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人
전에 우리나라의 어떤 코미디언이 "못생겨서 미안하다"는 대사를 특허상표처럼 들고 나와서 시청자들을 마냥 웃긴일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미남 축에는 못들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비하할 만큼 외모가 빠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남이 하기 어려운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그의 진솔한 인품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그는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뒤에 정계에까지 진출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가 나를 보고 너무 늙었다면서 머리에 염색이라도 해 보라고 권했다. 나는 부지중에 앞서의 코미디언의 대사가 떠올라서 "늙어서 미안하다"고 얼버무렸다. 그 뒤에도 늙었다는 인사를 받을 때면 나는 가끔 이 말을 써먹는데, 이제는 그대사가 나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숨김 없는 심정이다. 이런 말로 앞서의 코미디언처럼 인기에 영합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진짜 늙은이가 늙었다는 말을 해서 인기를 얻었다는 소문을 나는 아직 아무데서도 들어 본 일이 없다. 갓 스물, 서른 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나는 어느새 올해로 77세에 접어들었다. 어떤 분은 희수(喜壽)라는 듣기 좋은 별칭을 붙여 주기도 하고, 익살스럽게 7학년 7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초등학교는 6학년을 마치면 졸업하므로 7학년이면 인생 재수생으로 여기는지도 모른다. 짓궂은 친구는 섰다판의 용어를 끌어다가 7명을 잡았다는 덕담을 하면서이 나이까지 살아온 것을 치하해 주기도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허약한 체질이어서 집안 어른들에게 앞으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끼쳐 드렸다고 한다. 장성하면서 체질이 조금씩 나아진 듯하지만 그동안 겪은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들을 생각하면 곡예 인생이라고나 할까, 마치 줄타기를 한 느낌이 든다. 몇 번인가 물과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렸고, 낭떠러지에 서 있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일도 있었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교통사고와 수면제 사고, 건물 붕괴 사고, 일제 말엽의 학도병 사건 등을 겪었다.
나는 반평생을 교직에 머물렀는데 6.25 전쟁 중에는 피난 수도 부산에서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다. 그때는 잠시 분필을 집어던지고 총을 잡은 기간이었다. 이내 팔공산 방어작전의 전투요원으로 차출되어 대기 중인 트럭에 오를 참이었다. 그 찰나에 나는 뜻밖에 부대에 잔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인생은 여기에서도 이어졌다.
그때 출동한 대원들은 며칠 사이에 거의 다 희생되었다는 비보가 부대에 날아왔다. 팔공산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그 뒤에 두고두고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내렸던 것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그때의 나의 명운이 억세게 끈질겼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50세를 전후해서부터는 몇 차례 시한부 인생이라는 진단을 받고 절망의 구렁을 헤맸다. 번번이 오진이어서 그 덕분에 재생의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했지만 생사가 마치 의사의 소견서 한 장으로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직업 의식에서랄까. 그럴 때마다 나는 무사히 정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년이 가까웠을 때 전국적으로 학원의 소요 사태가 절정에 이르러서 사제간의 도의는 진흙탕에 내팽개쳐진 꼴이었다. 어느 날, 우리 학교에서도 주모급 학생들이 원로 교수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대학이 양로원인 줄 아느냐고 몰아붙이며 물갈이 할 터인즉 보따리를 싸라는 식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오래 살다보니 은행이 퇴출당하는 꼴을 다 본다고 허탈해 한다. 그런데 그 무렵에는 학생들이 강단을 점거하고 스승이 마룻바닥에 앉아서 제자들의 훈시(?)를 듣던 때이기도 했다.
원로 교수들은 늙은 것이 죄라며 다들 풀이 죽었다. 풀이 살아도 별수 없을 늙은이들이 더 풀이 죽은 모습으로 합동 강의실을 빠져 나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를 아무런 하자 없이 학생들의 무례한 언동으로 좌지우지될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격동기가 지나자 그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건 · 사고 · 오진 등으로 점철된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볼 때 정년을 맞는 나의 소회는 남달랐다. 퇴임식장에서는 나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과 동료 교직원, 그리고 친지들의 격려와 축하 속에 과분한 훈장도 하나 목에 걸어 보았다. 그 훈장은 대부분의 정년 퇴임자들에게 수여되는 의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대과 없이 직무를 수행한 노고에 대한 위로의 뜻이 담겨져 있으므로 의미 있게 받아서 간직하고 있다.
정년 뒤에는 한국문협의 지부장을 맡아서 나의 능력이 다할 때까지 힘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자부했다. 임기가 끝날 무렵 나도 마침 타지방으로 옮겨 앉게 되어서 후임자를 선출하는 절차가 남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젊은 문인들이 세대 교체, 물갈이를 들고 나와서 원로 문인들의 기를 죽여 놓았다. 오나가나 노인들의 수난기였다.
일본의 인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에 얽힌 일설에는 늙어서 노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젊은 나이에 자결했다고 한다. 전에 나는 어떤 글에서 그 작가는 인생을 너무 무겁게 본 것인지 아니면 너무 가볍게 본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쓴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무거운 쪽으로 이해가 기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초등교사들 사이에서 가끔 명예 퇴직의 바람이 불었다.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어린이나 학부모들이 젊은 담임교사를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늙어서까지 홀대를 받아가며 자리를 지키느니 차라리 일찍 자진해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한다. 앞서의 일본 작가의 경우와 조금은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요즘 정치판에서도 '젊은 피 수혈론'이 대두되어 술렁이고 있다. 어떤 신문에는 이런 기회를 놓칠세라 함량 미달의 정치꾼들이 줄을 섰다는 기사가 나와 있다. 무조건 젊다고 다 쓸모 있는 수혈감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경우는 상징적인 표현이겠지만 실제로 병원의 임상치료에서도 때때로 나타나는 수혈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나도 늙은이라서 아전인수격으로 하는 말일는지는 모르지만 노인에게 관련된 잠언이 두어 개 머리에 떠오른다.
'오랜 세월을 거쳐서 경험을 쌓은 자만이 노인이 될 수 있다' 느니
'젊은이의 완성이 늙은이다' 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사람이 어찌나 한 사람뿐이랴 싶다.
나는 십여 년 전에 나의 일생도 짧지 않은 인생이라고 자부한 일이 있지만, 이제는 고희(古稀)를 넘긴 지도 일곱 해나 되는 진짜 나이배기 노인이 되었다. 나의 스승이며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김도태(金道泰) 선생님은 바이런을 예로 들어 굵고 짧은 인생을 예찬했었다. 그때는 일제 시대였으므로 마음 놓고 말씀은 못 하셨다. 그래서 바이런이 그리스의 독립운동에 정열을 기울이다가 젊은 나이에 타계한 사실을 우리나라의 경우를 견주어서 암시적으로 언급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민족을 배반하며 치부하고 출세한 속물들을 지탄하는 속내에 더 비중을 두신 것으로 짐작된다. 그 말씀에 나는 무턱대고 공감했고 가늘고 긴 인생을 경멸한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던 그 어른은 60대 중반에 세상을 떴으므로 별로 장수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로 교육자로 굵게 살다간 분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학창시절에 굵고 짧은 인생에 매료되었던 소생은 이제 헛나이만 먹은 채 가늘고 길게 사는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이웃 나라에 '바가노 히도쓰 오보에' 라는 속담이 있다. '멍청이가 어쩌다가 한 가지 외워둔 것이 장해서 자주 떠벌인다'는 뜻이라고 한다. 앞에서 내비친 나의 훈장(勳章) 타령도 그런 격이나 아닐까 싶어 겸연쩍기 이를 데 없다. 하여간 이 늙은이가 오랜 교직생활에서 조그만 흔적이라도 남긴 것이 있다면 덕망 있는 스승님들과 착하고 바르게 살다가신 부모님의 뒷모습 지켜보며 살아온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어려서는 허약해서 사람 구실을 못할 것 같다고 어른들에게 걱정을 많이 끼쳐 드렸다는 사연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버젓한 사람 구실은 못한 위인(爲人)이지만, 그래도 노인 구실은 한 셈이라고 자위해 본다. '늙어서 미안하다'는 대사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