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이나 역사신학 같은 이론 신학에 비해서 성경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장점이 있지만 소위 자유주의 신학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더 많다고들 합니다. 미국 신학교에 비해서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 히브리어∙헬라어 등 성경 원어의 실력은 높지만 자유주의 신학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고도 하지요. 구분선 아래에 하나님의 이름 야웨에 대한 글을 번역한 차준희 교수님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분류되는 독일에서 공부를 한 분이고 원저자 월터 브루그만이 포스트모던 신학자로 분류되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Yahweh)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설명된다는 설명은 나쁘지 않고 오히려 복음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 부분은 타붙하여 함께 나누어 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모세와의 만남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Yahweh)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설명된다(출 3:13-18; 6:2-9). 모세는 만약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에게 갈 수 없고 또 가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출 3:13). 야라는 이름은 이미 창세기의 몇몇 내러티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출애굽 전승은 출애굽기 6:2-3에서 분명히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야웨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야웨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모세의 주장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를 나타내신다(출 3:14-15).
하나님의 이름을 공개한 일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하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을 알려주는 행위는 관계를 맺는 친밀감의 표시다. 그것은 상처받으시는 하나님의 특성과도 연관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접근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을 보다 깊이 찬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이 악용되고 모욕받을 수 있는 위험성도 지닌다. 십계명 중 하나는 그러한 악용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보호하고자 한다(출 20:7; 신 5:11). 후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경외는 더욱 발전되었다(출 33:19: 34:6에 있는 공식을 보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과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는 사람들임을 의미했다(민 6:27을 보라). 후대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사상은 야웨라는 이름을 결코 발음하지 않는 관습을 낳았다. 따라서 야웨라는 이름 대신에 "주"(LORD)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아도나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유대교 신앙의 관습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내용에는 언어유희가 포함되어 있다. 이 문제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논의되어왔는데, 이는 언어학적으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도 그러하다. 야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히브리어 동사 “하야”("to be)와 연결된다. 14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 대한 전통적인 번역은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 우리말 개역개정판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역자 주)이다. 이러한 번역은 하나님을 존재 자체의 상태(the state of being itself)로 파악하거나, 하나님의 실재가 신적 존재의 핵심에 고정되어 있음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출애굽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보다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이 구절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역동적으로 나타내는 번역을 선호한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대로 될 존재 다 (I will be who I will be/I will cause to be what I will cause to be). 이러한 번역의 정당성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된다. 출애굽 이야기의 전후 맥락에서 이제 앞으로 다가올 일은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과 하나의 민족으로서 탄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 존재한다. 동시에 "되고자 하는 바"(what will be)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낸 일은 출애굽기를 읽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자 하나님이 곧 창조자 하나님도 되심을 상기시켜준다. 우주와 역사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분은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고 친밀한 관계를 세우신 하나님이다.
야웨를 영어로 으레 "주"(LORD)라고 번역하는 것은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 이름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한 관습은 구약 시대 이후 유대교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기 위해서 야웨 대신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후의 히브리 본문에는 거룩한 이름을 발음하지 않기 위해 야훼의 이름에 해당하는 자음에 대안적인 모음이 붙여졌다. 그 결과 생겨난 특이한 혼합어가 바로 “여호와”(Jehovah)다. 이러한 고대 유대교의 관습을 존중하여 대부분의 현대 영역성서들은 계속해서 야웨를 "주"(LORD, 항상 대문자로 표기되는)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독법은 피상적일 뿐 결코 적절하다 할 수 없으며, 그러한 번역어 역시 남성 단수로 사용됨으로써 야웨라는 이름을 온전히 포착하지 못한다. 앞으로 우리는 본서에서 특정 번역을 인용하지 않는 이상, 더 적절한 이름인 야웨(Yahweh)를 사용할 것이다.
출애굽기 6:2-9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는 야웨이니라"라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본문이 제사장 전승(P)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기에는 바빌로니아 포로기 때 부각된 야웨라는 이름의 중요성이 반영되어 있다. 출애굽기 3장과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주제를 대조해보면, 우리는 문서가설에서 말하는 다양한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본문들은 서로 다른 시대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신학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강조점을 이스라엘의 등장과 연결시켜 논의해왔다. 이러한 강조점은 이스라엘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세계의 일원이 되었던 왕정 시대에 적절한 주제였다(J와 E 문서). 출애굽기 6장은 야웨의 이름을 보다 직접적으로 약속의 성취와 언약의 체결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킨다. 이 주제들은 언약의 파기를 경험했으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실성이 다시금 나타나기를 고대하던 포로기 세대들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완결된 형태로서의 출애굽 이야기의 전후문맥을 고려할 때, 이 본문 (출 6:2-9)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언약 수행-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 -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성은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에 나타나는 극적인 출애굽 사건들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그러한 사건들은 5-8절에 나오는 일련의 강력한 동사구를 통해 예견된다. "신음 소리를 듣고……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너희를 빼내며…너희를 건지며 너희를 속량하여…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너희에게 주어." 이렇게 열거된 진술 속에서 하나님은 네 번이나 "나는 야웨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신다(6:2, 6, 7, 8). 야웨라는 이름은 출애굽의 구원과 해방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구절은 시내산 언약을 연상시키는 공식이자 해방을 넘어서 독특한 언약관계를 예견하는 표현이다. 포로기의 이스라엘은 이처럼 희망의 내용이 담긴 이름인 "야웨"에 헌신함으로써 희망을 얻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원리는 특별히 고통스럽고 소망 없는 시대를 살았던 유대인 및 그리스도인들의 세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월터 브루그만 외, 차준희 역, 『신학의 렌즈로 본 구약개관』, pp.173~176.
첫댓글 차준희 교수님은 성결교 신자 출신으로 오순절의 한세대에서 강의를 오래 하셨던 분입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세계적 구약학자로서 포스트모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훼, 여호와에 대한 특이한 언급과 하나님의 이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물 배경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출3:13-18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여호와'(Yehowah)라는 명칭은 '야웨'의 히브리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이 합쳐져 구성되었다. 한편 우리말 '여호와'는 헬라어 및 라틴어를 거쳐 정착된 영어'Jehovah'의 음역이다.///
@장코뱅 YHWH가 아도나이로 발음해서 여호와로 구성되었다는 거죠.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합니다.
@노베 알겠어요.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출애굽기>
======3:13절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로서 그 사람의 기질과 성품과 지위와 생애를 반영한다. 특별히 고대 세계에서 권력자들은 자기의 사신(使臣)을 타인에게 보낼 때 그 사신에게 자신의 권위를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명호가 담긴 도장, 편지 내지는 그 사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자신을 애굽에 파견하시는 절대자의 이름을 확인한 것 은 자연스런 일이다. 한편 신약 시대의 사도들도 복음 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신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행하는 이적과 기사의 출처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제시하였다(행 4:7-12). 한편 혹자(pulpit commentary)의 견해에 따르면, 다신교롤 신봉하는 애굽인들은 당시 개개의 신들에게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따라서 애굽 우상들에 익숙했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도 물어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모세가 자기를 보내는 분의 이름을 확인했다고 한다. 물론 이 견해도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으나 전자의 견해가 더욱 환영할 만하다.
======3: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 , 예흐웨 아쉐르 예흐웨) - 여기서 '아쉐르'(who)는 관계 대명사로서 '나는 존재한다'(I am)는 뜻인 '예흐웨' 성호를 결합시켜 자존성(自存性)을 강조한다. 즉 시작과 끝이 없으신, 언제나 존재하는 자존자(自存者)란 뜻으로 피조된 존재들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 (I am who I am)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계 1:4,8). 이는 절대 완전하고, 독립적이시며 우주 안의 모든 인과 법칙을 초월한, 모든 존재의 근거와 기반이 되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그대로 반영한 말이다. 더욱이 이 말 속에는 ,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변함없으시며 그 말씀하신 바를 온전히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 말이 언약과의 관계에서 쓰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주로서(6:6) 언약의 주체자가 되사 그 언약하신 바를 변개치 않으시며 영원히 성취해 가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3:15절
여호와( , 예호와) - '나는 스스로 있는 자'(14절)란 말과 같은 뜻을지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다. 즉 이 이름은 '존재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하야'( )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로서 하나님의 자존성과 영원불변성을 강조한 이름이다(14절). '여호와'의 히브리형 '예호와'는 원래 자음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4개의 자음 곧 'YHWH'가 된다. 따라서 발음하기에 곤란하나 통칭 '야웨'(야훼), '예호와' 등으로 불려져 왔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경외심에서 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아도나이'( ,나의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했다. 따라서 성경을 옮겨 기록하거나 낭독하는 일을 맡고있던 서기관들은 이 단어가 나오게 되면 '야웨' 대신 '아도나이'라 발음했다. 따라서 결국 '여호와'(Yehowah)라는 명칭은 '야웨'의 히브리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이 합쳐져 구성되었다. 한편 우리말 '여호와'는 헬라어 및 라틴어를 거쳐 정착된 영어'Jehovah'의 음역이다.
나의 영원한 이름 - 하나님에게 가장 합당한 이름이자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속성과 본질을 지니신 당신의 영원불변의 이름 이란 뜻이다. 실로 이름의 영원성은 그 존재의 영원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표호(表號) - '표하다', '기억을 되살리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곧 '기념물'이란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표시가 되는 이름', 곧 그 이름만 들어도 그분의 품성과, 이뤄 놓으신 놀라운 사건들과, 미래에 완성하실 원대한 계획까지 생각할 수 있을 그러한 기념비적 이름이란 뜻이다.
=====3:16절
장로( , 자켄) - '나이 먹다'란 뜻의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노인'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한 가문의 어른으로서 추앙받을 만한 재덕을 겸비한 자를 가리킨다(6:14,25). 체계적 행정 체제가 미비하였던 당시대에 이들은 백성의 대표자 역할을 폭넓게 감당하였다.
권고하여( , 파카드) - '방문하다'(KJV: 'visited'), '감시하다', '보살피다'(RSV:'observed), '판단하다' 등의 뜻이다. 요셉이 임종시에,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고하실 것이라던 예언의 말과 같은 표현으로서 (창 50:24). 영감된 예언의 필연적 성취를 보여준다. 실로 하나님은 요셉의 말을기억하시고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보살피시기 위해 지금 이 땅에 방문하실 것을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3:17절
고난( , 마아나) - '위협하다', '괴롭히다', '강탈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 '아나'에서
유래한 말로서 곧 애굽의 압제를 집약한 말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고역'(drudgery)과 '굴욕'(humiliation) 등 구체적으로 번역했다.
=====3:18절
들으리니( ,솨마) - '순종하다', '경청하다'란 뜻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요구에 순복하리라는 의미이다. 한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유명한 신앙 지침인 '쉐마'(들으라) 부분도 동일한 말로 시작된다(신 6:4). 실로 애굽의 강력한 압제 하에 신음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일개 초라한 망명객의 말에 순복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결과는 인간의 생각과 판이했다(4:31).
장로들과 함께 - 모세는 여호와의 권능에 찬 이름과 더불어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바로 앞에 서서 담대히 말해야 했다. 즉 그에게는 하늘과 땅의 많은 후원자들이 있었다(5:1).
히브리사람의 하나님( ,엘로헤 하이브리임) - 아브라함을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에서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으로' 불러내 그와 언약을 맺으신 그 하나님(창 12:1,7;14:13)을 특별히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이 사용된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또 한 번의 '건너는'(히브리, 창 14:13)
역사(홍해 사건)를 통해 그들의 구원을 주도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모세에게만 나타나셨으나, 임하신 목적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그들의 대표격이었으므로 '우리'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이다.
희생( , 제바흐) - '짐승을 살육하다'란 뜻의 동사 '자바흐'에서 유래한 말로서 '제사', '헌물'(제물)을 의미한다. 어느 종교에서건 제사 의식은 종교 생활의 핵심 중 하나이다. 더욱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 제사 의식은 유일신 여호와 신앙으로 전민족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희생 제사 요청, 그것도 민족적 대이동을 수반해야 하는 이 요청이 강퍅한 애굽 왕에게 받아들여질리 만무했다. 따라서 결국 이 요청은 바로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사흘 길 -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인 고센 지역으로부터 제사를 위해 하나님의 현현 장소인 시내 산까지 이를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동시에 애굽의 속박과 추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리를 지칭한다.
(아란 콜 - 세가지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1) 시내산이 고센으로부터 직선으로 삼일 길로 여겼다는 가능성 - 짐이 없는 성인이 고센과 가데스 사이에
직선도로가 있는 경우만 가능한 해석이다.
2) 모세가 계략을 써서 애굽을 빠져 나가려고 하는 가능성 -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3) 사흘 길이라는 말이 불투명한 시간의 길이를 어림잡아 말하는데 사용하는 가능성 - "어제와 삼일 전에"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보통 "이전에"라는 의미가 된다(출 5:7).
여기에 나오는 표현은 동양적인 흥정의 복잡한 형태이다.)
@장코뱅 차준희, 브루그만 교수가 학문적으로 글을 썼지만, 어느 면에서는 호크마 주석의 설명이 더 학문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진짜 좋은 주석입니다.
@노베 네, 알겠어요. 공감합니다.
출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 사건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그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아멘!
<호크마 주석: 출애굽기>
20:7
이름 속에서 한 개인의 품성과 속성 및 인격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또한 이름은 '기억', '기념'과도 동 개념을 이루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름을 부여할 경우에는 명명자와 피명명자 간에 지배 내지 소유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하신 후 제일 먼저 이름을 부여하신 것(창 1:5,8,10)은 하나님 자신이 바로 만물의 소유자가 되심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언약적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6:3). 오히려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그 대답을 거절하기까지 하셨다(창 32:29). 그러나 출애굽 사건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그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곧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가장 특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1) 그분이 인간의 구원자이심과
(2) 인간의 지배자와 소유주이심, 그리고 (3) 인간을 찾아오셔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자이심을 알 수 있다<6:2>.
망령되이(* , 라솨웨) -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라'와 함께 쓰인 '솨웨'는 '낭비된 것', '무질서한 것', '소모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말은 '헛되이','쓸데없이', '함부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런 의미에서 셋째 계명은 여호와의 성호(聖號)를 경외하라는 계명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여러 이름을 통해 당신의 품성과 속성을 인간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곧 그분의 존재와 영광을 직접 상징한다. 따라서 인간은 마땅히 순수하고도 진실한 기도와 찬양, 그리고 감사 등에 그 이름을 합당히 사용하여 영광 돌려야지, 저주나 악담 그리고 농담이나 희롱 등에 함부로 그 이름을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컫지(* ,티솨) - '들어올리다', '취하다'(take), '운반하다'라는 뜻을 지닌 '나솨'의 명령형으로 '일컫다'(부르다)는 의미보다는 '사용하다', '적용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단순히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우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레 19:12에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죄 없다 하지 아니 하리라(* , 로 예나케) - 만일 어겼을 경우, 그 처벌 규정이 명시되어 있는 계명은 2가지(제 2, 3 계명) 계명이다. 하나는 우상 숭배 금지 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 나타난 성호(聖號) 오용 금지 계명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계명은 모두 인간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치 않고, 무시하거나 도전할 때의 경우임을 알 수 있다.
@장코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언급한 폭동 조장 면직 목사가 잘 명심해야 할 내용 같습니다.
출6:2-9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이스라엘에는 누가 살해당했을 때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 복수하고(수 20:5), 땅을 팔았을 때는 대신 물어주고(룻 3:13), 또한 무자(無子)한 채죽었을 때는 그 아내와 혼인하여 자손을 잇게 해주는 '고엘 제도'라는 관습이 있었다(룻 4:10).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바로 그 일을 담당하는 가까운 혈족 곧 '고엘'(구속자, 갚는 자)이 되어 주시겠다는 뜻이다.
한편 이러한 구속자 고엘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연히 드러났으니, 곧 그분은 성도의 복수자요(딤후 4:14), 신랑이요(마 9:15), 잃었던 유업을 되찾아 주신 분이다(롬8:17).///
@장코뱅 아멘!
<호크마 주석: 출애굽기>
====6:2절
여호와(* , 예호와) - 이 이름(3:15)은 이중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즉 (1)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절대자란 뜻이다. (2) 선민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시키시는 구속주란 뜻이다. 본문에서는 특히 (2)의 의미가 강하게 표출되어있다. 낙담 중 탄원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이유는 출애굽 사건이 당신의 언약과 성취라는 차원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모세에게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다.
======6:3절
전능의 하나님(* , 엘 솨다이) - '솨다이'는 '공략 불가능한'이란 뜻의 '사다드'에서 온 말로 '전능자'(Almighty)를 가리킨다. 그리고 '엘'은 '힘' 혹은'힘센 자'란 의미의 '아일'에서 유래한 말로 '사다이'와 비슷하게 '강하고 능력있는 자'란 뜻이다(창 17:1;49:25).
여호와로는...알리지 아니하였고 - 여기서 '알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 )의 기본 개념은 '확실히 깨닫게 하다', '체험하게 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전혀 계시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창 15:7;22:14;28:13). 다만 이 칭호가 '언약의 주'로서의 의의를 지닌 것으로 확연히 알려진 것은, 구속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출애굽을 전후한 때라는 의미이다.
=====6:6절
무거운 짐 -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은 모든 압제를 통칭한 말이다(Modern Language Bible, Egypt's burdens). 한편 이에 비해 다음의 '고역'은 이런 저런 이유로(1:12-14;5:7-9) 더욱 가중된 고난을 특별히 암시하는 말인 듯하다.
빼어 내며 - 이 말은 (댓가를 지불하고)'사다', '택하다'(신 4:20), '빼앗다'(삼상2:16), (원수를)'갚다'(렘 20:10) 등 다양한 뜻을 내포한 말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해 내시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하셨는가를 잘 보여 주는 말이다. 한편 이를 통해 우리는 성도를 피로 사시사(계 5:8),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건져내신 구속주의 무한하신 은총을 연상할 수 있게 된다(골 1:13).
건지며 - 곧 '탈취하다'(대하 20:25), '구원하다', (겔 14:14), '탈출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3:8).
편 팔 - 팔을 편다는 것은 어떤 행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편팔'은 '강한 손'(1절)과 더불어 하나님의 적극적이고도 강력한 활동을 의미하는 신인동형성론적 표현이다(신 11:2;왕상 8:42;겔 20:33).
재앙(* , 쉐파팀) - '미쉐파트'와 동의어로서(신 32:41;욥 8:3)'심판'(잠 9:29)이란 뜻이다(KJV, RSV-judgement). 이는 애굽에 임하게 될 심판이 단순한 이적 사건이 아니라(3:20),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구속하여( , 가알) - '무르다', '복수하다', (가장 가까운)'친척이 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에는 누가 살해당했을 때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 복수하고(수 20:5), 땅을 팔았을 때는 대신 물어주고(룻 3:13), 또한 무자(無子)한 채죽었을 때는 그 아내와 혼인하여 자손을 잇게 해주는 '고엘 제도'라는 관습이 있었다(룻 4:10).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바로 그 일을 담당하는 가까운 혈족 곧 '고엘'(구속자, 갚는 자)이 되어 주시겠다는 뜻이다. 한편 이러한 구속자 고엘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연히 드러났으니,
완연히 드러났으니, 곧 그분은 성도의 복수자요(딤후 4:14), 신랑이요(마 9:15), 잃었던 유업을 되찾아 주신 분이다(롬8:17).
야, 야웨, 여호와 등으로 표시됐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유익한 지식을 주는 좋은 내용이네요.
창세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야'로 표기된 바 있었고 출 3:14에서 계시된 이름이 예흐웨 아쉐르 예흐웨로서 기존에는 나는 나다, 스스로 있는 자, 자존자다 라는 하나님을 존재론적인 이름으로만 번역했는데, 이후 많은 학자들이 조금 더 역동적인 이름으로, 즉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대로 될 존재다 라는 번역으로 선회했다는 거군요.
그랬을 때 출애굽에서 본격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어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이름이 된다고요.
본문의 문서는 제사장 전승(P)으로서 바벨론 포로기 때 부각된 야웨라는 이름의 중요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했네요.
따라서 출 6장은 다시 한 번 출애굽 때와 같은 구원을 염원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분석했군요. 하나님의 이름에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로서 하나님의 언약 수행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으로요.
네.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에 이렇게 풍부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좋네요. 감사합니다.
네, 풍성한 댓글에 매우 공감을 합니다.
요약과 포인트 정리를 해주신 것 같아요. 매우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 같습니다. 이와 관련 좋은 내용과 댓글을 보고 제 믿음이 더 유익을 얻는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