용 읽으며 어려워하는 이유, 여러가지겠지만, 그 중에서 다른 분들이 지적하지 않은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그의 진술은, 그의 설명은, 그의 예시는 철저하게 "변증법적 유물론"의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스탈린식의 이해가지고는 따라잡을 수 없는 역동적인, 생생한, 종합적인 적용과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임승수 선생님의 책(원숭이마르크스철학)으로도 너무 부족합니다. 많은 선생님이 이 책도 어려워하시니, 고민이 많습니다.
4) 제가 번역 작업하다, 잠깐 (인터넷) 산책할 때, 이 곳을 들리기도 합니다. 너무 댓글 늦게 달아서 죄송. 컴 앞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좀 부끄럽네요. 제 카페에 http://cafe.naver.com/vygotsky 에 제가 썼던 자료랑, 국내 자료도 제법 모아 놨습니다. 비공개지만, 공부하고자 한다고 하면, 다 가입시켜드립니다.
참, 저도 "시간여행자" 샘의 글 열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