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몽땅 (Yves Montand,1921~1991)
프랑스의 영화배우/가수 '이브 몽땅'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태생으로, 1924년
'파시스트'의 박해를 피해 공산당원인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마르세유'로 이주,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공장노동자, 미용보조사 등으로
일했으며, 우연히 '마르세유'의 한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면서, 가수가
될 기회를 잡았다.
그는 1944년 파리에서 당시 '물랑루즈'의 유명한 샹송 가수 '에디뜨 삐아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물랑루즈'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그녀는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에디뜨 삐아프'는 자신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장미 빛 인생(La Vie En Rose)"에서'이브 몽땅'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에디뜨 삐아프'가 함께 하는 동안 '이브 몽땅' 은
가수로 급성장하였고, 큰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둘의 관계는 곧 종말(終末)을
맞았다.
'이브 몽땅' 은 샹송 가수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면서 영화 쪽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어두운 별, 1946>을 통해 처음 연기를 시작한 그는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 1946)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영화는 완벽하게 실패했고, 잡지 ‘시네몽드’로부터 ‘올해 최악의 연기자는
'이브 몽땅’ 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비록 영화는 실패했지만 그가 영화 속에서
부른 주제가 "고엽"(Les Feuilles Mortes: Autumn Leaves)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가수로 인기를 얻은 이후에도 '파리'가 아닌 '생 폴 드방스'에서 하숙을 했는데,
이 시절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 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와는 1951년 결혼에 이르렀다.
1953년 '이브 몽땅' 은 ‘프랑스의 히치콕’이라 불리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1953)에 출연하여 '니트로글리세린'을 운반
하는 트럭운전수 역(役)을 맡아 배우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공포의 보수>는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배우 이력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1959년 미국의 초청을 받은 '이브 몽땅' 은 '시몬느 시뇨레' 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언론과 할리우드는 그를 환영했고, 20세기폭스사는 <Let's Make Love, 1960>의
출연을 제의했다. 이 영화는 뉴욕의 억만장자 ‘클레이몽’이 자신을 풍자하는 내용의
공연을 하는 극장을 찾아가 만나는 여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주인공 역할은 할리우드의 섹스 심벌 '마릴린 몬로' 가 맡았다. '이브'와 '먼로'는 실제
사랑에 빠졌지만, 그들의 연인(戀人)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브 몽땅' 은 반전운동, 인권운동, 핵실험 반대 등 다양한 방면의 활동을 보여주면서
여러 편의 정치영화에도 출연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영화를 통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전쟁은 끝났다>(La guerre
est finie, 1966)와 <제트>(Z, 1969), <고백>(L’aveu, 1970), <계엄령>(État
de siège, 1972) 등의 영화가 이런 경향을 띈 작품들이다. <전쟁은 끝났다>에서
그는 스페인 전쟁에 의혹을 품은 좌파 혁명가 ‘디에고’ 역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계속 의문을 품으면서도 이상에 충실한 '디에고'가 자신의 정신과 잘 부합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브 몽땅' 은 이 영화를 통해 평론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1970년 '이브 몽땅' 은 <암흑가의 세 사람>(Le cercle rouge)에 출연한다. 이 영화
에서 그는 전직 경찰 저격수로 일의 압박감 때문에 일을 그만두지만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는 ‘얀센’ 역을 맡아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 '알랭 들롱' 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다.
이어서 <세자르와 로잘리1972>에서 여배우 'Romy Schneider'와 동반출연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이기적이고 속물스럽지만 사실은 너무나 순진한 ‘세자르’ 역으로
분했다. 세자르는 '로미 슈나이더'가 연기한 ‘로잘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인물로 '이브 몽땅' 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1986년 60대에 접어든 '이브 몽땅' 은 끌로드 베리(Claude Berri) 감독 연출의
<마농의 샘>(Jean de Florette, 1986), <마농의 샘 2>(Manon des sources, 1986)에
연이어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1920년대 초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3대에
걸친 비극적인 운명의 이야기를 다룬 대서사시였다. 10년에 걸친 세월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서 그는 '이기적인 포도농장주 역할'을 연기해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선보인다.
'이브 몽땅' 은 배우 겸 가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배우로서 그는
'Jean- Luc Godard'와 'Alain Resnais'와 같은 누벨바그 세대들 뿐 아니라
장-피에르 멜빌, 코스타 가브라스, 끌로드 소떼 등 다양한 개성을 지닌 감독들과
협업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진중하고 중후한 그의 풍모는 정치영화와 멜로
드라마에 어울리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1985년 34년을 함께 했던 아내 '시몬느 시뇨레' 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는 1987년 '카롤 아미엘(Carole Amiel)' 과 결혼하여 아들 '발랑탱(Valentin)' 을
낳았다.
'장-자크 베넥스' 감독의 <코끼리의 섬>(IP5: L'ile Aux Pachydermes)을 촬영 중
이던, 그는 1991년 11월 9일 프랑스 샹리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다음날 일흔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날 '이브 몽땅'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프랑스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은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추모방송을 내보냈으며, '미테랑 대통령' 을
비롯한 정치, 사회, 문화계 인사들이 그에게 헌사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