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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지선 - 태학의 이념
지어지선은 명명덕 신민과 함께 대학의 강령입니다. 명명덕 신민은 하위조목이 있지만 지어지선은 하위조목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어지선이 명명덕 신민외의 다른 일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어지선은 명명덕 신민의 다른 이름입니다. 명명덕 내에 지어지선은 이미 있는 것이고 이미 있는 이것을 따로 드러낸 것이 지어지선입니다. 이미 있는 그것은 명명덕의 표적에 해당하는 것으로 中입니다. 情無不中(정무불중)은 수신의 정의인데 이 中이 바로 지선이며 대학공부의 표적입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대학이므로 지어지선은 이념 강령이 됩니다. 이념부라고 이름 지었지만 나머지 강령 조목과 따로 있는 부분은 아니고 하나의 대학에서 그러한 이념을 구분하여 말할 뿐입니다. 지어지선을 구체화한 것이 명명덕 신민입니다. 1. 至善-事理當然之極(사리로 보아 지극히 당연함) 1.1. 事理와 物理 物理를 말하는 차원은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차원은 천리를 眞으로 봅니다.수학, 순수과학, 평등 등의 이념이 시간과 공간을 고려하지 않고 지배하는 차원입니다. 반면 事理의 차원은 천리를 善의 근원으로 보는 차원입니다. 실용 또는 응용과학, 차별 등의 현실이 지배하는 차원입니다. 물리의 차원에는 진위만 따지기 때문에 눈물이 없지만, 사리의 차원에서는 시비가 있습니다. 똑 같은 죽음이지만 물리로는 당연한 것(眞)이고 사리로 보면 불선입니다. 물리의 차원에서는 평등이 眞입니다. 그러나 사리의 차원에서는 그것이 불선입니다. 현실적으로 평등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와 남을 차별해야 하고 가족과 남을 차별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차별해야하고, 아이와 어른을 차별해야 합니다. 임금과 신하를 차별해야 합니다. 가진자와 없는 자를 차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별은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善입니다. 당연을 거스르면 불선입니다. 1.2. 당연의 善과 당연의 極인 至善 時空이라는 것을 제약으로 보든 덕이 되는 무엇으로 보든, 사리의 차원은 시공의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당연' 역시 시공의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 이 상황에서 마땅한 것, 그것이 당연입니다. 이 당연이 곧 善입니다. 당연함의 경지가 지극할 경우 그것이 지선입니다. 따라서 지선은 절대선이 아닙니다. 이금 여기라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상대선입니다. 지금 여기는 家 國 天下입니다. 1.3. 지선은 中 지선이 이러하다면 中이 아니고는 이러함을 대체할 말이 없는 것 같고, 그것이 中이 아니라면 中이 될 별도의 무엇이 없어 보입니다. 中은 지선의 다른 이름으로서 시공의 善의 이름입니다. 中은 家 國 天下라는 시공의 상황을 전제로 한 시공 善의 극치를 으름한 것입니다. 당연함의 극치는 과불급이 없는 경지입니다. 2. 止는 執과 동의어 止는 '머무를 止'라고 하기도 하고 '그칠 止'라고 하기도 합니다. 지선이 中이라고 이해하는 면에서 '그칠 止'라는 번역도 의미 있습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그 지점에서 '그친다'고 하면 中의 의미를 지닌 번역이 됩니다. 그냥 지극한 善이라고 하여 지극한 곳을 염두에 두면 머문다는 번역이 더 의미 있게 됩니다.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止는 執의 뜻입니다. 執으로 해석하려는 의도는 允執厥中(윤집궐중)과 지어지선이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止와 執은 다 같은 소리를 가진 말입니다. 그 소리의 기본은 손으로 '쥐다'의 '쥐'입니다. 이러한 예가 수 없이 많지만 한 가지만 듭니다. 據於德(거어덕. 논어 술이 제1장)의 據(거) 역시 執의 뜻입니다. 집주에서는 據於德에 '덕을 잡고 지킨다(執守집수)'는 주를 달고 있습니다. 據가 執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據 역시 '쥐' 계통의 소리인 것입니다. 이 설명 방식은 한자에 담겨 있는 우리말을 찾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止가 執으로 쓰이고 있으니 이 방식의 설명과 합치합니다. 3. 지어지선은 윤집궐중 지선이 中이고 止가 執이라면 지어지선과 윤집궐중은 동의어입니다. 요임금은 윤집궐중을 순임금에게 과제로 전하였고, 순임금은 이 과제를 더 구체화하여 인심도심의 精一(정일)을 추가하였습니다. 대학은 이를 더욱 구체화 체계화하여 인심도심 정일을 명명덕으로 대치하고 그 실제를 신민으로 들었으며 윤집궐중을 지어지선으로 대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명덕 신민을 격물치지/ 성의/ 정심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로 조목화하였습니다. 이에, 유학의 구체적이고 상세함의 큰 틀이 환히 드러납니다.
요임금은 처음에 윤집궐중을 순임금에게 주문하였습니다. 순임금은, 여기에다가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을 더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지어지선 명명덕 신민을 비교하면 지어지선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드러납니다.
대학은 지어지선 공부를 표방합니다. 이러한 표방을 구체화하면, 명명덕 신민이라는 강령이 나옵니다. 이 강령을 한 번 더 구체화하면, 명명덕이라는 원론은 知와 行으로 요약하는 격물치지와 정심수신이 되고, 신민은 제가 치국 평천하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공부의 대강과 조목이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일을 경영하여야 합니다. 성의가 이것입니다. 성의는 대학이라는 프로그램을 돌리는 드라이버입니다. 대학을 경영하는 주체입니다. 성의가 아니면 대학은 돌아 가지 않습니다. 성의는 조목의 하나로서 취급되어 왔지만 대학의 단순한 부품이 아닙니다. 대학의 전체를 포함하는 조목이므로 사실상 조목일 수 없는데 조목이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조목을 천자적 조목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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