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복 단편소설 『먼 길』을 읽고
김인희
가깝고도 먼 곳, 송산 검단리를 찾아가는 형준을 따라 잠시 동행했습니다. 송산에서 검단리까지는 버스 편으로 한나절 거리였으나 주인공이 30여 년 이상 별러 왔으니 참으로 먼 곳이었습니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아픈 지난날을 등에 지고 가는 형준의 발걸음 따라 걷노라니 형준의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제게 전이되었습니다.
높은 산들이 온통 주위를 에워싼 하늘만 빠끔하게 트여있는 형상, 다 쓰러져 가는 엉성한 점방, 금세 폭살 내려앉을 듯 퇴락할 대로 퇴락한 가게, 누런 흙먼지가 더께더께 올라앉아 아예 개흙으로 맥질을 해놓은 것 같은 유리문, 강당골 홍 노인을 만나기 위해 막걸리와 ‘라일락’ 담배 한 포를 사는 형준······. 작가의 묘사에 사로잡혀 잠시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에 탑승한 듯 황홀했습니다. 아주 잠시동안 말입니다.
호적등본을 통해 생부가 아닌 양부로 밝혀진 아버지와 양모, 검단리에서 박분녀의 사생아로 출생하여 3년 뒤 아버지(김선태)에게 입양된 것, 아이를 낳지 못한 원죄가 있음에도 형준을 모질게 학대했던 양모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품고 안개 자욱한 미로를 걷듯 강당골을 향하는 주인공을 따라가면서 얽히고설킨 타래가 풀리기를 바랐습니다.
마침내 형준이 홍 노인을 만나는 대목에서 위안이 되었습니다. 홍 노인 사랑방에서 삼태기를 만들고 새끼를 꼬는 두 노인은 제 유년 시절의 단상이었기에 정겨웠습니다. 홍 노인과 형준의 대화에서 하나씩 풀리는 의문들, 추임새 넣듯 끼어드는 두 노인들이 대화의 맥을 끊을 듯 걱정되기도 했지만 확신과 검증을 견고하게 한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아! 생모에 대한 기구한 사연을 듣고 충격에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서모가 아버지가 없을 때 형준을 ‘돼지새끼’라고 부르며 구박했던 이름은 아기 때 돼지처럼 별 탈 없이 잘 자라달라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었습니다. 형준이 부끄러운 집안 내력을 들통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여 남의 일처럼 물었으나, 홍 노인과 두 노인에게 작별하고 사랑방을 나온 후 두런대는 노인들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저 젊은이가 필경 돼지인 것 같어유.”,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형준은 닭똥처럼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산기슭의 왕소나무 가지들도 미친 짐승처럼 몸부림치며 서럽게 울부짖고,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작가는 회임한 친모가 어쩌다 소박을 맞았는지 영구미제로 남깁니다. 독자의 아둔한 상상으로 풀어낼 수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