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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공경의 근거와 배경에 관한 고찰
특별히 한국 가톨릭교회에 있어 성모님 공경에 대한 공적 계기는 1838년 12월 1일에 제2대 조선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를 조선 교구의 주보로 정하였다. 성모 공경은 우리 민족에게 대단히 강한 경향이 있다. 그 이유를 보면 레지오 마리애가 신심단체 가운데 가장 큰 주축 돌을 이루고 있는데서 잘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이해는 신심적 차원에 있어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논란과 문제점들을 야기 시키고 있다. 사도시대를 지나 교회의 모습을 세우기 위한 교부들에게 있어 마리아 신심에 대한 교의적 확정이 필요하였기에 마치도 전쟁터와 같은 싸움을 겪은 후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하게 된다. 교의에 대한 확정에 있어 크게 논란이 되었던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 하느님의 어머니, 주님의 어머니,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 주님과 함께 하늘로 부름받은 분(승천) 등이었다. 교의적 문제는 그것을 확정하기에 있어 단지 옳고 그름에 대한 단정이 아니라 신앙감을 바탕으로 한 신앙의 확정이다.
신앙감과 신앙에 대한 우리들의 식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즉 신심행위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신앙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단정적으로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감의 중요성은 모든 신앙의 출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의 말씀과 빵을 나눔을 통해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았으나(루가 24, 13-35), 그들 안에 이미 예수의 존재가 차지하고 있음이 있었다. 신앙감이란 바로 제자들에게 남겨진 그 분의 흔적과 같은 것이기에 그분이 바로 주님임을 고백할 수 있는 원천을 갖게 된다. 마리아에 대한 우리들의 개인적 차원에 있어 신심 행위들은 달라도 어머니로서의 공경행위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모든 종교에 있어 마리아 공경이란 서로 동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 종교의 경전에도 마리아 공경의 이야기가 나오며, 개신교의 첫 출발인 루터나 쯔빙글리 그리고 캘빈의 사상에서도 어머니로서의 공경의 차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가톨릭교회에 있어 왜 그렇게 교의적 차원의 확정을 통해 타종교에게서 마리아 신심에 대한 오해를 갖도록 하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성서적 근거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기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진술이 많지 않다. 그러나 몇몇 내용들을 통해 마리아의 인격, 성품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 때부터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 불렸으며, 기도하는 사람, 예수를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다.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복음선포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육화이다.
1> 구약성서
구약성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정확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예언이 드러나는 곳을 아래와 같이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리아 공경에 대한 근거는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1> 1. 창세기 3,15 (원시복음)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inimicitas ponam inter te et mulierem
et semen tuum et semen illius
ipsa conteret caput tuum
et tu insidiaberis calcaneo eius)
이 성서 구절을 두고 原福音 또는 原始福音이라고 한다. 이유는 원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구원에 대한 최초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교회 전승을 따르면, 이 구절이 성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친에 대한, 여인과 그의 자식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라고 한다. Vulgata(불가따) 번역본 성서가, 영어로 말하자면 “it”이라고 하는 비인칭 대명사를 “she”(ipsa)라고 하는 여성형 제 3인칭 단수 대명사로 대치한 오역부분이 마리아와 관련된 부분으로 해석 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실 하와는 자신을 유혹했던 뱀의 머리를 짓밟는 자와 거리가 멀고, 그 여인은 하와보다는 다른 “어떤 여인”이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그 다른 여인, 다른 하와, 제 2의 하와가 바로 “마리아”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해석 입장이다. ‘제 2의 하와’라는 표현은 그가 자신의 선조로 첫 번째 하와가 저질러 이루어 놓은 손상을 복구하였다는 의미에서 교부들이 마리아에게 즐겨 사용했던 표현이다. 오늘날 이 잘못된 번역에 대해서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 오늘날 어느 정도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모친에 관련된 것임이 분명한 까닭이다.
대한성서공회에서 펴낸 공동번역 성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이라는 말에서 “여인”이라는 단어는 악마를 의미하는 뱀의 머리를 짓밟는 자의 모친으로서 여인이다. 악마의 머리를 짓밟는 자의 모친으로서 이 여인은 내용상으로 하와와 거리가 멀다. 악마를 쳐 이긴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 여인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되는 셈이다. 교회 전승은 이 여인을 마리아로 해석하고, 마리아를 일컬어 “제 2 하와”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 2 아담”이라고 부르는 데 기인한다. 예컨대, 로마서 5,12-21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과 대조하면서 예수를 제 2 아담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바오로의 해석을 적용하여 하와가 아담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불순종케하고 범죄케 했다면, 제 2하와인 마리아는 예수를 하느님께 순종케하고, 인류를 구원하는데 협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원시복음(최초의 기쁜 소식)은 성서의 첫 권에 언급되고 있는데, 성서의 마지막 권인 요한 묵시록에 훌륭하게 조화되어 나타난다. 요한 묵시록 12장에 창세기 3장 15절이 예고한 바를 실현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된다(여자와 용).
구약의 70인역도 “It shall crush thy head”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본문을 (αυτο) 희랍어 αυτοσ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 남성형 대명사는 메시아적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최후의 전투, 즉 종말론적 전투가 묘사되고 있다. 뱀으로 상징되는 악마와 “여인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메시아적 인물과의 대결이다. 여기서 악마는 메시아적 인물에 의해서 정복된다. 가톨릭 신학자 대부분은 이 인물은 작가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지시할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여인은 그리스도의 모친, 즉 마리아여야 한다는데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
만일 텍스트의 문맥을 따라서,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해하자면 그 여인은 하와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텍스트 안에서 하와이외에 다른 여인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성서 구절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종의 신탁(divine oracle)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 부분은 소위 야휘스트계에 속하는 문헌으로서 하느님 자신의 입으로 친히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여인”이라는 말은 단지 “하와‘만을 지시한다기보다 그녀의 후손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뱀은 악마요, 여인의 후손은 메시아를 지시한다. 뱀과 후손의 반목은 뱀을 짓밟음으로써 끝난다.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에 있어서 하느님의 권리가 전적으로 다시 수립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현대 신학자들이 부딪히는 것은 약속의 하나로서 이 “여인”은 하와와 마리아 양편 모두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견과 문자적으로 하와만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견이다.
J. Coppens라고 하는 신학자는 하와와 마리아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어떤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여인, 즉 구세주의 모친은 규정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지시되고 있다고 해석한다.
어떻든 이 원시복음은 미래에 있을 어떤 사실을 예견하고 있다는데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 미래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한다. 어떤 사람은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환상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 텍스트는 예언적이며 메시아를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든 최종적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빛은 구약성서 안에서는 다소간 불투명한 베일을 통해서만 인식되고 있다. 그들은 이 구절을 메시아 자신의 모습에 적용함으로써, 비록 숨겨져 있지만 메시아의 모친의 모습이 남아 있어야 함을 기대하고 있다.
본래의 텍스트는 창세기 3,15이 집단적 인물의 의미보다 어떤 개별 인간을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 텍스트가 악의 권력을 대표하는 어떤 적을 물리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승리자는 그 사탄을 쳐 이길 수 있는 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본 것처럼 70인역에서 중성형을 남성형 autos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한 개별 인간을 지시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 후손은 여인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승리가 이룩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번역본은 마지막 문장을 남성형 대명사로 시작하면서 이 승리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여인의 후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인의 후손들 가운데 구체적인 한사람에게 의한 것임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교부들이 분명하게 메시아적 인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메시아와 더불어 그의 모친은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유대 전승,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승은 여기서 메시아를 예견하고 있다. 그 메시아는 악마를 거슬러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역사에 있어서 유일한 인물이다. 이 점이 요한복음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31-32).
요한복음은 예수의 생애 전체를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거슬러 싸우는 투쟁으로 묘사한다. 이 투쟁은 예수에 의해서 갈바리아 산에서 승리를 거둔다. 신약성서 특히 요한계 문헌은 옛 뱀은 사탄으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패배하였고 하느님의 뜻에 의해 그리스도는 그 모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데 이제 그 놈은 땅으로 떨어졌고, 그 부하들도 함께 떨어졌습니다.(묵시록 12,9)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요한 12,31).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이 여인은 누구인가?
J. Galot : 문자적으로는 하와를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내재적으로 마리아를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의 의도와 관심은 뱀에 대한 승리에 있기 때문이다.
A. Robert : 우리는 하와의 모습에서 마리아의 모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원형이었습니다.(로마 5,14).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1 고린 15,22.45). 이처럼 하와가 자연적으로 모든 이들의 어머니가 되셨던 것처럼, 마리아는 은총으로 그분의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치유된 자들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나 후에 모든 의인들은 그 여인,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의 후손이 된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두고, “하느님의 계획을 따라, 나자렛의 소녀, 즉 새로운 하와는 새로운 아담이 뱀을 쳐부수고 승리한 것과 긴밀히 관련될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의 기대는 하와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축복 받은 자, 즉 구세주의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1> 2. 임마누엘의 모친(이사야 7,14)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마리아와 관련된 구약의 텍스트는 이사야서 7, 14이다.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시리아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다윗 왕조가 멸망할 위기에 놓인다. 하느님의 말씀이 유다의 왕 아하즈에게 전해진다. 아하즈 왕은 이 예언을 곧이듣지 않는다. 그는 그의 정책 노선을 고집한다.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하느님의 징표를 구하라고 한다. 아하즈는 이를 거절한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그 징표를 손수 주시리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이 구절을 놓고 많은 논쟁들이 일어났다. 그 논쟁의 중심은 첫째로 히브리어 단어 Almah다. 이 단어는 엄격하게 말해서 “처녀”를 일컫는 용어가 아니다. 오히려 “젊은 여인”으로 번역될 수 있다. 어떤 독일 신학자(A. Schulz)는 이 단어를 매번 “처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히브리어와 상당히 유사한 셈족어로 쓰여진 기원전 14세기경의 명판 “Ras Shamra”에서 새로운 빛을 얻게 되었다. 이 명판의 내용은 Nikkal 이라는 여신에 대한 우가릿 詩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보라, 젊은 여인(galmatu)가 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galmatu는 히브리어 almah와 동의어이다).
이러한 사상은 단순히 가나안 지방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중동의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처녀 출산으로 태어난 아이가 행복한 시대를 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언자 이사야가 이러한 당시의 사상에 친숙해 있었고, 이것을 그의 고유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R. Laurentin의 의견이고 Duncker는 이것을 반대하고, Coppens는 이것을 불확실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예언 자체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첫째로 다윗왕조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히즈키아(아하즈의 아들)의 탄생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예언자 자신의 아들의 탄생에 관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떻든 이 예언은 결코 평범한 사건이 아닌 특별한 사건의 색조를 띠고 있다. 즉 일종의 기적적인 증표로 나타난다. 그래서 Coppens는 다른 가능성들을 분석한 다음에, 이 텍스트는 바로 메시아와 그의 모친에 관한 예언이라고 결론짓는다.
한편 J. Steinmann은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적 메시지가 아니고, 오히려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에 관한 메시지로 이해한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메시아에 관한 메시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만일 문자적 의미에서 히즈키야에 관련된 것이라면, 또는 예언자 자신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면 almah는 단순히 “결혼 적령기에 있는 소녀”(결혼을 했던 하지 않았던 상관없이)를 의미한다. Laurentin 역시 Steinmann과 유사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Laurentin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이 예언이 직접적으로는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에 관련된 것이지만, 이것은 이차적으로, 종말적이고 메시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종말론적 - 메시아적 의미는 바빌론 귀향 이후 유다이즘에서 발견되고 있다.
70인역은 almah를 parthenos로 번역하고 있다. Lauretin은 공적으로 처녀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사실상 almah는 불확실한 용어다. 그러나 이 예언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1,23)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는 임마누엘이라 일컬어지리라”.
마태오는 1,22에서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태오는 almah를 처녀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여기서 마리아의 예수 동정 잉태를 선언하고 있다. Laurentin은 마태오에게 영향을 준 이사야서 7,14이 동정 탄생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마태오가 예수의 가족으로부터 유래하는 전승을 따라서 이사야의 신탁을 유용하게 이용하면서 동정탄생의 의미를 발굴해 냈다고 주장한다.
어떻든 almah는 반드시 처녀를 의미하지 않는다.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betulah라는 히브리어 명사가 있다. almah는 처녀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 하지 않는 “젊은 여성”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 안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 정확하지가 않다. 더욱이 almah를 사용하는 성서의 여러 곳에서 반드시 젊은 처녀를 의미하지 않았다.
“제가 지금 샘터에 서 있는데, 혼기가 찬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오면, 항아리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게 해 달라고 말을 걸어 보겠습니다.(창세 24,43-44).
“그 때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아기에게 젖을 빨리게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하나 데려다 들릴까요.’ 파라오의 딸이 ‘그래, 어서 다녀오너라.' 하고 대답하자 소녀는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 왔다”(출애 2,7-8).
“하느님, 당신의 거동하심이 보입니다. 내 임금, 내 하느님의 성소로 오르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합창대는 맨 앞에, 현악대는 맨 뒤에, 그 한가운데서 처녀들이 소구를 칩니다.”(시편 68, 25).
어떻든 루가 복음 1,26-31과 이사야서 7,14을 비교 하면서 계시가 점차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더욱이 루가의 경우는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 천사는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루가 1,26-31).
이러한 비교 속에서 이사야 예언의 almah는 반드시 ‘처녀’를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다고 ‘처녀’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루가에서처럼 이사야에게서도 동정 모성을 긍정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두 번째 논쟁점은 signum (표징)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해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직접적으로 메시아적 징표로 알아듣는다. 다른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메시아적 징표가 될 뿐이라고 한다. 예언은 직접적으로는 아하즈 왕의 아들 히즈키야의 탄생을 내다본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예언은 직접적인 현실성을 뛰어넘어, 미래를 향하고 있으며, 그 완전한 실현은 동정 마리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앗시리아와 전쟁을 할 당시 다윗 왕조의 생존이 히즈키야의 탄생과 더불어 보장되었던 것처럼,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다윗 후손의 영원한 통치가 하느님으로부터 보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사야에 있어서 히즈키야의 모습이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될 때는 양젖과 꿀을 먹게 될 것이요.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네가 원수로 여겨 두려워하는 저 두 왕의 땅은 황무지가 되리라”(이사 7,14-15).
“... 아 임마누엘아, 그가 날개를 펴서 네 땅을 온통 뒤 덮으리라. 민족들아, 너희는 결국 실패할 줄 알아라.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사 8,5-10).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 겉만 보고 재판하지 아니하고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 ”(이사 11,1-9).
루가복음은 예수를 임마누엘,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32-33).
마태오는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 그러므로 적어도 간접적으로 이 텍스트 이사야 7,14은 메시아적 메시지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젊은 여인”은 임마누엘의 모친으로서 구원의 중재자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히즈키아의 모친은 그 처녀의 예형이다. 아하즈 왕 때에 일어났던 것이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의 신비 안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취됨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은 구약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겠다.
1> 3 베들레헴에서의 출산 (미가 5,1-2)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이사야서 7,14이 기원전 73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미가서 5,1-2은 그보다 훨씬 뒤인 기원전 701년을 배경으로 한다. 미가서는 미래에 오실 메시아의 탄생이 다윗 가문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사가들은 메시아의 탄생지를 바로 미가서에서 찾는다(마태 2,6; 루가 2,4이하). “그 여인이 아기를 낳기까지”라는 표현은 메시아의 모친의 동정성에 대해서 어떤 암시도 드러내지 않는다. 미가서의 이 구절은 유명한 30년 전의 이사야의 almah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미가서는 이사야서의 반향(eco)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성모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는 구약에서 암시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신약성서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2> 신약성서
1) 갈라4,4-5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의 모친에 관한 성서의 언급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다. 갈라디아서는 약 50년경(53/57)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여인으로부터의 탄생’은 예수의 진정한 인성을 의미하고, 또 한편 동정녀 출산에 관한 착상과 연결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어떻든 교부들과, 심지어 칼빈과 루터까지도, 또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에서 이 구절을 동정출산을 위한 첫 증언의 자료로 보고자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아기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만으로 그가 동정 출산을 암시하고자 의도했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바오로의 관심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성을 지니고 태어나셨으며, 따라서 참 인간으로서 율법의 지배하에 자신을 낮춤으로써, 율법의 지배를 받는 인류를 구원 하셨다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마리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순히 ‘여인’이라는 용어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든 간에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에게 인간적 육체를 지니게 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다윗의 후손이라는 연대성을 지닌 존재가 되게 하였다는 점이다.
더 자세히 찾아본다면 구약의 욥기를 보면, 한 인간의 인간적 조건을 드러내는 히브리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사람이란 결국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것”(욥 14,1).
- “죽을 인생이 어찌 깨끗할 수 있겠는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죄 없을 수 있겠는가?”(욥 15,14).
- “하느님 앞에서 그 누가 죄가 없다 하겠는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순결할 수 있겠는가?”(욥 25,4).
신약성서 복음서에서도 비슷한 용법을 찾아 볼 수 있다.
-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마태 11,11).
-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어느 누구보다도 요한보다 크지 못합니다.”(루가 7,28).
이외에도 이러한 표현은 팔레스티나에서 꿈란 문헌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예수의 인간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절로부터 사도 바오로가 마리아의 동정출산을 의도하거나 의식했다는 것에는 신빙성이 없다. 바오로는 단순하게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모성적 역할에서의 어머니이심을 이야기한다. 바오로에게는 루가에서 보듯 ‘첫아들’(2,7)이라는 암시도 없고, 예수의 모친이 동정녀였다는 힌트도 없다. 바오로는 동정잉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바오로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생각하고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바오로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명이 그리스도론에서 동정잉태를 고수하게 되는 그 이후의 신약성서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바오로는 동정잉태에 관한 한 중립적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로마서 1,3(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 )과 더불어 이 갈라디아서 4,4을 동정잉태의 근거로 내세운다(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1,1).
“육으로는 다윗 가문으로, 하느님의 뜻과 권능으로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처녀로부터 태어나신다.”
이처럼 이 구절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마리아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귀중한 바오로의 증언으로서 마리아론이 여기서부터 뒤이어 발전하게 된다.
M. Shumaus는 그의 교의신학에서 바오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예수의 모친에 관해서 구세사적 관점에서 언급한 점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바오로 사도가 언급한 바에 따라서 그 이후의 모든 언급들이 발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Dogmatica Cattolica II, 391 쪽).
Gaiselmann 같은 경우, 갈라디아서의 해석과 더불어 마리아의 성서적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교의 신학 관점에서 갈라디아 4,4의 언급은 신약성서 안에서 가장 중요한 마리아에 대한 텍스트이다. 비록 과거 또 오늘의 일부 신학자들에게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바오로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관한 증언을 통하여 마리아론이 그리스도론과 변형되어 나타나고 구세사 안에서의 그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갈라디아서 4.4-5에 대한 앞의 이야기들을 줄여서 이야기를 하면 예수 어머니에 대한 첫 번째 증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마리아를 단순히 여자라고만 언급한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다신교적 배경에서 살았기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여신(女神)으로 숭배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여자’라고만 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여인으로부터의 탄생’은 동정잉태의 암시로 이해된다. 구약,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인간적 조건을 드러내는 것으로 예수의 참된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신약성서의 다른 문헌들에 의해 발전하게 되는 마리아 교리의 근원적인 씨앗이다.
2) 마르코 복음: 마르3,31-35 : 누가 내 어머니인가?
“...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의 답변은 외견상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찬미 내지 찬양의 소리로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 예수는 새로운 형제관계 내지 친척 관계를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르코는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을 악평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그의 관심사가 다른데 있었을 뿐이다. 마르코에게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비로소 부활을 통해서만 계시되기 때문에, 부활 이전에는 예수와 가장 가까운 자들까지도 예수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3,21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러 갔다는 것을 전하는 점에서 그 의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3,35의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란 구절에서 마리아야말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서 예수가 ‘결혼’과 ‘가정’, 그러한 평범한 행복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려내고 있지만. 결국 복음에서 보듯이 마지막 희생으로서의 죽음을 놓고, 자신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라는 쓴잔을 마시기를 수락한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르 14,36; 마태 26,42). 바로 이 구절을 대하면서 우리는 예수의 철저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뢰, 신앙이 그의 모친 마리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루가 1,38; 대조 22,42). 루가 복음에 의하면 성자의 육화, 말씀의 강생은 바로 마리아의 ‘하느님 말씀에의 순종’에서 가능했음을 전한다.
이런 문맥에서 마르코 3장의 이야기는 피상적으로는 마리아에 대해 불경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예수는 오히려 마리아의 이러한 방문을 이용하여,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점에 착안해서, “믿음으로 잉태하시며,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낳게 해 주실 여인으로 간택되시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창조되기 전 그리스도께서 창조해 주신 동정 마리아께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분명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마리아는 태중에 모신 육신보다 마음에 지닌 진리를 더 열심히 간직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십니다. 그러나 태중에 있는 것보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글 옮긴이: 까페지기마음