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대왕 :성종(1457-1494년.재위 : 1469-1494.12월. 집권25년 1개월) 38세까지 삶.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으로(당시4세) 이어져야 하나, 정희왕후와 한명회 등이 결탁하여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성종(13세)을 예종이 죽는 날 왕에 앉힌다. 첫째인 월산군이 당시 16세였으나 둘째인 자을산군으로 왕통이 이어진다. 이는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기에 정희왕후와 서로 결탁함. 당시 한명회는 최대 권력가였다. 성종은 태어 난지 2달만에 아버지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射藝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했는데도 그는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태조를 닳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 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의 나이인 20살 까지 7년 동안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1476년 섭정이 끝나자 원상제도 를 폐지하여 왕명출납과 서무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과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 했다. 임사홍, 유자광 등 공신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출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사림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숭유억불 정책실시.하고, 변방을 위협 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조선 백성들은 개국이래 가장 태평성대 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은 후기에 들어 유흥에 빠져 들었고 이것 이 확산되어 사회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 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 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어우동에 관한 야사의 이야기도 이시기에 형성됨. 성종은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16남 12녀의 자녀를 얻었다.
※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1437-1504년.) - 의경세자의 비. 성종의 어머니.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한 것으로 전해진다. 계비윤씨를 폐비시킴. 연산군이 폐비사건으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로 생을 마침.
※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1462-1530) -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왕비에 책봉 되었다.
※ 폐비윤씨(? -1482년) -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 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 되었다. 1479년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가 되고 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성종은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윤씨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게 하여 사약 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賜死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 까지는 폐비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 김종직(1431-1492년) :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진사가 되고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하여 1462년 에는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오른 김종직은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등용 되기에 이른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 하였으며 세조의 불의에 동조 한 신숙주,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 그래서 대간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세조의 부도덕함 을 질책하고 세조 때의 공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훈구세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조의제문]..「화술주시」- 이것이 사초에 실려 있어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