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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 복 많이 받은 음식점 주인
1. 맨발의 청춘
2. 맨발로 뛰는 탤런트 사장
3. 손님 한 분 한 분이 고맙다
4. 불타는 카리스마 안로
5. 음식점 부업으로 성공한 탤런트!?
6. 장사는 아무나 하나?
7. 장사꾼 체질 따로 있다
8. 손님 끊이지 않는 비결
9. 죽기 살기로 해야 된다
10. 내가 할 건 고깃집밖에 없었다!!
11. 일하는 즐거움, 돈 버는 재미
2장 / 고단한 삶이 기회였다
1. 불안해서 버티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2. 졸지에 가장 신세가 된 대학생
3.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탤런트
4. 불안정한 엑스트라 생활
5. 드디어 떴다!
6. 부업 전선에 나서다
7. 김재벌 소리 들으면서 속으론 곯고 있었다
8. 편하게 살고 싶어 사업 모두 접었는데...
9. 주식으로 돈 날린 밤무대의 스타
10. 내 인생의 IMF
3장 / 김종결의 창업 성공 비결 & 어드바이스 (세부 제목은 3장 원고 앞에 따로 )
4장 / 홀로, 더불어, 가는 인생
1.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인연들
2. 밖에선 착한 남자, 집에선 독불장군
3. 배부른 데 또 뭐가 먹고 싶어?
4. ‘짠돌이’ 남편, ‘구두쇠’ 아빠
5. 아비 닮아 샛길로 빠진 아들
6. 부녀간의 ‘살벌한’ 대화
7. 어머님이 베풀어주신 사랑
8. 40세에 접은 톱스타의 꿈, 그러나...
프롤로그 / “성공하는 비결 좀 알려주시오!”
“요즘 다들 좀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명퇴 당하는 사람도 많고 구조 조정이니 뭐니 해서 직장인은 불안해하지, 대학을 나와도 취직 할 데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구요. 그래서 창업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만만한 게 먹는 장사인지 음식점 생각을 많이들 하는데요?”
인터뷰를 위해 만난 기자는 얘기를 곧장 음식점 창업 쪽으로 풀어갔다. 아마도 누군가 내 얼굴은 못 보고 얘기만 들었다면 날 연기자가 아니라 창업 컨설턴트로 알았을 게다. 1999년에 개그맨 심형래, 탤런트 김종결이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는 기사가 나가고 나서 며칠 후에 이루어진 자리였다.
내가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건 93년도에 여의도에 차린 음식점 ‘주신정’이 장사가 제법 잘 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을 게다. 음식점이고 다른 업종이건 간에 가게가 하나둘씩 문을 닫아야 했던 IMF 때도 우리 집은 거뜬하게 살아남았다. 그래서 ‘저 집이 저렇게 잘되는 걸 보면 뭐가 있긴 있다’ 하면서 사람들이 관심 갖고 보게 됐고. 그러면서 기업체니 창업 컨설팅 현장 거기다 대학교까지 가서 소위 ‘친절 강연’이란 걸 하면서 인기 강사로 뜨게 됐다. 굳이 과거 일까지 들쳐 내자면, 화재로 거의 전 재산을 날리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주신정을 차렸으니까, 소위 ‘위기를 기회로!’ 캐치프레이즈와 맞아떨어졌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김선생님, 창업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장사로 성공하는지 그 비결 좀 들려주십시오.”
기자는 마이크 녹음 버튼을 눌렀다.
"특별한 비결이 있나? 죽기 살기로 하면 되지."
기자는 내 대답이 성이 차지가 않는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 정도 대답으론 안 되지요’ 하는 표정. 하지만 그거말고 또 무슨 얘기가 필요해? 죽기 살기로 매달리니까 되던데!
"질문을 좀 구체적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음식점으로 성공한 업주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적절한 대답을 생각해봤다. 좀 구체적이면서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이 뭐 없을까?
“쉬운 길만을 보지 말라. 어려운 걸 선택해서 하는 게 좋을 듯 싶다. 예를 들자면 커피숍을 하는 것보단 해장국집을 하는 게 낫다. 투자하고 노력하고 고생도 하고.... 본인이 힘들여서 노력해야만 땀의 대가를 바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장의 이익에만 너무 연연해하는 것도 좋지 않다. 베푸는 게 남는 거다. 열심히만 한다면 안 되는 일이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당연한 예기만 늘어놓았던 거 같다.
* * *
절망이라 생각했을 때, 그때가 바로 희망을 위한 신호등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십 중반에 들어서면서였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으세요, 그래? 드라마 끊이지 않고 계속 하시지, 주신정에서 돈 착착 들어오지’ 하면서 부러워한다. 하지만 이 나이가 돼서도 톱 탤런트에 대한 미련은 포기가 안 된다. 돈에 대해서도 마음을 탁 놓은 게 불과 4,5년 전이라면?
그동안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권유는 여러 번 받았었다. 이번에도 꽤 망설였다. 우리 나이대 남자들 고생하면서 살아온 얘기야 거기서 거기고 ‘탤런트 김종결이가 음식점해서 엄청 벌었다’는 식이라면 먹고사는 게 고달파서 마음이 울적한 가장들한테는, 또 앞날이 불안해서 어깨가 처지고 마음도 위축된 직장인들한테는 ‘남의 떡’ 얘기가 아닌가. 그럼에도 용기를 냈다.
간혹 인터뷰를 통해 소위 ‘김종결 음식점 성공 비결’이란 걸 밝히긴 했지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시간에 쫓겨서 또 지면상의 제한 때문에, 음식점 창업 초보자들이 정말 알고 싶어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얘기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사해서 돈 좀 벌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정이야 내가 잘 알지 않는가? 음식점 차려서 먹고살아야겠다고 열심히 창업과 관련된 책도 사고 여기저기 가게도 알아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마음 혹은 처지 또한 내가 주신정을 시작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지 않겠는가?
연기와 장사, 열심히 뛰다보니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게 되었다. 흔히들 소위 ‘성공 드라마’에는 시련과 절망이 기본 메뉴처럼 등장하는데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그 모든 얘기를 풀어보자니 개인적인 욕심이 앞선다. 지지리 고생한 얘기도, 우리 가족 아옹다옹하며 살아가는 얘기도 많이 쓰고 싶다. 그동안 나와 인연을 맺었던 종업원들, 방송국 사람들, 우리 가게 단골손님들,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사람들, 일일이 챙겨서 글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 정신적인 주업인 탤런트 생활 35년도 풀어서 정리하고 싶다.
허나, 내 귓속을 맴도는 말. ‘음식점 장사해서 성공하는 비결 좀 알려주시오!’ 기자들한테서, 사람들한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그래서 가능한, 지금 가게까지 해서 20년 가까이 장사해오면서 터득한 노하우를 중심으로 장사와 관련된 실질적인 얘기를 많이 담으려고 했다. ‘죽기 살기’로 하되, 과연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1장 / 복 많이 받은 음식점 주인
1. 맨발의 청춘
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길었다. 워낙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인지라, 거기다 나이 오십 끝줄에 들어서서 그런지 여름을 나는 게 예전 같지가 않았다.
“무슨 남자가 샤워를 하루에 세 번씩 해! 어이구, 징그러워, 혼자 깔끔 떤다니까!”
아내는 기겁하면서 날 결벽증으로 몰고 갔지만, 저도 가게에 나와서 나처럼 뛰어보면 샤워 세 번 갖고는 턱도 없었을 게다.
요즘은 눈이 떠지는 건 아침 8시에서 9시. 헌데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까지 침대에서 뒹구는 시간이 5분, 7분, 10분..., 엿가락처럼 술술 늘어나더니 이젠 한 시간은 부스럭거려야 한다. 새벽 세 시까지 깨어 있는 습성을 고치던가 해야지, 몸이 무거워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어제만 해도 일본에 있는 딸한테 메일을 보내고는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어야 하는데, 괜히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겠답시고 씨름하면서 새벽까지 피워댄 담배가 화근일 터다. 드라마 끝나면 푹 쉬어야지 하고 늘 마음은 먹으면서도 막상 방송이 없으면 뭐라도 하나 배워야지 직성이 풀리는 체질은 또 어떻고?
다행인지 어쩐지, 작년 6월에 <여인천하> 녹화가 끝나고 난 이후 한동안은 새로 들어간 프로가 없었다. 그래서 작년 여름엔 가게로, 방송국으로, 야외 세트장으로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고 그나마 가게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드라마까지 해야 했다면 비지땀 꽤나 줄줄 흘렸을 게다. 그래도 한가하게 쉴 틈이 없는 건 매한가지. 드라마 때문에 가게 비운다는 핑계거리도 없으니 죽으나 사나 가게엔 나가야 했다.
아내는 잘도 자고 있다. 나보단 젊어서 그런가? 잘 만큼은 자야 일어나겠다는 심사인데 오늘따라 괜히 얄밉다. 그래서 옆구리라도 툭 쳐볼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는다. 그래, 자라, 자, 푹~.
아내 또래 여자들은 초저녁잠이 많다고들 하지 않나. 거의 매일같이 밤 11시를 훌쩍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남편하고 살자니 저도 피곤하겠지. 거기다 밥장사하면서도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덩그러니 큰집에서 혼자 꾸벅꾸벅 졸면서 기다렸다가 밥상 차리는 것도 고달프긴 할 게다. 날은 훤한데도 아직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아내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야, 김종결, 잘 자고 있는 마누라가 안쓰럽질 않나, 몸이 예전 같지가 않네 하면서 아침부터 신파 드라마 찍고 있구나. 이쯤해서 스톱하고 일어나자고.
주방으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는 커피를 탄다. 아내가 타주는 아침 커피를 포기한 지는 오래다. 처량하다던가 하는 마음 같은 건 없다. 아내가 알면 혹 서운해할지도 모르지만, 내 손으로 직접 타서 혼자 마시는 커피 맛이 꽤 근사하다. 탤런트라는 게 워낙 얼굴 드러내놓고 사는 직업인 데다가, 또 가게에서 하루 평균 손님 7,8백 명을 받으려면 솔직히 사람에 치여 산다고나 할까. 잠시잠깐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참으로 귀하다.
커피를 들고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간다. 작년만 해도 아파트 단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담배를 빠는 맛이 꽤나 쏠쏠했었는데, 담배를 끊은 후부턴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공기 맛을 만끽하고 있다. 한동안 바람이 꽤나 매서웠는데 많이 사그라진 걸 보면 겨울도 곧 끝날 것 같다. 아침부터 신파 드라마 찍은 것도 겨울바람에 나도 모르게 얼어붙은 마음이 풀어지면서인 듯도 싶다.
아이고, 그렇다 해도 난 늘 여름이다. 낮에, 또 저녁에 가게에서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한겨울에도 등줄기에선 물이 줄줄 흐른다. 이 홀 저 홀로, 마루로, 카운터로, 주방으로 후닥닥 움직이려면 신발 챙겨 신고 벗고 할 겨를도 없다. 티셔츠에 청바지 입고 그렇게 맨발로 뛰어다닌다.
“희락당 대감, 아침 드슈!”
허, 오늘따라 웬일? 주방 쪽에서 나는 아내 목소리가 유난히 사분사분하다. 보통은 일하는 아줌마가 와서 아침 차려놓으면 식탁에 내가 먼저 앉고 나서야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는 사람인데. 주방에 가서 보니 머리 매무새도 정갈하다.
“야, 너 왜 그래? 평상시대로 해.”
속으론 좋으면서도 괜히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뭐가?”
아내 눈초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샐쭉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피곤한 거 같아서 기분 좀 북돋아주려고 했더니만, 혼자 잘 났어.”
아차! 아내 얼굴은 그야 말로 똥 씹어 먹은 표정이다. 쯧쯧, 무조건 감격해 줬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왕 내친걸음. 아옹다옹하며 사는 게 부부 아닌가. 결혼 생활 30년 하면서 아내랑 티격태격하는 맛에 인이 박힌 건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아들 장가 가 따로 살고 딸까지 외국에 나가서 단 둘이 사는데, 이런 재미도 없으면 너무 늙은이들 같잖아? 그래, 뭘 갖고 시비를 걸까? 호칭?
“그리고 말이야, 김안로 죽은 지 얼만데 아직도 희락당 대감이냐?”
말을 해놓고 봐도 괜한 생트집이다. <여인천하> 출연하고부턴 아내프는 자기 기분에 따라 ‘희락당‘ ‘어이, 김안로!, ‘안로야!’ 하고 부르고 있으니까. 이 정도 트집에 꼬리를 내릴 아내도 아니다.
“피, 그럼 상감 한 번 해. 상감 마마라고 불러줄게.”
“이 여자가 아침부터 속을 긁네, 긁어. 그래, 나 상감 못해봤다. 어쩔래?”
일부러 씩씩거리면서 맞장구를 쳐줬지만 가슴 한쪽이 시리다. 연기자 생활 35년이고, 그 숱한 사극에 많이도 출연했는데 아직 임금은 못 해봤으니까. 하지만 마누라 앞에서 기죽을 순 없는 노릇. 이럴 땐 빙그레 웃으면서 농담조로 받아치는 게 상책이다.
“여보시오, 마누라. 내가 이 나이에 젊은 상감 할 순 없고, 그렇다고 명색이 내가 아줌마들한텐 젊은 오빠요, 가게에선 맨발의 청춘인데 늙수그레한 상감 할 수도 없잖아?”
아내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처음엔 ‘지가 진짜 청춘인 줄 아나 보지?’ 하면서 기가 막혀 하는 표정이었는데, 그건 잠시, 애처롭다는 저 표정은 또 뭔가? 이 나이에 청춘 소리 들어가며 음식점에서 맨발로 뛰는 늙은 남편이 불쌍하다는 표정 아니야? 야, 경희야, 괜찮아, 나 아직 괜찮아. 아이고, 마누라 애처로워하는 표정 보는 건 정말 싫다. 이럴 땐 빨리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목소리 톤은 가능한 경쾌하게.
“경희 씨, 그끄저껜가 입은 빨간 색 티셔츠 빨아놨지?”
2. 맨발로 뛰는 탤런트 사장
방송 일이 없으면 오전 나절엔 집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뭉그적거리면서 텔레비전도 보고 마냥 여유를 부린다. 마누라한테 가까이 사는 아들네는 별 탈 없는지 보고(?)도 듣는다. 아들애도 거짓말 좀 보태서 코앞에서 장사를 하는데 업종이 달라서 바쁜 시간대도 달라서 얼굴 보기가 힘들다. 성경 말씀도 한 구절씩 읽는다. 의무감으로. 내가 다니는 남서울 침례교회 목사님이 순서대로 주는 책이 있어서 날짜에 맞춰서 읽는 건데 건너뛰면 벌받을 거 같은 마음에. 그러는 와중에도 가게에 전화해서 오늘은 점심 예약이 몇 개냐 들어왔는지 체크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놓여서 또 여유를 부리고. 그러다 시간이 임박해서야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아파트에서 가게까진 걸어서 5,6분 거리. 조금 일찍 집을 나와서 걸어가면 운동도 되고 몸에도 좋으련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여름이야 땀흘리기 싫어서 그렇다 쳐도, 가을이 깊어지면 길가에 노란 은행잎이 잔뜩 떨어져 있어 꽤 운치가 있는데도 감상에 젖을 새가 없다. 그저 가게 가느라 바쁘다. 그 짧은 거리를 차를 타고 가면서도 빨리 가게에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오늘도 20분 빨리 가야지 하고 다짐했는데도 12시쯤에야 가게에 도착했다.
여의도 증권가 한복판에 있는 대영빌딩.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나면 눈은 벌써 지하에 있는 우리 집 가게로 내려가는 손님들 얼굴을 찾아 빛이 난다.
“어서들 오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을 보면 무조건 반갑다. 손도 덥석 잡고 하는 일은 잘 되는지, 건강한지, 안부라도 묻고 싶지만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 웃음으로만 대신하고 내달리듯 계단을 내려간다. 가게 안에 들어서면 난 그야 말로 ‘날쌘 돌이’가 된다.
“사장님 나오셨어요?”
“그래... 야, 저기 테이블 빨리 치우고..... 어서 오십시오.... 네, 네, 많이 드십시오...”
2백 평 가게 안은 자리가 이미 반은 찼다. 종업원들한테 이것저것 지시하랴, 밀어닥치는 손님들한테 일일이 인사하랴, 입술엔 침이 마른다. 가장 바쁜 시간대는 12시 30분부터 1시. 40여 종업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도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난 음식점은 잔칫집 분위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먹는 잔칫집. 잔칫집에 온 손님들한테 불친절할 순 없는 노릇.
손님이 일단 테이블에 앉으면 물 가져가야지, 주문 받아야지, 반찬 나가지, 기본 식사 나가지, 커피 나가지, 떨어진 반찬 한 번 더 가져가면 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 테이블에 평균 대여섯 번을 왕복해야 한다. 테이블이 총 91개. 테이블이 한 번만 돌아가도 점심 손님만 3백 명이다.
주방 인력 빼고 30여 명이 홀에 달라붙어도 식사 끝난 테이블 치울 손이 미처 모자랄 때가 있다. 손님들이 불평하기에 앞서 내가 성질이 급해서 잠시라도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카운터에서 손님 받다가 잽싸게 주방 쪽으로 튀어가서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가서 빈 그릇을 주워담는다. 반찬 떨어진 데 없나 살피면서 저기다 싶으면 종업원 부르느니 주방에 빈 그릇들 갖다주고는 반찬을 챙겨간다.
몇 번이고 마루에 앉은 손님들 신발을 정리하고, 테이블 돌아다니며 “많이 드십시오” 인사 챙기고. 한 시간 넘게 뛰어다니면 초가을인데도 이마에, 등에 땀이 주룩주룩 흐른다. 일요일 같은 경우는 너무 바빠서, 일하는 사람이 딸리게 나올 경우, 정말 진땀이 쪽쪽 나면서 뛰어다닌다. 손님은 새로 들어와 있는데, 종업원은 모자라 그릇은 못 치우고 있지...
가게를 연중무휴로 돌려버리니까, 종업원은 돌아가면서 한 달에 세 번씩 쉬는데 대개 일요일에 쉬겠다고 하고 일요일은 파출부도 잘 안 오고 해서 손이 달린다. 일요일엔 나도 좀 푹 쉬고 싶지만 내 얼굴 보러 오는 손님들 생각에, 또 손이 달린다는 걸 아니까 교회에 가서 아침 11시 예배보고는 곧장 가게로 온다. 12시 반쯤에 와서는 그야말로 펄펄 뛰어다닌다.
지금은 그래도 인원이 넉넉하니까 괜찮지만 초기엔 정말 진땀 많이 흘렸다. 종업원들도 손발이 안 맞고 서툴고. 아예 맨발로 왔다 갔다 했다. ‘맨발의 청춘’이란 별명은 그때 붙은 거다.
“가게에 목숨 걸었냐? 이젠 너 없어도 잘 굴러가는데 왜 이리 죽자살자 가게 나가?”
주변에선 안타까운지 좀 쉬엄쉬엄 하란다. 하지만 쉬엄쉬엄 할 수가 없다. 성질이 철저한 때문도 있지만, 이걸 놓치면 다 놓친다는 생각에서 기를 쓰고 붙들고 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 내 인생에선 연기를 계속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신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니까.
그리고 그들도 사장 해보면 그런 말 쉽게 못할 거다. 한 달만 내가 안나오면 가게는 비리비리해 질 텐데... 종업원들이 다 손발을 맞춰서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주인이 없는 가게는 잘될 수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얼굴이 팔려서, 내 얼굴보고 오는 손님들이 많다고 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만일 경영만 하는 사람은, 위에 사무실 차려놓고 매장은 점장(店長)들이 다 알아서 한다고 하지만, 그분들 경우는 한 20~30퍼센트는 자기가 먹을 거 포기한 상태라고 봐야한다. 지배인이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사장 같진 않다. 자기랑 똑같은 사람은 없으니까....
3. 손님 한 분 한 분이 고맙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음식점 문을 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주신정은 10년째 연중 무휴를 고수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우리 집 음식 먹으러 온 손님이 한 분이라도 헛걸음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하루라도 문을 닫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을 들자면, 지배인 이하 40여 명의 종업원이 한 몸이 되어 움직여준 덕이고.
그래서 여의도 증권타운 식당가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인적이 뜸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데 우리 집은 늘 잔칫집 분위기다. 아예 문을 열지 않는 집들이 많아 그 덕도 보는 셈.
잔칫집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손님이 있건 없건 음식점은 늘 그 분위기여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썰렁한 데서 먹는 게 맛이 있나? 그래서 종업원들과 함께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허나, 믿을 수 있는 종업원들이 알아서들 착착 일을 잘해준다고 해도, 맘 턱 놓고 가게를 비울 수 없는 게 음식점 사장이란 자리다. 더군다나 내 얼굴 보려고 오시는 손님들도 있으니 촬영이 있는 날은 어쩔 수 없지만 가급적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탤런트 간판 내걸고 장사하니까 얼굴 팔린 덕에 돈벌기 편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솔직히 얼굴 팔려서 더 뛴다.
우리 집 고객은 평일 점심하고 저녁엔 아무래도 주변에 있는 증권 맨, 탤런트, 방송국 특히 가까이 있는 MBC 사람들이 많다. 주말에는 가족동반, 친목계 등으로 오는 중년이 많고. 처음 가게문을 열었을 땐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다. PD들이며 방송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팔아줬고, 동료 탤런트들도 자주 와줘서 손님들을 끌어줬다.
난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은 한 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음식 맛에 반해서, 친절한 서비스가 흡족해서 계속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니 그게 고마워서 더 열심히 뛰었다. 내가 종업원 이상으로 뛰니까 이런 내 모습에 감동 받았다면서 우리 집 아니면 회식이 안 된다는 사장님도 계시니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개중엔 고기 맛 갖고 트집잡는 손님, 서비스만 몇 접시째 원하는 손님, 종업원한테 함부로 대하는 손님, 우리 집 흠잡을 데 없나 하고 오는 손님도 있다. 그래도 난 손님 기분을 맞춰주려고 노력한다. 우리 집 이름은 ‘주식회사 신정’을 줄인 말이기도 하지만, ‘손님이 주신 정(情)’이란 의미도 있다. 그 ‘주신 정’이 고마운데, 좀 빡빡한 손님이어도 얼마든지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할 수 있다.
그러면 또 겸손한 척 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있다. “저거, 탤런트니까 연기 아니야?” 하면서. 주업이 탤런트이니 직업 탓이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아무리 명연기자라도 연기를 그렇게 오래, 한결같이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비웠기 때문인지 어쩐지, 난 매장에만 들어오면 건방진 마음이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집(home)에선 독불장군이어도, 종업원들한텐 좀 깐깐하게 굴어도, 손님한텐 무조건 저자세다. 저절로. 어떻게 시작한 가게인가? 나이 오십 넘어 모든 걸 날리고 마지막이란 생각에 시작한 거 아닌가. 우리 식구 밥 먹여주는 사람이 바로 우리 집(주신정) 손님들이다. 그러니 무조건 고맙고, 고맙다.
그럼에도, 가끔은 솔직히 피곤할 때도 있다. 사극에 출연할 땐 민속촌이니 경복궁 등지에서 야외 촬영을 많이 하는데, 그땐 주신정 지배인인 길영이가 내 차 운전도 하면서 함께 움직인다. 촬영장에선 내 핸드폰을 길영이가 갖고 있는데, 한 장면 찍고 나서 다음 장면 찍기 전에 쉴 때면 손님 전화라며 핸드폰을 바꿔준다. 촬영하는 도중에 걸려오는 핸드폰은 못 받아도 쉬고 있을 땐 안 받을 수가 없다.
“납니다. 이XX. 나 오늘 여러 명 같이 왔는데 김사장은 왜 없소? 거기 가서 녹화하고 있소? 빨리 와요, 와.”
정말 이럴 땐 답답하다. 가게 종업원한테 내가 야외 촬영 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을 터인데도 여기까지 전화를 할 건 또 뭐 있나? 그래도 손님인데 짜증을 낼 수는 없다. 방송 돌아가는 사정은 전혀 모르니까 아무 때나 불러대도 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또 김종결하고 잘 안다고 하면서 사람들 데려 왔을 터이니 좀 폼도 잡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게다. 오랜만에 왔는데 내가 없으니까 서운하기도 한 거고. 그러니 마른침 꿀꺽 삼키고 죄송하다고, 방송 때문에 가게엔 저녁 늦게나 갈 거 같다고 연신 미안해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어쨌거나, 심호흡 크게 한번하고 나서 생각하면 그래도 고마운 일이다.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날 찾아주는 사람, 우리 집을 잊지 않고 찾아준 분이지 않은가. 촬영장으로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것도 다 나에 대한 애정 표현이다. 별 손님 다 있는데 어찌 보면 괜한 ‘생트집’도, 싫은 소리 한 마디 내뱉는 것도 애정표현인 줄도 모른다. 조금 잘못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손님들을 겪다보면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손님한테는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대한다면서, 그 고마운 얼굴을 몇이나 기억해낼 수 있는가? 손님이 자꾸 바뀐다고 해도 얼굴을 아는 사람은 20,30퍼센트 정도다. 워낙 손님이 너무 많아서 큰 인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은, 간혹 가다 찾아주시는 분은 얼굴을 잘 모른다.
손님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한 6개월을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왔는데도 내가 자기 얼굴을 하도 몰라보니까 언제까지 그럴 건가 한 번 두고보자는 심산으로 줄기차게 왔다는. 지금은 그 손님하고 ‘형, 동생’ 하지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미안했다. 그 이후 손님 얼굴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인사만 해도 대충하는 식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몇 시간 내에 다 챙기려면 솔직히 힘들다. 처음엔 손님한테 하는 인사말도 다양했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뭐 더 갖다드릴까요?’ 등등. 그런데 오래하다 보니 이젠 레퍼토리가 정해졌다. ‘많이 드십시오’.
지금은 하루에 그 말만 한 7,8백 번은 하는 거 같다. 언젠가는 교회에서 예배 끝나고 교우들하고 같이 점심을 먹는데, 교우한테 인사한다는 게 "많이 드십시오"였다. 어떡하다 처음 만난 사람하고 인사하는 자리에서도 불쑥 튀어나온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하다보니 완전히 입에 배어 버렸다. 부지불식간에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 행여 건성으로 대충 습관처럼 하는 말로 듣고 가신 분은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4. 불타는 카리스마 안로
SBS TV 대하사극 <여인천하> 이후 오랜만에 방송을 쉬고 있다. 이렇게 오래 쉬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인지, 주신정을 시작하면서도 계속 한 프로씩은 출연을 해왔다. 역이 없어서 3개월 이상 방송을 쉰 적이 없었으니까.
<여인천하>에서 희락당 김안로 역을 맡았던 건 나로선 행운이다. 최고 시청률 55.3퍼센트를 기록했고 평균 시청률 30퍼센트 대를 유지하면서 1년 반에 걸쳐 150회 나가면서 롱런을 했다. 막을 내린 건 7월 말. 권력욕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던 인간 김안로는 처참한 몰골로 사약을 마시고 한 달 먼저 브라운관에서 사라졌지만.
효혜 공주의 시아버지로 세자를 보필한다는 명분 하에 기세 등등해서 불타는 권세욕에 일생을 바친 인물 김안로. 결국 야망의 화신인 정난정에 의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는데, 그렇게까지 악해졌으니 인간의 급수를 따진다면 최하다. 허나, 그 불타는 권력욕은 이해는 충분히 간다.
천성 자체가 악하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악하게 태어난다 해도 선한 얘기 듣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 보면서 자라면 선해지는 법. 하지만 정난정을 비롯해서 김안로 주변 사람들은 다들 권력에 눈이 멀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렇게 살면 안되겠지만, 우리의 본성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김안로’가 들어 있는 거 같다.
나 역시 왜 욕심이 없겠는가? 있는데 도덕적인 관념 때문에 누르면서 사는 것뿐.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끝까지 치닫다가 결국은 그 욕심에 먹혀버렸으니 김안로는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다. 그라고 왜 속으로 울지 않았겠는가? 자기 연민에서건 회한에서건. 눈물을 보임으로 해서 더욱 가증스러워 보일지라도.
김안로를 연기하면서 생각한 게 그도 인간이라는 거였다. 아무리 악인이라 해도 인간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인간의 내면에서 감을 잡아내서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자주 눈물을 내비쳤다. 악인도 눈물이 있다... 눈물을 보인다고 해서 악한 인간이 선한 인간으로 보이진 않지만, 인간이 제대로 보이는 거 같다. 이런 생각을 한 게 오래인지 예전부터 악인 역을 할 때는 눈물을 흘렸다. 사람 찔러 죽일 때도 울면서 찌르고... 내면을 담아놓으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김안로가 사약 받는 대본을 받았을 땐 섭섭했다. 대사가 많아서 힘들기도 했지만 1년 넘게 한 작품이 무사히 끝나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안로가 어떻게 죽을 건지 고민을 많이 했다. 눈을 뜨고 웃고 죽는 걸로 설정했다. 한차례 웃고 나서는 사약을 들이키는 걸로. 미친 듯이 웃다가 눈물을 머금고 울다 웃다가, 목을 움켜잡고 컬컬컬 하다가 죽는 걸로. 끝판에 사약 먹고 힘을 주는 데 너무 힘을 줬는지, 방송을 보면서 나도 놀랐다. 눈이 발개서. 저러다 내가 혈압 올라 죽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어쨌거나, 이런 내 연기가 먹혀 들어간 건지, <여인천하> 인기가 대단해서인지 인터넷에 내 이름으로 카페까지 생겼다. 작년 여름에 인터넷에 들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사실 깜짝 놀랐다. 카페 이름이 ‘불타는 카리스마 안로’. 카페를 소개하는 문구는 ‘여인천하의 김안로, 종결 오빠의 사랑을 키우는 곳’. 도대체 누가 이걸 만들었나 궁금해서 보니까 젊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카페였다. ‘오빠, 파이팅!’, ‘건강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등등, 간지러운 글들도 있고 내 인터뷰 기사랑 주신정 기사도 올라와 있었다.
사이트 개설일을 보니 2002년 03월 28일. <여인천하>에서 김안로가 한참 기쓰고 용쓰면서 설치던 때다. 회원수는 얼마 안되지만 내 팬은 주로 아줌마들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터라 젊은 친구들의 열기(?)에 적잖이 어리둥절해 했다. 무엇보다도 ‘불타는 카리스마 안로’란 타이틀에. 성실하다, 겸손하다, 철저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고 가까운 이들한테는 깐깐하다, 지독하다는 말도 듣지만 카리스마라는 말은...
인간 김안로를 보여주기 위해 눈물에 콧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눈 벌개 지도록 연기한 점을 높이 사준 건가? 그렇다면 고맙다. 젊은 친구들한테도 어필하고 새로운 팬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건 나이 든 연기자에겐 행복한 일이니까.
혹은, 내가 그들의 관심 대상이 된 건, 자기가 좋아하는 거 실컷 하면서 돈도 왕창 벌고 싶은 게 젊은 사람들이 원하는 거여서 인지도 모른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직업 1순위가 연예인이라지 않나. 인기도 얻고 화려하고 돈도 많이 벌고! (모든 연예인이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 난 장사까지 해서 성공했다니까...
5. 음식점 부업으로 성공한 탤런트 !?
<여인천하> 촬영이 중반부에 들어섰을 때쯤 잡지사 여기자한테서 인터뷰를 하자면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김안로 역이 커지고 있었던 터라 내 연기를 한번 뛰어주려나 내심 기대를 했다. 가게랑 촬영장, 방송국을 바쁘게 오가면서 나름대로 기를 쓰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헌데 목소리가 예쁜 여기자는 딴 소리를 했다.
“선생님은 음식점으로 크게 성공하셨잖아요?”
“성공은 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쿠, 또 가게 얘긴가? 아님 부업으로 성공한 연예인 기사? 그런 기사라면 내가 빠지는 적이 없으니까. ‘음식점으로 성공한 연예인 김종결’, 이런 제목으로 나간 기사가 수도 없다. 이젠 이런 인터뷰 제의에 숙달이 됐을 법한데, 이상하게, 아직도, 마음 한쪽이 편하지가 않았다. 명색이 그래도 연기자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저 사람 탤런트잖아!” 하면서 내 얼굴을 알아보는데, 주신정 사장 명함부터 내미는 거 같아서. 그러면서도 서운한 내색은 할 수 없다. 어쨌거나 우리 가게 기사가 나가면 그 기사를 보고 오시는 분도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선생님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셨는데요? 주업인 탤런트, 부업인 음식점. 그 둘을 그렇게 멋지게 해낼 수 있는 비결이랄까, 직업관, 뭐 그런 걸 좀 들으려고 해요.”
비결? 뭐를 하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는 거지... 인터뷰 날짜를 정하고 통화는 끝났다.
두 마리 토끼라... 다섯 마리라고 못 잡을 거 있나? 진정한 프로라면 어디를 가든 최선을 다해서 허점을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니까 좀 잘난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섯 가지 일도 할 수 있다고 난 생각한다. 단, 모든 일을 똑같이 1등으로 할 순 없다. 적당히 욕심을 누르고 포기할 부분은 대담하게 포기하고, 할 수 없는 부분은 과감히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 한다.
가게의 경우, 지배인한테 많은 부분을 일임했다. 다행히도 우리 집은 시스템이 잘 돼 있어 내가 없어도, 지배인까지 없어도, 종업원들이 자기네들끼리 다 알아서 움직이고 한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기까지는 시간도 많이 걸렸고 가게를 비워야 할 땐 불안하기도 했지만 차츰 불안은 가라앉았다.
종업원들을 믿고 맡긴다 해도 밖에 나가 있으면 관심은 늘 가게로 가 있다. 그래서 수시로 전화를 한다. 종업원을 관리하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무슨 일 없었냐, 얼마나 팔았냐가 궁금해서. 드라마 찍는 동안은 잊어버리고 연기에 몰두해도, 약간 쉬는 짬이 나면 가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진득하니 있질 못하고 핸드폰을 누른다. 그래서 방송 일이 많아지면 핸드폰 요금도 덩달아 올라간다.
‘여인천하’는 야외촬영이 많았다. 총 275일을 했다는데, 좋은 작품을 찍으려고 감독 이하 모든 스텝과 연기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내 경우, 초기에는 스케줄이 일주일에 나흘이 잡혔었다. 촬영하고 나서 다음 날 새벽에 더빙을 하는데, 재수가 좋으면 야외 촬영이 일주일에 하루만 있고 하루는 세트 촬영을 하는데 난 대부분 이틀을 야외 촬영을 했다. 대본 연습 날짜도 따로 잡혀 있지, 극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김안로 역이 커지니까 스케줄도 늘어났다.
야외촬영이 잡힌 날은 이동시간이 있어서 하루를 거의 밖에서 보내야 했다. 매시간 가게로 핸드폰을 때리면서. 아침에 모여서 촬영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오후 5시쯤에 끝났는데 서둘러 와도 가게가 한참 바쁜 타임은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나마 재수가 좋은 거다. 식사하고 있는 손님들한테 “많이 드십시오”라고 할 수 있으니. 녹화가 좀 늦게 끝나거나 길이 막히면 가게 정리할 무렵에야 와서 결산만 보고 갔다. 만일 그것도 못하게 되면 카운터로 전화해서 그날 하루 나간 돈하고 들어온 돈을 결산한 내역을 수위실에 맡겨 놓게 하고 집에 가는 길에 들러서 갖고 갔다.
일요일은 밤 8시에 방송국에 모여서 연습을 했는데, 7시에 가게에 나와서 손님 잠깐 맞고 30분 전에 달려가는 식으로 분초를 다퉜다. 대사 외우는 것도 큰 일. 가게에 대본을 갖고 가서 가게 일 보면서 짬짬이 대사를 외웠다. 커닝하는 학생처럼 카운터 옆 바닥에다 대본 깔아놓고 보다가 손님 들어오면 급하게 고개 들고 인사하면서.
95년에 SBS 미니 시리즈 <모래시계> 찍었을 땐 그야말로 고달팠다. 민변호사 역을 맡았었는데, 야외 녹화가 많아서 몇 달 간 다른 스케줄은 잡지 않고 그저 부르면 부르는 대로 나가서 찍었다. 반 이상이 대본이 나와 있는 상태에서 스튜디오 녹화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씬(장면)을 같이 찍었는데 언제 어디로 불려갈지 몰라 늘 대기상태였다. “모래는 경주다” 하면 급하게 대본 외워서 달려가서 찍고 나면 부리나케 올라와서 가게로 직행하고.
방송이 바쁘면 바쁠수록 가게에 나와 있으려고 더욱 애썼다. 방송한답시고 가게 비운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또 방송 때문에 가게에 못 나오니 방송에 빼앗긴 시간을 만회할 욕심으로 가게에 있는 시간만큼은 더 열심히 뛰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도대체 왜 그렇게 죽기살기로 하냐고? 하나만 잘 하려고 해도 피곤한데 골치 아프게 왜 둘씩이냐 붙들고 있냐고? 주업하고 부업하고 분간해가면서 하라고.
하지만 둘 다 주업인 걸 어찌하랴? 67년 동양방송(TBC) 탤런트 4기로 출발했으니 연기자 생활 35년인데 부업으로 해온 음식점 장사만도 20년이 넘는다. 이젠 탤런트가 정신적인 주업이라면 음식점 장사가 실질적인 주업이 되어 버렸다.
일만 계속된다는 보장만 있으면, 또 대사 외우는 스트레스만 없다면 배우처럼 좋은 직업도 없다. 그 좋은 맛에 푹 절어서인지 끝까지 연기자로 살아남아 시청자들 앞에 서고 싶은 소망은 포기가 안 된다.
그렇다고 주신정을 대충대충 할 수는 없다. 이걸 놓치면 다 놓쳐버린다는 생각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까.
그래서 주신정을 하면서 나름대로 찾은 타협책이 방송은 한 프로씩만 한다는 거였다. 두 세 프로를 같이 하게 되면 가게엔 전념할 수가 없겠다 싶어서.
부업으로 한 4년 도자기 가게 할 때는 방송이 없어서 걱정이었지, 어떤 역이든 가리지 않고 많이 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20년도 더 됐는데 여의도 먹자 빌딩에서 처음 고깃집을 할 때만 해도 방송을 우선으로 생각했었다. 가게에 어떤 일이 생겨도 방송 일이 있으면 다 채쳐놓고 나간다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내 나이에 주신정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잘 아니까.
6. 장사는 아무나 하나?
주신정하고 관련된 기사가 신문이며 잡지에 나가고 거기다 방송까지 타면 그 여세로 새로운 손님들이 가게에 많이들 찾아오신다. ‘김종결이가 여의도에서 음식점 해?’ 하고 호기심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고 오시는 것이니 그저 고맙다. 또한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친절한지 한번 가보자’ 하고 오시니 우리 집 맛을 지키기 위해, 친절하게 모시려고 노력한다. 행여 돈 좀 벌었다고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라도 들어가진 않았는지 추스른다. 처음 가게문을 열 때의 겸손함은 잃지 않았는지 점검하면서.
헌데, 간혹 이런 표정으로 우리 가게를 찾는 분도 있다.
‘김종결이 지가 톱 탤런트도 아니고, 성공해봤자 그래, 음식점으로 돈 좀 벌었다는 거 아니야? 음식점으로 돈 번 사람이 한둘인가! 나도 당장 직장 때려치우고 먹는 장사하면 금새 큰돈 벌 수 있다고!’
아마도 이런 마음들일 게다. 대충 탤런트만 해도 밥 먹고 살 수 있는데 음식점까지 해가면서 돈을 버는 것이 못마땅해서. 또한 머리를 써서 뭔가를 개발하고 상품화시키면 ‘대단하다’ 치켜세우면서도, 땀 뻘뻘 흘려가며 온몸으로 뛰면서 이루어내면 ‘그래봤자 장사치지’ 하면서 은근히 깔아보는 시선. 그것도 그 흔한 음식점 장사로 돈 좀 번 게 뭐 대수냐 하는 생각.
솔직히 연기만 하면서 돈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었다면 애초부터 부업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게다. 오늘의 주신정도 없었을 거고 남들 말처럼 극성(?) 떨지 않고 조금은 편안하게 살아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을 이렇듯 뿌듯하게 채워주는 만족감을 과연 얻을 수 있었을지?
사실은 나도 의사가 꿈이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오다보니 탤런트가 되었고, 그 다음엔 음식점 주인이 천직이 되었고 나의 인생이 되었다. 그 상황이란 게 결국은 돈이었는데, 상황에 떠밀리지 않게 된 이후에도 난 아주 신이 나서 여전히 쟁반을 나르고 행주질을 한다.
지금은 의사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중고등학교 동창들 중엔 공부 잘 하던 애들이 많아서 교수, 의사가 된 친구들이 많다. 그런데 동창회에 나가보면 장사하는 친구들이 더 멋있다.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탤런트가 되고 나서도 연기자 수입이란 게 워낙 불규칙해서 난 한시도 돈 걱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이 오십 중반에 들어서야 돈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젠 돈은 벌만큼 벌었으니 가게를 접을 수도, 아니 긴장만이라도 좀 늦추고 여유를 가질 수도 있으련만 그게 잘 안 된다.
돈 욕심에? 아니다. 내 인생의 큰 부분이 바로 여기, 주신정에서 채워지고 있어서다. 땀을 흘린 만큼 가슴 가득 차 오르는 성취감, 그걸 매일매일 새롭게 느끼면서 산다는 거, 그 달콤한 맛에 인이 배겨버려서.
솔직히 연기란 허망한 부분이 있다. 한 달만 지나면 내가 뭘 찍었는지도 모르겠고, 내 연기가 시청자들 마음에 남을지도 자신이 없다. 물론 연륜이 있으니까 어떤 역할을 맡게되던 최선을 다해 잘하자고 다짐하고, 한 컷(cut) 한 컷 정말 잘 찍어 보려고 노력했다. 대사를 대충 외우고 하는 사람도 있고 술 먹고 와서 녹화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대사를 딸딸 외워서 간다. 연기를 35년 하면서도 대사를 잊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질 못하다. 이런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면 녹화를 참 여유롭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스스로를 달달 볶아가면서 사는 성격인지라 그게 쉽지가 않다.
어쨌거나, 그렇게 철저하게 해도 연기의 뒷맛은 씁쓸하다. 막이 내린 뒤의 공허감,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배우란 무대에서만 가슴이 벅차 오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무대에서 내려서는 순간 성취감도 사라진다. 그런데 장사는 그렇지가 않다. 일상에서, 매일매일, 지속적이면서도 새로운 성취감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음식점을 해나가려면 자잘하게 골치 아픈 게 엄청 많다. 장사란 게 몸으로만 때워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다른 집으로 손님 뺏기지 않으려면 새로운 메뉴 개발해야지, 새로운 손님 하나라도 더 끌어오려면 입소문 퍼지게 할 방법 찾아야지, 머리가 획획 돌아가야 한다. 고기니 야채니 재료가 모자라면 부랴부랴 급조해야지, 남으면 남는 대로 신선하게 보관하고 처리해야지, 순발력도 있어야 한다. 물가가 올라 재료비가 비싸진다고 해서 쉽게 음식값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원가니 손익 계산에 어두우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 장사는 그야말로 고객 서비스에서 광고에 이르기까지 ‘경영’ 전략이 총체적으로 요구되는 ‘사업’이다.
사람 상대하는 일은 또 어떤가. 까다로운 손님 기분 맞춰주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종업원도 참고 봐주면서 우리 집 식구 만들려면 도(道) 닦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솔직히 장사는 고달프다. 그럼에도, 가게에 손님이 꽉 찬 걸 보면서 느끼는 성취감은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는다. 오늘 얼마를 팔았나 하는데서 오는 안도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지막으로, 아무나 음식점 장사해서 돈 버는 게 아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안 되는 게, 욕심만큼 안 되는 게 장사다. 기본적으로 체질이 맞지 않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좋다.
7. 장사꾼 체질 따로 있다
97년 IMF 시절, 업종을 불문하고 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부도가 나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는 판이니 직장인들은 월급이 깎이는 선에서 자리를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그야말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허나 아무리 먹고살기가 힘들어도 끼니를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 그럼에도 음식점들도 손님이 현저하게 줄고 간판을 내리는 곳이 속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 집은 다행히도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주신정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기까지 한 2년, 저녁때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고 점심때도 이삼 십 분씩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고도 3년쯤 지난 시기여서 단골도 많이 확보된 상태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얼리지 않는 생고기, 맛깔스럽고 푸짐한 점심저녁 식사메뉴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는 박리다매 원칙을 고수해온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가게가 잘되니까 98년인가, KBC 아침 토크쇼 <엄앵란 이택림의 사랑방>에서 초대를 했다. 장사 인생 얘기를 들려달라는 것. 당시 KBS 대하사극 <용의 눈물>에서 세자의 스승 역을 맡고 있었는데, <여인천하>에서도 같이 일한 김재형 감독(PD)이 연출을 맡은 프로였다. 김재형 감독은 70년대 초, 단역만 맡고 있던 나를 동양방송(TBC) 인기 사극 <연화>에 출연시키면서 내가 소위 인기 탤런트로 뜨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이다. 그 후 계속 같이 일했으니 30년 넘게 알아온 사람인데 토크쇼 미니 인터뷰에서 나란 사람에 대해 이런 코멘트를 했다.
“늘 한결같은 사람이다. 진실로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 철저한 장사꾼으로 무섭게 변신하는 사람. 불황에도 불황을 모르는 사람.”
코멘트가 나가고 엄앵란 씨와 같이 사회를 보던 이택림 씨가 물었다.
“김선생님은 장사꾼 체질이신가 봅니다?”
난 좀 쑥스럽기도 해서 허허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장사꾼 체질이 따로 있나요? 난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고 내가 복 많이 받은 음식점 주인이라 생각합니다.”
진심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단, 장사꾼 체질이 따로 있겠냐는 말은 수정하고 싶다. 장사꾼 체질이란 게 확실히 있다. 내가 그 체질인 듯 싶다. 가령, 손님에 대한 마인드는 처음 장사를 시작한 이후 한결같다. 일단 가게에만 들어오면 일부러 마음을 먹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겸손해진다. 나도 나름대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인데도 희한하게 손님들 앞에선 무조건 ‘네, 네’가 나온다.
나도 웃긴다. 가게에 있으면 손님들한테 어떤 대접을 받아도, 아무리 이상한 손님을 상대해도 ‘웰컴(welcome)’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할 순 없겠지만 내가 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건지, 당신은 나보다 한 수 아래야 하는 감이 있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잘한다. 손님이 건방떨어도 차라리 옆에 종업원들이 화를 내지 난 화가 안 난다.
또한 손님 앞에선 체질적으로 개 폼이 잡히지가 않는다. 연예인들 중에는 유명세 앞세워서 돈 벌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망하는 사람도 꽤 많다. 일반인들 중에도 사장이랍시고 손님들 앞에서 개 폼잡다가 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개 폼 잡으면 망한다는 것도 내 장사 원칙의 하나다. 멋모르고 개 폼을 잡다가 쓰라린 경험을 해서 깨우친 것이 아니다. 그런 자세가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니라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장사꾼 체질이다.
“형, 나 장사 좀 해보려고 하는데 나 좀 도와줘.”
아는 후배가 찾아와서는 혼자선 장사할 자신이 없다며 동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장사는 장사체질이어야 한다고 절실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느낀 바로는 그 후배는 장사할 체질이 아니었다.
“야, 임마, 넌 틀렸어.”
대개 사람들은 이 정도 대답에 물러서질 않는다. 나름대로 절박한 상황에서 돌파구로서 장사를 생각하고 있으므로. 후배도 의욕을 내비치며 눈빛을 반짝거리며 들러붙었다.
“나도 일단 시작하면 뭐든 하면 잘해낼 수 있다고요.”
“넌 아니야.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장사란 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넌 거만한 데가 있어서 안 된다, 어깨에 힘 빼고 손님한테 저자세로 나올 수 있겠냐, 그게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절로 그렇게 되야 한다..., 일일이 설명해줘도 직접 해보지 않는 이상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나도 가슴이 답답하다. 웬만하면 도와주고 싶지만 장사할 타입이 아닌데 덥석 끌어줄 수도 없지 않은가.
후배는 투덜투덜하더니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마 속으로 욕 꽤나 하면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장사 체질이 아닌 사람하고 덥석 손잡고 같이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사 노하우 몇 개 가르쳐 주고 혼자 해보라고, 잘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 넣어줄 수도 없다.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체질이 아닌 사람은 장사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한테 장사꾼 체질이 있다는 걸 안 건 장사란 걸 처음 해보게 되었을 때다. 30여 년 전 총각 시절, 한 3,4년 지지리 고생만 하다가 드디어 연기자로 한참 떴을 때였다. 탤런트 선배 한 분이 빛을 못 봐서 어려운 생활하면서 코스모스 백화점 3층에 조그맣게 옹기(도자기) 가게를 하고 계셨는데 내게 도움을 청하셨다.
“너 잘나가니까 일일 점원으로 삼일 정도 가게 좀 나와주면 안 되겠냐?”
CF다, 영화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대로 뛰어다니는 판이니 시간이 빠듯했지만 선배의 청을 거절할 순 없었다. 어려운 생활을 해봐서 그런지 남 어려운 생활은 못 보는 성격이라 3일간 명동으로 출퇴근을 하기로 했다. 장사란 걸 할 수 있느냐 까진 생각도 못했다. 얼굴은 팔렸으니 손님이나 끌어주면 다행이라는 심정이었다.
헌데 도자기 가게에 나가서 직접 물건을 팔아보니까 내가 장사수완이 있는지 아주 잘 팔렸다. 잘 되니까 장사하는 재미도 솔솔 했다. 선배네 가게는 세 배를 남기는 장사였는데, 난 3천 원을 내는 손님한테는 5백 원짜리 물건을 집어줬다. 5백 원짜리 물건의 원가는 2백 원밖에 안 되는 셈인데 그땐 원가 계산도 안 했다. 처음부터 그냥 집어주는 걸 좋아했다.
이런 날 보고 선배형은 속이 타는지 말렸다.
“너 이거 얼마나 남는다고 자꾸 집어 주냐?”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세 배는 남는 장사인데 손님이 또 와서 물건 하나라도 더 팔면 이익이 아닌가? 하지만 선배는 공짜로 나가는 물건의 원가 생각만 했다. 그걸 돈 받고 팔았으면 얼마가 남는데 하면서. 그 후에도 이런 계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지 선배 형 도자기 가게는 계속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들놈을 봐도 장사 체질이라는 게 따로 있구나, 그건 타고나는 거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아들놈이 대학생 때 방학을 이용해서 우리 가게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홀에서 처음 뛰는 젊은애들은 특별히 손님상에 갈 일이 없어도 괜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일단 상을 차려 나갔으면 아예 그쪽 테이블은 신경을 끄고 자기 할 일만 하다가 “이거 하라, 저거 하라!” 시켜야만 움직인다.
그런데 우리 애는 손님 테이블에 음식을 나르고서는 한쪽에 서서 유심히 가게 안을 살폈다. 그러다 어느 손님상에 반찬이 하나라도 떨어지면 주방에서 얼른 집어다 갖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준 것도 아니다. 아들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야, 저 자식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너 왜 그러냐?”
대견한 마음을 감추면서 농담조로 물었다.
“아빠, 가게가 내 거라 생각하니까 잘돼.”
아들애는 대답을 하면서도 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난 거기서 아들의 체질을 봤다. 종업원으로 뛰더라도 사장 마인드로 일하는 자세.
아들은 졸업 후 직장 생활 1년을 채우고는 문방구점을 시작했다. 아들의 체질을 알아봤기에 잘 할 것이라는 판단은 있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곧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아들애가 장사 시작하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 슬쩍 가본 적이 있다.
“이거, 저 오늘 학교에서 필요한 건데.. 쓰지는 않을 건데 사기도 그렇고... 어떡하면 좋지요?”
여고생이 물건을 만지작거리면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어떡하나 볼 요량으로 옆에 비켜서서 지켜보고 있는데 아들애 입에선 금새 대답이 나왔다.
“그냥 가져가셨다가 가져오세요.”
목소리엔 싫은 기색이 없었다.
어떤 손님은 5백 원짜리를 샀는데 아들은 재고로 남아 있는 물건 중에서 하나 주면서 “이것도 가져가세요”라고 했다. 웃는 얼굴로.
아들은 장사를 제법 잘 하고 있었다. 내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퍼주는 게 남는 것이라는 장사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손님을 끌려고 머리 싸매고 무슨 전략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그냥 알게되고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오는 것, 그게 바로 장사 체질이라는 것이다. 남 주는 거 아까워하고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거 생각하면서 벌벌 떠는 사람은 장사 못한다.
8. 손님 끊이지 않는 비결
IMF 시대에도 우리 음식점은 어찌된 건지 손님이 늘었다. 그게 화제가 되면서 무슨 비법이 있나 하고 사람들이 우리 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어느 라디오 프로에 나가서 가게 얘기를 조금 하게 되었다. 친절하게 하니까 되더라 하는 요지였다.
프로가 나가고 나서 며칠이 지났을까. 1997년 여름 늦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현대증권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우리 가게 주변이 증권가니까 단골 중에 금융맨이 많은데 현대 증권 직원 중에도 낯이 익은 이가 꽤 있었다. 아마도 사장인 내가 종업원이 되어 쟁반도 나르고 걸레질도 하고 맨발로 뛰면서 기를 쓰는 모습은 익히 봐왔을 터. 그래서 아마도 김종결 장사하는 얘기를 들어보자는 의견이 현대증권 본사 차원에서 오갔던 것 같다.
당시는 아무래도 불황의 여파였는지 기업체들이 외부에서 강사를 모셔와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강연을 많이 했었다. 위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새로운 마음가짐도 불어넣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나한테까지 강연 요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타이틀은 ‘친절 서비스 특강’.
강연은 경험도 없거니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예기치 못한 제의에 당시 출연하고 있던 KBS 수목드라마 <욕망의 바다>가 끝나면 하겠다고 얼떨결에 대답해버렸다. 드라마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으니 시간이나 벌자는 심사였다. 그때 가서 굳이 내 강연을 들을 일이 없어지면 좋은 것이고.
그런데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드라마 중간에서 내가 하던 배역이 죽어서 더 이상 촬영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자 현대증권 쪽에서 연락이 왔다. 이젠 시간이 났으니 2주 후에 강연하자고. 약속은 해놨던 것이어서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하긴 해야 할 터인데 60분 정도를 혼자 떠들 생각을 하니까 막막하기만 했다.
어떤 얘기부터 시작하나, 사람들이 그런 얘기에 흥미가 있을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뭔 수가 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하루 이틀 지나다보니 강연 날짜가 내일로 다가왔다. 막판에 몰린 심정으로 집에서 부랴부랴 연습에 들어갔다. 그래 하자, 해, 인터뷰하는 식으로 하면 되겠지, 인터뷰는 여러 번 해봤으니까 이력이 붙지 않았는가... 헌데 녹음기를 갖다놓고 얘기를 쫙 풀어봐도 15분이면 끝이 났다. 해도 또 해도 안 돼서 녹음기를 치워버렸다. 에라, 내가 솔직한 게 장기라면 장기니까 솔직하게 나 살아온 얘기를 하자! 말이 막히면 ’여러분 궁금한 거 없으세요‘ 하고 물어보지 뭐! 그야말로 깡이었다.
9월 20일. 가게에서 가까운 현대증권 여의도 본사 건물. 현대증권 전국의 지점장 76명과 본사 마케팅팀 직원 등 1백여 명을 앞에 두고 난생 처음 강연이란 걸 했다. 탤런트 김종결이 아니라 성공한 기업인의 자격으로.
“점심, 저녁때 매일 식당에 나와서 손님 신발을 정리하고 음식을 직접 나릅니다. 손님이 끊이지 않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말들 하지만, 친절한 자세로 좋은 고기를 싸게 판 것 외에는 별다른 비결이 있겠습니까?”
친절 서비스 얘기를 하다보니 주신정을 열기까지 고생해온 세월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눈물이 왈칵 솟았다. 워낙 눈물이 많은데 심성이 여리게 태어난 데다가 연기를 오래 하다보니 감성이 발달해온 탓이 크다. 어쨌거나 정신 없이 한 시간이 지나갔다.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주책없이 눈물을 보인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은 것이 아닌가 해서 부끄럽기도 했다.
이틀 후, 조선일보에 ‘탤런트 음식점 주인 김종결, 현대 증권에서 친절 강연했다’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왔다. 탤런트가 유명 증권회사에서 강연을 한다니까 신문에 게재할 거리가 되었나 보다. 기사에는 현대증권 손영보 상무의 코멘트가 실려 있었다.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자세를 배우기 위해 김사장을 초청해 강연회를 마련했다. 이론적인 기업분석 특강도 중요하지만 경영 현장에서 친절 서비스로 성공한 얘기를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 다음부터 가게며 집이며 전화가 불이 났다. 여기저기서 강연을 하자고 난리였다. 강연을 어떻게 해냈는지 돌아볼 정신도 없을 정도로 너무 혼이 나서 못한다고 뺐다. 사람 심리가 이상한 건지, 내가 빼면 뺄수록 상대방들은 더 하자고 달라붙었다. 그나마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청은 쉽게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원들을 데리고 우리 가게에 와서 회식을 하면서 “내가 전화한 사람인데 해주셔야겠다”고 청하는 경우는 박절하게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강연장에 얼굴을 여러 번 내밀게 되었고, 그게 신문이며 잡지에 기사가 나가고 화제가 되면서 KBS <TV 인간대학>에도 나갔다. 소위 인기 강사로 뜬 것이다.
한 3년 전까지 강연을 정말 많이 했다. 동네 기업체들, 실업자 재교육 강연장, 요식협회, 강남대학교..., 총 50회쯤 한 거 같다. 미용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데처럼 나로선 생소한 장소까지 가서 떠들었다. 회수가 늘어나는데도 강연하는 게 편안해지지가 않았다.
녹화하기 전에 대사를 외어보는 것처럼 강연장으로 차를 타고 가면서 내용을 계속해서 메모리 하는 것이 피곤했다. 강연 장소에 따라 내용도 달리해야 하므로 준비하는 것도 귀찮았다. 자꾸 강연을 하다보니 거짓말도 자꾸 늘어나는 것 같아서 그것도 싫었다. 가게도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차츰 슬슬 빼기 시작했다. 자꾸 거절을 하니까 요즘은 강연 의뢰가 드문드문 들어온다.
기업체에서 날 부르는 이유는 주로 우리 업체의 친절성을 들려달라는 것이다. 당신네는 그렇게 헌신적으로 손님을 모시는데 우리 은행에선 뭘 본받아야 하느냐, 이벤트는 자주 하는 게 좋으냐 등등.
그런데 가선 항상 하는 얘기가 정해졌다.
“손님들이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해오더라도 절대로 싫은 얼굴을 하면 안됩니다. 항상 웃는 얼굴로 고객을 맞아야지요.”
장사하는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데 가서도 강연을 많이 했다. 요식협회, 미용협회 등 회원들을 교육시키는 강연 프로그램에 초청되는 경우인데, 그런 데 가서 강의하면 신이 나서 했다. 강의하기도 편하다. 질문이 많고 구체적이니까 나는 어떻게 했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면 된다. 피드백도 느껴지고 무엇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눈이 초롱초롱하다. 자기네들이 실무로 부딪치는 일을 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도 친절과 관련된 것이다.
“형식적인 친절말고 어떤 친절이 정말 좋은 친절입니까?”
내 대답은 간단하다.
“친절, 필요 없어요. 손님이 정말 고맙다고만 생각하십시오.”
9. 죽기 살기로 해야 된다
처음에 강연을 하러 여기저기 다닐 땐 내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다 내게 호의적인 줄 알았었다. 물론 무슨 무슨 협회에서 불러서 가보면, 인기강사 탤런트가 오니까 얼굴 보러 많이들 오라는 식으로 이용(?)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그것도 일종의 팬 서비스라면 서비스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바라는 게 있었다. 내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탤런트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성공했다니까 처음엔 재미로 듣겠지만, 혹시라도 지금 사는 게 힘든 사람들은 내가 고생한 얘기를 들으면서 희망을 가졌으면 했다.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IMF 때는 실직자를 대상으로 한 강연장에 많이 다녔다.
98년 12월 경기도 용인시 금호인력개발원에서 했던 강연도 그런 경우였다. 재취업-창업 프로그램을 이수한 실직경력자, 실직자, 명퇴자 3백여 명이 청중이었다. 타이틀은 ‘실직은 제2인생 출발점’. 난 식당업 창업 성공 사례를 얘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당은 아주 넓고 화려했다. 모인 사람들은 실직자들이라 해도 나름대로 탄탄한 직장에 다니던 건실한 직장인들이었다. 나이들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모아둔 돈도 어느 정도 있는지 창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았다. 겉모습만 보면 일반 직장인하고 다를 게 없었다. 갑작스런 실직으로 인해, 그리고 불안한 앞날 때문에 어깨에 힘이 좀 빠져 있는 것만 빼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용기인 거 같았다. 식당을 차리려면 자본금은 얼마가 있어야 하고, 가게는 어떤 데를 골라야 하고, 손님은 친절로 모셔야 한다는 등등, 음식점 창업 컨설팅과 관련된 얘기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해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내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뭘 하던 할 게 아닌가! 그러다 보니 또 내가 고생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어려울 때 난 이렇게 저렇게 버텼으니까 여러 분도 버텨내라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고.
“날 보십시오. 우리 어머니 가게에 불이 났을 때 난 탤런트가 됐습니다. 내 가게가 불이 난 후에 다시 주신정으로 일어섰습니다. 인생 후반기에 들어서 다 잃어버렸을 땐 정말 사는 게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정신만 잃지 않고, 용기만 잃지만 않으면 됩니다. 우리가 하루 이틀 사는 것도 아니고 계속 사는 건데 큰 용기만 갖고 열심히 하면 돼요. 지금 내가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음식점이란 게 언제 잘못될지 몰라 항상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용기만 잃지 않으면, 죽기살기로 노력하면 장사든 뭐든 못할 게 없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을 받는 순서가 왔다.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내 얘기를 감명 깊게 듣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탤런트라니까 거꾸로 듣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다. 미적미적한 태도로 말을 돌려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게 뭐 고생했다면서 지랄을 하는데 고생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어? 또 누가 지 고생한 얘기 듣겠대?!’하는 느낌이 전달됐다.
아차 싶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점이 있구나, 내 얘기를 부풀리지 말고 사실 그대로만 얘기해야겠구나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 어려울 때마다 좋은 일이 생겼다, 정말 절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절망이 행복을 끌어오기 위한 신호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는 식의 얘기는 자칫 ‘난 지금은 성공해서 행복하다’는 자화자찬이 될 수 있을 터니까.
어쨌거나, 내 얘기를 들으신 분들 중에 지금 장사를, 그것도 음식점을 하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비록 지금까지 대단한 성공을 하지 못했다 해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현재 직장을 잃고 혹은 사업이 망해서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취직 걱정을 앞으로 장사를 하건, 다른 일을 하건, 자신감을 잃지 않고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심정으로 매달렸으면 좋겠다.
강연한답시고 여기저기 창업 강연장을 다녀봤는데 일반 창업 컨설턴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저런 얘기들이 과연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한테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업 컨설턴트들은 장사 이전의 마인드, 태도에 대한 건 문제삼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는 마인드는 터치하지 않고 너무나도 단편적이었다. 자본금이 얼마면 어떤 업종을 하고, 그 업종을 하면 종업원은 몇 명 두고 하는 식이다. 손님을 불러모으려면 광고는 어떻게 하고, 다른 집들하고는 어떻게 차별화시킬 것이냐 등등. 장사로 꼭 성공하겠다는 마인드가 없이 성공 비결만 주르르 꿰고 있다고 해서 성공할 순 없다. 성공하겠다는 절실한 마음부터 다지는 것이 먼저다, 그게 내 생각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하는 성공비결은 그 다음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어도 마인드만 확실하면 비결이라는 것은 스스로 터득해갈 수 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간은 좀더 걸리겠지만. 장사해서 돈 좀 벌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긴 딱 한 마디다.
“죽기 살기로 하겠다는 마인드가 없으면 장사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좋다.”
10. 내가 할 건 고깃집밖에 없었다!!
“김종결 선배 뵐 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중*고등학교 선배여서 어릴 때부터 봐온 분인데, 보기에는 차분해 보이지만 무지하게 끈기가 있으세요. 공부면 공부, 사업이면 사업, 뭐든지 끈기 있게 하시지요. 연기도 30여 년 동안 빈틈없이 해오셨지만, 사업하면서 한 번도 실패하는 걸 못 봤습니다. 사실 선배님이 사업하시는 거 보면서 불안한 마음은 있죠. 우리 같은 연기자들이 사업을 하면 실패하는 걸 많이 봐서...“
작년에 모 방송국 아침 프로에서 후배 탤런트 이덕화가 날 두고 한 코멘트다. 그의 말처럼 나 역시 장사에는 제법 도(道)가 텄다고 자부했고 주변에서도 한껏 치켜세워 줬다. 한 때는 점포를 다섯 개나 운영할 정도로 사업가로 날렸는데 나이 오십을 바라보면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음식점 하나에 목숨을 걸게 될 줄은 몰랐다.
젊었을 땐 패기도 살아 있었기에 욕심도 맘껏 부려봤다. 그러나 과하면 화를 부른다고 주식에 손댔다가 큰돈을 날렸다. 그 때문에 고달픈 밤무대 생활을 몇 년 했지만, 그래도 난 당당한 사업가였다. 당시 잘 나가는 햄버거 가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화재로 그동안 벌어놓았던 걸 몽땅 날렸을 땐 앞으로 살아갈 게 정말이지 막막하고 겁이 났다. 내 잘못도 아니요, 그것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젠 좀 편하게 살 때라고, 돈도 호기롭게 써볼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때 졸지에 일을 당하니까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성격도 아니요, 얄팍하게 머리 써가면서 편하게 대충 살자는 성격도 아니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살고, 끈기 있게 버티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이 나이에 내가 왜 이렇게 가혹한 일을 당해야 하나, 내가 뭘 잘못했나,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나마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붙잡을 지푸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건 고깃집밖에 없다는 단 하나의 생각. 그걸 붙잡고 죽기살기로 매달린 덕분에 주신정은 장사가 잘 되었고 연예인 사업가로 어엿하게 인정을 받고 있다.
고깃집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30대 중반이었다. 그 전에 부업으로 처음 시작한 게 도자기 가게였다. 코스모스 백화점에서 한 2,3년 했는데 장사가 제법 잘 됐다.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었고 수입도 짭짭해 탤런트 생활하면서 부업으로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79년도였을 게다. 우리 집이 여의도인데,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이 건물 저 건물에서 나온 샐러리맨들이 근처 음식점으로 새카맣게 몰려들 가고 있었다. 직장인들의 점심 시간이었다. 아, 음식점을 차리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때만 해도 여의도는 사무실이 먼저 들어오고 음식점은 늦게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메뉴만 잘 고르면 손님 확보는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무조건 조그만 건물의 빈 가게를 찾아다녔고, 일명 먹자 상가로 불리는 여의도 종합상가 2층의 30평 가게를 얻었다. 업종은 로스 집으로 정했다. 사람들이 주로 삼겹살을 먹던 시절이라 메뉴를 좀 고급화시킨 것이었다. 가게 이름은 ‘신정’.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먹는 장사는 죽어도 안 하려고 했었다. 어머님이 일식집 하시는 것을 보고자란 터라, 음식점이란 게 얼마나 힘들고 골치 아픈 일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그럼에도, 음식점 경험이 없으면서도 겁도 없이 달려들 수 있었던 건 어머니 옆에서 어깨너머로 보아온 것이 밑천이 되었을 것이다.
명색이 탤런트니까 음식점 규모는 작아도 체면이 깎이지 않을 만큼 내부 인테리어는 예쁘게 꾸몄다. 투자비는 20년도 더 된 일이라 지금의 돈 가치로 환산하긴 힘든데 별로 큰돈이란 생각은 안 들었던 거 같다. 다행히도 도자기 가게 하면서 모아둔 돈도 좀 있었고. 주방인력도 좋은 사람 쓰고 종업원 15여 명을 구해서 조그맣게 문을 열었다.
장사는 엄청 잘됐다. 도자기 가게의 한달 매상이 하루에도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 돈이 이렇게도 벌리는 구나, 하는 실감을 했다. 허나, 한달 결산을 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 이유는 뒷부분에서 자세하게 얘기하겠지만, 세 달쯤 지나서 가게를 세 배로 텄고 종업원도 두 배로 늘리니까 돈이 제법 벌리기 시작했다. 먹는 장사의 노하우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80년 방송국이 통폐합되던 시절이라 방송국들이 여의도로 몰려오면서 ‘신정’은 굉장히 유명해지고 여의도의 명물이 됐다. 그때부터 여의도에서 재벌 나왔다는 소리를 농담조로 듣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많이 젊었고 패기 넘치던 때라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던 때였다.
그래서 신정 개업 후 2년도 못 돼서 다른 가게를 내기 시작했다. 민속주점, 만두집, 그리고 요식업과는 별개의 업종까지 손을 댔는데 그래도 주업종은 고깃집이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서 가게들을 하나씩 정리했고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던 신정도 다른 사람한테 넘겨버렸다. 10년 가까이 해오던 고깃집까지 정리하니 주변에선 인생관이 바뀌었냐, 몸이 근질근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말들이 많았다.
“이제부턴 좀 편하게 살아야겠어. 음식점은, 그것도 고깃집은 다신 안 할 거야.”
나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한테는 단호하게 말했고 본업인 연기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몇 개월 쉬니 정말 몸이 근질근질했다. 현금이 솔솔 들어오던 재미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햄버거 가게를 새로 시작했다. 고깃집보단 훨씬 편할 거 같아서. 초기엔 꽤 고전을 했지만 햄버거 가게도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가게까지 터서 큰 돈 좀 벌어보려는 시점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힘들어서 다신 안 하리라 생각했던 고깃집을, 이번엔 생고깃집을 열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음식 장사는 부가가치가 높은 편이지만, 고된 노동을 요하는 힘든 업종이다. 또한 독특한 맛과 친절한 서비스가 없다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노력하는 만큼 얻어지는 게 많다. 그걸 경험으로 알았기에 다시 생고깃집에 매달린 것이었다. 메리트가 많으니까.
우선 생산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프랜차이즈의 경우, 좀 편하게 돈을 벌 순 있겠지만 재료를 본사에서 받아다가 파니까 원재료비가 비싸다. 남는 게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하면 직접 만들어서 파니까 마진이 훨씬 높다. 고깃집의 경우, 매출에서 순수 재료비를 뺀 마진을 55퍼센트 정도 바라볼 수 있다. 100원어치 팔면 55원이 남는 것이다. 우리 가게의 경우, 점심 때 고기 매상만 2백여 만 원인데 고기 값, 야채 값을 45퍼센트 잡으면 백 십 만 원을 버는 셈이다.
또한 직접 음식점을 운영하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똑같은 메뉴를 그냥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내서 다양하게 메뉴를 개발할 수 있다. 주신정은 고기 메뉴는 처음부터 똑같은 걸 고수하고 있지만, 식사 위주의 점심 메뉴는 계속 바꾸면서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걸 내는 식으로 하고 있다. 김치말이 냉면도 최근에 인기 메뉴가 되었고, 푸른 밥이니 간장 게장이니 하는 사이드 디시(side dish)도 늘어났다.
또한, 오늘 먹어도 내일도 또 먹어야 하는 것이므로 수요가 늘 있다는 점이 음식점의 가장 큰 메리트다.
물론 애로점도 많다. 애로점들은 뒷 부분에서 얘기가 되겠지만 노력하면서 극복해나갈 수 있는 문제고, 메리트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것들이다.
주신정은 93년 오픈 초기부터 한 달에 3천여 만 원씩 내 손에 들어왔고 매상이 계속 늘어났다. ‘아, 돈은 이렇게 해서 벌리는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했고, 돈버는 맛에 힘들어도 고생이란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11. 일하는 즐거움, 돈 버는 재미
주신정을 오픈하고 나서 한 3년 되니까 한 달 결산하고 집에 가져가는 돈이 8천만 원 가까이 됐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수입이 일정하게 착착 들어오면 기분이 너무 좋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다가도 8~9백만 원 유지되던 하루 매출이 7백으로 떨어지면 순간, 이거 이러다가 망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돈은 액수가 많건, 적건 간에 편해지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전에는 점포를 다섯 개 했어도 돈을 꿔서 가게를 늘리기도 하고, 여기서 남는 돈을 저쪽에다 매우는 식으로 했기 때문에 큰돈이 들어오는 걸 몰랐다. 사업가 소리를 들으면서도 드라마는 방송국에서 나오라는 대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라다녔으므로 본업과 부업의 경계도 없이 허둥대며 살았다.
하지만 주신정을 하면서부터는 딴 데 한눈팔지 않고, 방송도 한 프로씩만 하면서 그야말로 본격적인 경영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 돈 버는 재미라는 걸 알게되었다. 그 전에 로스집을 할 때는 손님 모으는 재미만 있었지, 돈 버는 재미는 몰랐었다. ‘희한하다, 남들은 이렇게 장사가 잘 된다는데 내가 가져가는 돈은 왜 이거밖에 안되냐?’, 의아해했었다.
그러한 의문은 주신정을 하면서 풀렸다. 지금은 재료비에 대한 퍼센티지(percentage)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지만, 당시엔 그런 것도 몰랐고 뭐가 남는지도 모르고 손님한테 열심히 퍼주는 거 밖에 몰랐다. 물론 규모에 따른 차이도 있다. 로스집 신정은 90평 가게에 종업원이 20명 선이었다. 지금 주신정은 오픈할 땐 가게 규모나 종업원 수가 그때랑 비슷했지만, 3년 후쯤 가게를 2백 평으로 늘렸고 종업원도 40명으로 늘어났다. 거기다 가게를 연중무휴로 돌리고 오로지 여기에만 신경을 쓰니까 매출이며 이익이 2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뒤늦게 돈 버는 재미에 맛을 들이면서 통장이 하나둘 늘어났다. 10년도 더 된 얘기지만, 증권에 투자해서 엄청 날린 쓴 경험이 있어서 주식에는 별 취미가 없다. 그래서 버는 돈은 대부분 비과세 저축 중에서 이자가 높은 상품을 골라서 저축을 해왔다. 2000년도 제37회 저축의 날에 대통령상을 받았을 당시에 은행 통장만 15개 넘게 있었다. 종업원들 월급도 현금으로 주지 않고 각자 통장을 개설하게 해서 통장에 입금시키고 있다.
솔직히 통장이 그렇게까지 많을 필요는 없다. 통장이 많다고 해서 저축하는 돈이 몇 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관리하는 것도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고객 확보의 차원에서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통장을 정리할 수도 없다. 가게 주변의 은행들과 거래를 해야 거기 직원들이 우리 집에 식사도 하고 회식도 하러 와주지 않는가.
어쨌거나 버는 돈은 대개 은행에 집어넣다 보니 한 달에 몇 천 만원씩 들어와도 우리 집의 경제 규모는 물론, 내 씀씀이도 크게 달라지지가 않았다. 아내나 아이들은 날 ‘짠돌이’라고 부르면서 원망(?)도 많이 했고 이젠 대충 포기(?)도 한 것 같은데, 난 지금도 이 말을 고수하고 있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이는 것이다.”
그런지라, 작은 돈이 허투루 새어나가는 것이 싫고 몸치장하는 데 돈 쓰는 것도 아깝다. 친한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맛있는 거 먹는 자리에선 액수가 얼마이든 돈을 내지만, 술자리에 양주가 한 병이라도 올라와 있으면 지갑을 열지 않는다. 쓸 데 없는 데 돈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돈에 대한 내 철학이다.
주위에서는 이런 내가 이상한가 보다. 있는 돈 쓰러 다니기도 바쁠 판에, 일요일까지 가게에 나가서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는 것이 불쌍하기까지 한가 보다.
“형은 무슨 낙으로 살우? 뭐 그렇게 열심히 벌어대? 그 돈 다 쓰지도 못할 텐데! 애들 갖다줄려고? 그래봤자 좋을 게 뭐가 있어요!”
후배 하나가 걱정스럽다는 듯 얘기했었는데 친구들도 대충 비슷한 말들을 한다. 난 저들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되려 이상하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받아친다.
“야, 너 하와이에 가서 일주일만 누워 있어 봐라. 거기가 무슨 천국이냐! 일하는 즐거움이 진짜 즐거움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도, 사람들 얼굴을 보면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보다. 난 지금까지도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이 좋고, 쉬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느리게, 찬찬히 살겠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난 아니다. 일 그만두고 파삭 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친구들 중에도 그런 애들이 있다.
솔직히 가게 일로 힘들 때도 많다. 간판 새로 단다, 냉장고가 고장났다, 세금 낼 때가 돌아온다..., 드라마를 할 때 이런 일들이 터지면 촬영 끝나자마자 가게로 뛰어와서 계속 붙어 있어야 한다. 평상시처럼 손님이 꽉 찰 시간만 와서 움직이고 사우나 가거나 집에 가서 쉬지도 못한다. 여행을 엄청 좋아하는데 자주 못하는 것도 아쉽다. 드라마 쉴 때 겨우 며칠 짬을 내서 갔다 오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 종업원들한테는 “너희들은 한 달에 세 번 놀지만 난 못 노니까...”, 여행 가기 전에 이런 식으로 토를 달면서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가게의 잡다한 일들이 골고루 재미가 있다. 결산 맞추고 나서 장사가 안된 날은 스트레스를 받지만, 오늘 하루 100원 팔면 55원 남는다는 퍼센티지를 꽉 쥐고 있으니까 이익이 모자라면 어디가 새는 구나를 아니까, 그런 거 맞추는 것이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하나님이 주신 즐거움이 뭐냐 따질 때 가정을 거느리는 즐거움, 일에서 얻는 즐거움....”
교회에서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었는데 나야말로 그런 즐거움을 두루 누리고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 1장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