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찰랑거리고
장수라
파란시선 0148
2024년 9월 1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33쪽
ISBN 979-11-91897-86-9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그래서 괜찮아 밤의 말을 이해하며 꽃이 지는 시간
[당신이 찰랑거리고]는 장수라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꽃을 사러 가」 「향유」 「Esthesia」 등 54편이 실려 있다.
장수라 시인은 1968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고, 명지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시와 문화]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당신이 찰랑거리고]를 썼다.
우리는 시인이 「꽃을 사러 가」에서 애틋하게 발음했던 시어인 “마른 영혼”의 함의에 도달할 수 있다. 영혼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장소이다. 사람은 타인의 손을 빌려서도, 타인의 목소리에 기대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목소리는 닿을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삶의 끝까지 ‘당신’과의 거리는 아득한 상태로 남는다. 이러한 인식은 지속한다. 결국 사람은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이해하는 대신 “허파에 대해 생각하고 잠수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바다의 설법」). “타인의 손가락 끝을 주시하며 방향을 잃을 때 나의 턱은 늘 초승달처럼 차오르기를 기다”리다가 끝내 이 기다림 또한 열매일 거라고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턱」).
따라서 이 시집에서 스스로 이룩해야 할 ‘영혼’은 아직 미완이다. 줄곧 ‘당신’ 또한 발음해 보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닿을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를 환기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관능적인 호명과 촉각적 모티프가 반복될지라도 그것은 끝내 이룰 수 없는 접촉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서시의 제목이 “회전문”인 이유에 대해서도 이제 깨닫는다. 서시의 주제는 ‘당신’-예술과의 만남을 통한 자기 갱신이다. (이상 박동억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2011년인가 이미 오래전에 나는 장수라 시인의 불타는 듯한 시 세계를 알아 버렸다. 그때 언젠가 이 시인은 잠깐 담갔던 발가락으로 온통 강물이 출렁거리는 청둥오리 같은 시인이 될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이번 시집에서 내 예감은 적중했다. 「꽃을 사러 가」에서 장수라는, 꽃을 태우기 위해 꽃을 사고 꽃을 사기 위해 자기 몸을 그림자로 바꿀 수 있는, 바싹 마른 영혼으로 태울 꽃을 사려는 그는 이미 불타는 시인이 되어 있었다. 「바다의 설법」에서 “이 물을 다 마셔 버릴 거야”라고 외치는 당돌한 설법은 어느 자리에선가 만나서 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느꼈던 충격 그대로였다. 「봄이 오면 종로경찰서로 간다」 「시선」 「Esthesia」 「놓을」 「타투」 「허구의 힘」 「풍난이 피다」 「향유」 등은 시를 읽는 동안 장수라 시인의 무엇인가 만만치 않은 겹으로 된 시 세계를 더 알게 해 주었다. 이런 시 세계를 충실히 유지해 오면서 14년 만에 시집을 출간하는 시인은 앞으로도 많은 것을 불러낼 시인일 것이다.
―최문자 시인
•― 시인의 말
사라지는 것을 사랑한다
지워지는 것을 사랑한다
불타는 소멸
빛처럼
신을 향한 노래처럼
•― 저자 소개
장수라
1968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시와 문화]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당신이 찰랑거리고]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회전문 – 11
구름 안부 – 12
버찌가 까맣게 톡톡 – 14
놓을 – 15
꽃을 사러 가 – 18
모란을 그대에게 보여 주려고 – 20
파프리카 – 22
국수역에 가면 – 24
바다의 설법 – 26
빌린 이야기 – 28
턱 – 30
안개 – 32
봄이 오면 종로경찰서로 간다 – 34
갈라파고스 해변에서 – 36
제2부
시선 – 41
페르시아 양탄자 정원 – 42
Esthesia – 44
말 – 46
다정한 사람 – 48
dog’s ear – 50
영화 한 장면, 훗날 차용하겠습니다 – 52
우주팽창론 – 54
Etude – 56
타투 – 58
동어반복 – 60
슈베르트는 내게 안전하지 못하다 – 62
박쥐 자르기 – 63
제3부
내 사랑은 택배로 왔다 – 67
향유 – 68
궁평항 무인카페―Genofa – 70
머리 위에 녹차 향 바람이 분다 – 72
자장자장 해님 달님 – 74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 76
토끼몰이 – 78
소금 호수 – 80
아내를 위하여 – 82
모딜리아니의 방 – 83
돌 – 86
양파를 까고 있는 것일까 – 88
내 이름은 필로멜라! – 90
제4부
독립문 횡단보도에서 – 95
시접 – 96
사과를 왜 북극에 갖다 놓았나요? – 98
장국영, 영화 세 편을 본 날 – 99
허구의 힘 – 100
크로와상 – 102
행간 – 104
샌드아트 – 105
거미의 비행 – 108
날마다 공룡놀이터로 간다 – 110
소금 – 112
풍선인간 – 114
조약돌이 웃고 있네 – 116
풍난이 피다 – 118
해설 박동억 사랑과 예술적 실존 사이에서 – 119
•― 시집 속의 시 세 편
꽃을 사러 가
꽃을 태우기 위해 꽃을 사러 가네
태우다가 간혹 꽃의 유령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유령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러 단계가 있어
몸을 그림자로 바꿔야 해
어떤 꽃을 만날까
프리지어를 고를까
장미가 나을까
꽃들을 나열하는 일도 즐거운 일이지
꽃잎이 마르는 중에도 소곤소곤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한 잎 두 잎 모두 바람으로 흩어지기 전
붙잡아 두려고
날짜를 정해 꽃을 사러 가
마른 영혼에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꽃의 유령을 달래다 악몽을 꿀지도 몰라
태울 꽃을 주세요
말하고 싶은 걸 애써 누르며
낯선 화원 주인 앞에서 그림자를
내려놓지 않아도 될 거야
향과 색깔을 어느 기억 속에 넣을까
꽃이 야위어 가는 대기 속에서
드라이플라워라고 웅얼거리면
기타 튕기는 소리가 나
꽃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해야지
아무리 먼 곳일지라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꽃에게로 가야지 ■
향유
하루 종일 나비 한 마리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인사동 어느 전시관에서 나비 그림을 보고
홍보용 엽서 한 장 손에 쥐고 나온 것뿐인데
머리 위에 앉았다가 어깨 위로 마침내 손등에
나비는 멀고 가까워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잡으려 손을 뻗으면 멀리 달아나는 나비 한 마리
내 곁에 오게 하기 위해 손짓도 눈길도 주지 않고
숨죽이던 순간이 있었다
나비를 향한 사랑은 내 맘에 따라 귀찮은 모기가 되었다가 산비둘기나 부엉이가 되기도 했다
다른 것에 몰두하고 있을 땐
그 나비는 죽은 나비가 되는 것이다
종이 한 장 속 나비를 사랑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라볼 때만 나비는 살아 있다
너와 나 사이 팔랑팔랑 일렁이던,
미미한 바람을 일으켜 주던 날갯짓은
태양이 배회하던 오후의 보호색
미래를 얼리고 달아나는 한 잎 두 잎 바람들
저기 흙내음 나는 언덕 위에 앉아 보라고
여름 태양 빛 아래
한 송이 꽃이 어깨에 스며들었다
멀리서 태양이 걸어 들어오고
당신이 찰랑거리고 또 찰랑거리고 ■
Esthesia
가는 것과 잠이 든 것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빛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경계, 명암이 되어 버린 장롱이 담벼락에서 조는 시간 원목 장롱문을 여니 추억이 기울어져 있다 신발을 보관하는 방법을 알려 주기라도 한 것처럼 수십 켤레의 구두가 층층이 쌓여 있다
단조롭게 주목받는 짧은 무엇, 마치 헤어지기 좋은 시간을 마련하려던 것처럼 떠날 때 정리할 사람이 없었을까 알 수 없는 아이러니가 장롱문을 통해 흘러나왔다 자신이 버려진 줄 모르고 길옆 꽃 한 송이가 별빛과 연결되듯 머무는 곳에서 언어가 되살아난다
나니아로 가는 관문, 우주의 힘이 낯선 생명들과 연결되어 어리고 나이 든 신발들이 빛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은 헛것이고 허깨비라는 듯 세상의 발 아무리 많아도 신을 수 없는 날개 달린 헤르메스의 신들
빛의 윤곽이 회반죽 되어 가는 과정에서 귀밑 구부러진 징후가 고요하게 읽힌다 구두코가 햇빛이 너무 밝다고 말한다 아는 걸 모른다고 말한다 꽃을 피운 길들을 잊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은 눈물 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것들과 연결된 것들은 모두 나약하다 우리를 품어 안은 우주는 쓸쓸한 영혼에 편들고 싶어 할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것 이미 엎질러져 흘러가는 것 휘감겨 목적을 상실한 것 추억을 향하다가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게 사라져 가는, 네게로 가는 길은 이토록 어려웠다 낮달 하나가 나를 부르는 깊은 겨울날의 명령
*Esthesia: 미학적인 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