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여정, 802
문육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패잔병도 없는 점령지의 황량함처럼 거실은 졸고 있었다.
십자수 같은 가로세로 열아홉의 바둑판이 모니터에서 소리도 없이 지나가는 바람을 여과했다. 창밖에서 열한 개의 푸른 모과가 기웃거리며 살아있음의 눈짓을 보내는 오후였다.
그가 거기에 있었다. 거실 모퉁이 소파에 죽은 듯 있는 그를 보았다. 그림자가 흔들렸다.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걸까. 어제 운동한다고 나섰다가 집으로 오는 길은 아득해졌고 안개처럼 뿌연 동네며 높은 건물들이 끌고 다니던 몽환의 순간들을 이어가고 있을까. 하나씩 기억의 줄을 놓고 있는 그를 생각하며 책장이라도 정리하려고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왜 낯설까, 자기 것이라면 아까워 움켜쥐고 살던 그가 어찌 저리 모두를 놓기 시작했을까를 생각하며 나를 내려놓았다. 한지 한 장도 손을 대면 큰일 치르듯 질색하던 그의 글씨들이 한지 위에서 주인 대신 뒹굴고 있었다. 벽장문을 열었다. 책들이 작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열병식을 하고 있었다.
누렇게 바래어지고 그의 건강만큼 바스러진 책을 뒤졌다. 책마다 뒤표지 바로 앞에는 그의 눈길을 거쳐 쌓인 지식이나 심어진 땀방울이 얼마나 책갈피를 적셨는지 공룡의 화석처럼 박혀 있었다. 일곱 번째 읽음 <○년 ○월○일> 여섯 번, 세 번, 여덟 번....책마다 단정한 글씨가 기도 같기만 했다. 그건 진정 기도였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 연한 초록의 비닐봉지 속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원고지 뭉치. <시험 인생>이라는 큰 글씨가 눈을 막았다. 원고지 끝에는 <802>라는 숫자가 마감을 알렸다. 그가 글을 쓰다니. 세상을 잊은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을 <시험 인생>이라는 한 마디로 적고 있었다. 부제로는 ‘살아온 날들에서 남기고 싶은 것들’이라고 되어 있었고 퇴직 후에 가장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였다고 밝히고 있었다. 시험이 아니었던 것은 세상에 귀를 내밀게 된 일이었으며 그것은 나중에 ‘빈농의 칠 남매 맏이’라는 계급장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걸어온 구절양장의 길은 애절한 이야기를 품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수채화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를 따라 밭일을 하고는 산허리를 에둘러오는 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는 중학생인 그를 보았다. 운명이었다. 부자의 모습은 무채색이었다. 그는 디딘 발 앞에서 넘어지는 새소리는 듣지 못했다. 부리를 세우고 날아가는 새들의 무리도 보지 못했다. 어제와 오늘의 구름이 다르고 태양의 각도가 다름도 그에겐 알 바 없는 사실이었다. 배턴터치를 하는 사계의 흐름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시험 인생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함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다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철학 과목 교사 자격증을 획득한 그는 그만의 철학으로 산다는 게 만만치 않음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로망이었던 고시에의 도전과 낙방의 날들을 쉼 없이 겪어낸 후에 획득한 늦은 합격은 기쁨보다는 셰르파도 없이 올라야 할 히말라야 같은 인생의 무게였다. 산의 형세를 가늠하듯 어떤 수순으로 인생의 너울을 헤쳐나갈 것인가가 가장 큰 과제였다. 연수도 승진도 훈장도 모두 시험 후의 습득물이었다. 몇 번씩 넘어지고 일어나며 가끔은 불운도, 행운도 스치는 바람처럼 그를 안았다간 놓아두고 갔다. 몇십 년을 같은 보폭으로 걸었고 자리를 비워달라는 날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뭐라고 대꾸할 처지가 아니었음을 가슴 아파하면서.
그는 물고 늘어지던 시험과 일에 결별의 입맞춤을 건네고 영원한 휴식과 쉼 속에서 자유롭기를 원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우스개와는 전혀 무관했다. 찾아오는 이도 찾아가는 일도 없었다. 종일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얌전한 손님이 되어 먹고 자고, 그리고 TV와의 눈싸움으로 거실에서 365일에 하나씩 금을 그었다. 그러나 금은 보이지 않았고 지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이면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내게 생기고 말았다.
그렇게 치열하게 시험에 매달려 살고 있음을 몰랐고 아니 환희로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했다. 일이 재미요 일이 없으면 삶의 의미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나 이상으로 그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빈농의 맏이’라는 계급장을 달고 구절양장의 시험 위를 디디며 숙명처럼 걸어왔으며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오롯한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 길을 802페이지의 원고지에 쏟아놓고는 기진한 채 감정의 끈을 한 줄씩 놓고 있는 것이었다. 눈 붉혀 미워할 것도 눈 아리게 그리워할 것도 없이 가슴만 젖어 있는 그를 보았다. 원고지 속엔 치열하게 살아온 남자의 삶이 누구의 박수도 받지 못한 채 점철되어 있을 뿐이었다. 노을 진 인생의 끝자락에서 살아온 길을 한 폭의 수채화로 원고지에 누벼 둔 것을 보자 격려도 위로도 한 적 없음이 더없이 미안했다. 죽은 듯 누워있는 그의 실루엣이 시폰으로 만든 블라우스처럼 가만히 흔들렸다. 미망의 세월 속에서도 꿈을 꾸고 있구나. 진정 꿈을 꾸고 있었다.
다시 펼쳐보는 802라는 숫자가 그의 전부임이 전율처럼 안겨 오자 그가 내 짝이었음이 눈물이 되어 처음으로 미안함과 애잔한 정을 원고지 마지막에 후기처럼 몰래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