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후 1:1~7
제목: 사나 죽으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
● 기독교는 사나 죽으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오직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고후1: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
아마도 고린도후서 1장만큼 ‘위로’라는 좋은 단어가 많이 나오는 장(章)도 드물 것 같습니다. 건강하고 젊은 청년들은 위로받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연약한 분들, 특히 노인들은 위로가 절실하고요. 말로만 하는 위로가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실질적으로 위로하는 그런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공하고 부유한 자식이 많은 노인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독거노인으로 고난에 처한 분들이 갈급해 하는 위로의 분량은 멀쩡한 사람들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절박하고 처절할 것입니다. 애절하게 위로가 필요한 분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신앙고백이 아래에 있습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 |
위 신앙고백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시는 분은 아직 믿음이 없거나 희미한 분이실 겁니다. 몸과 마음에 자강력(自强力,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힘)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본 자만이 인생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파악한다는 속담처럼 믿음 안에서 치열하게 고생을 해보신 분들은 위 문답의 내용이 아련하게 공감이 되실 겁니다.
● 현재 형편이 어려우며 늙고 가난한 분들도 어릴 때는 부잣집 귀한 자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지금의 모양으로만 판단하면 안 됩니다. 부자의 자식이 완벽하게 모두 다 부자로 영원히 살았다면 좋겠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영국이나 유럽 선진국에 비해서 신분의 상승•하강과 불안정의 확률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한국은 OECD 가입 국가들 중에 노인 빈곤율 (貧困率)이 매우 높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공무원연금•군인연금이 아닌 국민연금은 용돈 정도는 되어도 노후 생활비는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인들이 노후 대책을 세우지 못해서 미래를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노인은 아니지만 노인 문제의 심각성을 직•간접으로 종종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저 늙었을 때 하나님을 망각하지 못하게 꼭 붙잡아 주세요.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심 임마누엘 영원히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놓치지 않도록 꼬옥 붙잡아 주세요.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사람들은 음악을 듣는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안한 아이를 평안히 잠들게 하는 자장가처럼 내 심령이 안심하고 기뻐하기까지 하게 하소서! 내가 힘들 때 세상이 나에게 절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하나님이 없는 것이 절망입니다. 하나님 저를 꼬옥 껴안아 주세요! 하나님만이 나의 의(義)이시고 진정한 대의(大義)이십니다. 아멘! |
젊으나 늙으나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창동의 다가구주택의 2층 작은 방에 사는 독거노인을 보았습니다. 생일 날 아내도 없고 가족도 없이 봉사자들이 갖다 준 미역국과 반찬을 잡수시는 모습이 쓸쓸하고 솔직히 처량해 보였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꼬맹이 때 저 할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저 노인을 바라보는 묵상자가 노인이 됐을 때 나는 어찌 될 것인가? 잠시이지만 긴장을 하고 나를 생각하고 성찰해 보았습니다. 신비주의 종교인들처럼 근거 없는 신념에 도취되어 믿쓥니다! 하면 된다! 할렐루야! 부르짖으면 만사형통인가요?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잠시 한번 밖에 못 사는 것입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그런데 위 TV 프로그램의 그 노인에게서 시편 1편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시편1편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
80대 중반이지만 또렷한 눈빛으로 성경을 읽고 집중하며 꽉 다문 입모양이 보였는데요. 인생의 말년을 또렷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으며 마무리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것을 보고 할아버지에 대해서 나의 마음은 상당히 안심이 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성경을 읽고 하나님 말씀이 주는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붙잡혀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잠시 위로를 얻은 나는 속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저 늙었을 때 정신을 잃고 횡설수설 하지 말고 성령께 붙잡혀 성경을 읽고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있게 해주세요. 죽을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고 감격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해주세요. |
●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 그 자체가 신앙의 진수이고 최고봉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간음하는 자가 그 시간 동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겠습니까? 남을 미워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단에 빠져서 자신은 교주가 아니니 괜찮다고 셀프로 자기위로 하는 자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참 성도의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기독교적인 관용 표현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이라고 앵무새처럼 둘러대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성찰하고 오류와 미흡함이 있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식사 준비 다하고 설거지 다하고 청소 다하고 장보기 다하고 온갖 일을 다 한 다음에야… 그제서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씀을 읽고 기도를 헐 수 있는 신자의 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요셉이나 다니엘은 대국(大國)의 총리였지만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을 했습니다. 전업주부나 실업자일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조금의 마음도 없다면 말씀을 묵상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할 명분이 수십 가지로 등장을 합니다.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믿는 성도들은 복잡다단한 집안일을 하는 중에 직장 일을 하는 중에, 또는 그 이전에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최소한의 간접적 확인의 일환으로써 말씀을 보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소박한 묵상을 마칩니다. 주일에 큰 은혜를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좋은 포스팅을 읽고 은혜를 나누어 갑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을 읽던 차에 햐설의 내용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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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에는 어떤 부분들이 있는가?
이 위로에는 여섯 가지 부분이 있다.
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었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요 그의 자녀들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는것(고전 7:23).
2.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방식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것, 즉 그가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를 보상하신 것이라는 것(벧전 1:18; 요일 1:7).
3. 죄와 사망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받았다는 것.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실 뿐 아니라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서 구원하셔서, 죄와 사망과 사탄이 우리에게 권세를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다(히 2:14; 요일 3:8).이다.
4. 우리의 화목과 구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 주고 사신 다른 모든 은택(恩澤)을 끊임없이 보존하신다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 감찰하시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 자신의 손이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에게 있다면 매순간마다 수천 번씩이라도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5. 우리의 모든 악들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 의인도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또한 양처럼 살육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그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데 협력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그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바꾸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6. 이 모든 큰 은택들과 영생에 대하여 층만한 깨달음과 확신이 있다는 것. 이런 확신은첫째로, 우리 속에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셔서 참된 믿음과 회심을 이루시는 성령께서 이 모든 축복들이 진정 우리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증거해 주심으로써 얻어진다. 그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참된 믿음의 결과들에서 얻어진다. 곧, 참된 회개,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모든 계명들을 순종하고자하는 확고한 목적 등을 우리 속에서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또한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구원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 위로의 다른 모든 부분들의 토대(土臺)가 된다. 이것이 없는 다른 모든 위로는 이 세상의 삶의 유혹들 가운데서 그저 덧없이 사라지고 말 불만족스러운 위로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의 골자는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또한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화목되었으므로,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구원받으며, 성령과 영생이우리에게 베풀어진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p.29~30.
@천이다 좋아요^^ 해설을 첨부하시니 독자들에게 이해가 배가될 것입니다.
@천이다 여기에나어는 상경구절을 모지리 찾아 읽으면 충분한 성경공부도 될 것입니다!
@천이다 은택은 쉬운 말로 하면 은혜이겠지요?
@장코뱅 네, 충분히 성경공부가 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하고 유일한 위로자가 되심을 맏고 고백합니다. 감사합나다.
아멘!
아멘22
매일 일과 전에 먼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삶이 경건의 능력을 유지하는 탁월한 일일 것입니다. 생활이 단순했던 옛날로 갈 수록 이것을 실천하기가 더 쉬웠고, 현대로 올 수록, 그리고 도시에서 살 수록 중요한 것을 먼저 놓치고 항상 바쁘게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경건한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항상 보호하시고 위로와 큰 능력을 받으며 만족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시 1편과 같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복된 삶을 죽을 때 까지 지속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성찰하게 하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