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의 바나힐을 오르다 / 정재홍
가을이 시작되는 계절에 가족들과 베트남을 찾았다. 다낭공항에서 호텔버스로 남쪽을 향해 약 40분을 달리니 호이안시가 나타났다. 비가 내린 탓일까 호아이강은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숙소인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손자와 손녀는 재빠르게 호텔 뜰에 마련된 수영장 물로 뛰어들었다. 비행의 여독이 풀린 다음날은 베트남음식 만들기 체험을 하였다. 열심히 많이 만들었지만 다 먹지 못하고 대부분을 남겼다.
여행 3일째 되는 날은 다낭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 국립공원 바나힐(Ba Na Hills)의 썬월드(Sun World)를 찾기로 했다. 아침 7시에 렌터카 기사가 차를 몰고 왔다. 다낭시내를 지나니 바나힐로 향하는 도로는 곧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자동차들이 속력을 낼만도 한데 젊은 운전기사는 시속 60km를 끝까지 유지했다. 주차장은 각종 자동차들로 가득했다. 한국 여행사의 대형버스도 여러 대 보였다. 이곳 다낭을 찾는 한국 여행객들이 많다는 말은 들었는데 현지에 가보니 실감할 수 있었다. 가난에 찌들어 어렵게 살아가던 한국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의 삶을 누리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해발 1,487m의 바나힐을 바라보니 구름이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걸어서 케이블카를 타는 역으로 향했다.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한국어 등이 뒤섞여 시끌벅적하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자 한참을 기다려야 될 거라고 걱정했는데 탑승차례가 빨리 돌아왔다. 이곳 케이블카는 다섯 개 라인으로 한 시간에 무려 7,500명의 손님을 태울 수 있다고 한다. 케이블카는 산 정상으로 향하는데 짙게 피어오르던 구름은 태양을 보자 서서히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남녘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데 멀리 거대한 손이 보였다. 바나힐의 명물 골든 브릿지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역은 골든 브릿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골든 브릿지는 해발 1,000m에 설치된 보행자 전용다리다. 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데 쉽지가 않다. 인파에 밀리며 150m나 되는 다리를 지나갔다. 이 다리는 2018년 6월에 공개되었으며 바나힐의 전설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먼 옛날 천상의 세계로 오르려는 사람에게 산신이 나타나서 금띠를 내주며 타고 오르도록 인도해 주었다고 전한다. 그 금띠가 바로 골든 브릿지(금빛 다리)라는 것이다. 거대한 손은 황금색의 끈을 쥐고 있는 신의 손을 형상화 하였다고 전한다. 개장 1년도 안되어 세계적인 명소로 이름을 알렸으니 다리를 설계한 사람의 창의력은 참으로 놀라웠다.
아홉 개의 테마로 구성된 꽃 정원을 돌아보고 프랑스마을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은 중세유럽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무더운 날씨를 피하고, 휴양을 하기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지하에 와인창고까지 만들어가며 생활을 즐겼다. 골목길을 걸으며 여러 건축물을 감상했다. 이 건물들을 지을 때 참여한 사람들은 아마도 베트남 사람들일 것이다. 지배자의 강요에 의해 노동을 착취당하며 공사에 임했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나라를 빼앗겨 힘없는 피지배자들은 언제나 배고팠으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나라의 식민지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다낭과 호이안을 어떤 이유로 찾는지는 몰라도 프랑스인 여행객들이 많다고 한다. 어쩌면 그들은 그곳에서 지난날 식민 시대를 반추(反芻)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여럿 있었는데 우리 가족은 일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향료와 기름진 음식이 맞지 않아 찾은 곳인데 손님 대부분이 한국 사람들이다. 썬 월드라는 기업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바나힐을 관광명소로 만들어가는 중이란다.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연중 맥주축제, 할로원축제, 겨울축제, 꽃축제 등이 열린다고 한다. 손주들을 위해 판타지 파크(Fantasy Park)를 찾았다. 실내놀이터로 여러 놀이기구를 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바나힐에서의 하루는 볼거리가 다양하여 지루하지 않았다. 일정을 마치고 하산하는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100m가 넘을 듯 암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가 인상적이었다. 산을 내려오며 새롭게 웅비하는 베트남을 생각해보았다.
사실 한국과 베트남은 비슷한 점이 많다. 외세 침략에 따른 고난의 역사와 온화한 국민성, 불교와 유교가 중심을 이루었던 종교,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생활까지 닮은꼴이다.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와 94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로 살았고, 30년 동안이나 독립전쟁을 치룬 민족이다. 외세 침략의 역사가 절반을 넘는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베트남은 중국, 몽골, 프랑스, 일본, 미국 등 외세의 침공에 대항해 싸워 모두 이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지금 큰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한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다. 미국의 파병 요청으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30만 명이 넘는 군인들을 파병시켰다. 서로에게 피를 흘리게 했던 전쟁은 참혹한 상처를 남겼다. 베트남 국민들에겐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을 남긴 전쟁이다.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그들의 동족을 살해한 원수의 나라로 보일 텐데 이상한 점은 한국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대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병의 대가는 우리나라의 1960년대 경제개발 정책에 큰 밑거름이 되었고, 전쟁 후에는 경제 특수로 이어져 두 나라의 경제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젊은 청춘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피 흘리며 죽음으로서 만들어진 값비싼 대가라고 말한다면 억설일까? 누구도 모를 일은 아직 남아있다. 베트남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그들은 베트남전쟁이 남긴 역사의 문제를 새로 정립하려들지 모를 일이다.
베트남은 미래가 밝은 젊은 국가다. 30세 미만의 인구가 약 60%를 차치한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호이안시에서 노인을 보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10년 전에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여행할 때 들은 이야기가 새롭게 떠오른다. 1,000년 전 하노이는 떠오르는 용이라는 뜻의 ‘탕롱〔昇龍〕’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국토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젊은 인적자원이 풍부하기에 전국이 탕롱을 꿈꾸며 비상중이다.
여행이 끝나는 전날 밤에 호이안의 야시장을 찾았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옛도시의 야시장은 수많은 인파와 행상인들이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스쳐지나가며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은 세련되지 않은 짧은 한국어로 호객을 하였고, 가격 흥정에서도 한국어로 응대했다. 기념으로 혁대를 하나 샀다.
9월부터는 우기의 시작이라 걱정했는데 여행기간에는 날씨가 좋아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더군다나 가족들과 함께한 여행이었기에 의미를 더한다. 다낭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에서 남중국해의 푸른 바다를 품에 안고 세계인을 불러들이는 다낭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끝)
첫댓글 가만히 앉아 다낭을 잘 느껴봅니다. 기행문과 기행수필은 다르지요. 저도 한번 북쪽을 다녀왔으니 요즘 다낭이 뜬다니 다녀오고 싶은데 애들이 등을 미뤄도 점점 ㅎㅎ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