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이범찬
지루한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오면 만물이 활기를 찾는다. 화사한 봄꽃들을 바라보다 5월의 달력을 펼쳐보았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로부터 시작해 11개의 기념일과 행사가 눈에 들어온다. 과연 계절의 여왕답게 많은 행사와 즐거움을 품고 있지 않은가.
나도 5월의 여왕 품에 안기면 즐거움만 아니라 지나간 일들도 줄 지어 되살아난다. 5월 15일은 붉은 글씨인데, '부처님 오신 날'에 '스승의 날'이 겹쳤다. 스승의 날을 떠올리면 감회가 새로워진다. 한평생을 강단에서 보냈으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나 스승과의 인연을 맺었다.
오늘의 나를 길러주신 스승 두 분의 은덕을 잊을 수도 없고 보답할 길도 없다. 고병국 교수님은 법과대학 학장이고, 대학원 강의도 맡으셨다. 대학원 강의시간에 읽었던 로스코 파운드의 『법의 새로운 길 』』(Roscoe Pound, New Path of the Law)을 공역을 하기도 했고, 결혼식 때는 주례도 맡아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이화여자대학교의 김옥길 총장을 찾아가 나를 천거해 주셨다. 2학기가 끝나가는 무렵인데, 강의도 하지 않고, 법정대학의 개혁 작업을 맡으라고 11월 3일 자로 전임강사 발령을 내는 파격적인 일도 있었다.
무애 서돈각 교수님은 대학원의 지도교수로서, 논문 지도는 물론이고, 나의 「상법예해」를 공저로 발행하여 주시기도 했다. 그 당시는 국민서관의 문 사장이 형편이 어려워서 젊은 사람의 책을 발행했다가 평이 좋지않으면 그 위험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서돈각 교수와 공저로 발행하기를 원했다. 공저가 되었는데, 의외로 호평을 받아 각 대학의 구내서점에서 주문이 쇄도하여 소문이 자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 교수님이 국민대학의 교무처장을 겸직하던 시절에는 나를 처음으로 국민대학의 강단에 세워 주셨고, 동국대학의 총장 시절에는 법학박사 학위까지 수여하여 구제박사 제도(대학원의 수료 없이 논문 심사만으로 준 학위)의 막차를 태워주시기도 했다. 오랫동안 한국상사법학회를 이끌어 오다가, 손주찬 회장을 거쳐 나를 제4대 회장으로 밀어주시기도 했다.
새해가 돌아오면 두 분 스승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세배를 다녔고, 대학에서는 신년하례식을 열어 사제 간, 선후배 간의 인사를 나누며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의 세태는 너무도 빨리 삭막해지고 있으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일찍이 공자는 스승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짐승만도 못하다며,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말라 했다. 학생의 인권을 옹호한다며 기를 살려, 선생의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덤벼들고 폭행까지 자행하며 몰래 녹음까지 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되니 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는가.
스승의 날을 맞아 나 자신의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대접을 받으려고만 했지,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을까. 얼굴이 뜨거워진다.
이제라도 두 분 스승의 은공을 깊이 되새기면서, 그분들에게는 보답할 길이 없어졌으니 그 대신 내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세상이 발전하고 밝아질 것이다.
나의 스승은 모두 가셨고, 나 자신도 망백의 언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무거운 내 마음을 다독이며 「스승의 은혜」 시조 한 편을 적어본다.
주례를 서주시고 원서*도 공역서로
대학에도 몸소 가서 어려운 천거하니
그 은공 너무도 커서 갚을 길이 없구나
논문 지도 교재** 공저 사랑을 베풀고
강단에 세워 주고 박사까지 주선하니
그 은혜 크고 고마워 잊을 수가 없어라
*Roscoe Pound, New Path of the Laws
**「상법 예해』(상,하)」
첫댓글 월간 수필문학 202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