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禍兮福之所倚(화혜복지소의) : 화근(禍)에는 복(福)이 깃들어 있고
福兮禍之所伏(복혜화지소복) : 복(福)에는 화근(禍)이 도사리고 있으려니,
孰知其極(숙지기극) : 그 끝(極)을 누가 알 수 있으랴?
其無正(기무정) : 그 끝(極)을 누가 알 수 있으랴?
正復爲奇(정복위기) : 올바름(正)이 변하여 기이함(奇)이 되고
善復爲妖(선복위요) : 선함(善)이 변하여 요망함(妖)이 되려니,
人之迷(인지미) : 사람의 미혹됨(迷)이란 실로 뿌리 깊은 것이다.
其日固久(기일고구) : 실로 뿌리 깊은 것이다.
是以聖人方而不割(시이성인방이불할) : 이런 연유로 성인은 반듯해도(方) 나누지(割) 않고,
廉而不劌(염이불귀) : 청렴해도(廉) 상처 입히지(劌) 않고,
直而不肆(직이불사) : 곧아도(直) 방자하지(肆) 않고,
光而不燿(광이불요) : 빛나도(光) 눈부시지(燿)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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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림(政)이 그저 어수룩하면(悶悶)
백성(民)은 그저 순박해지고(淳淳),
다스림(政)이 그저 영민하면(察察)
백성(民)은 그저 영악해지리라(缺缺).
화근(禍)에는 복(福)이 깃들어 있고
복(福)에는 화근(禍)이 도사리고 있으려니,
그 끝(極)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올바름(正)이란 따로 없는 것이다.
올바름(正)이 변하여 기이함(奇)이 되고
선함(善)이 변하여 요망함(妖)이 되려니,
사람의 미혹됨(迷)이란 실로 뿌리 깊은 것이다.
이런 연유로 성인은
반듯해도(方) 나누지(割) 않고,
청렴해도(廉) 상처 입히지(劌) 않고,
곧아도(直) 방자하지(肆) 않고,
빛나도(光) 눈부시지(燿)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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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림이 어리숙하면 그 나라는 돈후해지고
다스림이 깐깐하면 그 나라는 황폐해진다
재앙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
복에는 재앙이 엎드리고 있으니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정해진 올바름이란 없다.
올바른 것은 다시 이상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은 다시 요망한 것이 된다
사람들의 미혹됨은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이 때문에 반듯하면서도 남을 재단하지 않고
모가 서려 있으면서도 남을 찌르지 않으며
곧바르면서도 널리 펼치지 않고
빛나면서도 번쩍거리지 않는다.
其政悶悶, 其邦惇惇. 其政察察, 其邦缺缺. 禍福之所倚, 福禍之所伏, 孰知其極. 其无正也.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也, 其日固久矣. 是以方而不割, 廉而不刺, 直而不紲, 光而不耀.
[其政悶悶, 其邦惇惇]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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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강남 역>
其政悶悶(기정민민) : 정치인들이 한가하면
其民淳淳(기민순순) : 백성들이 순박해지고
其政察察(기정찰찰) : 정치인들이 부지런하면
其民缺缺(기민결결) : 백성들이 어리석어 진다.
禍兮福之所倚(화혜복지소의) : 화禍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복福이 나오고
福兮禍之所伏(복혜화지소복) : 복이라고 생각되는 데 화가 숨어 있습니다.
孰知其極(숙지기극) :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其無正(기무정) :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이란 없다
正復爲奇(정복위기) : 올바름이 변하여 그른 것이 되고
善復爲妖(선복위요) : 선한 것이 변하여 사악한 것이 된다.
人之迷(인지미) : 사람이 미혹되어도
其日固久(기일고구) : 실로 한참이다.
是以聖人方而不割(시이성인방이불할) : 그러므로 성인은 모가 있으나 다치게 하지는 않고,
廉而不劌(염이불귀) : 날카로워도 잘라 내지는 않고
直而不肆(직이불사) : 곧지만 뻗지는 않고,
光而不燿(광이불요) : 빛나지만 눈부시게 하지는 않는다.
<노바당 역>
정치가 맹맹하면
백성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똑똑하면
백성이 못되게 된다.
화라고 생각되는 데서 복이 나오고
복이라고 생각되는 데 화가 숨어 있다.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올바름이 변하여 이상스런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하여 사악한 것이 된다.
사람이 미혹되어도
실로 한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모가 있으나 다치게 하지는 않고
예리하나 잘라 내지는 않고
곧으나 너무 뻗지는 않고
빛나나 눈부시게는 않는다.
<임채우 역>
58 모르는 척 묵묵히 다스리면 백성은 순박해지고
모르는 척 묵묵히 다스리면
그 백성은 순박해지고,
가혹하게 따지며 다스리면
백성은 교활해진다.
복은 화에 의지하며,
화는 복 속에 엎드려 있나니,
누가 그 기준을 알겠는가?
그 바르다는 기준이 없으니,
바름은 다시 속이는 짓이 되고,
착함은 다시 잘못된 것이 되나니,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그렇게 도를 잃었네.
그래서 도를 얻은 사람은
반듯하지만 남을 해치지 않고,
청렴하지만 남을 다치지 않고,
곧지만 멋대로 하지 않으며,
밝지만 번쩍거리지 않는다.
<James Legge 역>
1. The government that seems the most unwise, Oft goodness to the people best supplies; That which is meddling, touching everything, Will work but ill, and disappointment bring. Misery! -- happiness is to be found by its side! Happiness! -- misery lurks beneath it! Who knows what either will come to in the end?
2. Shall we then dispense with correction? The (method of) correction shall by a turn become distortion, and the good in it shall by a turn become evil. The delusion of the people (on this point) has indeed subsisted for a long time.
3. Therefore the sage is (like) a square which cuts no one (with its angles); (like) a corner which injures no one (with its sharpness). He is straightforward, but allows himself no license; he is bright, but does not dazzle.
<Lin Derek 역>
When governing is lackluster
The people are simple and honest
When governing is scrutinizing
The people are shrewd and crafty
Misfortune is what fortune depends upon
Fortune is where misfortune hides beneath
Who knows their ultimate end?
They have no determined outcome
Rightness reverts to become strange
Goodness reverts to become wicked
The confusion of people
has lasted many long days
Therefore the sages are:
Righteous without being scathing
Incorruptible without being piercing
Straightforward without being ruthless
Illuminated without being flashy
<장 도연 역>
제58장 너그러움으로 다스리면 백성은 순박해진다
정치가 관대하면 백성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엄하고 가혹하면 백성이 교활해진다.
재앙 곁에는 행복이 기대고 서 있으며
행복이 있는 곳에는 재앙이 숨어 있다.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세상에 정확한 것은 없다.
바르다가도 갑자기 비뚤어지고
선하다가도 갑자기 요사한 것으로 변한다.
사람들의 미혹은 이미 오래됐다.
그러므로 성인은 모나면서도 반듯하여
남을 해치지 않으며
예리하나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고
직설적이나 방자하지 않고
밝아도 빛을 내지 않는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그 다스림이 어두운 듯 묵묵하게 하면 그 백성은 순박해지고,
其政悶悶, 其民淳淳;
잘 다스리는 이는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고, 일을 만들지 않으며, 내세우는 정치가 없다. 어둑어둑하지만 마침내 크게 다스려지므로 “그 다스림이 어두운 둣하다”라고 했다. 그 백성은 앞서려고 다투지 않고 관대하고 순박하므로 “그 백성이 순박해진다”라고 했다.
言善治政者, 無形無名無事無政可擧. 悶悶然, 卒至於大治. 故曰其政悶悶也. 其民無所爭競, 寬大淳淳, 故曰其民淳淳也.
그 정치가 가혹하게 따지면 백성은 교활해진다.
其政察察, 其民缺缺.
형법을 수립하고 상벌을 밝혀서 속임과 거짓을 단속하므로 “그 정치가 가혹하게 따진다”라고 했다. 계층별로 나누고 가르면 백성들은 서로 다투어 앞서려는 생각을 품게 되므로, “백성들이 교활해진다”라고 말했다.
立刑名, 明賞罰, 以檢姦僞, 故曰[其政]察察也. 殊類分析, 民懷爭競, 故曰其民缺缺.
화여 복이 그에 의지하며, 복이여 화가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그 바름이 없으니,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주석>
‘정’(正)은 ‘정’(定)이다.(진고응, 『노자주역급평개』 참조)
누가 잘 다스린다는 것의 표준을 알겠는가? 다만 바르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형상으로 이름 지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둑어둑하게 천하가 크게 교화되는 이것이 그 표준이다.
言誰知善治之極乎? 唯無可正擧, 無可形名, 悶悶然, 而天下大化, 是其極也.
바른 것은 다시 속이는 짓이 되고,
正復爲奇,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다시 속임수로 군대를 쓰게 된다. 그러므로 “바름은 다시 속임이 된다”라고 했다.
以正治國, 則便復以奇用兵矣. 故曰正復爲奇.
착함은 다시 잘못된 것이 되나니
善復爲妖,
선한 도덕을 내세워서 거기에 만물을 맞추려고 한다면, 다시 요망한 근심거리가 생기게 된다.(즉 도덕에 맞추려고 위선을 행한다거나 도덕에 맞지 않는 것들이 모두 문제가 된다)
立善以和萬物, 則便復有妖之患也.
사람들이 미혹된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人之迷, 其日固久.
사람들이 미혹되어 도를 잃은 지가 진실로 오래되었으므로, 다시 정치를 잘 바로잡아서 따질 수가 없다는 말이다.
言人之迷惑失道固久矣, 不可便正善治以責.
그래서 성인은 방정하지만 해치지 않고,
是以聖人方而不割,
방정함으로 사물을 인도하여 잘못된 것을 버리게 하지만 그 방정함 때문에 사물을 해치지 않으니, 이른바 큰 모에는 모서리가 없다는 것이다.
<주석>
『노자』 41장에 나온다.
以方導物, 令去其邪, 不以方割物. 所謂大方無隅.
청렴하지만 다치지 않고,
廉而不劌,
<주석>
백서본에는 ‘자’(刺)로 되어 있다.
‘염’(廉)은 청렴함이요, ‘귀’(劌)는 다친다는 뜻이다. 청렴으로 백성을 인도하여 그 더러워진 것을 씻게 하되, 그 청렴함 때문에 사물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다.
廉, 淸廉也. 劌, 傷也. 以淸廉導民, 令去其汚, 不以淸廉劌傷於物也.
곧다고 마음대로 하지 않으며(혹은 곧지만 굽은 듯하며),
直而不肆,
곧음으로 사물을 이끌어 그 편벽된 것을 고치게 하되, 곧음으로 사물과 부딪치지 않으니 이른바 아주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다는 것이다.
<주석>
『노자』 45장에 나온다.
以直導物, 令去其僻, 而不以直激拂於物也. 所謂大直若屈也.
밝지만 (속속들이) 비춰내지(혹은 번쩍거리지) 않는다.
光而不燿.
그 미혹된 소이를 밝게 비추되 감춰둔 것까지 환히 비춰내려고 하지 않으니, 이른바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근본을 높임으로써 말단을 종식시키는 것이며, (직접) 다스리지 않고도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주석>
『노자』 41장에 나온다.
以光鑑其所以迷, 不以光照求其隱慝也. 所謂明道若昧也. 此皆崇本以息末, 不攻而使復之也.
<Stefan Stenudd 역>
When the government is quite unobtrusive,
People are indeed pure.
When the government is quite prying,
People are indeed conniving.
Misery is what happiness rests upon.
Happiness is what misery lurks beneath.
Who knows where it ends?
Is there nothing correct?
Correct becomes defect.
Good becomes ominous.
People’s delusions have certainly lasted long.
Therefore the sage is sharp but does not cut,
Pointed but does not pierce,
Forthright but does not offend,
Bright but does not dazzle.
What to Trust?
We are never closer to misery than when we are happy. The one so easily turns into the other. They are strongly linked, and mutually dependent. Were it not for happiness, misery would not exist, and the other way around. So, it’s not always evident which is which.
What was correct can suddenly prove to be completely wrong. It happens all the time in science. It’s not rare in politics and philosophy either. The same uncertainty can be found in ethics. What’s right today may be dead wrong tomorrow. What seems to be good can threaten to do a lot of harm.
The future is as vague as the true state of the present. We don’t know where we are going, because we don’t really know where we are.
Since mankind stands on such shaky ground, it would be rude and obtrusive of the sage to shout commands, declare conclusions, and point in an exact direction. People don’t follow willingly when they feel forced, and they can’t understand what they are not allowed to examine by themselves.
The sage can gently give clues and appropriate suggestions, without demanding compliance. No more.
Governments should do the same. Even if they are certain of knowing what’s best for everybody, it will not be accomplished if done by force. People will react and resist.
That might seem almost self-destructive, but the damage would be more severe and profound if people allowed themselves to be led on the Way, as if they were sheep. They are not, so they need to find their own way, even if that should lead them away from Tao. Otherwise they can never know when they happen to step on the right track.
We don’t walk on the Way with our feet only. We must be there with our whole beings, including our minds and hearts. So, it has to be voluntary, and the progress must be felt inside, instead of just proclaimed from above. We simply have to do it ourselves, each and every one of us.
This is explained in chapters 18 and 38. Force is the worst, then rituals, then righteousness, then benevolence, then virtue, and above them all is Tao. It’s impossible to lead people to Tao by force, almost as impossible to do it with rituals, and just slightly more possible with righteousness.
Benevolence could almost do the trick, but not if it’s turned into one of the others. It usually is. Benevolence is often used as an excuse for force, although force can never be benevolent.
TE-oracle-bronze-seal-present.png
The Te sign in three old versions (oracle, bronze, and seal), and in its present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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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장)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58장)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
臨江仙 - 楊愼
滾滾長江東逝水(곤곤장강동절수) 굽이쳐 동으로 흐르는 양자강 도도한 물결에
浪花淘盡英雄(낭화도진영웅) 낭화 물거품처럼 사라져간 영웅들이여
是非成敗轉頭空 (시비성패전두공) 허구많은 시비와 성패 지나서 보니 모두 덧없더라
青山依舊在(청산의구재) 청산은 의구한데
幾度夕陽紅(기도석양홍) 몇번이나 석양이 붉게 물들여졌던가
白髮漁樵江渚上 (백발어초강저상) 강가의 백발 고기잡이 나무꾼 늙은이
慣看秋月春風(관간추월춘봉) 만고풍상 다 겪었으리니
一壺濁酒喜相逢(일호탁주회상봉) 탁주 한병을 앞에 두고 기쁘게 만나
古今多少事(고금다소사) 고금의 이러 저러한 일들을
都付笑談中(도부소담중) 소담거리로 한다
삼국지연의의 서두시
양신(1488~1559) - 명나라 중기 학자, 시인. 명세조에게 직간하다가 운남성으로 귀양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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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법과 등불 공부방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hdoy&logNo=221290674363&categoryNo=84&parentCategoryNo=&from=thumbnailList
뜻을 가다듬고, 행동을 일관되게 하고, 세상과 동떨어져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살며, 고고한 논의로 세상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은 오직 혼자 세상에 우뚝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산골짜기에 숨어사는 선비나, 세상을 비난하는 사람이나, 깡마른 몸으로 절개를 지키며 연못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다.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을 논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恭儉), 남을 앞세우고 자신은 겸양하는 것은 자기 몸을 닦으려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선비나,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과, 벼슬을 얻으려 다니는 학자들이 좋아하는 일이다.
큰 공을 세우고, 큰 이름을 날리고, 임금과 신하의 예를 행하며, 위와 아래를 바로잡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벼슬아치나, 왕을 위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사람과, 제후끼리 합종연횡에 공을 세우는 자들이 좋아하는 일이다.
숲이나 강가로 가서, 툭 터진 곳에서 지내거나, 한가한 곳에 머물며 낚시를 하는 것은 일없이 지내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강이나 바다에 사는 선비나,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과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이다.
숨을 깊이 쉬면서 탁한 기운을 토해내고 신선한 기운을 들이쉬며, 곰이 나무에 매달리고 새가 몸을 펴는 듯한 동작을 하는 것은 오래 살려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도인(안마나 기공)을 하는 선비와, 몸을 기르는 사람과, 팽조와 같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이들이 좋아하는 일이다.
- <장자> 외편 각의(刻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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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림이 어리숙하면 그 나라는 돈후해지고, 다스림이 깐깐하면 그 나라는 황폐해진다
其政悶悶, 其邦惇惇, 其政察察, 其邦缺缺
'문문(悶悶)'은 보통 '민민'으로 읽지만 여기에서는 '문문'으로 읽는다(설혜). 보통 관대하다는 의미로 많이 옮기지만 그저 관대한 것이 아니라 총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임희일)에서 관대하다는 의미이므로 어리숙하다고 옮기는 게 좋겠다. "세속 사람은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숙하다(20)"라는 말에서도 같은 용례로 쓰였다. '돈돈(惇惇)'은 통행본에 여러 다른 글자 형태가 있는데, 마서륜은 그것들 모두가 통하는 글자로 돈후하다는 뜻을 지닌다고 하였다. '찰찰(察察)'은 밝게 헤아리는 모습이다(소철). 사람들의 잘못을 빠짐없이 감시하는 것이므로 형명과 상벌로 다스리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고(왕필), 번쇄한 정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임희일). '결결(缺缺)'은 영락한 모습(성현영) 또는 조락한 모습(육희성)이다.
『초사』 「어부」에는 "어찌 깨끗한〔察察〕 몸으로 세상것들의 더러움〔汶汶〕을 뒤집어쓰겠는가"라는 말이 있다. '찰찰'과 '문문'의 글자 뜻은 같지만 『노자』는 '찰찰'에 부정적 의미를 담았고, 「어부」는 긍정적 의미를 담았다. 굴원은 초 회왕에게 버림받아 울분을 느꼈기에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하려 하였고, 『노자』는 그런 울분을 자아내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기 때문에 결백을 호소하기보다는 어리숙하고 먼지투성인 채 조용히 지내는 것을 택했다. 굴원은 자살했고, '노자'는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육희성은 "훌륭한 임금은 어리숙한 모습으로 관대히 대하고 포용하면서 다스리니 백성이 모두 태어난 것을 즐거워하고 그 본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순박하게 후박(厚朴)한 곳으로 돌아간다. 덕이 없는 임금은 깐깐한 모습으로 총명함을 자랑하고 엄하고 급하게 다스리니 백성이 그 소업을 잃어버리고 근본을 잃는다. 그러므로 맥없이 영락해버리고 만다"고 하였는데, 이 전체의 문장을 잘 해설했다고 하겠다.
재앙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 복에는 재앙이 엎드리고 있으니
禍福之所倚, 福禍之所伏
하상공은 이 문장을 "사람이 재앙(화)을 만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을 나무라면서 착한 일을 실천하고 도를 행하면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온다. ……사람이 복을 얻어 교만 방자해지면 복이 사라지고 재앙이 다가온다"라고 설명한다. 「해로」도 "사람에게 재앙이 생기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니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행동이 단정해진다. ……복은 재앙이 있는 것에 뿌리를 둔다. ……사람에게 복이 있으면 부귀해지고, 부귀해지면 의식이 풍족해지며, 의식이 풍족해지면 교만한 마음이 생긴다. ……재앙은 복이 있는 것에 뿌리를 둔다"고 하여 같은 식으로 이 문장을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이미 『여씨춘추』에 나온다. 그에 따르면 탕왕 때 궁정에 이상한 곡식이 자라는 불길한 조짐이 있었는데 "상서(祥瑞)는 복에 앞서서 나타나지만 상서를 보고 불선한 일을 행하면 복이 이르지 않고, 요얼(妖孼)은 재앙에 앞서서 나타나지만 요얼을 보고 선을 행하면 재앙이 이르지 않기 때문에" 탕왕은 그 불길한 조짐을 보고 백성을 위안하고 돌보는 선한 행동을 하였고, 결국 사흘 만에 그 곡식은 사라졌다. "그러므로 재앙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 복에는 재앙이 엎드리고 있다고 하니 성인만이 알아차릴 뿐 뭇사람들이 어찌 그 끝을 알겠는가." 하상공이나 「해로」의 설명이 「제악」과 완전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도 『여씨춘추』는 『노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노자』의 문장은 『설원』 「경신」에도 인용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기사를 검토해보면 「경신」의 문제점이 또 드러난다. 「경신」의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노자가 말했다. "이로운 것을 얻을 때는 반드시 그 해로운 바를 생각하고, 성공을 즐거워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 실패할 것을 돌아보아야 한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 하늘이 복으로 보답하고, 사람이 불선한 일을 하면 하늘이 재앙으로 보답하니 그러므로 재앙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 복에는 재앙이 엎드리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 하늘이 복으로 보답하고, 사람이 불선한 일을 하면 하늘이 재앙으로 보답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사실 공자의 일화와 관련된 말이다. 곧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란을 겪을 때 7일 동안이나 불로 만든 음식을 만들어 먹지 못하여 제자들에게 배고픈 기색이 있었는데, 그때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불만을 털어놓으며 한 말 중에 이 말이 들어 있다.
제가 들으니 선한 일을 하면 하늘이 복으로 보답하고, 불선한 일을 하면 하늘이 재앙으로 보답한다고 하는데, 이제 선생님께서는 덕을 쌓고 의를 모으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그것을 행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어째서 사는 것이 이리 궁하십니까?(『순자』 「유좌」)
이 일화는 공자의 일대기 중에서도 핵심이므로 상당히 잘 알려져 있었다. 『순자』에는 공자와 자로의 대화만 나오지만 『사기』 「공자세가」에서는 공자와 자공 그리고 공자와 안회의 대화도 같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공자가 곤경을 겪을 때 제자들에게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공자가 중요한 제자를 불러 그 생각을 물어보았더니 먼저 자로가 이런 식으로 불평을 늘어놓았고, 자공은 세상과 타협할 것을 권유했으며, 안회는 세상에 용납되지 않은 이후에 군자인지를 알 수 있다는 고무적인 답변을 하였다. 『사기』의 기록은 아마도 약간 각색한 것이겠지만 여하튼 이 일화는 영웅은 고난을 받는다는 영웅담의 일반적 요소를 공자의 일생에 부여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순자』나 『사기』 이외에도 『한시외전』이나 『공자가어』 등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말이 「경신」에서는 노자의 말로 둔갑한 것이다.
『순자』에서 자로는 이 말을 할 때 '제가 들으니'라고 하여 이 말이 마치 이전부터 전해지는 말인 것처럼 표현했다. 만약 자로가 옮긴 이 말이 노자의 말이라면 노자는 공자 이전의 인물이다. 그렇지만 『공자가어』에 따르면 이 말은 자로가 공자에게서 들은 말이다. 물론 『공자가어』도 왕숙(王肅)이 손댄 책이고, 신빙성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경신」과 같은 식의 조작을 통해 노자를 공자의 선배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철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미 금인명에 대해서 이야기하였고, 『논어』에 나오는 『노자』와 유사한 말에 대해서도 약간 언급하였다. 후자에 대해서는 뒤에 더 논의할 것이다(다음 참조). 그러므로 아무래도 의심은 노자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또한 분명한 것은 「경신」의 노자의 말 몇 마디는 줄곧 공자와 자로의 일화를 통해 전해져 내려왔으며, 「경신」은 뒤늦게 그것을 노자에 붙였다는 점이다.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정해진 올바름이란 없다
孰知其極. 其无正也
첫 구절은 "화복이 서로 번갈아가며 생겨나니 누가 그 궁극의 때를 알겠는가(하상공)" 라는 의미다.
두 번째 구절은 여러 가지 독법이 있고, 일부에서는 다음 글의 첫머리로 옮겨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올바름〔正〕이란 없는 것인가" 하고 질문하면서 다음 문장들을 이끌어내는 말머리로 기능한다(오징). 하지만 이런 독법은 많은 통행본의 경우 '야(也)'가 의문문을 만드는 종지사인 '야(邪)'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다. 백서처럼 '야(也)'인 경우에도 의문문으로 해석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설득력은 떨어진다.
두 번째 구절을 여기로 붙여 해석할 때도 '정(正)'을 그 본뜻으로 옮기는 경우가 있고(소철·여혜경 등), '정(定)'과 같은 글자로 보아 정해짐 또는 정해진 이치라는 뜻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성현영·임희일 등), 서로 통한다. 본문에서는 '정해진 올바름'이라고 옮겨 두 견해를 모두 포용하려고 하였다.
올바른 것은 다시 이상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은 다시 요망한 것이 된다. 사람들의 미혹됨은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也, 其日固久矣
이 문장은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는 것처럼 올바름과 이상함, 선함과 요망함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다. "다스림이 어리숙하면 그 나라는 돈후해지고, 다스림이 깐깐하면 그 나라는 황폐해진다"는 말은 이런 엎치락거림의 한 표본이다. 『노자』의 조심스러움은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 자체에서 온 것이다.
이 때문에 반듯하면서도 남을 재단하지 않고, 모가 서려 있으면서도 남을 찌르지 않으며, 곧바르면서도 널리 펼치지 않고, 빛나면서도 번쩍거리지 않는다
是以方而不割, 廉而不刺, 直而不紲, 光而不耀
모든 통행본에는 '시이(是以)' 다음에 '성인(聖人)'이라는 말이 더 있다. 반면 「해로」에는 '시이'와 '성인'이라는 말이 모두 없다. 아마도 '성인'이라는 말은 후대에 첨가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노자』는 설령 자기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세상이 언제 변하여 자기가 피해를 준 사람이 보복하고, 자기 자랑이 순식간에 망신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처세(통치)의 뒷배경 역시 화복의 변화 무쌍함이다.
왕필은 "반듯하면서도 그 반듯함으로 남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큰 모에는 모서리가 없다(41)"는 말과 같고, "곧바르면서도 널리 펼치지 않는다"는 말은 "큰 곧음은 마치 구부러진 듯하다(45)"는 말과 같으며, "빛나면서도 번쩍거리지 않는다"는 말은 "밝은 길은 어두운 듯하다(41)"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 일리가 있다. 왕필주에는 "모가 서려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남을 찌르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만 비교하는 말이 없는데, 이 말은 『순자』 「불구」에 나온다. "군자는 관대하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모가 서려 있으면서도 남에게 상처입히지 않으며〔廉而不劌〕, 분변하면서도 논쟁하지 않고, 살피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혼자 서 있으되 이기지 못하고, 굳세면서도 포악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공경하고 근신하면서 남을 포용한다." 순자에 따르면 이 말은 『시』 「대아·억」의 "온화하고 남을 공경하는 사람이여, 덕의 바탕이로다"라는 시를 설명한 것이다.
상서는 복에 앞서서 나타나지만
상서를 보고 불선한 일을 행하면 복이 이르지 않고
요얼은 재앙에 앞서서 나타나지만
요얼을 보고 선을 행하면 재앙이 이르지 않는다
―『여씨춘추』 「계하기·제악」
[其政悶悶, 其邦惇惇]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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