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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 과 처녀(virgins & virgin).
말씀 : 마태복음 25:1-13.
요즈음은 그리스도인들도 아이 많이 낳기를 꺼려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예 하나 낳기도 싫어합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복을 주시며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하셨습니다.
옛날에는 믿음과 상관없이 사람은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고 했는데 요즘은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자식을 낳으면 무엇을 먹일까? 교육을 어떻게 시킬까? 어떤 학교를 보낼까? 어떤 직업을 갖게 할까? 미리 걱정을 쌓고 삽니다. 이는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마음이 1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자식을 낳고 그 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는가? 세상이 얼마나 살기 힘든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는가? 대단한 이기주의에 빠져있습니다.
지난 월요일(2월4일) 밤 “안녕하세요?”프로그램에 결혼 3년차의 한 아내의 고민으로 자기 남편이 아이 갖기를 원하지 않아서 고민을 호소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36살로 점점 아이 갖는 시기가 늦어지고 있는데 그 남편은 강아지를 자식으로 생각하고 아내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하고 밤에도 아내와의 사이에 강아지를 끼고 잔다는 말을 해 방청객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 남편이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로 경제적인 문제를 들었습니다. 아직 집도 장만하지 못했는데 아이를 낳아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고생하는 것보다 아이 없이 부부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데 그들에게 부부간의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서로가 같은 생각을 갖고 함께 기쁘고 함께 즐거워야 행복인 것이지 혼자만의 생각대로 고집부리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으로 결코 아내에게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진행자들이 그러면 결혼을 왜 했느냐? 결혼 전에 아이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아내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결혼 했느냐?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부부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자기 고집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전혀 아내를 배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은 두 부부의 사랑의 증표인데 자기 앞길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의 희생을 전혀 감사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행복은 무엇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나의 수고로 내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 이웃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것,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 모든 일에서 감사하는 것, 이웃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행20:35) 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희생물로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죽는 사람을 의인이라 합니다. 죽어주지는 못할 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주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무어라 하셨습니까?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생각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각 사람이 자기 일들만 돌아보지 말고 각 사람이 남의 일들도 돌아보라.” (빌 2:3-4).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말씀이요, 그분 안에 있는 그분의 생각입니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빌 2:5).
자기 유익만 생각하는 세상은 메마르고 각박하고 살벌해집니다. 자기 유익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웃은 불행하고 괴롭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자신을 희생시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알고 믿는다면 그분 같이 살아야합니다.
자녀를 두는 것은 부부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산, 즉 많이 낳으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주께서 책임지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최선을 다 해야 하고 많이 낳으라.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못하실 일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도 나를 구원하신 주께서 하신다면 얼마나 쉽고 완전하겠습니까? 주님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리라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빌 4:6).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할 시간에 엎드려 주님께 간구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이렇게 구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 4:19).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주님께 나아가기를 즐거워하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 맡기기를 부담 갖지 마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마 11:28-30).
여러분들의 무거운 짐들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함께 져 주시는 여러분의 짐은 가볍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 될 때 여러분들에게는 안식이 필요합니다. 그 안식을 주께서 주심을 믿고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결혼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신약 성경은 일부일처를 말씀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감독이 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보면 한 남자가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들을 낳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는 여럿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지 성도 하나하나를 어린양의 신부로 보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들은 그 죄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 졌으므로 “순결한 한 처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어떤 노력이나 고행이나 수련으로 순결한 처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주 앞에 자백함으로 그분의 보혈로 그 죄가 씻겨 진 자들을 “순결한 한 처녀”라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한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는 내가 너희를 순결한 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한 남편에게 너희를 정혼시켰기 때문이라.”(고후 11:2).
그리스도는 한 남편이요, 거듭난 성도는 교회 안에서 한 아내입니다. 이런 영적인 일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수많은 성도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느냐? 어떻게 남자 성도가 예수님의 아내가 되느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가 어린양의 아내로 그분과 결혼한다는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내를 구하려고 이 땅에 오셨고 아내를 위하여 자신의 옆구리에 창을 맞고 죽으셨습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잠들고(죽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옆구리를 열고 그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어 아담에게 아내로 주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시고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어 묻히셨다가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곧 자신의 신부를 데려가시려고 공중에 오실 것입니다.
우리 거듭난 성도들도 부활의 몸을 입어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땅의 몸, 썩을 몸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어린양과 혼인을 한다 해서 이 땅에서 결혼하고 이 땅에서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는 땅에서와 같이 다산하고 번성하기 위하여 육신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없습니다. “부활 때에는 그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이 땅에 큰 환란이 임하기 전에 하늘에 계신 주께서 어린양의 신부인 우리를 데리러 오시려고 공중에 오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자신을 부르는 마지막 나팔소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하늘로 채어 올라갈 때에 순식간에 변화되고 하늘의 몸,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보이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성결해진 성도들만 휴거 된다는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모두 거룩한 자들입니다. 성도(聖徒)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히 구별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1:1a)입니다.
이 거룩함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 집니다. 이전에 구원만 받고 죽은 사람이나,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나, 이제 막 구원받은 사람이나 주께서 이리로 올라오라 하시면 우리는 모두 들림 받으면서 순식간에 변화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순간 구원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영·혼·몸이 온전히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첫째 목적은 죽을 때 갈 곳 없는 혼의 구원입니다. “이는 너희가 너희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벧전 1:9).
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불어 넣으신 것으로 사람이 죽을 때 그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전 12:7).
우리의 현재 몸은 “천한 몸”입니다. 흙으로 지어지고 죄를 경험하고 더러워진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썩을 몸입니다. 이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합니다(고전15:50). 이 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부활의 몸, 하늘의 몸을 입을 때 비로소 몸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때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게 만드시리라.”(빌 3:21).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성결케 한다고 영성훈련을 하고, 수도생활을 하고, 식욕을 절제하고, 철저한 주일성수를 하고,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천한 몸은 늙어가고 쇠퇴하고 병들어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수고와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라 살다보면 거듭난 몸은 누구나 부활의 몸을 입은 뒤에 그리스도와 같이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영적 성장은 육신을 훈련시켜 얻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막12:31) 하셨으면 가장 가까운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를 자신의 몸 같이 사랑하십시오. 서로 존중하고 섬기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영성을 말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몸의 완전한 구원은 아직 아닙니다. 이 땅의 썩을 몸을 벗어버리고 썩지 않을 부활의 몸, 하늘의 몸을 입어야 비로소 영·혼·몸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썩을 몸을 우상섬기 듯 섬기지 마십시오. 아무리 갈고 닦고 훈련해도 땅으로 갈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된 몸, 부활의 몸을 입고 하늘에 오르면 어린양과 혼인을 합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정결하게 된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릴지니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르렀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도다. 또 그녀가 깨끗하고 희고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입도록 허락하셨는데 그 고운 아마포는 성도들의 의니라, 하더라.”(계 19:7-8).
사람들은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제대로 설교하지 모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마태복음 25장은 하늘에서 이루어질 어린양 되시는 신랑과 신부(교회)의 결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들의 결혼 풍속도도 알아야합니다.
성경의 흐름을 통해서 마태복음 25장도 24장과 같이 환란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경을 설교할 때 역사적 적용이나 교리적 적용이나 영적인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설교할 때 언제 누구에게 적용할 것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할 것인지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 말씀인지를 파악해야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본문이 시대와 대상이 맞지 않는다면 주님의 뜻을 잘못 전달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본문 마태복음 25장 1-12절의 열 처녀 비유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죄를 지으면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설교할 때 자주사용하고 있는 구절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대다수의 목사님들이 이런 본문을 통해서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본문의 열 처녀들을 구원관과 연계시키거나 처녀들을 오늘날의 성도들로, 어린양의 신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믿는 척하는 자들로 비유하거나 처음엔 잘 믿다가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 변질된 사람들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성경을 잘 못 알고 있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처녀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어린양의 신부는 더더욱 아닙니다. 어린양의 신부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신부는 순결한 한 처녀입니다(고후11:2). 처녀들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 단수복수를 구분하지 않으면 전혀 다른 뜻을 전합니다.
본문은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이지만 주님은 율법을 지키셨으며 이스라엘에게 왕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율법보다 더 강화된 천년왕국에서 지켜야 할 율법을 산상보훈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본문의 처녀들은 대환란 때의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니 그들은 처녀들이니라. 이들은 [어린양]께서 가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며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이더라. 그들의 입에서 교활함을 찾을 수 없었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잘못이 없도다.”(계 14:4-5).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란 육신의 남자와 여자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유대인들 중에 음녀와 어울리거나 우상을 섬기지 아니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대환란 중에 어린양을 믿고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해 졌음을 말합니다.
신부(처녀)는 어린양과 함께 갑니다. 그러나 처녀들은 “[어린양]께서 가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처녀들은 환란 중에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원 받은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이더라.”(계14:4b)했습니다.
오늘날 배도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대환란을 통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결국 대환란에서 어린양께 구원 받은 첫 열매가 됩니다.
순결한 한 처녀는 그리스도의 신부이지만 처녀들은 어린양의 신부가 아닙니다. 환란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가 아닙니다. 은혜시대에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교회)과 환란 성도들은 같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자라고 신분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며 처녀는 수도 없이 많으나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는 오직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유일한 자요, 그녀를 낳은 여인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딸들이 그녀를 보고 축복하였으니 참으로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녀를 칭찬하였도다.”(아 6:8-9).
성경을 읽을 때 인칭 대명사의 단수 복수를 소홀이 해서는 안 됩니다. 처녀인 신부는 신랑과 함께합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나니 이것은 그들이 하나 안에서 완전해지게 하려 함이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3).
처녀들은 신랑과 신부를 섬기기 위하여 따르는 들러리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시편 45편도 읽어야합니다. 한 처녀와 처녀들은 너무 다릅니다. “그녀가 수놓은 옷을 입고 왕께로 인도되며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그녀의 동료 처녀들도 왕께로 인도되리니 그들이 기쁨과 즐거움과 더불어 인도되고 왕의 궁궐에 들어가리로다.”(시 45:14-15).
신부는 신약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처녀들(virgins)의 정체는 간단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은 환란을 다루고 있으므로 당연히 처녀들은 환란 성도들입니다. 처녀들(virgins)은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지 그분의 아내(virgin)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결혼식에서도 예식 후 신부의 친구들이 사진을 같이 찍습니다. 친구 처녀들이 많을지라도 그 결혼식의 주인공은 당연히 한 신부입니다.
“처녀들(virgins)”이 누구인지 보십시오.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니 그들은 처녀들(virgins)이니라. 이들은 [어린양]께서 가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며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이더라.”(계 14:4).
어떤 목사님들은 대환란에서는 구원 받는 자들이 하나도 없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대환란 중에서도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과 십사만 사천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왕국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무도 능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자들이 환란에서 구원 받게 됩니다.
“이 일 뒤에 내가 보니, 보라,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구원이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하더라.”(계 7:9-10).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는 완악한 이스라엘이 환란 때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 한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도 교회라고 합니다. 계시록에 “성도”라는 말을 신약성도로 보는 것입니다. 환란 가운데에서는 구원받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를 당연히 교회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찌합니까? 교회는 환란 전에 하늘로 채여 가서 하늘에 거하지 땅에 거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한 처녀로 (집합)단수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한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는 내가 너희를 순결한 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한 남편에게 너희를 정혼시켰기 때문이라.”(고후 11:2).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처녀는 복수로 절대 어린양의 신부가 아닙니다. 그들은 어린양과 결혼하기 위하여 신랑을 기다리는 자들이 아니라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은 마치 자기 주인이 결혼식에서 돌아올 때에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이 되라. 그가 와서 두드리면 그들이 즉시 그에게 열어 주리라.”(눅 12:36). 등불을 예비하고 기다리는 처녀들은 “주인이 결혼식에서 돌아올 때에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신랑 신부의 들러리입니다.
환란 성도들은 하늘에서 결혼을 하고 재림하실 주님(신랑)을 기다립니다.
본문 마태복음 25:1입니다.
“그때에 하늘의 왕국은 마치 자기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아간 열 처녀와 같으리라.”(마 25:1). “하늘의 왕국”은 언제 이 땅에 세워집니까? 하늘의 왕국 실체가 무엇입니까? 대 환란 뒤에 이 땅에 세워질 왕국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앙이 되셔서 통치하는 나라가 하늘의 왕국입니다.
본문 자체가 [하늘의 왕국은 마치], 비유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늘의 왕국 백성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누구에게 왕국 복음이 선포되었습니까? 이스라엘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문은 하늘의 왕국, 즉 천년왕국에 들어갈 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너희는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마 10:5-7). “하늘의 왕국”복음이 누구에게 선포됩니까?
본문 2-4절엔 어리석은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이 등장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등불은 가졌으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은 현 은혜의 시대의 구원 받은 자들과 구원 없는 자들의 구분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잘 맞이하여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잔치는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 후에 있는 잔치 즉 피로연입니다.
본문 5-7절엔 열 처녀 모두 다 졸았고 신랑이 온다는 외침에 모두 다 일어났습니다. 이는 대환란 때 이 땅에 남아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의 상태를 말합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 신랑을 맞으려고 등불을 손질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자들에게 나누어 달라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그들에게 기름을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의 등불이 꺼졌으니 우리에게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달라, 하거늘”(마 25:8). “지혜로운 자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그리할 수 없노라. 우리와 너희가 함께 쓰기에 부족할까 염려하노니 너희는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를 위해 사라, 하매”(마 25:9).
본문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을 마지막 때를 예비하는 유대인들과 그렇지 못한 유대인들을 비유하며 환란 가운데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구분됩니다. 환란에서 육신의 몸을 입은 대로 구원 받는 자들이 천년왕국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그 날들이 짧아지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로되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짧아지리라.”(마 24:22).
“어떤 육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로되”이 구원은 혼의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환란 가운데에서 육신을 가진 채로 살아남을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천년 동안 자녀를 낳아 그리스도의 왕국을 채워갈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기름은 아주 중요한 매매 물건입니다. 구약의 엘리사는 빚을 지고 자식과 어려운 생활을 하는 어느 과부에게 기름을 팔아서 생활하도록 했습니다(왕하4:7). 본문의 기름을 성령이라고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너무 비약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 사람들에게 사거나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만약 성령을 돈 주고 사고자 한다면 망합니다(행8:20). 본문의 기름은 그냥 빛을 내는 등불의 기름입니다.
본문의 열 처녀는 어린양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신랑을 기다리는 자들이 아니라 환란 성도들을 말합니다. 물론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환란 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서 혼인을 마치고 재림하시는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환란 성도들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환란 때 유대인들은 모두 주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모두 등을 준비합니다. 모두 졸았습니다. 모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재림 주님과 함께 하늘의 왕국인 천년왕국엔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늘의 왕국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줄기차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유대의 이스라엘입니다.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와서 유대의 광야에서 선포하여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1-2).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대환란 뒤에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 하늘의 왕국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의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본문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기다리던 지혜로운 자들은 신랑을 맞이하고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주님이 다스리는 하늘의 왕국(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됨을 말합니다. 그들은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졸지 말라는 뜻보다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그들은 끝까지 견뎌야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 24:13). 환란에서 남는 자들, 이기는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주를 기다리는 동안 등과 기름을 준비한자들은 깨어 있는 자들이고 등은 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들은 깨어있지 못하고 끝까지 견디지 못한 자들입니다.
대환란 동안 유대인들이나 성도들이 주님을 기다리다가 깨어있지 못하면 주님과 함께 구원 받은 육신으로 천년왕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환란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켜야합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나니 곧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들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더라.”(계 14:12). 이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지금의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되거나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환란 가운데 일어날 일들을 지금 성도들에게 적용하면 많은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독려로 설교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고 독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현 신약교회의 성도들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전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모두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적용해야 할 것들을 교회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적용해야 할 것들을 환란 성도들에게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환란 때에 있을 일들을 지금 성도들에게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이 땅에 아직 대환란도 임하지 않았는데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 베리칩을 받지 말라는 말씀은 너무 오버하는 것이며 주님의 공중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를 믿지 않는 자들의 행위입니다.
신약교회는 주님의 신부로 대환란 전에 하늘로 들림 받습니다. 대환란 성도들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키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대환란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행위가 따라야합니다.
본문의 열 처녀는 교회도 아니고 구원 받은 자들만 가리키는 말도 아닙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되려고 신랑을 기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교회, 즉 어린양의 신부는 정결한 한 처녀입니다(고후11:2). 정결한 신부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열 처녀는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맞이하려는 처녀들입니다.
찬송작가도 열 처녀들을 교회에 비유해서 신랑 맞을 준비가 됐느냐? 성도들에게 묻는 찬송을 하게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오늘날 구원 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재림 주님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전무후무한 대환란이 임하기 전에 하늘로 채여 올라가 하늘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되고 어린양의 결혼식도 하늘에서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밝은 등불 들고 나갈 준비 하느냐?]는 찬송가는 교리적으로 오늘날 교회가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는 등불을 들고 신랑 맞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공중에 오셔서 하늘로 채어 가십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시지 신부가 등불 들고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으러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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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교회와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대체신학은 신자들을 미로 속으로 몰아넣어 성경을 이해하는데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하지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 땅의 것들에 목을 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하늘의 것, 영적인 복을 주셨습니다(엡1:3). 내세에 소망이 없는 자들은 기복신앙에 얽메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는(딤후2:15) 분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므로(고전10:31) 헛된 삶을 살기가 일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