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원생금(元生金) - 미리 아시고 미리 부르시고
8. 죽을 고비를 넘기다
1 그 후 다시 경북에 내려갔다가 40일 축도를 받은 후에 구룡포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합승 버스를 탔는데 가는 도중에 군용차량과 탱크의 행렬로 오랜 시간이 지체되어 그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2 승객들이 겁을 먹고 천천히 가자고 해도 못 들은 척하더니 한 20여 분 후에 그냥 나가떨어졌다. 나는 그 직전에 사고를 직감하고서 보따리를 찾아 품에 안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선생님을 뵙지 못하고 죽는가 보다 하는 생각과 처음으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마음이 착 가라앉는 듯했다.
3 순식간에 언덕을 받고 굴러버린 합승은 논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그때까지도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며 정신이 들자 가까스로 언덕을 기어 올라왔다. 나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망자는 없었고, 전부 중경상자였다. 그중에는 통일교회 아줌마 때문에 우리가 살았다고 하는 말도 들렸다.
4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서러운지 자꾸만 울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따라 울게 되니 온통 아비규환의 수라장 같았다. 그때 지나가던 차가 서더니 군인이 뛰어 내려오며 왜 그렇게 울고만 있느냐고 하며 내 옷고름을 떼어서 다친 손을 매어 주었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어디를 다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5 손등의 힘줄이 끊어져 피가 낭자했고 뼈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동맥이 두 개나 끊어져서 피가 모자라 수혈을 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생살을 꿰매게 되었는데 그 아픔은 정말 견딜 수 없었다. 포항에서 15일 입원해 있으면서도 마음의 조급함이 아픔을 잊게 해주는 청량제가 되었다.
6 나는 그때 하루에 나오는 식대 60원을 식당에 주지 말고 나에게 직접 달라고 하여 그 돈으로 어렵게 지내시는 지역장님의 식사를 해결하고 우리들은 국수를 끓여 먹었었다. 주위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불쌍해서 눈물이 자꾸만 나왔다.
7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며 내어몰지 않으면 안 되는 아버님의 쓰리고 아픈 심정을 체휼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아픈 팔을 어깨에 메어 고정시키고 퇴원을 하였다.
8 그 후 병원에는 하루 한 번씩 다니며 치료를 받았고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그때에 경찰에서 사고를 낸 운전사의 처벌에 대해서 피해자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운전수의 가족들을 생각하고 석방하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합승 버스 회사에서는 무임승차 패스를 끊어 주었고, 얼마간의 돈도 주어서 어려운 지역살림에 보탰다.
9 몽시에 선생님께서 그 돈을 다 쓰지 말고 대구에 가서 약을 사 먹어야 재발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남은 돈을 갖고 대구에 가서 어느 식구님의 소개로 약방에 찾아가서 약을 사게 되었다. 나를 본 약국 할머니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약 값을 조금 받는다고 하면서 정가의 절반인 3천원만 받았다.
10 얼마 후에 서울로 올라와 본부에 들려 선생님을 뵙고 보고를 한 뒤 집으로 돌아오니 하오 11시가 되었다. 문을 두드렸는데도 열어주지 않았다. 남편은 그때 천안지역에서 시무하다가 건강이 나빠 집에 있었다. 나는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어 알 수 있었다.
11 한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남편이 눈을 비비며 나와서 문을 열어 주고는 본체만체 그냥 들어가 버렸다. 나는 남편을 위해 기도를 하자 건강이 회복되어 아산 토기공장에 파견됐다.
12 그 후 나도 충남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순회를 많이 하게 됐다. 하나님께서 먼저 염려를 하시고는 “너 다리를 너무 무리하게 쓰지 말라”라는 계시를 주셨지만 그대로 밀고 나갔는데 다리가 아파 끝내는 충남지구장님의 소개로 대전 이성내과에 입원하였다.
13 그러나 아산군 선장면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이성내과 원장인 이상헌 선생님의 정성도 뿌리치고 새벽에 도망치다시피 병원을 나왔다. 그렇게 활동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이적도 많았고 은사도 많았다.
14 많은 사람이 시험에서 헤어나와 금식도 하고 축복도 받고 새 출발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대구 부흥회를 맞이하였다. 한국의 여리고성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에는 기독교 신자가 많기로 유명하였다. 또 선생님께서 초기에 이곳에서 많은 환난도 겪으셨다.
15 1차 부흥회 장소는 상공회의소였고, 다음은 대구역 앞에 있는 KG홀이었다. 전체 식구가 동원되어 기도를 드리고 전도 활동을 하였다. 우리는 새벽 4시 통금만 끝나면 기성 교회의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고 핍박을 많이 하는 교회의 낮 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때 가장 심하게 우리를 핍박한 교회는 대봉동 제일 교회였다.
16 우리는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매를 맞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 말씀을 전할 때 어떤 곳에서는 목사들이 숨어있으면서도 없다고까지 하였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모욕이 있더라고 끝까지 참고 온유 겸손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기성교인들은 우리의 활동에 위협을 느꼈으며 시내가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었다.
17 그 후 1967년에는 전국 순회사에 발탁되어 광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제주도까지 순회를 했는데 그때의 광주지구 본부는 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지구에서 생활하면서 식구들의 심정을 부활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몇몇 청년들은 내가 순회하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18 지구본부 내에서 충성을 많이 한 부인 식구가 있는데 그분은 자녀들로부터 반대를 받고 있었다. 헌신 생활을 하기 위해 자녀들과 헤어져 살았기 때문에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를 하였다. 나는 그곳에 가서 자녀들에게 부모의 입장을 설명했고 그들은 마음이 돌아서서 축복까지 받게 됐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