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316. 사순 제2주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05:19 현재 / 아직
- 05:49 공유 ---------------------------------------
250316. 사순 제2주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16 05:42
- 희망을 보는 사람, 희망을 주는 사람.
지난주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가셔서 악령의 유혹을 받으신 주님께서
오늘 사순 제2주일에는 산으로 가시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고,
그 모습을 뽑힌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십니다.
왜 이러신 것일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순시기 전례적인 의미로 볼 때 이 사건은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것과 해골산에서 돌아가신 것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산으로 오르셨다가 다시 내려오신 다음
다시 골고타로 오르시어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뽑힌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도 따라야 할 주님의 발자취이고,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봉헌 생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크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은 <A Patre, ad Patrem>
곧 성부께로부터 오셔서 성부께로 돌아가시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작게 보면 그 중간에 광야-타볼산-해골산의 여정이 있고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는 이 여정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부께 갈 수 있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모습은
해골산에 오를 제자들을 위해 미리 일부러 보여주신 것이고,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모될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이렇게 될 희망을 가지고 당신의 십자가 길을 따르라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뽑힌 제자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시고,
바오로 사도는 하늘 시민인 우리에게도 권고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필리피서에서
십자가를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늘 시민을 대비시키며
자신과 필리피 신자들은 하늘 시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늘 시민이 될 것인가? 자문케 하고 선택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답과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우리의 대답과 선택은 너무도 자명하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들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고 상상할 수도 없겠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십자가의 원수들이 될 수 있고,
반대로 하늘 시민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선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생래적으로 고통을 거부합니다.
인간이란 아니 모든 피조물은 고통을 거부하게끔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꽃길을 가면서 고통스럽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것도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산을 오릅니까?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아, 좋다! 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그런 산을 오르지 않고 하느님의 산을, 하늘 시민이 되기 위해 오르며,
그래서 고통을 감수하고 더욱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이런 목적이 없으면 곧 하늘 시민이 되려는 목적이 없으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목적은 있는데 희망이 없어도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십자가만 보고 주님을 보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주님은 목적지시고 길잡이시고 동반자이시기에 희망을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산 위에서 변모하신 것은 이런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고,
뽑힌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것도 그들이 희망을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보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까?
----------------------------------------------------
250316. 사순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LVy/550
참회와 회개의 계절
사순절은 참회와 회개의 계절입니다.
회개는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영혼을 새롭게 하려면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반적인 사건에 대해서 종종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빌라도가 신전에서 유대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 군중들은 그것을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정치적으로 벌을 주기를 바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이 부당한 정치적인 죄명으로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비난하지 않으셨고 빌라도 총독을 판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치적인 관점이 아닌 종교적인 관점으로 해결할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사건을 여론화하기 전에 먼저 참회와 회개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성공은 도덕적인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이고, 재난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재난의 피해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기 때문에 참변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그 참변을 면한 사람들은 죄가 없다는 증거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 또한 죄인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보다 더 참혹하게 멸망할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을 심판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심판해야 한다. 판결을 내려야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처럼 먼저 회개하며 자신을 판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행동이, 나의 말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상이 아닌 현실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합니다. 하늘과 바다를 막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우선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개조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 꽃을 가꾼다면 세계는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이 바로 세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타인이나 사건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판단하여 자신의 실체를 알고 부족한 자신부터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입니다.
주님, 저희 영혼을 새롭게 하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와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2. 나의 삶에서 행운과 불행 어떤 것이 더 많았습니까? 왜 나에게 불행이 닥쳤다고 생각합니까?
3. 사회와 가정을 바꾸기 전에 나 자신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에 내가 바꿔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
250316. 사순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파스카의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시편27,9ㄱㄴ)
사순시기 제1주일은 언제나 주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일화가 나오고, 제2주일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이 소개됩니다. 수평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이어 수직의 산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체험입니다. 산은 언제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변모 사건에 앞서 바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더불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시고,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최측근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토록 하시니 참 놀랍고 고마운 선물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 나야 한다.”
이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지 확실한 지침을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타당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이런 경직된 상황에 이어 주님은 다소 긴장되었을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체험토록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있은 후 여드레쯤 되어 일어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순시기는 물론 삶의 여정에 참 좋은 세가지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기도하라!”
기도가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의 주님의 변모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도 기도였습니다. 사순시기 어느때 보다도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바오로가 개탄하는 세인들의 타락한 삶이 더욱 우리의 기도를 부추깁니다.
“내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이런 세속적 육적 삶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복음 첫 대목부터 ‘기도’란 말마디가 나오고 기도의 결과 주님의 변모 신비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바로 기도와 더불어 발생한 주님의 변모 사건이요 여기서 등장한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해줍니다. 깊은 기도중에 시공을 초월하여 두분의 자문을 받으며 친교를 나누니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깊은 지 깨닫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람 역시 주님을 만나 축복말씀을 들었으니 이 또한 깊은 기도중에 일어난 신비한 사건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기도중 이런 신비축복체험은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집착하지 말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중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베드로의 호의였을 수도 있지만 이는 분명 성급한 이기적 집착이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연중 본색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신비체험은 독점하여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잠정적 삶의 여정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또 여기는 궁극의 머물 안식처나 정주처도 아니고 삶의 제자리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정말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흥분했음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의 도상중에 있는 순례자의 삶임을 잊은 것입니다.
셋째, “말씀에 순종하라!”
바로 이때 베드로의 집착을 교정하는 하느님의 기민한 개입이 뒤따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중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을 때,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그만 제자리로 내려 가 다시 십자가의 길을,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나를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현존이요 빛이자 생명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사순시기 광야여정 우리가 믿고 순종하며 따를 것은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주님의 세 제자들은 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물론 주님의 이 말씀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며 파스카의 여정중에 지칠줄 모르는 삶의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복된 제자들이요 이제 예전의 세 제자들이 아닙니다. 다음 시편 화답송은 그대로 세 제자는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거룩한 신비스러운 변모를 체험한 이 세 제자들 바오로의 다음 고백에 이심전심 공감했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신선한 감동과 더불어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용기백배하여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흡사 오늘 주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매일이 주님의 변모축일입니다. 주님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주님의 변모를 체험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어가는 ‘변모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을 제 말씀으로 삼아 여러분 모두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제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4,1). 아멘.
----------------------------------------------------
250316. 사순 제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함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살리시는 당신을 따라
살고파 나선 길 위에서
살리시기 위해서
반드시 죽으셔야 한다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말씀에
코앞에 닥친
당신의 죽음보다
당신과 함께 한다면
반드시 맞닥뜨려야하는
아직은 뿌연 나의 죽음이
오히려 더욱 쓰라리게
가슴을 파고들어
살려면 떠나야 하고
따르면 죽어야 하는
참담한 갈림길에서
느닷없이 곁에 계신
빛나는 당신을
살아있는 당신을
영광스러운 당신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악착같이 움켜쥐어
당신과 더불어
빛나는 나를
살아있는 나를
영광스러운 나를
그려보는 꿈은 이내
온데간데없이 부서지고
끝내 길을 가시려는 당신과
갈지 말지 두려움에 머뭇거리는 내가
날것 그대로 마주한 순간에
생생하게 듣습니다
무른 믿음을 다지는 하느님의 소리를
바랜 희망을 돋우는 하느님의 소리를
식은 사랑을 지피는 하느님의 소리를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당신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당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따를 수 없어도
따르고 싶지 않아도
당신을 오롯이 따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처럼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가
당신과 함께 사흘 만에 되살아나게 하소서”
----------------------------------------------------
250316. 사순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을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주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변모된 모습은 사람은 기도하는 데로 변모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뇌신경계와 면역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는 정신신경면역학 분야의 전문가인 캔더스 퍼트는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는 이론을 주장합니다. 이 이론은 신앙의 차원에서 기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 해줍니다.
우리 몸의 면역계는 뇌신경계와는 관계 없이 방어 역할만 한다는 이론이 과학자들의 세계에서 지배해온 이론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과학계에서는 뇌에서 분비되는 감정에 관여하는 펩타이드라는 물질의 수용체가 뇌세포뿐 아니라 면역계와 온몸의 장기에도 있을 뿐 아니라 면역계는 펩타이드를 만들며 뇌는 이를 받아들인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고 합니다.
이는 뇌와 몸에서 분비되는 펩타이드의 총합이 우리의 감정을 이루고, 몸과 마음이 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감정은 1차 느낌이 아니라 신체 작용에 따른 간접적인 2차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사건을 지각하고 그 지각이 우리의 기억과 상상을 거친 후에야 감정이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은 그 사람을 만들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전반적으로 지배합니다. 그 생각은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 따른 어떤 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희망을 생각하면 뇌에서 희망에 해당하는 신경전달 물질을 만들고, 슬품을 생각하면 뇌에서 슬픔에 해당하는 신경 전달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지속적으로 원한을 품고 거기에 몰입하면 서서히 몸이 원한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결국 뇌에서 만들어진 원한의 신경물질은 온몸으로 퍼져 전신을 지배합니다. 하루종일 돈만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돈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의 습관으로 물들게 됩니다. 그렇기에 생각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사람의 모습은 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생각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잘못 왜곡되고 편협하고 완고한 생각을 정화시키고 올바른 생각으로 인도해 줍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느나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됩니다. 루카복음서는 흔히 소외된 이들의 복음서’, ‘성령의 복음서’,‘기도의 복음서’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부터 가난한 이’ ,잡혀 간 이들’,눈먼 이’,‘억압받는 이’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모되는지를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변모됨을 의미합니다.
기도가 그렇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불의로 인해 억압받고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가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변모케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이 하느님께로부터 들은 ‘내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17,5)’로 인정받는 참된 변모체험을 우리 또한 하게 될 것입니다.
----------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조롱하도록 놓아 두시지 않는다
러시아 점령 전에는 신부였던 나 노르베르트 (Norbert)는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었던 곳에서 은거하는 중에 한번은 희귀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이에 대해 세상에 알리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분명 나를 미쳤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약 천 오백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다. 이곳 국민학교의 여선생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녀의 모든 강의는 “신(神)을 멀리하라”는 기본강령의 축을 맴돌았다. 그녀는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의 종교를 멸시하고 우스개거리를 만들며 공공연하게 무시했다. 그녀의 강의계획은 간단했다. 어린 무신론자의 양성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서른 두 명의 소심한 아이들은 감히 이에 맞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들은 믿음이 두터웠고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이 곳의 주임신부인 나는 종교 강의를 위해 아이들을 성당으로 모았다. 철의 장막 뒤에서는 어디나 그렇듯이, 헝가리에서도 이러한 강의는 순탄치 못했다. 이런 실정이니 이 불쌍한 어린 양들이 옳은 길을 걷겠는가? 그러나 아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자 ! 종종 기이한 카리스마를 통해 뒷받침된 은총이 관여하는 것이다. 기사가 일어날 때도 있는 법이다.
대개는 여선생인 게르트루트(Gertrud) 양이 계속해서 환멸스럽게 주입시키는 말은 이 어린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영성체를 자주 하는데 익숙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기에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그러나 게르트루트 여선생은 신기하게도 믿기지 않는 예민한 육감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항상 누가 영성채에 참여했는지를 찾아내어, 그녀의 표현대로 말하면 이 검은 양들을 본능적인 분노로써 특히 엄하고 표독하게 다루었다. 그녀가 한 두 명의 밀탐꾼으로부터 이를 알아냈을 가능성도 있다.(332)
----------------------------------------------------
|
첫댓글 오늘 평일이 아니여서 새볔미사 참례관계로 07시경까지는
공유하지 못하는 날이 아니였고
어제 오후 재속회 월례회 미사가 주일 특전미사였기에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신부님 강론글이 게제된후
이 곳에 바로 공유하게 되였습니다.
평화와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