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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만들어 기근 구제한 석정(石亭) 김효달
[선비 정신의 미학] 저수지 만들어 기근 구제한 석정(石亭) 김효달
조선판 富의 사회환원, 수 억원 가치 거금 들여 이용후생 농업 생산 기여
관리도 경작자와 공유한 나눔 정신, 노후에 참봉 천거되고 통정대부 예우
내가 듣기로 ‘천 사람을 살리면 자손들이 반드시 흥한다’고 한다. 하지만 초야에서 태어나 밭이랑에서 늙어가다 보니 남에게 큰 혜택을 베풀 만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1600년대 경북 영천의 선비가 남긴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늘그막에 드디어 방법을 찾아낸다. “들판을 개간하고 수리(水利)를 원활히 해 사람들의 농업 생산에 이익을 주는 것보다 더 나은 게 없다.” 석정(石亭) 김효달(金孝達, 1610~1690)이 쓴 ‘마현제 설창기(馬峴堤設創記)’의 앞부분이다.
3월 16일 석정 선생이 축조한 저수지인 영천시 북안면 관리의 마현제를 찾아갔다. 최근 관련 논문을 쓴 이종문 전 계명대 교수가 동행했다. 영천시는 우리나라 시·군 중 저수지가 가장 많은 곳이다. 저수지를 관리하는 한국농어촌공사에 따르면 영천시는 논농사에 필요한 크고 작은 저수지 1045곳을 두고 있다. 이는 전국의 6% 정도에 해당한다.
먼저 저수지 아래 내감보(內甘洑)에 도착했다. 보는 저수지의 물 일부를 가두고 있다가 수로를 통해 필요한 농경지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 교수가 현장을 설명했다. “저기 보와 물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시멘트 보로 바뀌어 옛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가 보에서 조그맣게 보이는 산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까지 저수지의 물이 흘러든다고 덧붙인다. 마현제가 농수를 공급하는 일대 들녘이다.
내감보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마침내 널따란 마현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저수지의 현재 이름은 마현. 저수지 아래 도로 옆 산기슭에 마현제의 내력을 새긴 기적비(紀蹟碑)가 서 있다. 1993년 석정의 후손들이 전하는 ‘마현제 설창기’를 국역한 뒤 사실을 정리한 것이다.
“몇 년 전 못을 막을 만한 땅을 살피다가 영천 남쪽 마동(馬洞) 골짜기 어귀에 못을 하나 막았더랬다.”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백성의 기근을 구제하려는 선비의 담대한 뜻이다. 그러나 그의 포부가 한 번에 이뤄지지는 않았다. 석정이 저수지 축조공사에 착수한 것은 1661년(현종 2) 1월 6일. 나이 52세 무렵이다. 공사가 끝난 것은 그해 10월 16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첫 공사는 실패한다. 그 아픔이 설창기에 담담히 기록돼 있다. “애를 먹으며 경비를 들인 것이 수천 냥이나 되었지만, 못을 막은 장소의 지리적 조건이 적절치 못해 홍수에 두 번이나 둑이 터지는 바람에 헛되이 공력만 손상했을 따름이다.”
홍수에 저수지 두 차례 터지면서 거금 날려
홍수로 처음 저수지 둑이 터진 것은 이듬해 5월. 석정은 이후 9월 터진 둑을 다시 막았으나 그다음 해인 1663년 4월 또다시 둑이 터져버렸다. 경사가 다소 급한 지형이 붕괴의 근본 원인이었다.
여기서 선생은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한다. 큰 실패에 주저앉지 않고 2전 3기 다시 일어선다. 석정은 그 결기를 “일을 시작한 만큼 끝장을 보지 않을 수없었다”고 표현했다.
1664년 2월 그는 다시 저수지를 막는 일에 착수한다. 이번에는 처음 못을 막은 위치에서 조금 아래쪽(대략 700m)의 튼실하고 평탄한 곳을 골라 거금을 들여 길이 100보 정도의 못 둑을 막는다. 공사를 마친 것은 1665년 3월. 그와 함께 저수지의 물을 논에 효과적으로 대기 위해 저수지 3리 아래에 보를 만들고 5리 밖까지 수로를 조성한다. 이렇게 저수지와 보, 수로에 이르기까지 마현제 수리사업이 모두 끝난 것은 1667년(현종 8) 3월. 저수지 마현제를 처음 막은 때로부터 무려 7년 만에 드디어 대역사가 마무리된 것이다.
석정이 조성한 마현 저수지는 3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저수지 아래 내감보 물은 들판 한복판을 지나 독산(獨山) 기슭을 따라 산 넘어 반계마을을 돈 뒤 지금은 폐쇄된 임포역 너머까지 농경지에 물을 댄다”고 설명한다.
돌아보면 마현제 축조의 2차례 실패는 엄청난 손실을 동반했다. 석정은 관련 경비 내역도 기록으로 세세히 남겼다. 그때까지 소요된 경비는 모두 2235냥. 당시 화폐 가치를 현재로 환산하기는 쉽지 않다. 대략 조선시대 다섯 냥은 쌀 한 섬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요즘 돈으로 치면 1냥은 7만원 정도가 된다. 두 차례 둑이 터지면서 말하자면 1억5000만원이 넘는 큰돈을 날린 셈이다. 그쯤 되면 집안이나 주변의 불평불만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자손들아! 내가 정하는 규정 따라다오”
그럼에도 김효달은 다시 2900냥 2전을 들여 아래쪽에 저수지를 막고 보와 수로를 만드는 데 또 336냥 6전을 투입했다. 저수지 축조엔 돌과 흙, 잔디 운반비가 전체의 63%를 차지했다. 실패를 포함한 7년의 대역사에 들인 자금은 5471냥 8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농민의 수리를 돕겠다는 그의 집념은 이렇게 강렬했다.
마침내 일대 수백 명은 생산에 이익을 보게 됐다. 김효달은 그 감회를 설창기에 덧붙인다. “(이만하면) 혜택을 베풀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돌이켜보면 나의 평생 사업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 저수지에 있다. 나의 자손들이 삼가 규정을 지켜 내 뜻을 따라 준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울까.”
석정은 저수지 축조의 기쁨과 함께 자손들이 저수지 관리 규정을 따라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규정의 핵심은 막대한 경비를 들여 저수지를 만들고도 자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수입을 배분하지 않은 것이다. 자손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다. 그렇지만 저수지로 이웃도 살리고 자손도 흥하도록 가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자신의 뜻을 꼭 지켜달라고 요청한다.
석정은 저수지 관리 규정을 8가지로 정리했다. 방점은 처음 두 가지 항목에 찍힌다. 1. 후손 가운데 근엄하고 후덕한 사람을 가려내 도감(都監)으로 선정할 것. 2. 들판 가운데 성실하게 경작하는 사람을 찾아내 감고(監庫)로 임명할 것. 여기서 도감은 보수가 없는 저수지의 대표다. 그는 적장자(嫡長子) 세습이 아닌, 후손 가운데 후덕한 사람으로 지정했다.
이에 비해 2항 감고는 일정한 보수를 받고 저수지 관련 사무를 맡는 총무 격이다. 총무는 아예 혈연에 관한 조건을 없앴다. 이것은 김효달이 저수지를 가문이 아닌 경작자 공동의 것으로 생각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마현제 옆 기적비를 살펴본 뒤 저수지 위쪽 마을에 사는 석정의 10대손 김상도 씨를 만났다. 그는 집안에 내려온 ‘마현제 설창기’의 내용을 알리고 기적비를 세우는 일에 앞장선 인물이다.
“지금도 마현제는 석정 선조의 뜻대로 우리 문중 아닌 공공의 소유로 돼 있습니다.” 현재 도감은 직계가 아닌 방손(김상만)이라고 한다. 김상도 씨는 관련 자료 몇 가지를 보여 주었다. “유품 가운데는 저수지의 설계도와 저수지를 축조하는 건축술을 기록한 책도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소실돼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설창기의 끝에는 마현제 말고 또 하나의 저수지가 언급된다. 석정은 마현제 축조에 앞서 1654년(효종 2)에도 2000냥을 들여 칠전제(漆田堤) 저수지 하나를 막았다는 것이다.
저수지 설계도와 축조 건축술 기록은 소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문이 들었다. 선비 김효달은 공사비로 소요된 이런 거금을 대체 어떻게 마련한 것일까. 그 근거를 설명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나마 비슷하다면 석정의 할아버지 김대해가 임진왜란에서 순국해 나라로부터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는 기록이 이만도의 <향산집(響山集)>에 나올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상도 씨는 석정이 외가인 경주 양동에서 태어나 30대까지 지냈다고 추정한다. 석정은 이후 아버지를 따라 세거지 영천 반계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윗대 어른들이 처가 등지에서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을 것”으로만 추정한다. 일행은 김씨와 함께 마현제 아래 몽리지역인 임포를 거쳐 석정이 중년 이후 살았던 반계마을과 석정의 아버지가 문을 연 반계서당을 둘러봤다.
김효달은 1610년(광해군 2) 영천에 세거한 경주 김씨 후예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소곡 김대해(1544~1592)는 효제충신하며 성리학에 전념한 선비였다. 그의 나이 49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전쟁은 그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며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왜적의 말발굽이 급기야 삶의 터전인 영천을 유린하자 그는 붓 대신 칼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향병(鄕兵)과 집안 종을 불러 모아 죽음을 맹세하고 도적을 토벌했다. 당시 그에겐 두 살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는 족보를 아이 손에 쥐여줬다. 소곡은 부인과 작별하며 비장하게 말한다. “의(義)로써 도적을 토벌하는 마당이니 죽음이 있을지언정 살아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요.” 견위수명(見危授命)의 각오였다.
김대해는 영천성 탈환에 참전해 임진왜란 중 육지전의 첫 승전고를 울리는 데 기여한다. 이에 고무된 그는 다시 경주성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나라는 그에게 형조정랑을 추증했다. 훗날 같이 전사한 선비 출신 의병 10명은 함께 고향 고천(古川)서원에 배향됐다.
김효달의 아버지 반계 김정(1591~?)은 아버지의 기백을 이어받은 선비였다. 반계는 행실이 고요했고, 모친상 때는 3년 시묘를 살았다. 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비분강개하며 의병으로 참전했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미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나라 위해 목숨 바치셨는데 아들은 아버지 충의를 본받지 못하니 한스럽다”고 탄식한 뒤 세상일에 마음을 끊었다고 한다.
“자기 마음으로 남의 아픔 헤아리는 의리”
김효달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런 뜻을 이은 자손이었다. 그는 공부가 깊었으며 덕행이 남달랐다. 또 청렴과 우애로 집안이 화목해 사람들이 존경하며 복종했다고 한다. 그는 어버이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했다. 또 어머니 무덤 아래 저수지 위쪽에는 띠 풀로 지붕을 덮은 조그만 정자를 지었다. 성묘하러 오갈 때 머물러 쉬도록 한 것이다. 석정(石亭)이란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석정은 이런 행실로 노년에 유림으로부터 수직(壽職) 참봉에 천거됐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3대는 이렇게 선비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이 보이는 족보 등에는 ‘일대 사건’인 저수지 축조 이력은 보이지 않는다. <영천군지(永川郡誌)> 같은 지역 문헌에도 언급이 없다. 뜻밖이다. 이 교수는 “저수지를 축조하고 토목공사에 뛰어드는 등은 선비의 체통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 추정했다.
석정의 소망대로 그가 수많은 사람을 살린 뒤 이후 자손은 흥성했을까. 저수지 축조라는 거대한 토목 사업을 벌인 뒤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지만 후손 중에는 대학교수와 의사 등이 배출됐다.
석정은 설창기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수리를 일으켜 남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도 ‘군자가 자기 마음으로 남을 헤아리는 의리가 될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전쟁이 남긴 기아의 해결이 급선무인 시대였다. 석정은 저수지 축조를 사명으로 자임하며 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김효달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를 실천한 선비였다.
마현제 이전에 국보 승격 앞둔 청제가 있었다
신라 법흥왕과 조선 숙종 시절 비석 세워 기록
김효달은 칠전제와 마현제 축조에 앞서 유서 깊은 인근 청제(菁堤)를 둘러봤을 것이다. 청제는 마현제에서 서쪽으로 11.3㎞ 떨어져 있다. 청제의 내력이 새겨진 청제비는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이지만 국보 승격을 앞두고 있다. 청제의 제방은 길이 243.5m에 높이 12.5m. 안내판에는 저수 면적이 11만㎡로 약 59만t의 물을 가둘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청제는 신라시대 수리 시설이면서 현재까지 중요 용수원인 유일한 제방이다.
청제비는 비각 안에 2기가 있다. 정면에서 보아 오른쪽 비석이 청제비며, 왼쪽이 청제중립(重立)비다. 이 2기를 합쳐 ‘청제비’라 부른다. 오른쪽 청제비는 앞면에 신라 법흥왕 23년(536) 청제의 공사 규모와 내용, 참여 인원수 등 축조 전말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신라 원성왕 14년(798) 청제를 보수한 내용을 적었다. 특히 원성왕 대 보수 기록에는 공사의 주체가 왕명을 받은 양내사라는 것, 동원된 일꾼이 1만4800여 명이란 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왼쪽 청제중립비는 조선 숙종 14년(1688)에 세워졌다. 이 비석은 뒷면에 조선 효종 4년(1653) 원래 비석이 두 동강 나 다시 맞춰 세웠다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김효달의 설창기도 청제비의 이런 기록 방식과 정신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